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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찾아주시고 가르침을 주신 김종윤 선생님, 러브선 님, 태양해 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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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 종합DB
경세유표 제3권
천관 수제(天官修制)
군현분예(郡縣分隸)
경기는 경계를 예전대로 분할하는데. 오직 낭천(狼川)ㆍ금성(金城)ㆍ금화(金化)ㆍ철원(鐵原)ㆍ평강(平康)ㆍ이천(伊川)ㆍ안협(安峽) 등 열수(洌水 : 한강) 서쪽 대수(帶水) 동쪽에 있는 일곱 고을은 경기에 붙이고, 양근(楊根)ㆍ지평(砥平)ㆍ제천(堤川) 등, 열수 동쪽에 있는 세 고을은 열동성에 붙인다. 또 송경(松京)으로 황해 포정사(黃海布政司)를 삼고, 장단(長湍)ㆍ마전(麻田)ㆍ풍덕(豊德) 등 세 고을을 송경에 붙여서 대수를 경계로 한다.
생각건대, 들(野)에 획을 그어서 주(州)로 나누는 데는 유명한 산과 큰 냇물을 한계로 해야 한다. 내가 보니, 열수의 근원 중 하나는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금강산(金剛山)에서 나와 용진(龍津) 하류에서 합류한다. 무릇 두 가닥 물의 동쪽에 있는 것을 열동성에 붙이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며, 열수 서쪽에 있는 것을 경기에 붙여서 근본(根本)되는 곳을 두텁게 함도 또한 마땅하다. 송경 유수(松京留守)는 한가롭게 하는 일이 없고, 황해 포정사는 궁벽지게 바다 한모퉁이에 있어, 무릇 징발하는 명령이 있어도 멀리 돌아서 가므로 매우 불편하다. 송경 유수에게 황해감사를 겸하게 하고, 도계(道界) 첫머리에 앉아서 평양이나 전주같이 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면 장단 등 세 고을을 황해에 예속시켜서 임진을 경계로 함이 또한 마땅하다.
살피건대, 경기와 사천성 사이에는 비록 유명한 산이나 큰 냇물이 한계가 된 곳은 없으나, 죽산(竹山) 남쪽에 있는 미수(洣水 : 속명은 天迷川이다)는 동쪽으로 흘러서 열수(驪興 남쪽에 있다)에 들어가며, 안성 남쪽에는 사수(沙水 : 하류가 素沙河이다)가 있어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며, 그대로 큰 나루가 되어 남북을 가로질러서 두 성의 경계(즉 해협)가 되었으니, 경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사천성이란 지금의 충청도인데, 그 강역(疆域)은 모두 예전대로이나, 오직 제천 한 고을을 열동성에다 고쳐 붙였다.
생각건대, 지금의 금강(錦江)을 옛 사기(史記)에 사비하(泗沘河)라 한 까닭으로 성 명칭을 사천성이라 했다. 이 성은 도성에 아주 가까운 울타리이므로 웅대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깎거나 가르지 않았다.
완남성ㆍ무남성은 지금의 전라도다. 이 도(道)의 동쪽에는 잔수(潺水)가 있고 복판에는 노령(蘆嶺)이 가로뻗쳐서 남북 한계와 똑같다. 이번에 잔수 이동 노령 이북은 완남성에 붙이고 잔수 이서 노령 이남을 잘라서 무남성으로 만들었다.
잔수 동쪽에 있는 것은 구례ㆍ남원ㆍ운봉ㆍ임실이고, 노령 북쪽에 있는 것은 순창ㆍ정읍ㆍ고창ㆍ무창인데, 여기부터 북쪽은 모두 완남성에 붙였다.
잔수 서쪽에 있는 것은 곡성ㆍ옥과이고, 노령 남쪽에 있는 것은 담양ㆍ장성ㆍ영광인데, 여기부터 이남은 모두 무남성에 붙였다.
생각건대, 중국같이 큰 나라도 13성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를 8도로 가른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내려오면서 법제가 분명하지 못하고, 기강이 확립되지 않았다. 하물며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인재가 흥기(興起)하지 않는데 한 방면의 임무를 부탁하니, 그 직에 능히 맞게 하는 자가 드물다. 서도(西道)와 북도(北道)는 지역이 넓고 아득한데, 감사(監司)가 경계 첫 고을에 앉아서 멀리 수천 리 지역을 통제한다. 그래서 명령이 빠를 수 없고, 간악함을 살필 수 없으니 갈라서 두 성으로 함이 마땅하다. 호남과 영남은 백성이 번성하고, 정무(政務)가 번거로우니 능통한 재질(材質)과 큰 기국(器局)이 아니면 다스릴 수가 없다.
나는 남쪽 지방에 15년이나 있었다. 그러나 능히 그 직무를 다하고 백성의 뜻을 크게 두려워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각각 갈라서 두 성씩으로 함이 마땅하다. 하물며 고려제도는 호남에 남북 두 도가 있었고, 영남에도 두 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목릉(穆陵) 때에 영남을 좌우 두 도로 갈라서 왜구를 방어했다. 양남(兩南)을 갈라서 네 성으로 만든 것은 예전에도 그런 법이 있었으며, 내가 처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남성의 포정사(布政司)는 광주에 있음이 마땅하며 광주는 옛날 무주이다.
영남성ㆍ황서성이란 지금의 경상도이다. 이 도에 황수(潢水 : 낙동강)가 있어, 남쪽으로 흐르는데, 물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태백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백산에서 나온다. 소백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황수 동쪽에 있는 것을 영남성으로 하고 황수 서편에 있는 것을 황서성이라 했다.
순흥ㆍ풍기ㆍ영천ㆍ안동ㆍ비안ㆍ군위ㆍ인동ㆍ현풍ㆍ창녕ㆍ영산에서 아래로 동래까지는 모두 이 물의 동쪽에 있는데 여기부터 동쪽은 옛적 진한국(辰韓國)이었다. 예천ㆍ용궁ㆍ함창ㆍ상주ㆍ선산ㆍ성주ㆍ고령ㆍ초계ㆍ의령ㆍ함안ㆍ칠원ㆍ창원에서 아래로 김해까지는 모두 이 물의 서쪽에 있는데, 여기부터 서쪽이 옛날 변진국(弁辰國)이다.
생각건대, 우리나라 중세에 영남 우도(右道)의 감사가 진주에 좌정(坐定)했던 것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주는 남쪽 바다에 가까워서, 북쪽으로 용궁ㆍ예천과는 길이 너무 멀고, 상주는 또 북쪽에 치우쳐 있다. 나의 생각에는 황서성 포정사는 성주에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 고을은 북쪽에 금오산성(金烏山城)을 두고 서쪽으로는 추풍령이 목이 되어서, 관방(關防)이 될 만한 요충지대이다. 그러므로 진주는 그대로 병영으로 만들고, 성주에다 감영(監營)을 건설하면 관할하기가 편리할 것이다.
살피건대, 성주에서 대구까지는 하룻길이 못 되니, 만약 남쪽 도적이 와서 침범하면 두 성 신하가 편지를 띄워서 일을 의논하여, 수레바퀴가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될 것이니 또한 애각(涯角)처럼 서로 동떨어진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열동성(洌東省)이란 지금의 강원도이다. 그 강역(疆域)은 예전대로 하되 오직 낭천(狼川)ㆍ금성(金城)등 열수(洌水) 서쪽 고을은 경기에 옮겨 붙이고(위에 이미 기록했다), 경기의 양근ㆍ지평 두 고을과 충청도의 제천한 고을을 본성(本省)에 옮겨다 붙인 것(위에 이미 기록했음)이 조금 다르게 되었다.
생각건대, 이 성의 영동 쪽 아홉 고을(북쪽의 歙谷에서 남쪽의 平海까지)은 본래 현도(玄菟)의 남부이다. 그후 금와(金蛙)의 아버지, 해부루(解夫婁)가 예(濊) 지역에서 동쪽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왔는데, 가섭원은 하서량(河西良)이고, 하서량은 지금의 강릉이다. 이후부터 영동 아홉 고을이 예맥(濊貊)이라는 명칭으로 잘못 불렸으나 실상 예맥은 본래 요동(遼東)에 있었고, 이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 산이 서쪽을 막았고, 동해(東海)가 동쪽에 닿았는데 감사는 원주(原州)에 앉았으니, 멀리까지 통제하기란 실상 어렵다. 나의 생각에는 강릉부사(江陵府使)도 또한 안찰사(按察使)라는 직명을 겸해서, 영동 아홉 고을의 작은 일은 강릉에 영솔(領率)되고, 오직 큰 일만을 감사에게 관유(關由)하도록 함이 또한 알맞을까한다.
송해성(松海省)이란 지금의 황해도이다. 해주(海州)는 궁벽지게 한 모퉁이에 있고, 송경은 다만 성 하나만 관할한다. 위치가 궁벽지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관할이 작으면 권세가 적고 약하다. 그리하여 서도(西道)의 울타리로서는 두 곳을 다 믿을 수 없으니 송경을 황해 감영으로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장단(長湍) 등 세 고을은 저절로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며, 북도(北道)에 있는 중화(中和)ㆍ상원(祥原) 두 고을도 본래 패수(浿水) 남쪽에 있는 것이므로 이번에 본성에다 옮겨붙였다.
