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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미추왕 죽엽군(未鄒王 竹葉軍) >김알지의 7대손 미추가 왕위에 오르다
김알지의 7대손 미추가 왕위에 오르다
미추왕 죽엽군(未鄒王 竹葉軍)
제13대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도 한다.註 490490 신라의 제13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262∼284년이다. 김알지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구도갈문왕이고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한편 미추는 ‘원(元)’, ‘본(本)’의 뜻으로 시조왕이란 의미를 가진다고도 한다(前間恭作, 「新羅王の世次と其名に就いて」, ≪東洋學報≫15-2, 1925).닫기은 김알지(金閼智)註 491491 경주 김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로, 탈해왕대 시림(始林)에 내려온 금궤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지는 우리말로 ‘小兒’ 곧 아기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알지탈해왕대).닫기의 7대손이다.註 492492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았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았다. 또 욱부는 구도(俱道)를 낳았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기 때문에(≪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알지탈해왕대) 미추왕이 시조 알지의 7세손이 되는 것이다.닫기 대대로 현달하였고 또한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沾解)註 493493 신라의 제12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247년∼261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이해이질금(理解尼叱今)’이라 하고 세주에 ‘해(解)’라 하였다. 골정의 둘째 아들로 조분왕을 이어서 즉위하였다. 이 왕대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고, 남당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의 자리를 물려받아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지금 왕의 능을 속칭 시조당(始祖堂)이라 한다.註 494494 이 시기는 ≪삼국유사≫가 찬술되던 때를 말하는 것이다.닫기 대개 김씨로써 처음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註 495495 미추왕의 즉위는 ‘김씨족의 정치적 성장’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추왕대는 신라사상 실질적인 김씨왕실의 시작으로 내물왕 이후부터 김씨 왕실이 지속적으로 왕위를 세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장창은, 「신라 석씨왕실의 분기와 미추왕의 즉위」, ≪북악사론≫ 7, 2000, 43쪽).닫기 후대 김씨 왕들이 모두 미추를 시조로 삼았으니 마땅하다.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능은 흥륜사(興輪寺)註 496496 신라의 불교 전래 및 공인과정과 연관되어 가장 일찍 국가적 사찰로 창건되었고 신라 왕경 내 칠처가람(七處伽藍) 터 중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건립되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최초의 승려 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며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544년(眞興王 5)에 완공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으로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되기도 하였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66쪽).닫기 동쪽에 있었다.
註 490
신라의 제13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262∼284년이다. 김알지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구도갈문왕이고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한편 미추는 ‘원(元)’, ‘본(本)’의 뜻으로 시조왕이란 의미를 가진다고도 한다(前間恭作, 「新羅王の世次と其名に就いて」, ≪東洋學報≫15-2, 1925).
註 491
경주 김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로, 탈해왕대 시림(始林)에 내려온 금궤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지는 우리말로 ‘小兒’ 곧 아기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알지탈해왕대).
註 492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았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았다. 또 욱부는 구도(俱道)를 낳았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기 때문에(≪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알지탈해왕대) 미추왕이 시조 알지의 7세손이 되는 것이다.
註 493
신라의 제12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247년∼261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이해이질금(理解尼叱今)’이라 하고 세주에 ‘해(解)’라 하였다. 골정의 둘째 아들로 조분왕을 이어서 즉위하였다. 이 왕대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고, 남당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494
이 시기는 ≪삼국유사≫가 찬술되던 때를 말하는 것이다.
註 495
미추왕의 즉위는 ‘김씨족의 정치적 성장’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추왕대는 신라사상 실질적인 김씨왕실의 시작으로 내물왕 이후부터 김씨 왕실이 지속적으로 왕위를 세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장창은, 「신라 석씨왕실의 분기와 미추왕의 즉위」, ≪북악사론≫ 7, 2000, 43쪽).
