훈장 내놔봤자 비웃음만…” 서랍속에서 먼지 쌓여가는 명예
《“평소 이런 거 꺼내놓을 일이 있어야 말이지…. 훈장 얘기를 하고 싶어도 들어 줄 사람이 없어. 손자손녀들도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난리야.” 노인은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전쟁 자료들을 계속 꺼내 놨다.
2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66m²(20평)짜리 빌라에서 손영준 씨(78)를 만났다. 1950년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가한 손 씨가 소속된 6사단 7연대는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붙인 뒤 중공군과 맞서 싸웠다. 당시 전공을 인정받아 그는 화랑무공훈장(4급)을 받았다. 안방에는 그때 훈장을 받던 사진, 학도병 시절의 흑백사진 등이 걸려 있었다.》
알아주지 않는 희생
“뭐 자랑이라고 달고 다니나”… 존경은커녕 얘기도 안들어
정부조차 감추고
수훈자 정보 요구해도 “프라이버시 보호” 답변만
상훈 기준도 모호
장관 1년만 해도 근정훈장… 사망한 소방관도 같은 훈장
“가족들이 이사 때마다 제발 버리라고 했지만 차마 못 버렸어. 아무도 안 알아주니 이 방이 유일하게 옛 기억을 되살리는 공간이라고.” 손 씨는 서랍 속에 깊이 넣어둔 훈장을 꺼냈다. 시커멓게 낡아 있었다. 꽁꽁 숨겨둔 ‘명예’를 보여준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됐다. 하지만 그는 훈장을 달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 죽인 게 무슨 자랑이라고 차고 다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아. 우리는 나라 지키려고 목숨 던진 사람들인데 말이야.”
○ 훈장을 감추는 나라
군인의 훈장은 곧 명예다. 전시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공을 세웠을 경우 수여하는 무공훈장을 받은 생존자는 20일 현재 3만6174명에 이른다.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183명에게만 수여됐다. 하지만 정작 정부는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존경받아야 할 이들의 존재가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가 서훈(敍勳)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에 무공훈장 등을 받은 사람 이름이나 공적 등을 문의했지만 담당부서는 ‘비공개’란 답변만 되풀이 했다.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국방부도 “사건별로 알려주면 형평성 등 논란이 일어 알려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국가보훈처에 문의하니 “행안부와 국방부에 연락하라”며 서로 떠넘겼다.
정부의 ‘인터넷 상훈포털 시스템’(www.sanghun.go.kr)에 접속해도 수훈자를 알 수 없다. 상훈수여정보 검색란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등록해야 어떤 훈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회사원 허보행 씨(30)는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훈장을 탄 순직군인, 소방관에 대해 알고 싶어 이곳저곳 뒤졌지만 전혀 정보가 없었다”고 말했다.
훈장과 제복의 명예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군인, 소방관, 경찰들 스스로가 훈장을 감추는 것이 현실이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대위 출신 한기선 씨(71)는 헬리콥터 조종사로 당시 한미양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한 씨는 “훈장을 달고 다녔더니 ‘뭐 대단한 거라고 치렁치렁 달고 다니냐’ 하고 비웃더라”며 “다들 훈장에 무관심하고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데 무슨 자긍심을 느끼겠느냐”고 말했다.
○ “근속하면 다 주는 건데…”
부산 북구소방서 성병수 소방관(58)은 6월 녹조근조훈장을 수훈할 예정이다. 훈장을 받기는 하지만 명예를 느끼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는 “근속만 하면 주는 훈장이라서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훈장을 받는 군인 소방관 경찰들조차 스스로 명예로워하지 않는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행안부 ‘2009년 훈장수여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1만3000명이 훈장을 받았다. 이 중 77%인 1만60건은 공무원이나 사립학교 교원에게 주는 ‘근정훈장’이었다. 근정훈장은 특별한 공적이 없어도 큰 흠결 없이 33년 이상 공직에 근무한 공무원에게 수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진짜 명예로운 훈장도 빛을 잃게 된다는 것. 1년 이상 근무한 장관은 퇴임할 때 특별한 공적이 없어도 1등급에 해당되는 청조근정훈장을 받는다. 반면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윤영하 소령에게는 3등급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당시 월드컵 대표팀 스태프와 선수들에게는 2등급 체육훈장맹호장을 수여했다.
더구나 소방관 경찰들은 공무원으로 묶이다 보니 대형 화재를 진압하다 숨지거나 범인을 검거하다가 칼에 맞고 쓰러져도 근정훈장에 그친다. 근정훈장을 받으면 무공훈장이나 보국훈장과 달리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연금 등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이에 따라 목숨을 걸고 인명을 구조한 소방관, 경찰관에게도 군인이 받는 보국훈장에 준하는 훈장을 받도록 하는 상훈법 개정안이 19일 발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