살피건대, 원제에 양남(兩南)과 양북(兩北)은 면적이 아주 큰데 복판 4도(道)는 지역이 아주 작으니, 그 안쪽은 중하게, 바깥은 경(輕)하게 하며, 줄기는 억세게, 가지는 약하게 하는 뜻에 있어, 매우 합당하지 못하다. 이제 양남과 양북은 갈라서 8성으로 만들고, 중앙 4도는 그전대로 했다. 그렇게 하면 중한 데에 있으면서 경한 것을 막고, 강함으로써 약함을 제어하게 되니 진실로 형세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패서성(浿西省)과 청서성(淸西省)은 지금의 평안도이다. 이 도는 중앙에 적유령(狄踰嶺ㆍ江界 남쪽 경계)이 있는데, 영 남쪽은 곧 청수(淸水)가 나오는 곳이고, 영 북쪽은 곧 독수(水)가 나오는 곳이다. 설한령(薛罕嶺) 산맥이 서쪽으로 나가서 적유령이 되고 또 서쪽으로 극성령(棘城嶺 : 熙川 서북쪽에 있다)이 되었는데, 가로뻗쳐서 남북의 큰 관(關)이 되었다. 지금은 적유령 남쪽 청수 동쪽에 있는 것은 패서성에 붙이고, 적유령 북쪽 청수 서쪽에 있는 것은 잘라서 청서성으로 만들려 한다.
덕천ㆍ개천에서 안주까지는 청수 동편에 있는데 이 동쪽은 패서성 소관이다. 그리고 희천ㆍ영변에서 박천까지는 청수 서쪽에 있고, 강계ㆍ위원은 적유령 북쪽에 있는데 이 서쪽은 청서성 소관이다.
생각건대, 평안 한 도가 본래 청남(淸南)ㆍ청북(淸北)으로 갈라져 있는데, 두 성으로 가른다는 것은 내가 처음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두 성을 설치한다면 청서성 포정사는 영변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 영변은 옛 병영인데 이괄(李适)이 이곳을 점거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에 병영을 안주로 옮겼으나 국론은 늘 영변이 안주보다 낫다 한다.
생각건대, 폐4군(廢四郡)이란 무창ㆍ여연ㆍ우예ㆍ자성이다. 네 고을의 지역이 거의 천 리가 넘어서 지금 황해도와 비교하여도 곱절이 넘는다. 비록 고을 관아는 없으나 또한 인민은 섞여서 살고 있다. 네 고을을 회복하지 않을 수가 없으나 남쪽으로 평양과의 거리가 거의 몇천 리여서, 감사가 멀리까지 통제할 수가 없다. 나의 생각에는 강계부사도 또한 안무사라는 직명을 겸해서, 네 고을 수령에게 작은 일은 모두 강계에서 결재를 받고, 오직 큰 일만 감사에게 관유해서 강릉 예와 같이 함이 진실로 마땅할 것이다. 다만 강릉이 관할하는 아홉 고을은 포정사에서 고과(考課)함이 마땅하나 강계가 관할하는 폐4군은 고과하는 것마저 강주대사(江州大使)에게 하도록 하여 제주목사(濟州牧使)가 정의(旌義)ㆍ대정(大靜) 두 고을을 고과함과 같이 함이 가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청렴한가 탐묵(貪墨)한가와 부지런한가 게으른가는 멀리 있으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폐4군의(廢四郡議)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윽이 압록강의 형세를 보건대, 4군 이서(以西)로부터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고을이 된 것이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등 일곱 고을이고, 4군 이동(以東)으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을이 된 것이 삼수와 갑산이다. 압록강 물은 남에서 북으로 여연에 이르고, 또 꺾여서 남쪽으로 흐른다. 지금 북쪽으로 매우 불거져나간 지역으로서, 대략 지대가 같은 곳을 논한다면 위원ㆍ갑산은 시위[弦]가 되고, 4군은 활이 된다. 강역(疆域)을 분별하는 데에는 활로 다툼이 마땅하고, 울타리를 가리는 데에는 활로 굳게 함이 마땅한데, 지금 폐지하고 돌아보지도 않음이 가하겠는가? 솔연(率然)이라는 뱀은 머리쪽을 치면 꼬리로 달려들고, 꼬리쪽을 치면 머리로 달려들며, 중간을 치면 머리와 꼬리로 함께 달려드는데, 이것이 병가(兵家)의 대세이기도 하다. 지금 솔연의 머리는 갑산에 있고, 꼬리는 위원에 닿았는데, 그 허리와 배는 모두 썩어버렸다. 그런데 오히려 머리와 꼬리로써 구원할 수가 있겠는가?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과 살아 남고 죽어 없어지는 것은 형세에 달렸을 뿐이다. 산전(山戰)하는 자는 높은 영(嶺)을 먼저 차지하면 이기고, 수전(水戰)하는 자는 먼저 상류(上流)를 차지하면 이기는 것도 형세이다.
강인(疆人) 수천 명이 4군 지역을 차지하여 북쪽으로 갈파(葛坡) 길을 끊고, 서쪽으로 건주(建州) 곡식을 통하면서, 남쪽을 향해 우리를 호령한다면 일곱 고을 정수(亭燧)와 성벽은 장차 흙이 무너지듯, 기와가 부스러지듯 하여, 패수 이북 지역은 다시 조선의 소유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걱정하지 않고, 4군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막는 것이 있기 전에 넘어옴은 해됨이 없거니와, 막았는데도 넘어오는 것은 어지럽게 되는 근본이다.
《시경(詩經)》에 ‘버들을 꺾어서 채마밭에 울타리를 치니, 미친 지아비도 조심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막은 것은 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압록강은 큰 방수(防守)인데 지금 까닭없이 허물어서, 북방의 간사한 백성들이 은밀히 산림 중에 살면서 그 처자를 끌고 와서 소굴을 만들고, 날마다 금ㆍ은ㆍ동ㆍ철을 캐서 두드리고, 주조하여 재물을 만들고, 아이만한 인삼과 초서피(貂鼠皮)로써 스스로 살찌우며, 활, 살, 창, 작은 창, 화기(火器) 따위를 갖추어서 스스로 호위하고 있는데도 그 지역을 지키는 신하는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며 묘당(廟堂)에서는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난리는 이미 일어났는데 방어(防禦)는 어디에 있는가? 옛적에 우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께서 장수에게 명하고 군사를 출동시켜서 6진(鎭)을 경영할 적에, 온 나라의 힘을 다하여 성공한 다음에 그만둔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두만강을 방수(防守)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방수할 곳이 남에게 있어도 오히려 도모했는데, 방수할 곳이 나에게 있건만 어찌해서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인가? 나는 그런 이유로 폐4군은 복구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장수(涱水 : 長進江)의 일대는 곧 우리 내지(內地)이고 방수할 곳이 아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장진에서 북쪽으로 갈파(葛坡)가지 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堡)를 설치한 것이 7~8군데나 되어, 목(項)과 등(背)이 서로 바라보이며 딱다기[刁斗] 소리가 서로 들림은 이 무슨 까닭인가? 대개 장수 서쪽은 곧 폐4군 지역으로서, 고을 관아는 이미 철폐했으나 난민이 섞여 살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4군을 이역같이 여겼으므로 장수도 변경같이 여겨서 이렇게 설비했던 것이다.
그 뜻이 이러했기 때문에 녹수(淥水)를 따라, 동쪽으로는 갈파에서, 서쪽으로는 만포(滿浦)까지 600여 리를 그냥 휑하게 비워 방수하는 곳이 없고, 군사 하나도 머물러 두지 않았다. 또 만포에서 남쪽으로 독수(水 : 禿魯江)를 따라 내려가면서 또 7~8군데 보를 설치하여 장수와 같게 했으니 대개 독수 동쪽도 또한 폐 4군 경계인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정에서는 참으로 폐4군 지역을 버려서 이역으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 대저 녹수는 하늘이 만든 우리나라의 해자(塹)인데 하늘이 만들어준 해자를 버림은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가경(嘉慶) 17년(1812)에 가산(嘉山) 역적 홍경래(洪景來)가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받았는데, 그 격서(檄書)에 문득 폐4군이 응원한다는 말로 허튼 공갈을 했다. 그렇다면 서쪽 토인(土人)들이 폐4군을 조만간 사단을 일으킬 곳으로 여기는 것이 명백하다. 장수 연변과 독수 연변에 설치된 수보(戍堡)가 거의 20곳이나 된다. 지금 이 여러 보를 걷어다가 녹수 연변에 벌여 세워서, 갈파ㆍ만포 사이의 비어 있는 지역을 방색(防塞)한다면 힘을 더 들이지 않고 재물을 더 허비하지 않아도, 녹수는 천연의 해자로서 기능이 완전해질 것이다.