註 496
신라의 불교 전래 및 공인과정과 연관되어 가장 일찍 국가적 사찰로 창건되었고 신라 왕경 내 칠처가람(七處伽藍) 터 중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건립되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최초의 승려 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며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544년(眞興王 5)에 완공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으로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되기도 하였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66쪽).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미추왕 죽엽군(未鄒王 竹葉軍) >유리왕대 이서국 사람들이 침략하자 미추왕능에서 죽엽군이 나와 물리치다
유리왕대 이서국 사람들이 침략하자 미추왕능에서 죽엽군이 나와 물리치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註 497497 신라의 제1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84∼298년이다. 이 왕은 백제와 화친하여 함께 왜를 정벌하려다가 그만두었고, 이서고국(伊西古國)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대에 이서국(伊西國)註 498498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던 소국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노례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 19년(서기 42)에 신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한다. 한편 유례왕 14년(297)에 이서국의 사람들이 신라를 침공한 사실은 이 기사 외에도 ≪삼국유사≫ 권1 기이1 이서국조에서도 확인된다.닫기 사람들이 와서 금성(金城)註 499499 신라의 왕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 및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성곽조에 의하면, 부(府)의 동쪽 4리에 있고 토축으로서 둘레가 2,407척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본서 신라본기 및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금성은 신라 초기의 궁으로서, 혁거세거서간 21년(서기전 37)에 축조되었으며, 그에 관한 기록이 소지마립간 22년(500)까지 나온다.닫기을 공격하였다. 우리가 크게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견딜 수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병사가 있어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댓잎[竹葉]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병사와 힘을 합쳐 적병을 공격해 격파했다. 적군이 물러간 후에 [이상한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때서야 선왕에 의한 음덕의 공이 있었음을 알았는데, 이로 인하여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
註 497
신라의 제1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84∼298년이다. 이 왕은 백제와 화친하여 함께 왜를 정벌하려다가 그만두었고, 이서고국(伊西古國)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498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던 소국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노례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 19년(서기 42)에 신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한다. 한편 유례왕 14년(297)에 이서국의 사람들이 신라를 침공한 사실은 이 기사 외에도 ≪삼국유사≫ 권1 기이1 이서국조에서도 확인된다.
註 499
신라의 왕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 및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성곽조에 의하면, 부(府)의 동쪽 4리에 있고 토축으로서 둘레가 2,407척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본서 신라본기 및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금성은 신라 초기의 궁으로서, 혁거세거서간 21년(서기전 37)에 축조되었으며, 그에 관한 기록이 소지마립간 22년(500)까지 나온다.
정치>신이>기타>기타
지명 : 금성
국명 : 이서국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미추왕 죽엽군(未鄒王 竹葉軍) >혜공왕대 유신공이 원통함을 미추왕에게 호소하다(779년 4월 (음))
혜공왕대 유신공이 원통함을 미추왕에게 호소하다 ( 779년 04월(음) )
오래 지나 제36대 혜공왕(惠恭王)註 500500 신라의 제36대 왕으로 ‘제37대’라고 서술한 본문은 잘못이다. 재위 기간은 765∼780년이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혜공왕 4년에 대공(大恭)과 대렴(大廉)이 난을 일으켰고 동왕 6년에 김융(金融), 11년에 김은거(金隱居)·염상(廉相)·정문(正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수선해졌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재위 16년에 일어난 김지정(金志貞)의 난 와중에서 죽음으로써 신라의 중대 왕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대인 대력(大曆)註 501501 당 대종(代宗)의 연호로 766~779년에 사용하였다.닫기 14년 기미(己未) 4월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註 502502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에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있다. 무덤은 원형의 봉분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호석으로 둘러져 있다.