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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창 세 기
- 마음의 꼴 (1장 1~2절) -
글 : 도반 신부님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삽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마음은
공동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지만,
그것이 지나칠 경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을
비난하고 학대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착한 아이, 훌륭한 부모, 성인사제가 되기
위한 목표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자기학대용 무기로 돌변하였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한 사람이 되지만,
자신의 마음은 지옥, 때로는 연옥이 되어서
죽는 날까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허망한 죽음을 맞습니다.
성경에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다는 표현은,
바로 자기마음을 보지 못한 사람의 심리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운이 누구나의 마음 안에 감돌고 있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만들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허상을 따라서 탈진할 듯이 지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마음을 들여다보고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힘들어하는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쫓기듯이 추구해왔던 허상을 직면한 후 밀려오는 허탈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동안 노력을 기울여 살아온 것이 사실은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한 삶이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마음 안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마음공부는 오로지 하느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래서 마음공부는 출가자의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과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어서
마치 성경에 나오는 부자청년이 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슬퍼하면서 돌아가듯이 그렇게 허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시작하면
그동안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겪어야 하는 반면,
그동안 내가 버려두었던 것들 방치해두었던 것들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심리적으로 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인생의 불안정성을 받아들이며,
그동안 자신을 지배하고 억압해온 과거의 망령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그 슬픔과 고통을 잇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좌절을 극복할 새로운 힘을 얻게 되고,
그 힘으로 슬픔에 짓눌려 찌부러져 있던 자아가 비로소 제 모습을 찾고,
제감정의 주인이 되고, 제인생의 주인이 되며,
그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기운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마음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늘 내안에서 내가 살아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하느님을 믿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삶을 시작하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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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일
2012. 9. 2
마르코 7, 1~8. 14~15. 21~23
♠ 복음 연구
* 1~8절 : 3-4절에서 마르코는 이방계 신도들에게 유대인들의 잡다한 세정 관습을 설명한다. 바라사이들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계율뿐 아니라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한 규율도 지켰다. 이를 일컬어 ‘조상들의 전통’이라 하는데 여기 조상들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구전 계율을 물려받아 전해준 전승자들을 비롯하여 마르코서가 집필되기까지의 선현들을 모두 가리킨다. 알렉산드리아, 바티칸, 베자 사본에서는 ‘주먹으로’라 하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한 움큼 물로’라 의역했다. 6-7절은 이사 29/13을 인용한 것이다. 인용구 전반은 內心과 外行이 일치하지 않는 점을 탓하는 내용인데, 이 때문에 인용한 것은 아니다. 후반부는 하느님을 공경한다하나 실상 인습에 얽매여 있는 점을 탓하는 내용으로서 이것이 착안점이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인습을 따르는 행위일지언정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못 된다는 말씀이다. 8절은 세정에 관한 논쟁과 코르반에 관한 말씀을 연결하면서 마르코가 만들어 끼운 것이다.
* 14~15절 : 코르반 서약문에 관한 말씀과 금기 식품에 관한 단절어를 연결하면서 마르코는 14절을 만들어 삽입하였다. 레위 11장과 신명 14/3-21을 보면 정결한 식품과 불결한 식품을 가려 놓는다. 예수시대 유대교에서는 금기 식품을 한결 더 강화했다. 불결하다 해서 먹지 말도록 규정한 식품은 돼지, 쥐, 뱀,토끼, 낙타, 개. 목을 졸라 죽인 짐승, 피, 낙지, 오징어, 문어 따위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런 금기 식품을 폐기하신다. 자연의 음식물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사람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명언이다. 구약성서에 있는 규범조차 철폐하는 폭탄선언이다.
* 21~23절 : 20-23절은 초대교회의 또 한 가지의 해설을 옮겨 실은 것이다. 마음에서 온갖 죄악이 생겨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죄악의 종류를 밝혀 열두 가지 惡業을 나열하는데 앞의 여섯 가지 악업은 복수로 뒤의 여섯 가지 악업은 단수로 되어 있다. 네 복음서에서 이 대목 외에 죄악 목록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사실로 미루어 예수님이 이를 열거하시지는 않았다. 반대로 해외 유대교에서는 흔히 죄악을 나열했고, 그 영향을 받아 바오로, 또는 바오로 학파에서 죄악을 열거했다.
♠ 복음 요약 : 천주교는 전례의 종교이라고 한다. 그 절차가 대단히 화려하다. 아마도 이러한 훌륭한 절차는 구약시대로부터 이어져 왔을 것이다. 믿음의 선조들은 아마도 하느님을 직접 체험했으리라 여깁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 당시 율법학자들도 그 전통을 훌륭하게 지켜나갔으리라 여깁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그들을 나무라셨을까요? 단지 주님을 배척하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의 전통이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오늘은 과연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들이 과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엄숙히 하는 미사전례에 쉽게 동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의 미사며 여러 가지 단체 활동을 하면서 하느님말씀을 선포하고 예언을 말하면서 주님께 기도하며 찬양하는 예식을 갖게 됩니다. 이들을 잘하기 위한다는 핑계로 혹시나 옆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 대화 방향 : ① 코이노니아 나눔을 할 때에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 마음은 무엇 때문에 생겨난다고 생각됩니까?
