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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 대망 -
(90) 히스기야의 기도와 위로, 역대하 30:13-27
우리 주변에는 종종 우리가 뜻하지 않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저질러,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인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되거나 어려움을 겪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지요.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공연히 여기저기 일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럴 때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인한 불편함으로 분노하게 될 때도 있고, 그게 반복되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자, 이때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이로 말미암는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살펴보셨고 본문도 증언하고 있지만, 남북 분열왕국이래 처음이니, 솔로몬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남유다의 백성들과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모여서 유월절 절기를 지켰던 것이지요. 수백 년간의 갈등과 싸움이 끝날 수 있는, 아니, 멸망직전에 있는 북이스라엘이 다시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땠다고요?
수백 년만에 지켜지는, 그것도 한 달을 미뤄가며 정성다해 지키려는 그 중요한 유월절 절기를, 그 무엇보다 거룩하게 온전하게 지키려고 하는데, 그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던 것이지요? 북 이스라엘에서 온 사람들이 절기의 규례를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랫동안 유월절을 지켜오질 못했으니, 우상 숭배에 젖어 있었으니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가 바르질 못했던 것이지요. 유월절 절기를 시작하면서부터 큰 실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어떤 것이었지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들을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를 어긴지라”(대하30:18a)
그래요. 하나님을 오랫동안 떠나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중에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선조들과 달리 절기를 지켜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절기를 지키는데 필요한 절차와 규례를 몰랐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있던 그들에게 이는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을 비롯한 많은 무리가 자기들을 피로 깨끗하고 성결하게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음으로 기록한 규례를 어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중요한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그간의 모든 수고와 정성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위기를 맞게 된 것이지요. 우리의 잘못이 아닌 저들의 잘못으로 말입니다. 자, 오늘 본문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을까요? 이렇게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이르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하게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역대하 30:18-19)
그래요. 히스기야는 저들을 탓하고 나무라고 원망하고 미워할 수도 있었습니다. 너희들을 믿었던 내가 시절이고 바보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장에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우리의 거룩한 제사를, 내가 왕이 되어 거국적으로 행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보려고 지금까지 이렇게 우리 모두가 고생해서 준비해서 마침내 올려드리는 첫 번째 이 중요한 과업을 너희가 망쳐버렸다고 분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곤 두고 두고 저 사람들은 이런 사람이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되었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하고, 나아가 저 사람하고는 절대로 엮이지 말라고 너도 망하는 수가 있다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다고요? 확인하신 대로, 저들을 품어냅니다. 저들의 실수와 범죄함 앞에서 딱 한 가지를 하는데, 저들을 용서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저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책망이나 서운한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만 기도합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니. 저들이 결심하고 하나님을 구하여 나아왔으니, 선하신 하나님 용서해주옵소서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요. 오늘 히스기야는 지금 예배드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고, 오늘 저 형제들의 실수와 잘못을 탓하거나 비난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는 얼른 저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입지 않도록, 하나님의 명령과 초청을 받고 마음다해 이곳까지 와서 절기를 지키는 이들이, 하나님과의 언약백성으로 온전히 세워질 수 있도록, 오늘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며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지요. 복을 빌어주는 사람, 죄인을 영접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신 삶인 것이지요. 우리에게 잘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만 이뻐하며 복을 빌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사람만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허사로 만드는 사람, 우리의 선함을 악용하고, 철저하게 자기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 자기가 잘못한 것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 사사건건 우리를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 교만과 악함으로 우리를 십자가에 내어주고 죽게 하는 사람, 그래요. 성도는,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저들을 위해 복을 빌고, 그런 저들을 내 소중한 영역 안으로 영접하는 사람입니다.
저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저들을 선대하고 축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오늘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그 사람이야말로 오늘 하나님께 삶과 예물을 올려드릴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우리는 확인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중보기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중보기도의 본보기는 성경 여러 곳에 소개됩니다. 저 모세가 그러했지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여러번 40주야를 금식하며 범죄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무엘은 왕을 구하고 악을 행하는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은 역시 우리 예수님이시지요. 자신을 배반할 제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못 박는 군중과 군인들을 위해서, 자신을 저주하는 강도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기도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부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죄 많은 실수하고 악을 행하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고 계신 것이지요? 로마서에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우리를 위해 죽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죽고 다시 살아나, 천국가길 소원하고 기다리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 기도하는 삶입니다. 특별히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삶입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는 대로, 우리의 모든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습니다. 특별히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는 더욱 분명하게 응답받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그 기도를 참으로 기뻐하셨고, 저들의 잘못에도 저들이 명백히 규례를 어겼음에도 용서하시고, 저들의 유월절 제사를 넉넉히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요. 우리의 할 말은, “너 때문에 될 것도 안돼, 너 때문에 다 망쳤다”가 아닙니다. “내가 기도할께”입니다. 나아가 “너가 처벌을 받아야한다면 내가 대신 받을께”입니다. “내 아우대신 제가 처벌을 받겠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다.” 그쵸? 우리가 겪고 치러야 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사람 앞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입술은 우리 예수님을 닮은 복된 입술이 되시길, 히스기야처럼, 나를 우리를 모두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위해서, 더욱 기도에 힘을 쏟는 복된 종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잘 아시죠?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권세,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고 섬길 특권입니다. 우리가 매면 하늘에서 매입니다. 우리가 풀면 하늘에서 풀립니다(마18:18). 우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셨습니다(요20:23).
일전에 함께 살펴보셨습니다. 먼저 하라고 하셨습니다. 매는 것, 원한을 품는 것, 미워하는 것 먼저 하지 마시고, 푸는 것, 용서하는 것, 사화하는 것을 먼저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even now’ 먼저 하시는 것 ‘make the first move’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이 시대 히스기야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우리 모두에게 실수한 저 에브라임의 무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했고, 하나님이 기꺼이 응답해주셨습니다.