닫기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뒤를 따라 와서 죽현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능속에서 우는 소리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진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을 잠시도 가벼이 하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770)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註 503503 혜공왕 6년에 김유신의 자손인 김융이 복주(伏誅)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6년(770)조에 따르면 김융은 반혜공왕의 입장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바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닫기 군신들이 저의 공훈을 생각지 않습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니 왕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공은 전과 같이 노력해 주시오.” 하였다. [유신공이] 세 번 청하였으나 [미추왕은] 세 번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회오리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바로 상신 김경신(金敬信)註 504504 후에 원성왕으로 즉위하는 인물이다. 혜공왕이 죽고 나자 김주원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었고 그 결과 신라 제38대 왕으로 등극하였다.닫기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註 505505 ‘보(寶)’란 사원 또는 어떤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재단의 명칭이다. 따라서 공덕보전이란 공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내리는 전지로 이해할 수 있다.닫기 30결을 취선사(鷲仙寺)註 506506 ≪삼국사기≫ 권43 열전3 김유신 하에서는 이 절을 두고 김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 김유신이 죽은 673년 사이에 창건되었겠지만, 어디에 세워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닫기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왕이 국가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의 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註 507507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에는 신라가 삼산(三山)과 오악(五岳) 이하 명산 대천을 나누어 대사·중사·소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중 삼산(三山)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에 해당하였는데, 나력(奈歷)·골화(骨火)·혈례(穴禮)가 바로 그 세 산에 해당하였다.닫기과 함께 제사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五陵)註 508508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무덤을 가리킨다. 박혁거세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승천하였다가 7일만에 유체가 흩어져 땅으로 떨어졌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합장하려 했으나 큰 뱀이 이를 방해하므로 다섯 조각의 유체를 각각 다섯 개의 무덤으로 장사지냈기 때문에 오릉이라고 하였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닫기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註 509509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오묘(五廟)를 정하는데 미추왕은 김씨의 시조이므로 태종대왕·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이 있으므로 모두 세세불훼(世世不毁)의 신위로 하고 거기에 친묘 2위를 합해 오묘로 하였다(≪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 대묘에는 미추왕을 모셨으며 신라의 가장 큰 국가적 제사인 오묘 중 가장 으뜸의 위치에 있었다.닫기
註 500
신라의 제36대 왕으로 ‘제37대’라고 서술한 본문은 잘못이다. 재위 기간은 765∼780년이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혜공왕 4년에 대공(大恭)과 대렴(大廉)이 난을 일으켰고 동왕 6년에 김융(金融), 11년에 김은거(金隱居)·염상(廉相)·정문(正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수선해졌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재위 16년에 일어난 김지정(金志貞)의 난 와중에서 죽음으로써 신라의 중대 왕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01
당 대종(代宗)의 연호로 766~779년에 사용하였다.
註 502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에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있다. 무덤은 원형의 봉분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호석으로 둘러져 있다.
註 503
혜공왕 6년에 김유신의 자손인 김융이 복주(伏誅)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6년(770)조에 따르면 김융은 반혜공왕의 입장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바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註 504
후에 원성왕으로 즉위하는 인물이다. 혜공왕이 죽고 나자 김주원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었고 그 결과 신라 제38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註 505
‘보(寶)’란 사원 또는 어떤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재단의 명칭이다. 따라서 공덕보전이란 공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내리는 전지로 이해할 수 있다.
註 506
≪삼국사기≫ 권43 열전3 김유신 하에서는 이 절을 두고 김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 김유신이 죽은 673년 사이에 창건되었겠지만, 어디에 세워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註 507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에는 신라가 삼산(三山)과 오악(五岳) 이하 명산 대천을 나누어 대사·중사·소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중 삼산(三山)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에 해당하였는데, 나력(奈歷)·골화(骨火)·혈례(穴禮)가 바로 그 세 산에 해당하였다.