보를 설치하는 방법은 한꺼번에 크게 일으키면 참으로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금년에는 갈파 서쪽 30리 지점과 만포 동쪽 30리 지점에 보 하나씩을 세우고, 다음해에 또 새 보의 서쪽 30리 지점과 동쪽 30리 지점에 보 하나씩을 세우고, 또 명년에 30리 지점에 세운다면 형세는 주머니 주둥이를 졸라매듯 하고, 공(功)은 무너진 곳을 막는 것 같아서 10년을 넘지 않아 북쪽 변경에 보장(保障)이 완성될 것이다. 보장이 완성되고 나면 고을 관아를 설치하지 못할 곳이 있겠는가? 지금 남쪽에는 백성은 많고 땅은 좁아서, 한 농부가 경작할 만한 땅은 값이 수만이나 되니 이들을 이사시켜서 그 지역에 채우면 즐거워하지 않을 자가 없을 터인데 국정(國政)을 잡은 자가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인가?
패수(浿水) 남쪽에 있는 중화(中和)ㆍ상원(祥原) 두 고을을 이제 예에 따라 송해성(松海省)에 옮겨 붙이려고 한다(이미 위에 기록했다).
생각건대, 당시에 이 두 고을을 평안도에다 붙인 것은 평양이 바로 패수가에 있어, 배를 저어 잠깐 만에 갈 수 있는데 문득 다른 도(道)에 속해 있기 때문에 평양에다 임시로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들에 획을 그어서 고을을 가르는 것은 자연 지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중국 금릉(金陵)이 바로 양자강에 임했으나 강 북쪽 고을을 강 남쪽에다 붙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역(驛)을 설치해서 급변을 경계하면서 변경 보고가 왕래할 때에, 서로 돕지 않을 수 없다. 두고 온 토지와 인민에 대한 온갖 일은 다 중경(中京)에서 영솔(領率)하고 오직 변보(邊報)에 대한 한 가지 일만은 평양의 절제(節制)를 아울러 받게 하여도 아마 폐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역(疆域)의 한계만은 이동할 수 없는 것이다.
현도성과 만하성(滿河省)이란 지금의 함경도이다. 이 도는 한복판에 마천령(摩天嶺)이 있는데, 영(嶺)의 큰 등마루가 바로 장백산(長白山)큰 줄기에 닿아 있으므로 영 이남을 남도(南道)라 하고, 영 이북을 북도라 했다. 이제 이것을 따라 나누어 두 성으로 만들었다. 남성(南省)은 단천(端川)에서 그치고 북성(北省)은 길주(吉州)에서 시작한다. 여기부터 북쪽으로 큰 등성이의 서쪽에 있는 것은 현도성에 붙이고 동쪽에 있는 것은 만하성에 붙인다.
지금 북도 절도사(節度使)는 기후가 화창하면 경성(鏡城)에 들어가고 바람이 사나우면 종성 행영(鍾城行營 : 會寧 동쪽에 있다)에 나와서 있는데 이제는 경성을 포정사로 만들고, 종성 행영은 그대로 행영으로 만들어두는 것이 참으로 알맞겠다.
생각건대, 만하성 6진(鎭)은 본래 북옥저(北沃沮) 지역이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말갈(靺鞨)이 점거(占據)해 있었다.발해(渤海)가 번성할 때에는 그 지역을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삼았고, 또는 책성부(柵城府)라 하여 경(慶)ㆍ염(鹽)ㆍ목(穆)ㆍ하(賀) 네 고을을 영솔했다. 당(唐)나라 정원(貞元) 2년(신라 元聖王 2년 786)에 발해 문왕(文王) 흠무(欽茂)가 상경(上京)에서 동남쪽으로 도읍을 옮겨 동경(東京 : 《輿地勝覽》에는 南京으로 되어 있다)에다 정했는데 동경이란 지금의 행영(行營)이 혹 그 지역인가 한다. 그 후 발해가 망하자 그 지역을 야인(野人)이 몽땅 차지해서 자주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세종과 세조가 이를 정벌ㆍ경략하고 겨우 경리(經理)하여 만하 이남이 드디어 우리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기후가 아주 다르며, 지방 풍속이 우둔하여 이시애(李施愛)와 이징옥(李澄玉) 등이 한번 깃발을 휘두르며 난리를 일으키자, 백성이 쓸리듯 좇았다. 그 후에도 왜장(倭將) 청정(淸正)이 북관(北關)에 침입하니 난민 국경인(鞠景仁) 등 이 시기를 틈타 화동(和同)해서,번신(藩臣)과 수신(帥臣)을 다투어 죽이고 적에게 투항했다. 다행스럽게도 정문부(鄭文孚)의 힘을 입어서 평정할 수 있었으나 바람이 불면 풀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 같아서, 가장 걱정되는 곳이 이 지역이다. 게다가 지역이 아주 멀고 소식[聲聞]이 서로 전달되지 않아 그 지역을 지키는 신하가 제 뜻대로 탐학(貪虐)해도 조정에서 듣지 못하고, 감사도 살피지 못하여 한 지역 생민(生民)이 마침내 호소할 곳조차 없는 불쌍한 백성이 될 것이니, 무휼(撫恤)하고 위안(慰安)하는 방법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만하성 순찰사(巡察使) 자리는 반드시 경악(經幄)에 가까이 모시던 신하로서, 행실을 힘써 닦은 청렴한 사람을 뽑아 보내서, 백성을 회유하고 오게 하는[來上] 방법을 다하게 함을 그만둘 수 없다.
봉천성(奉天城) : 포정사는 경기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으며, 그 직명은 경기 순찰사(京畿巡察使)라 한다. 4주(州), 10군(郡), 22현(縣)을 거느린다.
또 심주(沁州)는 1개 군을 거느린다.
광주(廣州)는 3군, 6현을 관할한다.
3군은여흥(驪興)ㆍ죽산(竹山)ㆍ안성(安城)이고, 6현은 과천(果川)ㆍ양성(陽城)ㆍ용인(龍仁)ㆍ이천(利川)ㆍ양지(陽智)ㆍ음죽(陰竹)이다.
광주 도호부 대윤(廣州都護府大尹)이 경기 수어사(京畿守禦使)를 겸무하며, 판관(判官) 한 자리를 두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살피건대, 유수(留守)라는 직은 반드시 그 지역이 서울이 되었던 적이 있는 지역에 둘 수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송도(松都)를 중경(中京),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함은 마땅하나 그 외에는 경(京)이라 일컬을 만한 곳이 없다(경주가 비록 신라의 옛 도읍이었으나 지역이 아득히 멀고, 부여가 비록 백제의 고도이나 고을이 쓸쓸하고 가난하다). 강도(江都)와 광주는 한때 병란을 피했던 곳에 불과한데 어찌 도읍이라 할 수 있으며, 도읍이 되지 않았는데 어찌 유수를 둘 수 있겠는가? 그런데 200년 이래로 광주는 혹 유수가 되기도 하고 혹은 부윤(府尹)이 되기도 하여, 해마다 달마다 고쳐서 명칭이 여러번 변했다. 나의 생각에는 유수라는 명칭은 지금부터 폐지함이 마땅할 듯하다.
그 도호부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호(護)라는 것은 위로 왕국을 호위하고, 아래로 군민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원제에는 주(州)와 부(府 : 평양 같은 곳)가 있고, 도호부와 대도호부가 있다. 주에도 부윤(府尹)ㆍ목사(牧使)ㆍ부사(府使 : 朔州에서는 府使라 일컬음)가 있다. 직관제도(職官制度)는 간략해야 하며, 번거로움은 마땅치 못하다. 이제는 주와 부를 합쳐서 한 등(等)으로 하고, 무릇 주를 모두 도호부라 일컫고자 한다. 그 중에도 예전부터 부윤이라 일컫던 곳은 도호부 대윤(大尹)이라 일컫고 예전부터 대도호라 일컫던 곳은 도호부 대사(大使)라 일컬으며, 예부터 목사라 일컫던 곳은 도호부 목사라 일컫는다. 그리고 새로 승격해서 주로 만든 곳도 또한 아무 주 도호부 목사라 일컬으며, 그 밑에 군수가 있고, 그 밑에 현령이 있다. 현령과 현감은 반드시 명칭을 다르게 할 것이 아니므로 이제 현령을 그냥두고 현감이라는 명칭을 없애서, 중국제도와 같이 함이 잘못이 아닐 듯하다.
여흥(驪興)을 강등하여 군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여흥은 본시 작은 고을이었는데, 왕비(王妃)의 본관(本貫)이라는 이유로 주로 승격되었다.
생각건대, 주와 군을 올리고 낮추는 법은 본래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대저 왕자(王者)가 나라를 세우면서 들에 획을 그어서 주를 가르고, 그 법제를 한 번 정했으면 변동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옛날 고려 때에 주ㆍ군을 승격함이 해로 더하고 달로 불어났는데, 혹은 왕비의 관향(貫鄕)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공신의 관향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고승(高僧)의 관향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무릇 王師나 國師가 된 자의 관향은 모두 승격하였다). 드디어 관제가 어지럽게 되고 아첨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와서도 그대로 따라서 법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고쳐야 마땅하다. 국운이 장구하여 천년을 지날 것 같으면 군과 현은 다 주로 승격될 것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지금부터 주ㆍ군ㆍ현 세 등은 그 명칭을 한 번 정했으면 다시 번복하지 않는 것이 또한 왕정(王政)의 큰 것이다.