② 코이노니아 나눔을 할 때에 가장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합니까?
♠ 참고 문헌 : ▪성서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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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2012. 9. 9
마르코 7, 31 ~ 37
♠ 복음 연구
* 31절 :‘갈릴래아로 예수님께서는 돌아 오셨다. 갈릴래아는 제자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신 곳이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레나에게 제자들에게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말을 전하라라고 하셨다. 갈릴래아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 32~35절 : 사람들은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치유를 청원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에파타’라고 말씀하신다. ‘에파타’라는 아람어는 신체기관에 쓰는 말이 아니라, 병자에게 인격적 차원에서 사용하는 단어라고 한다. 하느님이 숨을 불어 넣어 창조된 인간이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치유를 주신다. 한숨은 아버지의 한숨을 상징한다. 당신께서 만드신 사람이 사랑을 듣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된 아픔 그 아버지의 연민에 아들 예수님도 함께하시기에 한숨을 내쉰다. 그러자 곧바로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고 말을 제대로 하게 된다.
* 36~37절 : 주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의 우선순위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으며, 다음으로 치유와 구마 등이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장애인들을 치유하시는 복음을 전하시는 일이 육적인 치유보다도 더 중요하셨기 때문이다.
♠ 복음 요약 : 신체 장애 중에서 모든 것이 다 불편하지만, 특히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고통이다. 단절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의 고통을 연민의 마음을 느꼈기에 이들은 예수님께 병자를 데리고 왔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을 보시고 치유해주신 주님은 역시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치유해 주신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치유 기적은 육체적 장애의 치유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영적인 귀머거리와 말더듬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적인 귀머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좋은 말씀이라고 끄덕이면서도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 그래서 복음적 사랑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한 상대방의 아픔을 오히려 웃음거리로 생각하는 영적인 장애인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 대화 방향 : ① 병으로 고생하는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며 ‘에파타’하고 기도를 한 경험을 나누어 보자.
②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지 않는 효율적인 방법을 서로 나누어 보자
♠ 참고 문헌 : ▪ 요한과 함께 하는 묵상 (박상대신부 편집)
▪ 야곱과 함께 하는 묵상 (박상대신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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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2012. 9. 16
마르코 8, 27 ~ 35
♠ 복음 연구
* 27~30절 :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도시 주위의 마을들로 가셨는데, 이곳은 벳사이다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당신의 신분에 대한 대중들의 견해를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라는 견해들이 있다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약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세말에 오시기로 된 그리스도이시라고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았다.
* 31~33절 : 예수께서는 몇차례 예루살렘에서 지도자들과 갈등을 겪으셨는데, 이러한 대립상황이 계속되면 결국에는 대사제, 제사장들, 원로들, 율법학자들이 당신을 죽일 것이라고 예감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그분의 고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을 보호하려는 듯이 붙잡으면서 만류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고백했음을 가리킨다. 그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야 그의 메시아 고백은 참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질책하셨는데,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분이 지금 가고 계신 고난과 죽음의 길을 충실히 따르라는 분부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스승의 십자가와 부활을 거절하여 당신의 메시아 신분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 제자 직분과 공동체를 유혹한다는 뜻으로 사탄이라고 질책하셨다. 베드로의 이러한 태도는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사람의 뜻이다.
* 34~35절 :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의 메시아 신분을 인간적 사고방식에 따라 이해한 것을 들으시고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생활원칙에 대해 교육하신다.
첫째,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예수님의 뜻과 계획을 생활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수반되는 난관과 박해를 감내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결심을 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후에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본받는 것을 뜻한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 직분에 지속적으로 충실하는 것이다.
♠ 복음 요약 : 예수께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당신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셨다. 우리 각자에게 하신 질문이기도 하다. 제자들의 대답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며, 영광만을 지닌 왕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 그리스도임을 밝히신다. 스승의 죽음을 강하게 말리는 베드로의 태도는 그분의 진정한 정체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계획보다 인간적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 베드로와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자기 버림’과 ‘제 십자가를 짐’이다. 자기의 생각과 바람 대신 그리스도의 생각과 바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은 누구이시고, 나에게는 어떤 분이시며, 내 생활에서 어떤 위치에 계시는 분인지 생각해 봅시다.