註 508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무덤을 가리킨다. 박혁거세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승천하였다가 7일만에 유체가 흩어져 땅으로 떨어졌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합장하려 했으나 큰 뱀이 이를 방해하므로 다섯 조각의 유체를 각각 다섯 개의 무덤으로 장사지냈기 때문에 오릉이라고 하였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註 509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오묘(五廟)를 정하는데 미추왕은 김씨의 시조이므로 태종대왕·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이 있으므로 모두 세세불훼(世世不毁)의 신위로 하고 거기에 친묘 2위를 합해 오묘로 하였다(≪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 대묘에는 미추왕을 모셨으며 신라의 가장 큰 국가적 제사인 오묘 중 가장 으뜸의 위치에 있었다.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정치>신이>기타>소리
이름 : 혜공왕,유신공,혜공왕,김경신,김공,김공,김유신공
지명 : 평양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 >나물왕이 셋째 아들 미해를 일본에 보내다(390년 (음))
나물왕이 셋째 아들 미해를 일본에 보내다 ( 390년 (음) )
나물왕(奈勿王) 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한다. 김제상(金堤上)
제17대 나밀왕(那密王)註 510510 신라의 제17대 왕으로 나물(奈勿) 혹은 나밀(奈密)이라고도 한다. 김씨로서 왕위에 오른 두 번째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356∼402년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나물을 ‘이사금’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이 왕대부터 마립간이라 칭하였다. 나물왕 이후에는 종전과 같은 3성 교립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걸쳐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점으로 보아 신라가 이때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 36년 경인(庚寅)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이르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께서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신 등을 시켜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에게 아뢰게 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어 우리 임금에게 성심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美海) 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한다.註 511511 미토희(未吐喜)·미흔(未欣)(≪삼국유사≫ 왕력 자비마립간)이나 미사흔(未斯欣)(≪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원년 3월)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미해는 나물이사금의 아들로 눌지마립간 2년(418)에 왜로부터 돌아왔다. 그는 눌지마립간 17년(433)에 죽었으며, 서불감(舒弗邯)으로 추증되었다.닫기를 왜국에 보냈는데 이때 미해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말과 행동이 아직 익숙지 않았으므로 내신(內臣) 박사람(朴娑覽)註 512512 고유명사가 아닌 신라 사람의 뜻인 사의 음을 한자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박→(光明)→시→서라벌→신라, 사람→사람(人)으로 풀이한다(양주동, ≪증정판 고가연구≫, 일조각, 1969).닫기을 부사로 삼아 왜국에 보냈다. 왜왕이 이들을 억류하여 30년 동안이나 보내지 아니하였다.
註 510
신라의 제17대 왕으로 나물(奈勿) 혹은 나밀(奈密)이라고도 한다. 김씨로서 왕위에 오른 두 번째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356∼402년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나물을 ‘이사금’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이 왕대부터 마립간이라 칭하였다. 나물왕 이후에는 종전과 같은 3성 교립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걸쳐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점으로 보아 신라가 이때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11
미토희(未吐喜)·미흔(未欣)(≪삼국유사≫ 왕력 자비마립간)이나 미사흔(未斯欣)(≪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원년 3월)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미해는 나물이사금의 아들로 눌지마립간 2년(418)에 왜로부터 돌아왔다. 그는 눌지마립간 17년(433)에 죽었으며, 서불감(舒弗邯)으로 추증되었다.
註 512
고유명사가 아닌 신라 사람의 뜻인 사의 음을 한자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박→(光明)→시→서라벌→신라, 사람→사람(人)으로 풀이한다(양주동, ≪증정판 고가연구≫, 일조각, 1969).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 >눌지왕이 아우 보해를 고구려에 보내다(419년 (음))
눌지왕이 아우 보해를 고구려에 보내다 ( 419년 (음) )
눌지왕(訥祗王)註 513513 신라의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17∼458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 하였고,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으로 보인다. 실성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며,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배제하기 위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신라에서는 눌지왕 때부터 왕위가 부자세습제로 확립되었다(이기동, 「신라 내물왕계의 혈연의식」,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74쪽).닫기 3년 기미(己未)에 이르러 고구려 장수왕(長壽王)註 514514 고구려의 제20대 왕으로 재위 기간 413∼491년이다. 아버지인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강대한 국가로 성장시켰다. 중국의 남북왕조에 대하여 양면 외교를 펼치면서 외교적 안정을 보았고 남쪽으로 백제를 압박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이 사신이 보내 와서 이르기를 “우리 임금님께서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註 515515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이름을 복호(卜好)라 하였다(≪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11년). 이 기사에서는 보해가 고구려로 간 해가 눌지왕 3년(419)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는 실성이사금 11년(412)의 일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닫기가 지혜와 재주를 갖추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가깝게 지내기를 원하여 특별히 소신을 보내어 간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여 이로 인해 화친을 맺기로 하고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로 보냈는데, 이때 내신 김무알(金武謁)을 보좌로 하여 고구려에 보냈다. 장수왕도 또한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
註 513
신라의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17∼458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 하였고,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으로 보인다. 실성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며,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배제하기 위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신라에서는 눌지왕 때부터 왕위가 부자세습제로 확립되었다(이기동, 「신라 내물왕계의 혈연의식」,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74쪽).