지금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죄를 지은 자가 그 고을에서 나오면 비록 웅장한 주와 큰 군이라도 낮추어, 현으로 만들어서 고을 명칭도 고치고(公州를 公山이라 고치는 것과 같다), 혹은 그 도의 명칭마저 고쳤다가(淸州를 강등시켜서 西原으로 만들고, 충청도를 公忠都라 했다)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복구하는데 이것은 매우 무의미한 일로, 그 정도가 심한 것이다. 감정이 없는 물(物)에다 벌을 시행하고, 징계하지 못할 땅에다 징계를 내리니, 장차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죄인이 나온 고을이 현이고 군이 아니어서 다시 더 낮출 수가 없으면 말현(末縣)으로 강등한다. 분명 이와 같으면, 주ㆍ군도 또한 그 본래 등급은 그냥두고 낮추어서 끝자리로 함이 마땅한데 어찌해서 반드시 현으로 낮추는 것인가? 법이 평등하지 못하면 성인의 법이 아닌데, 하물며 죄인이 나온 고을이 원래 말현이라면 장차 어찌 하겠는가? 법을 시행하다가 여기에 이르면 막혀서 통하지 못할 것이다. 무릇 막혀서 통하지 못하는 것은 성인의 법이 아니다.
죽산(竹山)을 낮추어서 군으로 한 것과 이천(利川)을 낮추어서 현으로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죽산과 이천은 모두 작은 고을이니 모두 현으로 낮추어야 할 것이나, 다만 죽산은 한길목에 있어서 평소부터 방어하는 책임이 있으므로 우선 낮추어서 군으로 했다. 이 다음에 낮추어서 현으로 만든 것은 모두 이와 같다.
화주(華州)는 3군, 6현을 관할한다.
3군은 남양(南陽)ㆍ인천(仁川)ㆍ부평(富平)이고, 6현은 시흥(始興)ㆍ진위(振威)ㆍ양천(陽川)ㆍ안산(安山)ㆍ김포(金浦)ㆍ통진(通津)이다.
화주 도호부 대사(大使)는 경기남도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화성이 유수가 된 것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여기에 특별한 뜻이 있어,행궁(行宮)을 짓고 그 전(殿) 이름을 노래당(老來堂)이라 한 것에서 연유한다. 지금은 까닭없이 명칭을 유수라 하여 한갓 관제만 깨뜨려서 완전하지 못하게 할 뿐이니 이번에는 옛 명호를 회복해서 도호부로 만들고자 한다. 오직 그 성지(城池)는 법대로 쌓았고, 또 요긴한 길목에 있으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했다.
양주(楊州)는 2군, 5현을 관할한다.
2군은 파평(坡平)ㆍ고양(高陽)이고, 5현은 가평(加平)ㆍ포천(抱川)ㆍ영평(永平)연천(漣川)ㆍ적성(積城)이다.
교하(交河)는 작은 고을이므로 고양에다 합병했다.
양주 도호부 목사는 경기 운향사(運餉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고양은 서로(西路)의 첫 참(站)에 당해서, 공궤(供饋)하는 일이 크게 번거로운데, 고을 힘이 약하니 교하를 합병해서 한 군으로 함이 마땅하다.
살피건대, 양주는 왼쪽으로 대수(帶水 : 임진강)를 끼고, 오른쪽으로는 열수(洌水)를 안고 있다. 무릇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군량(軍粮) 운반을 책임지우는 것이 마땅하므로 운향사를 겸하게 한다.
철주(鐵州)는 고을 2, 5현을 관찰한다.
2군은 이천(伊川)ㆍ삭녕(朔寧)이고, 5현은 평강(平康)ㆍ안협(安峽)ㆍ김화(金化)ㆍ금성(金城)ㆍ낭천(狼川)이다.
철주 도호부 목사는 경기북도 방어사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철원(鐵原)이란 옛날 철원(鐵圓)으로서 궁예(弓裔)가 도읍했던 곳이다. 바로 북로 요충(北路要衝)에 당해서, 본래부터 방어하는 직을 겸했는데 이번에도 그대로 했다.
심주부(心州府)는 1군을 거느린다.
1군은 교동(喬桐)이다.
심주부 행궁대사(行宮大使)는 경기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며, 판관(判官) 한 자리가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교동 군수는 경기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강화(江華)와 교동에는 관제가 여러번 변했으나, 강화가 이미 경읍(京邑)이 아니니 유수라는 명칭은 마땅치 않다. 그리고 서로 수군(西路水軍)과 특별히 상관되는 바가 없으니,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라는 것도 또한 군더더기이다. 이제 심주 대사가 수군 절도사를 겸하도록 하여 급한 변고에 쓸 수 있으니 반드시 교동에게 중임(重任)을 맡도록 할 것이 아니다.
사천성(泗川省) : 포정사는 공주(公州) 금강(錦江) 남쪽에 있는데 4주, 10군, 28현을 관할한다.
공주(公州)는 3군, 8현을 관할한다.
3군은 천안(天安 : 木川을 합병함)ㆍ노성(魯城 : 石城을 합병함)ㆍ한산(韓山)이고, 8현은 직산(稷山)ㆍ부여(扶餘)ㆍ은진(恩津)ㆍ정산(定山)ㆍ홍산(鴻山)ㆍ임천(林川)ㆍ남포(藍浦 : 庇仁을 합병함)ㆍ서천(舒川)이다.
사천성 순찰사는 공주 도호부 대사를 겸무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보통 사람의 재주와 기국(器局)은 그 거리가 심히 멀지 않은데 어떤 사람에게는 영남ㆍ호남을 전적으로 맡겨도 넉넉함이 있고, 어떤 사람은 비인ㆍ남포를 갈라 다스리게 하여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큰 도는 갈라서 두 성으로 만들고, 작은 현은 합쳐서 한 군으로 만드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현을 구차스럽게 남겨두면 그 폐단이 점점 심해진다. 왜냐하면 조그마한 고을에도 사직(社稷)이 있고, 빈객(賓客)이 있으며, 관원에게 권속(眷屬)이 있고, 관청에 아전과 하례(下隸)가 있다. 백성의 재물을 벗겨내고, 침해해서 큰 고을이 하는 짓을 다 본받고자 하니 백성을 해쳐서 만 가지로 괴롭힌다. 착한 원이 오면 팔짱끼고 구경만 할 뿐 할 일이 없고, 탐학한 원이 오면 백성의 등골을 뽑으면서 제 이익을 구한다. 대개 이와 같은 고을은 점차 합쳐서 용관(冗官)이 점점 줄어들고, 백성의 살림이 점점 펴지도록 함이 마땅하다. 위아래 여러 성에 무릇 둘을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은 모두 이러한 뜻에서이니 재찰(裁察)하기 바란다.
살피건대, 감사(監司)의 직을 관찰사라 호칭하면서 순찰사를 겸임하고 있으니 대저 관찰이 곧 순찰인데 겹쳐서 일컫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제부터는 관찰을 버리고, 다만 순찰사라 일컬어서 순찰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별도로 판관을 두는 이유는, 감사는 순행하는 것을 직무로 하여 거처를 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또 생각해보니 감사가 솔권(率眷)하기 시작한 이래고 온갖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한 가지 일도 거행되지 않고, 봄가을 순행(巡行)도 겉치레뿐이다. 이제부터는 감사가 솔권하는 법을 영원토록 철폐함이 마땅하다(이 뜻을 監司條에 밝혔음).
홍주(洪州)는 3군, 8현을 거느린다.
3군은 온양(溫陽 : 新昌을 합병함)ㆍ면천(沔川 : 德山을 합병함)ㆍ서산(瑞山 : 海美를 합병함)이고, 8현은 아산(牙山 : 平澤을 합병함)ㆍ대흥(大興)ㆍ예산(禮山)ㆍ보령(保寧)ㆍ당진(唐津)ㆍ태안(泰安)ㆍ결성(結城)ㆍ청양(靑陽)이다
홍주 도호부 목사는 사천성 운향사(運餉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홍주는 조운하는 길목에 당했으므로 운향사를 겸하도록 했다. 무릇 군량을 운반하는 관직을 겸한 것은 군사가 일어나면 군량 수운을 관장하고, 평시에는 세곡(稅穀) 조운을 담당하는 것을 규식으로 한다.
청주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황간(黃澗 : 永同을 합병함)ㆍ옥천(沃川)이고, 6현은 청산(靑山)ㆍ보은(報恩)ㆍ문의(文義 : 懷仁을 합병함)ㆍ연기(燕歧 : 全義를 합병함)ㆍ회덕(恢德 : 鎭岑을 합병함)ㆍ연산(連山)이다.
