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새암골 여상현 소나무
여상현 시인은 1914년 2월 9일에 태어났으나, 언제 생을 마감했는지 모르는 낯선 이름이다. 6·25의 참화가 그 이름을 삼켜버린 경계의 시인이며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시인이다.
여상현(呂尙鉉 필명呂星野)은 화순군 동면 천덕리 451번지 새암골에서 부친 여규병과 모친 조함령의 5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동복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9년 졸업하였다. 상경하여 경성중등학교 본과를 다니고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8월에 장성의 김아지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다. 이어 연희전문대를 나왔다.
그가 태어난 새암골인 천동(泉洞)은 음기가 세고 앞산의 양기가 세다 하여 마을 한가운데에 진려석이 있다. 이 진려석은 3개가 더 있고, 그 주위에 당산나무도 10여 그루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이 천동마을 가까이에 화순탄광이 있다. 한때 2만여 명에 이르던 이곳 탄광 노동자의 삶과 평화로운 마을 풍경은 그의 시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상현은 1936년 오장환, 함형숙, 김광균 등 12명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시를 썼으며 그 동인지 1집에 ‘장’, ‘호텔 앞 광장’, 2집에 ‘법원과 까마귀’, ‘호흡’ 등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좌절에서 헤어나려는 몸부림을, 해방 이후에는 계급의식 속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애환과 외세에 대한 저항 등을 노래했다.
1946년 서울신문사 기자이던 여 시인은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47년에 유일한 시집인 ‘칠면조’를 간행할 때 김기창 화백이 표지를 직접 그려 주었다. 표제시 ‘칠면조’는 해방공간의 상황을 야유와 풍자로 묘사한 시이며, 민요조의 ‘농부가’인 ‘노고지리 앞서가자 해가 지는 이 벌판….’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이 농부가는 1950년대 초까지 초등과 중등학교에서 가르쳤는데, 중등 음악 교과서의 여상현 작사가, 1950년대 후반에 이상현으로 바뀌었다. 이는 여 시인의 육이오 당시 월북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여상현 시인은 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1964년 12월 5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실종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세계도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다 2017년 4월 27일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제4조에 의거하여 납북자로 결정되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늦었지만, 그의 고향 마을 생가터에 조촐하나마 시 ‘봄날’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졌다.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고 아름답게 표현했던 그의 시도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여상현 시인이 어릴 적 숨바꼭질하며 뛰어놀았을 그의 옛집 터 뒷동산에 한 그루 소나무가 있다. 마을의 고샅길, 성황당, 연못, 논두렁, 밭고랑까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보고 싶었을 그리운 고향 마을의 시 ‘봄날’을 여상현 시인의 고향 집 뒷동산 소나무에 기대어 떠올린다.
‘논두렁가로 바스락 바스락 땅강아지 기어나고/ 아침 망웃(거름) 뭉게뭉게 김이 서리다// 꼬추잠자리 저자를 선 황토물 연못가엔/ 약에 쓴다고 비단개구리 잡는 꼬마둥이 녀석들이 움성거렸다// 바구니 낀 계집애들은 푸른 보리밭 고랑으로 기어들고/ 까투리는 쟁끼 꼬리를 물고 산기슭을 내리는구나/ 꿀벌 떼 노오란 장다리밭에서 잉잉거리고/ 동구밖 지름길론 갈모를 달아맨 괴나리봇짐이 하나 떠나간다/ 성황당 돌무데기 우거진 찔레엔/ 사철 하얀 종이쪽이 나풀거리더니 꽃이 피었네// 느티나무 아래 빨간 자전거 하나/ 자는 듯 고요한 마을에 무슨 소식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