註 514
고구려의 제20대 왕으로 재위 기간 413∼491년이다. 아버지인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강대한 국가로 성장시켰다. 중국의 남북왕조에 대하여 양면 외교를 펼치면서 외교적 안정을 보았고 남쪽으로 백제를 압박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15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이름을 복호(卜好)라 하였다(≪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11년). 이 기사에서는 보해가 고구려로 간 해가 눌지왕 3년(419)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는 실성이사금 11년(412)의 일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
정치>외교>사신>사절활동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 >눌지왕이 인질이 된 아우들을 보고 싶어 하다(426년 (음))
눌지왕이 인질이 된 아우들을 보고 싶어 하다 ( 426년 (음) )
[눌지왕] 10년 을축(乙丑)에 왕이 친히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여러 호협한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세 순배 돌게 되자 모든 음악이 시작되었다.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 아버님께서는 성심으로 백성의 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왜로 보냈다가 다시 못 보고 돌아가시었고 내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이웃 나라의 군사가 강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소. 고구려만이 화친을 맺자는 말이 있었으므로 내가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구려에 보내었소.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아우를 억류해 보내지 않고 있으니, 내가 비록 부귀를 누린다 하여도 일찍부터 하루라도 이들을 잊거나 울지 않는 날이 없소. 만일 두 아우를 만나 함께 선왕의 사당을 보게 될 수만 있다면, 나라 사람에게 은혜를 갚으려 하오. 누가 능히 이 계책을 이룰 수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백관이 모두 말하기를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맹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歃羅郡)註 516516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군 일대의 옛 지명으로 삽라국(歃羅國)이 있었던 곳이다(村上四男, 「新羅の歃良州(良州)について」, ≪조선학보≫ 48, 1968).닫기 태수(太守)註 517517 신라의 군(郡)을 다스린 지방관이다.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 하 외관조에 따르면 태수는 모두 115명이 있었는데, 사지(舍知)에서 중아찬(重阿湌)에 이르는 관등을 가진 자들이 이에 임명되었다.닫기로 있는 제상(堤上)註 518518 ≪삼국유사≫ 권1 기이1 나물왕 김제상조에서는 그의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 권45 열전5 박제상조에서는 ‘박(朴)’이라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이 가할까 합니다.” 하였다.
註 516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군 일대의 옛 지명으로 삽라국(歃羅國)이 있었던 곳이다(村上四男, 「新羅の歃良州(良州)について」, ≪조선학보≫ 48, 1968).
註 517
신라의 군(郡)을 다스린 지방관이다.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 하 외관조에 따르면 태수는 모두 115명이 있었는데, 사지(舍知)에서 중아찬(重阿湌)에 이르는 관등을 가진 자들이 이에 임명되었다.
註 518
≪삼국유사≫ 권1 기이1 나물왕 김제상조에서는 그의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 권45 열전5 박제상조에서는 ‘박(朴)’이라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이름 : 제상
지명 : 삽라군
국명 : 왜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 >제상이 왕의 근심을 받들다
제상이 왕의 근심을 받들다
이에 왕이 불러서 묻자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들은 바에 따르면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그 신하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註 519519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월세가」에서 범려가 월왕 구천을 떠나면서 한 말에서 유래한다.닫기 만일 일의 어려움과 쉬운 것을 헤아려서 행한다면 이는 불충성한 것이며,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하여 행한다면 이는 용맹이 없다고 할 것이니, 신이 비록 불초하나 명을 받들어 행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를 매우 가상스럽게 생각하여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아 작별했다.