청주 도호부 목사는 사천성 중도 방어사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남쪽 도적이 추풍령을 지나서 기내(畿內)로 침범하게 되면 황간에 와서 드디어 두 길로 갈라진다. 한 길은 청산(靑山)ㆍ보은을 지나서 청주로 나오고 한 길은 옥천ㆍ문의를 지나 청주로 나와서 경성(京城)에 도달한다. 이리하여 청주는 중도의 요충이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임진년(壬辰年)에 왜구의 큰 진(陣)이 조령(鳥嶺)을 지난 다음 그 가운데 1대가 추풍령을 지나서 청주로 나왔다. 그후 조령에는 세겹 성(城)을 쌓아서 엄중하게 지키고 있으나, 추풍령 길은 잊어버리고 비워둔 것은 또한 무슨 연고인가? 조령은 본디 천연적인 험지(險地)로서, 한 사람이 길목에 버티고 있으면 1만 명이라도 침범하기 어려운 곳이니, 비록 요새를 설치하지 않더라도 급한 변고에 대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추풍령은 본시 평지이니 만약 견고한 성이 없으면 도적을 막을 수 없다. 나의 생각에는 추풍령 서쪽으로 황간에 이르기 전에 험하고 비좁은 곳을 택해, 견고한 성을 급히 쌓아서 무기와 곡식을 간직하였다가 급한 변고가 있으면 군수에게 가서 지키게 하고 방어하는 신하는 후원(後援)이 되도록 해야 함은 그만둘 수가 없다.
충주(忠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단양(丹陽)ㆍ청풍(淸風)이고, 6현은 영춘(永春)ㆍ괴산(槐山)ㆍ연풍(延風)ㆍ청안(淸安)ㆍ음성(陰城)ㆍ진천(鎭川)이다.
충주 도호부 목사는 사천성 동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충주는 조령 길과 죽령(竹嶺)길이 합하는 곳이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한 것이다.
완남성(完南省) : 포정사는 전주부(全州府) 성안에 있으며 3주, 6군, 18현을 관할한다.
전주(全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여산(礪山)ㆍ익산(益山)이고, 6현은 고산(高山)ㆍ용안(龍安 : 咸悅의 반을 합병함)ㆍ임피(臨陂)ㆍ김제(金堤)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 : 함열의 반을 합병함)이다.
완남성 순찰사는 전주 도호부 대윤을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전주는 번성하고 부유해서 큰 도시라고 일컫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일찍이 경읍(京邑)이 된 적이 없으므로 남경(南京)이라는 명칭은 적당하지 않다.
용주(龍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용주는 지금의 남원이다).
2군은 무주(茂朱)ㆍ금산(錦山)이고, 6현은 진산(珍山)ㆍ용담(龍潭)ㆍ진안(鎭安)ㆍ장수(長水)ㆍ임실(任實)ㆍ운봉(雲峰 : 求禮를 합병한다)이다.
용주 도호부 목사는 완남성 동도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용성(龍城)이 동쪽으로 팔량치(八良峙)에 통해서, 신라ㆍ백제의 경계가 되었고, 목구멍 같은 요충지이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한다.
나의 생각에는 팔량영은 남방(南方)의 큰 관방(關防)이라 생각한다. 백제가 망할 때에 유인궤(劉仁軌)가 남원(南原)에 유진(留鎭)하면서 남원을 대방주(帶方州)로 만들어서 신라의 길을 막았다. 고려 말에는 우리 태조(太祖)가 왜구를 만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인 곳으로,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이곳에 있다. 만력 정유년(萬曆丁酉年 : 선조 30년,1597)에는 왜구가 이 길을 지나서 남원을 공격했는데, 명(明)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따라서 이 길목을 방어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지금까지 한 조각의 견고한 성도 없으니 엉성하다 할 수 있다. 운봉 동쪽 10여 리 지점이 그 영의 가장 험한 목에 해당하는데, 견고한 성 하나를 쌓고, 운봉 관아를 이 성으로 옮기도록 함은 그만둘 수 없다.
순주(淳州 : 곧 淳昌임)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태인(泰仁 : 태인은 이번에 승격했다)ㆍ고부(古阜)이다. 6현은 정읍(井邑)ㆍ금구(金溝)ㆍ부안(扶安)ㆍ고창(高敞)ㆍ무장(茂長)ㆍ흥덕(興德)이다.
순주 도호부 목사는 완남성 중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순주에도 노령(蘆嶺)이 있고, 복판 큰 길이 되었으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했다. 또 순주에는 부흥산(復興山)이 있어, 험하게 막힌 것은 비교할 데가 없다. 남쪽 사람들은 모두 병마사(兵馬使)의 영(營)은 순주에다 설치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무남성(武南省) : 포정사는 광주부(光州府) 성안에 있으며, 3주, 6군, 18현을 관할한다(또 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
광주(光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장성(長城)능성(綾城 : 綾州)이고, 6현은 담양(潭陽)ㆍ창평(昌平)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옥과(玉果)ㆍ곡성(谷城)이다.
무남성 순찰사는 무주(武州)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살피건대, 광주(光州)란무주(武州)이다. 신라 말부터 항상 큰 진(鎭)이었고, 고려 때에도 또한 그러했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창의(倡義)하는 군사가 이곳에서 먼저 일어났으니 그 고을을 포정사로 한 것이 그것에 연유한다.
나주(羅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영광(靈光)ㆍ영암(靈巖)이고, 6현은 함평(咸平)ㆍ무안(務安)ㆍ강진(康津)ㆍ해남(海南)ㆍ진도(珍島)ㆍ압해(押海)이다.
나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우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압해는 나주 바다의 바깥 섬이다. 나주 바다에 열두 개의 큰 섬이 있고, 작은 섬으로서 큰 섬에 딸린 것은 수십 개나 된다. 여러 섬에서 1년 동안 요역(徭役)으로서 고을 관청 사람의 요구에 응(應)하는데 곡식이 1만 섬이나 들고 다른 물건도 이만큼은 든다 한다. 나주 군관이 바깥 섬 주인이 되어, 그 이(利)를 다 먹으면서, 목사가 쓰는 목물(木物)과 잡비를 충당해준다 하니 천하에 무의 무법(無義無法)함이 이와 같을 수 없다. 섬 백성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와서 고소(告訴)하려 하여도 한 번 부성(府城)에 들어오려면, 헛되이 드는 비용이 매우 많고 사건은 결국 바로잡아지지 않기 때문에 원통함과 억울함이 쌓여서, 별도로 한 현을 세우고, 열두 섬을 다 이 현에다 붙이기를 원하고 있다. 내가 그 실정을 익히 알므로, 이번에는 열두 섬 중에 하나를 택해서 관아를 세우고자 하는데 자은(慈恩)ㆍ암태(巖泰)ㆍ압해가 그 후보지이다. 그런데 압해는 본시 옛 현이니 여기에다 관아를 설치함이 또한 마땅하다.
생각건대, 신라ㆍ고려 때에 왜구가 우리 서해(西海)를 여러 번 침범했고, 만력 임진년과 정유년 난리에는, 다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힘을 입어서, 왜적이 울두홍(熨斗谼)을 넘지 못했다. 만약 그때에 왜적이 이곳을 넘었더라면 나주 열두 섬이 맨 먼저 뱀과 돼지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러 섬에 성 하나, 보(堡) 하나 없으니 우리나라 서남해의 방어는 허술하다 할 수 있다. 바삐 한 현을 설치해서 그 침입을 막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승주(昇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승주는 곧 順天이다).
2군은 장흥(長興)ㆍ보성(寶城)이고, 6현은 광양(光陽)ㆍ흥양(興陽)ㆍ낙안(樂安)ㆍ동복(同福)ㆍ금오(金鼇)ㆍ검주(黔州)이다.
승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좌도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순천 수영(水營) 남쪽에 금오도(金鼇島)가 있는데 둘레가 300리이고, 그 서쪽에 수태도(愁太島)가 있는데 주위가 200리나 된다. 그리고 돌산(突山)ㆍ내발(乃發)ㆍ횡간(橫看) 따위 여러 섬은 그 수효도 모를 정도이다. 지금은 금오도를 현으로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 예속시켜서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생각건대, 흥양 남쪽에 있는 절금도(折今島)는 둘레가 100여 리인데 백성이 많고 토지가 기름지다. 그 서쪽에 산이(山伊)ㆍ조약(助藥)ㆍ벌라(伐羅)ㆍ금당(衾堂) 따위의 섬이 있는데 그 수효도 모를 지경이다. 절금도에 금주현을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다 예속시킴도 또한 마땅한 일이다.
제주(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
2현은 정의(旌義)ㆍ대정(大靜)이다.
제주 도호부 대사는 탐라부 병마 수군 도절제사(耽羅府兵馬水軍都節制使)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제주는 모두 원래 제도대로 하고 고칠 것이 아니다.
영남성(嶺南省) : 포정사는 달주부(達州府) 성안에 있는데 3주, 9군, 18현을 관할한다.
달주는 3군, 6현을 거느린다(달주는 곧 大邱이다).