② 나는 진리와 구원을 원하면서도 따라오는 고통은 거부하고 싶은 인간 본능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마르코 복음 해설 (성바오로 출판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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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일
2012. 9. 23
루카 9, 23 ~ 26
♠ 복음 연구
* 23절 :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구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 즉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 뒤를 따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첫 번째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 이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자아를 버리라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주님만을 위해서 주님만을 따르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만 추구하라는 뜻도 들어 있다.
두 번째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라는 것인데, 박해와 순교를 각오하라는 뜻이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잘 알고 있었다. 흔하게 사용되던 사형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과 같은 처지를 각오하라는 것이다. ‘날마다’ 라는 말은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날마다 겪는 어려움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주인)으로 섬기고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가는 것이다.
* 24절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이란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즉 순교를 회피하고 속세의 삶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 이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목숨’ 이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뜻 외에도 세상 사람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나 때문에’ 라는 것은 그런 포기나 버림은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예수님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면 순교라고 할 수 없다.
* 25절 : 여기서 ‘세상’ 이라는 말은 ‘세속적인 것들’을 뜻한다. 그래서 ‘온 세상을 얻는다’는 말은 ‘세속적인 부귀영화, 재물 등을 원하는 대로 모두 얻는 것’을 뜻한다.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친다.’라는 말은‘자기 자신의 목숨을 잃거나 해친다.’는 말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지 못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것은 ‘세속적인 것들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 26절 :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은 지금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나와 내 말’ 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부끄럽게 여기다’라는 말은 ‘거부하다’, ‘버리다’라는 말이다.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라는 말은 ‘종말의 예수님의 재림’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때 이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관으로, 또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만 보고 예수님을 버린다면, 또는 박해를 못 견디고 예수님을 떠난다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예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다. 이것은 사실상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 전에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남으로써 스스로 자초하는 일이다.
♠ 복음 요약 :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으면 좋은 것 아니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복음에서는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하나만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세속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 집착이 영적인 진보를 막는 가장 큰 장애이다.
♠ 대화 방향 : ① 하느님과 세속 중 나의 현재의 삶은 어디에 더 중점을 두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까?
②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 2가지를 나는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자기를 버리는 것,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 참고 문헌 : 송영진 (모세) 신부 성경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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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
2012. 9. 30
루카 12, 15 ~ 21
♠ 복음 연구
* 15절 : 예수께서는 재물을 늘리고자 하는 행동을 제자들이 반드시 견제해야 만하는 위험한 것으로 보고 꾸짖으셨다. 탐욕은 인간이 재산으로, 또는 필요 이상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말려들었음을 보여준다. 생명은 하느님께로 부터 온 선물이다.
* 16~19절 : 인간적인 모든 계획은 망상을 자아낸다. 인간의 생명은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손 안에 놓여 있지는 않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 관한 논의를 자신에게만 한정할 수 없다. 이러한 모든 논의에 하느님이 관여하셔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만약 자신의 노력이나 재물로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실질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다.
* 20~21절 : ‘우리의 생명이 부나 물질의 소유로 안전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이 명확히 보여 준다. 죽음의 천사, 하느님께로 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사탄이 "너에게서 네 영혼을 앗아 가리라. 바로 이 밤에...!“ 그런데 그 부자는 자기에게 많은 세월이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던 것이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을 따를 때라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는 세속의 재물에 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뿌리 깊이 박힌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재물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 유산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께서는 중재하기를 거부하셨으며 탐욕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예수께서는 한 비유를 통하여 참으로 안전한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셨다. 바로 소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지상 것들에 대한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의 교훈이다.
♠ 대화 방향 : ① 현재 나에게 가장 큰 관심과 걱정거리는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②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내안에 계신 하느님을 멀리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루카복음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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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유난히 뜨거웠던 FB하계 연수회를 마치고...
행사기록 담당자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꽤 익숙해진 고속도로의 주행의 꿈은 안산의 용맹한 두 남자만의 참여로 꿈이 무산되었다.
서둘러서 안산에서 버스를 10시30분쯤 타고 출발한다.
평상시보다는 약간 늦은 1시 25분쯤 도착해서 서신동 본당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니, 서신동 본당에서 여러 자매님을 만나 좀 기다렸다가 문정성당 버스를 반갑게 맞은 우리는 사무장인 버스기사를 위해서
주모경을 봉헌하고 목적지인 ‘초남리 성지’에 도착하니, 미리 도착한 여러 형제자매님들이 반겨주신다.
2조는 우물가의 사마리아여인 이야기이다.
4조는 다른 조와 달리 구약 야훼이레 주님께서 마련해주신다는 이야기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들어나는 광경이다. 한편의 멜로 드라마와 같이 흘러간다.
안정적으로 이뤄져나가는 숨은 일꾼들의 모습이 전주팀을 위시해서 들어난다.
신부님은 어렵게 지내던 교우들로 받은 상담에 당신의 역경을 알려줌으로써 ‘그들을 치유케 하셨던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것을 깨우쳐주셨다고 고백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