註 519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월세가」에서 범려가 월왕 구천을 떠나면서 한 말에서 유래한다.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정치>외교>사신>유형
정치>외교>숙위>파견·귀국
이름 : 제상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 >제상이 고구려에 들어가 보해를 귀국시키다
제상이 고구려에 들어가 보해를 귀국시키다
제상이 왕 앞에서 명을 받고 바로 북해로 길註 520520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조에 나오는 ‘북해통(北海通)’과 연관지어 이해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북해통은 왕도인 경주와 고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이용현, 「統一新羅の傳達體系と「北海通」」, ≪조선학보≫ 171, 조선학회, 1999).닫기을 떠나 변복을 한 다음 고구려로 들어갔다.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 함께 도망할 날짜를 약속하고 [제상은] 먼저 5월 15일 고성(高城)註 521521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지역이다.닫기의 수구(水口)로 돌아와 배를 대어 놓고 기다렸다. 약속한 기일이 가까워지자 보해는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 아니 하다가 야음을 틈타 도망하여 고성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이 일을 알고 수십 명의 군사를 시켜 그를 뒤쫓게 하였다. 고성에 이르러 따라 붙었으나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늘 좌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가 다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쏘아 드디어 부상당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註 520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조에 나오는 ‘북해통(北海通)’과 연관지어 이해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북해통은 왕도인 경주와 고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이용현, 「統一新羅の傳達體系と「北海通」」, ≪조선학보≫ 171, 조선학회, 1999).
註 521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지역이다.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 >제상이 다시 왕명을 받들어 아내도 보지 않고 일본으로 떠나다
제상이 다시 왕명을 받들어 아내도 보지 않고 일본으로 떠나다
눌지왕은 보해를 보자 미해가 더욱더 생각나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슬펐으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을 하였다. “마치 몸에 한쪽 팔만 있고 얼굴에 한쪽 눈만 있는 것 같아서 비록 하나는 얻었으되 하나는 잃은 상태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랴.” 이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두 번 절을 한 다음 왕에게 다짐하고 말에 올라타 집에 들르지도 않고 달려 바로 율포(栗浦)註 522522 지금의 경상남도 울산 지역으로, 경덕왕대에 동율현(東津縣)으로 바뀌어 하곡현(河曲縣)과 더불어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에 속해있었다. 고려 때에 임관군은 경주에 합쳐지고, 하곡현은 울주로 되었고 율포현은 울주에 합쳐졌다(≪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임관군).닫기의 해안가에 이르렀다. 제상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에 이르렀으나 남편이 벌써 배에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내가 그를 간절히 부르자 제상은 다만 손만 흔들어 보일 뿐 멈추지 않았다.
註 522
지금의 경상남도 울산 지역으로, 경덕왕대에 동율현(東津縣)으로 바뀌어 하곡현(河曲縣)과 더불어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에 속해있었다. 고려 때에 임관군은 경주에 합쳐지고, 하곡현은 울주로 되었고 율포현은 울주에 합쳐졌다(≪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임관군).