3군은 청도(淸道)ㆍ밀양(密陽)ㆍ칠곡(漆谷)이고, 6현은 현풍(玄風)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ㆍ인동(仁同)ㆍ경산(慶山 : 慈仁을 합병함)ㆍ신령(新寧 : 河陽을 합병함)이다.
영남성 순찰사는 달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가주(嘉州 : 곧 安東임)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풍기(豊基 : 順興을 합병함)ㆍ청송(靑松 : 眞寶를 합병함)ㆍ의성(義城)이고, 6현은 봉화(奉化)ㆍ영천(榮川)ㆍ예안(禮安)ㆍ영양(英陽)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 : 比安을 합병함)이다.
가주 도호부 대사는 영남성 상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풍기는 한길 요충에 당했고, 큰 영의 목을 차지했으나 고을 힘이 약하므로 순흥을 당겨서 합병했다.
경주(慶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동래(東萊)ㆍ울산(蔚山)ㆍ영천(永川)이고, 6현은 영해(盈海 : 盈德을 합병함)ㆍ흥해(興海 : 淸河를 합병함)ㆍ장기(長鬐 : 延日을 합병함)ㆍ언양(彦陽)ㆍ양산(梁山)ㆍ기장(機張)이다.
경주 도호부 대윤(大尹)은 영남성 하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동래는 본디 하나의 작은 현인데 이웃 나라와 인접했다는 이유로 부로 승격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군수열(郡守列)에 두었다. 그러나 그 직은 병마 수군절제사를 겸해서 다른 고을 수령과 같지 않다.
생각건대, 경주는 비록 신라의 천년 고도(千年古都)이나 지역이 아득히 멀어서 여러 경(京)에 끼기에는 부족하다.
황서성(潢西省) : 포정사는 황수(潢水) 서쪽 성주(星州)에 있는데 3주, 9관, 18현을 관할한다.
성주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합천(陜川)ㆍ함양(咸陽 : 安義를 합병함)ㆍ초계(草溪)이고, 6현은 고령(高靈)ㆍ거창(居昌)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산청(山淸)ㆍ단성(丹城)이다.
황서성 순찰사는 성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함양이 팔량치 어구에 당했으니 형세를 고단(孤單)하게 할 수 없으므로 안의를 합병한 것이다.
상주(尙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선산(善山)ㆍ예천(醴泉)ㆍ금산(金山)이고, 6현은 문경(聞慶)ㆍ용궁(龍宮)ㆍ함창(咸昌)ㆍ화령(化寧)ㆍ개령(開寧)ㆍ지례(知禮)이다.
상주 도호부 목사는 황서성 북로(北路)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추풍령 북쪽에 화령ㆍ중모(中牟)라는 두 옛 고을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혁파되어서 상주에 속했다. 나의 생각에는 이 고을을 다시 설치하는데 두 고을을 합쳐 하나로 만들고 명칭은 화령이라 하여 추풍령 어구를 충실히 하게 한다면 관방(關防)하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진주(晋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김해(金海)ㆍ창원(昌原 : 漆原을 합병함)ㆍ하동(荷東 : 즉 河東으로, 昆陽을 합병함)이고, 6현은 사원(泗原 : 즉 泗川)ㆍ고성(固城)ㆍ함안(咸安 : 鎭海를 합병함)ㆍ웅천(熊川)ㆍ남해(南海)ㆍ거제(巨濟)이다.
진주 도호부 목사는 황서성 남로(南路)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하동은 잔수(潺水) 동쪽에 있어, 서쪽으로 섬진강(蟾津江 : 豆恥津)만 건너면 곧 광양(光陽)에 닿아 전라도에 통한다. 여기도 관방할 곳이니 곤양을 합병해서 한 군으로 함이 마땅하다. 곤양 남쪽, 남해 어구에 노량보(露梁堡)가 있는데 여기가 이순신이 왜적을 막던 곳이다. 곤양 남쪽 두어 마을을 노량에다 예속시켜서 그 힘을 굳세게 함도 또한 마땅한 바이다(노량에다 防寨를 설치하면 蟾津寨는 혁파함이 마땅함).
충청도(忠淸道)를 이번에 사천성(泗川省)이라 고쳤으니 사천현은 사원(泗原)이라 고쳐서, 명칭이 헷갈리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열동성(洌東省) : 포정사는 원주부(原州府) 안에 있다. 3주, 6군, 12현을 관할한다.
원주는 2군, 3현을 거느린다.
2군은 영월(寧越)ㆍ정선(旌善)이고, 4현은 제천(堤川)ㆍ평창(平昌)ㆍ횡성(橫城)ㆍ지평(砥平)이다.
열동성 순찰사는 원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열동성 포정사는 춘주(春州)에다 두어서, 남북 이수(里數)가 균등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이번에는 우선 예전대로 했으나 그 의논은 그냥 무시할 것이 아니다. 또 영동 아홉 고을은 바로 이역 같아서 관할하기가 불편하니, 열동에 포정(布政)하는 신하를 봄ㆍ여름은 명주(溟州)에, 가을ㆍ겨울은 원주에 있도록 하여 선화(宣化)를 고르게 함이 마땅하다.
춘주(春州 : 춘주는 곧 春川임)는 2군, 4현을 거느린다.
2군은 회양(淮陽)ㆍ양근(楊根 : 본디 경기에 딸렸던 고을이다)이고, 4현은 홍천(洪川)ㆍ미원(迷源)ㆍ인제(麟蹄)ㆍ양구(楊口)이다.
춘주 도호부 목사는 열동성 운향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춘주란 옛적에 낙랑국(樂浪國)이었다. 한(漢)나라에서 처음에 평양에다 낙랑을 설치했는데 그후 고구려에게 빼앗기자, 낙랑 사람들이 우수주(牛首州)에 와서 차지하고, 백제와 연결해서 읍루(揖婁)에 항거하며 고구려와 대항하였다(아울러 《疆域考》에 밝혔다). 지금 사람들은 우수주를 맥국(貊國)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이것은 대개 가탐(賈耽)이 지지(地志)를 찬(撰)하면서부터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 지역이 본래 위치한 형세는 또 한 도의 복판에 있으니 열동성 포정사는 여기에 있음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양근 서북쪽에 미원이라는 옛 고을이 있는데, 아직도 창사(倉舍)가 있다. 이 지역은 홍천ㆍ춘천 두 고을 물이 합류하는 아래쪽에 있어 군사를 숨기고 곡식을 운반하여 급한 사변에 대처할 만한 곳이니, 그 고을을 복구하여 춘주 아래쪽을 받치게 하도록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명주(곧 江陵)는 2군, 4현을 거느린다.
2군은 양양(襄陽)ㆍ삼척(三陟)이고, 4현은 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통천(通川 : 歙谷을 합병함)ㆍ울진(蔚珍 : 平海를 합병함)이다.
명주 도호부 대사는 영동 안무사(嶺東安撫使)를 겸한다.
생각건대, 나의 숙부가 일찍이 흡곡 현령을 지냈는데, 그때 흡곡에는 민호(民戶)가 400여 호에 불과했다. 400호만으로는 현이 될 수 없으니 통천과 합쳐서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도록 함이 마땅하다. 또 울진이 현으로 되어 있으나 또한 아주 작다고 칭하니 평해를 울진에다 합치는 것이 마땅하다.
살피건대, 명주 지역이, 동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태산이 둘러 있어, 좁고 막힌 것이 문득 이역과 같으므로 감사에게 반(半)은 영동에 있도록 함이 마땅하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동 여러 고을의 일반 정무는 명주 대사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고 오직 큰 사건만 감사(監司)에게 관유(關由)하여, 강계(江界)의 폐4군처럼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송해성(松海省) : 포정사는 중경 유수부(中京留守府) 안에 있는데 1경(京), 2주, 12군, 12현을 관할한다.
중경은 개성부(開城府)인데, 4군, 4현을 거느린다.
4군은 장단(長湍)ㆍ평산(平山)ㆍ연안(延安)ㆍ배천(白川)이고, 4현은 마전(麻田)ㆍ금천(金川)ㆍ토산(兎山)ㆍ신계(新溪)이다.
풍덕부(豊德府)는 송경(松京)에다 합병했다.
중경 유수는 송해성 순찰사와 개성부 대윤(大尹)을 겸하며, 서윤(庶尹)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개성부가 이미 주목(州牧)의 체재(體裁)를 갖추었으나 지역이 아주 작고, 성 하나만 웅거했을 뿐이어서 모양이 안 되므로 이번에 풍덕(豊德)을 합쳐서 한 주로 만드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해주(海州)는 4군, 4현을 거느린다.
4군은 장연(長淵)ㆍ풍천(豊川 : 松禾를 합병함)ㆍ안악(安岳)ㆍ신천(信川)이고, 4현은 장련(長連)ㆍ은율(殷栗)ㆍ문화(文化)ㆍ강령(康翎 : 瓮津을 합병함)이다.
옹진이 이미 수영(水營)에 들어 있어도 없는 것 같으니 강령에 합쳐서, 계산에 넣지 않았다.
