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이야기
김형석/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초등학교 1학년 쯤의 나이였을 것이다. 10명도 채 안되는 큰 아이들이 모여 글을 배우고
있었다 가르쳐 준 글을 따로 외우지 못하면 언제나 체벌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이
학생들을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귀찮으니까 나보고 대신 이 학생은 10대 이 아이는 5 대
씩 일러주면서 때리라는 것이다.
주로 손바닥이나 옷을 걷어 올린 팔뚝을 때리는 것이다.처음에는 아픈 것 같아 가만히
때린다.그러면 선생이 팔뚝에 자리가 나도록 때려야 한다고 나에게 꾸지람을 주는 것
이었다. 그 아저씨는 눈을 껌뻑껌뻑하면서 가만히 때리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가만히 때리면 선생이 다시 힘껏 때리라는 명령을 내린다.내가 제일 어려서
그랬는지 나는 맞아본 기억이 없다.얼마동안 다니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교회 예배당을 학교 교실 대신에 사용해서 본격적으로 초등학교 교과목을 가르치기로
했다.예배당 구석구석에 몇명씩 모여 앉아 한글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마을에 학교가 생겼
다는 소문이 인근 마을에 알려져 학생들이 많아지고 예배당보다는 학교를 따로 건축하자
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동네 동쪽에 운동장이 생기고 기와집 교사가 건축되었다.학교 이름은 신망학교로
명명되었다. 교회학교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관에서 인가해준 학교는 아니다.
내 수필에 나오는 B양과의 사랑이야기도 그때의 이야기다. 나도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여자
친구와 사랑을 했고 그것이 삼각관계가 되어 마음을 태우기도 했다. 내 아내는 60살이 될 때
까지 내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를 놀리기도 했고 때로는 가벼운 질투심 비슷한 불만도
꺼내곤 했다.
참 엤날 이야기다 아내가 85세에 먼저 간지도 10년이 지났으니까...
부친을 따라 창덕소학교에 갔더니 교감직을 맏고 있던 선생이 나에게 구두시험을 보는 것이
었다. 일본어를 공부했느냐고 물었다 한마디도 모르냐고 하면서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읽지 못했다. 그 때 칠골교회 심목사가 옆에 있다가 애가 똑똑해보이니까 넣어 주도록 하지...
라고 말했다. 심목사가 교장이었던 것을 후에 알았다.
나에게는 제 2의 초등학교인 창덕국민학교 5학년 생으로 편입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내가 입학하기 5~6년 전에 김일성이 이 학교의 선배 졸업생으로 다녀간 사실은 해방 후에야
알았다. 그 당시에는 김성주라는 본명이었고 그의 다른 가족들은 송산리 앞 동네에 살고
있었다
창덕학교에서의 2년동안은 고생의 연속이었다.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한 마디가 되었다. 그 2년이 없었으면 내 인생의 성장 가능성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선생은 출석부를 보면서 학생들의 성명을 일본어로 불렀다.학생들은 "하이"하면서 대답을
했다. 나는 내이름을 일본어로는 몰랐기 때문에 대답을 못했다.내가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고
"네 이름을 모르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모두가 웃어댔다.
이렇게 시작된 첫 학기였으니 다른 고생이야 말해 무었하겠는가. 학기말이 되었다. 윤선생은
성적표를 나누어 주면서 "조심들 해야한다"제 이름도 모르던 형석이가 이번에 2등을 했으니까,
너희들을 어떻게 된 셈이냐.?고 경고를 내렸다. 나 자신도 놀랐다.1등을 한 학생은 두세살 위인
여학생이었다.
공부는 따라갈 자신이 생겼는데 추운 겨울과 볕이 따가운 여름에 10리나 되는 거리를 왕복하는
일은 큰 고역이었다.영하 20도가 넘는 이른 아침에 타박타박 혼자서 눈발자국 남기며 등하교를
하던 때를 생각하면 누가 보아도 가엾은 고행이었다.건강도 제구실을 못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운명이었다.
2년과정을 끝내고 졸업식 날이 되었다.나는 모친과 함께 졸업식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모친은 짚신을 신고 졸업식장에 갈 수 없으니까 누구네 집에서 빌려왔는지 고무신을 신고
함께 걸어갔다.집에서 떠날 때는 버선이 험해지면 안 되겠다고 벗어서 치마밑에 숨겨가지고
가더니 졸업식이 있는 예배당 앞에서는 버선을 신고 들어갔다 돌아올 때는 또 벗어
가지고 왔다 졸업식이 끝났다.
계속
김형석 연세대명예교수/ 9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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