정치>외교>인적교류>망명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 >제상이 일본에 들어가 미해를 귀국시키다
제상이 일본에 들어가 미해를 귀국시키다
그는 왜국註 523523 이 기록에 나오는 왜국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야마토 정권으로 보지만, 북큐슈의 후쿠오카 일대의 나라로 이해하기도 한다(연민수, 「5세기 이전 신라의 대왜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87~394쪽).닫기에 도착하여 거짓으로 꾸며 말하기를 “계림왕註 524524 당시 신라의 왕인 눌지왕을 가리킨다.닫기이 아무런 죄도 없이 제 아비와 형을 죽였으므로 도망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하니 왜왕註 525525 ≪일본서기≫ 권49 신공황후 5년(205)조에는 제상의 도일과 유사한 모티브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기록에 등장하는 毛麻利叱智를 제상으로 이해하고, 제상이 만난 왜왕을 신공황후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제상의 기록과 약 200년의 시기차가 있으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닫기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였다. 이때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 나가 놀았다. 그리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을 잡아서 매번 왜왕에게 바쳤다. 왜왕은 매우 기뻐하여 조금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제상이 말하기를 “지금이 떠날 만합니다.” 하자 미해가 이르기를 “그러면 같이 갑시다.” 하였다. 제상이 “만일 신이 같이 떠난다면 왜인들이 깨닫고 추격할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신은 이 곳에 남아 그들이 추격하는 것을 막겠습니다.” 했다. 미해가 이르기를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나 홀로 돌아가겠소.”라고 하였다. 제상이 말하기를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써 왕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하고는 술을 따라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 사람 강구려(康仇麗)註 526526 사서에 보이지 않아 그의 출신이나 신분 등은 알 수 없다. 때문에 그가 당시에 어떠한 이유로 왜에 있었는지 명백하지 않으나 미해가 인질로 갈 당시에 동행한 듯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때 왜국에는 다소의 신라인들이 들어와 있었고 신라와 왜국과의 사이에 사람을 비롯한 문물의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닫기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로 하여금 모시게 하여 미해를 보내었다.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를 모시는 사람들이 들어와 보려 하였으나 제상이 나와 그들을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미해공이 어제 사냥하느라 몹시 피로해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저녁 무렵 좌우 사람들이 그것을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제상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미해공은 떠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라고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왜왕에게 달려가 이를 고하자 왕이 기병을 시켜 그를 쫓게 하였으나 따라가지 못하였다.
註 523
이 기록에 나오는 왜국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야마토 정권으로 보지만, 북큐슈의 후쿠오카 일대의 나라로 이해하기도 한다(연민수, 「5세기 이전 신라의 대왜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87~394쪽).
註 524
당시 신라의 왕인 눌지왕을 가리킨다.
註 525
≪일본서기≫ 권49 신공황후 5년(205)조에는 제상의 도일과 유사한 모티브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기록에 등장하는 毛麻利叱智를 제상으로 이해하고, 제상이 만난 왜왕을 신공황후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제상의 기록과 약 200년의 시기차가 있으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註 526
사서에 보이지 않아 그의 출신이나 신분 등은 알 수 없다. 때문에 그가 당시에 어떠한 이유로 왜에 있었는지 명백하지 않으나 미해가 인질로 갈 당시에 동행한 듯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때 왜국에는 다소의 신라인들이 들어와 있었고 신라와 왜국과의 사이에 사람을 비롯한 문물의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정치>외교>인적교류>망명
정치>외교>숙위>파견·귀국
이름 : 계림왕,제상,제상,미해,제상,미해,제상,미해,제상,미해,강구려,제상,미해,제상,미해공
지명 : 계림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 >제상이 왜왕의 회유를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하다
제상이 왜왕의 회유를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하다