해주 도호부 목사는 송해성 운향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풍천이 초도(椒島) 어구에 당해 있으니, 일후의 급한 변은 반드시 이곳에서 일어날 것인데, 고을의 힘이 아주 약하므로 송화(松禾)를 합친 것이다.
생각건대, 관서(關西)에 병란이 있으면 남도 곡식을 북쪽으로 실어오고, 경기에 흉년이 들면 서도 곡식을 남쪽으로 수운(輸運)하는데, 신하 하나를 조수(漕帥)로 삼아 두는 것이 마땅하므로 여기에 운향사를 겸하도록 한 것이다.
살피건대, 여러 성에 등(等)을 가를 때마다 군은 적고 현은 많은데, 서북 여러 도에는 군과 현의 수효가 서로 같은 데가 많다. 이것은 본래 큰 군이 많아서 현으로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주(黃州)는 4군, 4현을 거느린다.
4군은 중화(中和)ㆍ봉산(鳳山)ㆍ서흥(瑞興)ㆍ곡산(谷山)이고, 4현은 상원(祥原)ㆍ수안(遂安)ㆍ재령(載寧)ㆍ인성(麟城)이다.
황주 도호부 목사는 송해성 서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인성이란 봉산 동사리(東四里)이다. 봉산 동남쪽 100여 리 되는 기린역(麒麟驛) 북쪽에 동사리라는 곳이 있고, 또 재령(載寧) 성당면(聖堂面)이 기린역 서쪽에 있다. 이 지역은 텅 비어서, 성곽이 없고, 4방 고을과의 거리는 모두 100리가 넘는다. 그러므로 백성이 법을 모르고 행려(行旅)도 모여들지 않는다. 여기에다 작은 현을 만들고, 명칭을 인성이라 하여, 바둑알과 별처럼 벌여 있도록 하고, 너무 엉성하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깊은 산 큰 골짜기에 사람 사는 곳이 아주 희소하면 비워두지 않을 수 없겠으나 이와 같은 평지에 어찌해서 보장(保障)을 만들지 않은 것인가? 여기에는 현을 반드시 설치해야 마땅하다.
재령은 본래 큰 군이었으나 갈라서 인성현을 만들었으므로 이번에 낮추어서 현으로 만들었다.
패서성(浿西省) : 포정사는 서경 유수부(西京留守府)에 있다. 1경, 1주, 6군, 12현을 관할한다.
서경은 평양부인데 4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성천(成川)ㆍ삼화(三和)ㆍ함종(咸從 : 甑山을 합병함)이고, 6현은 강서(江西)ㆍ용강(龍岡)ㆍ순안(順安)ㆍ강동(江東)ㆍ삼등(三登)ㆍ양덕(陽德)이다.
서경 유수는 패서성 순찰사와 평양부 대윤을 겸하며서윤(庶尹)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삼화는 패강(浿江)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구에 해당하므로 방어해야 할 책임이 있다. 비록 낮추어서 군으로 만들었으나 방어사라는 명칭은 그냥 겸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생각건대, 증산(甑山)은 작은 취락(聚落)이므로 함종에 합병함이 편당(便當)하나 증산과 함종이 예전에는 다 증지현(增地縣)에 매였던 것이므로 이번에는 함종에 증산의 명칭을 더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안주(安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숙천(肅川)ㆍ순천(順川)ㆍ개천(价川)이고, 6현은 영유(永柔)ㆍ자산(慈山)ㆍ덕천(德川)ㆍ맹산(孟山)ㆍ영원(寧遠)ㆍ은산(殷山)이다.
안주 도호부 목사는 패서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이 3군과 6현은 모두 살수(薩水) 동쪽에 있는데, 은산ㆍ맹산ㆍ영원은 또 패원(浿源) 동쪽에 있다.
청서성(淸西省) : 포정사는 영주(寧州) 약산(藥山) 성안에 있는데 3주, 18군, 2현을 관할한다.
영주(곧 寧邊이다)는 6군, 2현을 거느린다.
6군은 정주(定洲 : 곧 定州임)희천(熙川)ㆍ운산(雲山)ㆍ구성(龜城)ㆍ가산(嘉山)ㆍ곽산(郭山)이고, 2현은 박천(博川)ㆍ태천(泰川)이다.
청서성 순찰사는 영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주ㆍ군 제도가 모두 엄정하여 문란함이 없어야 한다면, 여러 고을이 주(州)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부당하므로 정주(定州)ㆍ삭주(朔州)는 모두 주(州)를 주(洲)로 고쳐야 한다.
의주(義州)는 6군을 거느린다.
6군은 삭주(朔洲)ㆍ창성(昌城)ㆍ벽동(碧潼)ㆍ용천(龍川)ㆍ철산(鐵山)ㆍ선천(宣川)이다.
의주 도호부 대윤은 청서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강변 여러 고을과 바닷가 세 고을은 그 등급이 높아야 할 것이므로 여섯 고을을 아울러 군(郡)으로 하고 현으로 낮추지 않는다.
강주(江州 : 강주는 곧 江界이다)는 6군을 거느린다.
6군은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ㆍ자성(慈城)ㆍ위원(渭源)ㆍ초산(楚山)이다.
강주 도호부 대사는 청서 방어사와 4군 안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4군에 백성을 채우는 방법은, 온 집이 변방으로 이사가는 율(律)을 회복하는 것이 마땅하나 다만 남북은 기후가 아주 다른데 갑자기 멀리 옮기면 인정이 슬퍼할 것이니 지금부터 중죄(重罪)는 1천 리 너머로 이사시키고, 그 다음은 500리 너머로 옮기도록 한다. 그리하여 남방 백성은 복판 도로 옮기고, 복판 도의 백성은 양서(兩西)로 옮기고, 서도 백성은 이에 4군으로 옮긴다면, 남방에는 호총(戶摠)이 죽어들고 4군에는 읍과 부락(部落)이 이루어질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편리한 방법이다.
현도성(玄菟省) : 포정사는 함주부(咸州府) 성안에 있다. 2주, 4군, 10현을 관할한다.
함주(즉 咸興이다)는 2군, 5현을 거느린다.
2군은 영흥(永興)ㆍ안변(安邊)이고, 5현은 덕원(德源)ㆍ문천(文川)ㆍ고원(高原)ㆍ정평(定平)ㆍ장진(長津)이다.
현도성 순찰사는 함주 도호부 대윤을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영흥이 비록 우리 성조(聖祖)가 일어난 곳이나, 반드시 승격시켜서 부(府)로 만들어야 존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 태조(漢太祖)가 용흥(龍興)한 후에도 풍읍(豊邑)은 그대로 현이었고, 패군(沛郡)은 그대로 군이었을 뿐, 그것을 승격시켜서 주목(州牧)으로 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법제(法制)를 한번 정했으면 기강이 있어야 하는데, 영흥은 이미 거느린 고을이 없으니 군이 될 뿐이다.
항주(航州 : 항주는 곧 北靑이다)는 2군, 5현을 거느린다.
2군은 단천(端川)ㆍ갑산(甲山)이고, 5현은 이원(利原)ㆍ홍원(洪原)ㆍ삼수(三水)ㆍ계산(階山)ㆍ후주(厚洲)이다.
현도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항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북청(北靑) 북쪽에 자항산(慈航山)이 있으므로 항주라고 고쳤다.
살피건대, 조정에서 이미 4군을 버려서, 4군은 야인잡류(野人雜類)가 사는 곳이 되어버렸는데, 이에 장수(涱水) 동쪽 연안에 장진(長津)ㆍ신방(神方)ㆍ강구(江口)ㆍ어면(魚面)ㆍ자작(自作)이라는 방수(防戍)를 두어서 갈파(葛坡)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문호를 열어서 적인(敵人)을 인도하는 것으로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선왕이 매우 개탄하여, 먼저 장진보(長津堡)를 장진부(長津府)로 만들고, 장신(將臣) 이경무(李敬懋)를 보내서 이 고을을 경영하였으니, 이것은 왕자(王者)의 큰 계획이었다.
생각건대, 항주 서북쪽에 소백계산(小白階山)ㆍ원동(院洞)ㆍ은동(銀洞)이라는 여러 곳이 어면보(魚面堡) 후면에 있으니, 그 지명을 계산이라 하여 바삐 한 현을 세우면 장수 서쪽 함덕(鹹德)ㆍ판막동(板幕洞) 여러 곳도 차츰 경영하는 안으로 들어올 것이니 고을이 되지 않을 것을 걱정할 것 없다.
살피건대, 폐4군은 모두 강 연안의 고을들인데 그 상류에 후주고성(厚州古城)이 있다. 지금은 조금 옮겨서 후주보(厚州堡)를 만들었는데, 이곳은 4군 외에 또 하나의 폐군(廢郡)이다. 이곳에다 현 하나를 설치하고, 명칭을 후주(厚洲)라 하여, 동쪽으로 삼수와 연하고 서쪽으로 무창(茂昌)에 접하여서 지금의 구갈파(舊葛坡)에 관아를 만들면,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지역이 모두 다스리는 계획 속에 들어와서 북변(北邊) 울타리가 점차 완전해질 것이다.