오늘도 범죄하고 잘못한 저들이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아니 나아가 저들과 저들로 인함임에도, 우리와 우리의 예배마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내가 저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 때문입니다. 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이 주어집니다. 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우리는 드디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깨달아 충만한 교회가 됩니다. 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 하나님 부어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히스기야의 기도만큼이나, 또 몇 가지 히스기야를 통해서 본받고 싶은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히스기야가 잘한 일들, 성경이 자랑하듯 기록하고 있는데, 과연 무엇들인지 먼저 21-22절에서 한 가지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울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능숙한 모든 레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더라”(대하30:21-22)
그래요. 히스기야는 절기를 지키는 동안 계속해서 찬양으로 섬기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위로 했습니다. 당연한 의무를 감당한 것인데, 그저 레위인으로 제사장으로 해야할 일을 하였을 뿐인데, 칭찬을 하고, 상을 주고, 위로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요.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래요. 책임과 의무를 끝까지 다할 수 있는 힘은 책임감만으로 사명감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위로받고 격려받은 마음으로 채워집니다.
그렇게 해야한다고 알고 있어도, 마음이 동하질 않으니 하지 못하더라고요. 예배해야하고 찬양해야하고 기도해야하고 사랑해야 하고 용서해야하는 것, 머리로는 아주 잘 알고 있는데 마음이 위로받질 못하고 격려받질 못하니 이 일을 조금도 할 수가 없는 것이 오늘 우리네 사람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내가 돈은 못 줘도 기도하는 일, 아울러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내가 위로받고 싶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위로해주시는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도 수고하고 있고 헌신하고 있고 섬기고 있는 분들을, 당연히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 다 일하고 보수를 받고 있는데 뭐 하며, 잘하나 못하나 평가자가 되지 마시고, 위로와 격려를 전해주는 사람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알아주는 사람 한 사람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힘도나고 용기도 나는 것이지요. 그 한 사람으로 우리 모두가 서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면서 히스기야가 잘한 것을 또 하나 보겠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만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으며”(대하30:24a)
어쩌면 이는 히스기야가 행한 ‘위로’의 실제적인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힘껏 왕의 호소와 명령에 달려나와 예배드리고 절기를 지킨 이들에게 오늘 왕이 선물을 줍니다. 방백들도 선물을 줍니다.
다윗은 법궤를 장막에 모시고 “남녀를 막론하고 각 사람에게” 과자봉지를 하나씩 주었는데(대상16:2-3), 오늘 히스기야는 송아지와 양을 나누어주는 것이지요? 그래요. 예배는 서로를 축복하고 나누는 것, 그리고 집에 돌아가 식구들 축복하는 것까지가 예배라는 말씀 드렸지요?
그래요.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하나님을 기쁘게 만나고 나면, 내 것을 나누고 싶고 주고 싶어야 정상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났는데도 자꾸만 챙기고 싶고 가져가고 싶으면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이지요.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함께 예배드리는 분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예뻐서, 송아지도 주고, 양도 줄 수 있는 분들 복된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배드리러 나올 때마다 무엇을 가져다 드릴까, 하나님께만 말고, 우리 성도님들 드릴 것도 늘 고민하고 챙겨보시는 분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예배 마치고 뭘 가지고 갈까 두리번 거리는 성도가 되기보다, 예배 드리러 오면서 누군가의 옆자리에 귀한 마음들, 선물들, 사탕 하나라도 나눌 수 있는 분들,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왕이면 송아지도 양도 팍팍 나눌 수 있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는 성도님들 되시도록 제가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만 더 볼까요?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모든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들과 유다에 사는 나그네들이 다 즐거워하였으므로”(대하30:25)
히스기야의 제사는, 절기는, 성경 그대로 지켜졌더라고요. 하나님은 저 출애굽기 시내산에서 율법을 제사법을 가르치실 때부터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가 특별히 종들이 소외되는 제사이면 안된다고 모두가 즐거워해야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남과 북의 모든 회중은 물론, 남과 북의 모든 나그네들이, 그죠? 고아와 과부를 포함한 나그네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이들이 초청받고 함께 하며 즐거워하였던 예배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우리끼리의 예배이어서는 안됩니다.
아닌게 아니라 내 교회가 있고, 우리 교회가 있고, 예수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대충 느낌이 오시죠?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내 교회가 없는 성도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 살아가는데, 내 사람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지요. 또한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 수 없는 우리 교회가 있습니다. 끼리끼리 모여서 텃세 부리는 우리만의 교회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어떤 곳,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편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함께 예배드리고 식구가 형제가 자매가 될 수 있는 곳인 것이지요. 그래요. 저와 여러분으로 지어져 가는 하일교회는 예수님의 교회,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이르렀더라”(대하30:27)
그래요. 멋진 유월절 제사였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실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복을 비는 제사였던 것이지요? 제사장들이 레위사람들이 일어나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축복이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임하였던 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요?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이르렀더라.”
마음을 다해 예배하고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니 기도가 축복이 하늘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처소에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는 것이지요. 그
그래요. 우리의 예배도 히스기야의 예배처럼 용서가 있고 위로가 있고 나눔이 있고 사랑이 있어서, 우리의 기도가 제사장과 레위인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목이 터져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우리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지 않는 이유는, 히스기야처럼 예배드리지 않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예배가 더욱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아름답고 복된 예배가 되시길, 용서가 있고, 위로가 있고, 나눔이 있고, 사랑이 있는 예배가 되시길, 내가 용서하고, 내가 위로하고, 내가 나누고, 내가 사랑하는 예배가 되시길, 살아 계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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