이에 제상을 가두어 두고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너희 나라 왕자를 몰래 보내었느냐?” 하자 [제상이] 대답하기를 “나는 오로지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오. 나는 단지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게 했던 것뿐이오. 어찌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겠소.”라고 하였다. 왜왕은 노하여 이르기를 “이미 너는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감히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註 527527 중국 고대의 5가지 형벌로 ≪書經≫ 舜典에는 묵(피부에 먹물로 刺字하는것), 의(코를 베는 일), 비( 발뒤꿈치를 베는 일), 궁(성기를 절단하는 일), 대벽(목을 베어 죽이는 일)을 5형이라 하였다.닫기을 모두 쓸 것이나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을 한다면 필히 후한 녹을 상으로 줄 것이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겠다.”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게 하였다 지금 갈대의 붉은 빛깔이 나는 것은 제상의 피라고 한다. [왜왕이] 다시 물어 이르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라고 하자, [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왜왕은]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제상을 세워 놓고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라고 하자, [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註 528528 일본학계에서는 박제상의 처형 장소를 대마도의 북안 ‘악포(鰐浦)’로 비정하고 있는데, 대마의 중심부인 지금의 미진도(美津島) ‘선월(船越)’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사엽, 「고대 한일문학의 비교연구」, ≪계간경향 사상과 정책≫ 5, 1984, 98쪽).닫기라는 섬에서 불 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와서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 안에 사실을 알렸다. 눌지왕은 놀라고 기뻐서 백관들에게 명하여 굴헐역(屈歇驛)註 529529 지금의 울산 지역에 설치된 신라시대의 역참으로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신라는 전국의 관도(官道)에 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굴헐역은 아마도 이 지역의 육로와 해로의 요충지에 설치되었을 것이다.닫기에서 맞이하게 하였고 왕은 아우 보해와 더불어 남교(南郊)에서 맞이하였다. 대궐로 맞아 들여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註 530530 부인(夫人)은 고려시대의 봉작으로 문무관 3품의 처에게 내려진 것이다. 신라에서도 이러한 봉작이 존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닫기으로 봉하고 그의 딸을 미해공(美海公)의 부인으로 삼았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 한(漢)나라 신하인 주가(周苛)註 531531 한나라 패땅 사람으로 고조(劉邦) 때 (기원전204) 어사대부가 되어 형양을 지키다가 항우가 형양을 함락시켜 그의 포로가 되었다. 항우는 주가에게 “네가 내 장수가 되면 상장군으로 삼고 만호후로 봉해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꾸짖으면서 끝내 굴복하지 않고 항우에게 살해되었다(≪사기≫ 장승상열전 및 ≪한서≫ 장주조임신도전).닫기가 영양(榮陽)註 532532 지금의 하남성 북부 황하의 남쪽에 있는 현이다.닫기 땅에 있다가 초나라 군사에게 잡힌 일이 있습니다. 이때 항우(項羽)가 주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내 신하 노릇을 한다면 만록후(萬祿侯)에 봉해 주겠다.’ 하니 주가는 꾸짖으며 굴복치 않고 초왕 항우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번 제상의 충정과 죽음은 주가에 못지않습니다.”라고 하였다.
註 527
중국 고대의 5가지 형벌로 ≪書經≫ 舜典에는 묵(피부에 먹물로 刺字하는것), 의(코를 베는 일), 비( 발뒤꿈치를 베는 일), 궁(성기를 절단하는 일), 대벽(목을 베어 죽이는 일)을 5형이라 하였다.
註 528
일본학계에서는 박제상의 처형 장소를 대마도의 북안 ‘악포(鰐浦)’로 비정하고 있는데, 대마의 중심부인 지금의 미진도(美津島) ‘선월(船越)’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사엽, 「고대 한일문학의 비교연구」, ≪계간경향 사상과 정책≫ 5, 1984, 98쪽).
註 529
지금의 울산 지역에 설치된 신라시대의 역참으로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신라는 전국의 관도(官道)에 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굴헐역은 아마도 이 지역의 육로와 해로의 요충지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註 530
부인(夫人)은 고려시대의 봉작으로 문무관 3품의 처에게 내려진 것이다. 신라에서도 이러한 봉작이 존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註 531
한나라 패땅 사람으로 고조(劉邦) 때 (기원전204) 어사대부가 되어 형양을 지키다가 항우가 형양을 함락시켜 그의 포로가 되었다. 항우는 주가에게 “네가 내 장수가 되면 상장군으로 삼고 만호후로 봉해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꾸짖으면서 끝내 굴복하지 않고 항우에게 살해되었다(≪사기≫ 장승상열전 및 ≪한서≫ 장주조임신도전).
註 532
지금의 하남성 북부 황하의 남쪽에 있는 현이다.
정치>외교>인적교류>망명
정치>법률>형법>형집행
문화>사상>유교사상>윤리
이름 : 제상,제상,제상,미해,강구려,보해,제상,국대부인,미해공,주가,항우,주가,주가,항우,제상,주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