만하성(滿河省) : 포정사는 경주부(鏡州府) 성안에 있는데 2주, 8군을 관할한다.
경주(鏡州 : 곧 鏡城)는 4군을 거느린다. 4군은 길주(吉洲 곧 吉州)ㆍ명천(明川)ㆍ부령(富寧)ㆍ무산(茂山)이다.
만하성 순찰사는 경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12성 순찰사는 모두 병마절도사를 으레 겸하고 있으나, 실제로 겸한 것은 아니다. 만하성의 경우는 실제로 겸하고 병마영(兵馬營)을 별도로 세우지 않음이 마땅하다.
회주(會州 : 곧 會寧)는 4군을 거느린다. 4군은 종성(鍾城)ㆍ온성(穩城)ㆍ경원(慶源)ㆍ경흥(慶興)이다.
회주 도호부 대사는 만하성 방어사와 6진 안무사(六鎭安撫使)를 겸한다.
생각건대, 예전 예에 만하성 절도사는 기후가 화창하면 경성(鏡城)에 있고 기후가 차가워지면 종성 행영(鍾城行營)에 있었는데 지금은 순찰사가 이 직무를 실제 겸했으니, 또한 옛 예에 따라 옮겨가면서 있음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만하성 순찰사는 문신과 무신이 교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며 무신은 일찍이 승지나 참판을 지낸 자라야 천망(薦望)에 참여하도록 함이 또한 마땅하다.
경세유표 제5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전제(田制) 1
정전론(井田論) 1
정전이란 성인의 상법(常法)이다. 상법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통할 수 있는 것인데, 예전에는 시행하기 편리했지만 지금은 불편하다는 것은, 필시법을 밝히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천하의 이치가 예와 지금에 다름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정전을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그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하나는 지세가 불편하다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백성의 수가 일정치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왕의 제도를 깊이 고찰해보지도 않고 나름대로 말하는 것이다. 소순(蘇洵)의 말은 “구(溝)ㆍ혁(洫)ㆍ회(澮)ㆍ천(川)의 제도와, 밭 경계에 도랑과 길을 만드는 법은 구렁을 메우고 골짜기를 평평하게 하며, 구릉을 뭉개고 분묘를 파헤치며, 가옥을 파괴하고 성곽을 옮기고, 경계를 바꾸지 않고는 할 수 없다.” 하고 또, “천하 사람을 몰아내고 천하 양식을 다 털어서, 수백 년 동안을 여기에만 전력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은 다음이라야 천하의 땅이 다 정전이 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소순의 말뿐이 아니고 천하 사람이 항상 하는 말이다.
무릇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리에 통하고 일을 잘 알아서, 옛 사적에 막힘이 없어 사람들을 흡족하게 만들고 이론을 시원스럽게 하는 것이 족히 한 세상을 능가한다고 여기나, 스스로 극히 용렬하고 혼매해서 이 일을 논하는 데 참여할 수 없는 존재임은 알지 못한다.
아! 지금의 산천도 요ㆍ순(堯舜)과 3왕(王) 시대의 그 산천이며, 지금의 강역도 요ㆍ순과 3왕 시대의 그 강역이다. 그 구릉과 언덕 및 숲과 진펄도 모두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혹 장맛비에 씻겨져서 무너지기도 하고, 가래와 삽으로 뭉개서 막히기도 했으나 기껏해야 심인(尋仞) 사이에 불과했고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대저 요ㆍ순과 3왕이 산을 뭉개서 구멍을 메우고 고개를 깎아다 늪을 메워서 천하를 다 정전으로 만들었다고 누가 말했는가? 진실로 이와 같으면 소씨(蘇氏)는 수백 년을 기한했지만, 나는 천만 년이라도 할 수 없는 바라고 생각한다. 유림(儒林)들이 경서를 주석하면서 잘못한 것이 있었는데, 후세 사람은 그 주석을 받들어서 경서라 하여 독실하게 믿어 의심치 않아 차라리 요ㆍ순과 3왕이 허황되고 괴상한 무함을 당할지언정 유림이 말한 것은 끝내 한 자도 감히 논박하지 못하는데 모두 이런 이유에서이다.
두우(杜佑)는 “밭둑길[阡陌]이 이미 무너졌으니 숨긴 전지를 밝혀내야 한다. 숨긴 것을 밝혀내는 것은 변통하는 데에 있고 변통하려면 문부를 빙준하여야 한다. 대저 미덥지 못한 법을 시행하면서 수많은 서리에게 정사를 맡겨서 인사의 중과(衆寡)를 기록하고 지리(地利)의 다소를 밝히고자 한다. 이것은 비록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이 형벌로 독려하고,대요(大撓)와 예수(隸首)가 계산하여도 상세하게는 못한다.” 하였다. 따라서 말하는 자가 있어 “인구(生齒)가 줄고 느는 것은 날로 바뀌고 달로 변해서 구름이 솟아나듯, 안개가 변화하듯 한다. 인구를 헤아려서 전지를 주며, 고르게 하려 해도 금년에 완전하던 것이 내년에는 변해버린다. 그리하여 주고 빼앗고 받고 돌리곤 하는 것이 마치 모래알이 바람을 따라서 모이고 흩어지듯 해서 비록 신불해와 상앙이 형벌로 독려하고, 대요와 예수가 계산하여도 평균하게 하지는 못한다.” 하니 그 용렬하고 총명하지 못함이 소씨의 말뿐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요ㆍ순과 3왕 때에는 천하 백성이 모두 태어나는 데에 시기가 있고 죽는 것도 한정이 있어, 그 총수를 잡아서 분수를 평균하게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장차 요ㆍ순과 3왕 때에도 일찍이 정전하는 법이 없었는데 경전에 기재된 것은 모두 제해(齊諧)ㆍ우초(虞初)처럼 꾸며낸 것일 뿐이란 말인가? 어찌해서 요ㆍ순과 3왕은 능히 시행했는데 지금은 끝내 본받을 수 없단 말인가?
아아! 천하에 이치는 하나인데 지금 사람이 반드시 못할 일이라면 요ㆍ순과 3왕도 또한 못했을 것이며, 요ㆍ순과 3왕이 이미 한 것은 지금 사람도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의심이 있겠는가? 무릇 요ㆍ순과 3왕 때에 천하 백성을 다 호구(戶口)대로 세어서 전지를 갈랐다고 누가 일렀는가? 우매한 사람은 근거 없는 속설에 빠지고 총명하다는 사람은 선유의 잘못한 주석에 얽매여, 비록 혁혁한 경서를 증거로 하여 천고의 의혹을 타파하기에 족함이 있어도 살피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천하에 공통된 병폐이다.
나도 그런 말은 익히 들었으나 반드시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시절에 알맞은 것을 참작하고 변통하는 방법을 시행하여 알아듣기 쉽게 하고 너무 고차원적인 이론을 펴지 말며, 시행할 수 있게 한 다음이라야 그 법을 조금이라도 시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성인의 여러 경서를 보니, 내가 참작해서 변통하고자 한 바가 원래부터 선왕의 본법(本法)이니, 다만 경서에 나타난 것을 상고해서 시행할 것이며 반드시 조리를 찾아서 줄이거나 불릴 것이 아니었다
아아! 성인이 오활할 것 같으면 어느 누가 면밀하며, 성인이 몽매할 것 같으면 어떤 이가 소명(疏明)한가? 도를 믿음이 독실하면 어디를 가더라도 석연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첫댓글 우리는 명절 때 고향가는 길을 귀성길(歸省) 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살던 성(省)으로 가는 길이죠.
이 말 또한 대륙의 흔적이 남아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인데,
만약 반도 한국사 이론 대로 한다면, 고향가는 길을 귀도(歸道)길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에는 성(省)이 없으므로...
아, 그렇군요~
경세유표 3권 자료는 카페지기이신 러브선 님이 찾아주셨고, 귀성길에 대한 부분은 태양해 님이 의견을 주셨음을 밝힙니다. 경세유표 5권 자료는 김종윤 선생님 특강에서도 언급된 부분이죠.
중복되는 내용이지만, 처음 보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어서, 한번 더 정리해서 올렸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가르침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뜻을 전합니다.
많이 배웁니다.
한국에도 사천성을 만들어놨어요,,,저기 지금 경남 남해바로 위에...근데 성자는 쏙 빼놓고...ㅎㅎㅎ
영남이 대륙의 동남쪽이었다면 지금의 양자강하류나 그 동남쪽이 되겠군요...복건성,절강성쪽이 될 듯 한데;..
당시 서울이 대륙의 장안(서안)이었다면...
영남/ 경상은 대륙의 동남쪽이 맞고요...강소성,절강성,안휘성 그리고 복건성입니다~
그러면 우리경상도가 왜놈 지역과 동일 권역입니까
일본과 같은 족속이라 친일 성향이 강한겁니까.
참 궁금코 궁금타.
왜넘은 자기나라가 없이 떠도는 족속, 조선팔도 전역에 흩어져 살았던 왜구집단이었습니다. 거리로는 마을 주변에서 일만리 이만리 삼만리 먼곳까지 존재한 조선인의 변형,변종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