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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회담, 거제도 형무소 폭동, 반공포로 석방, 전쟁 쓰레기
뉴데일리
춘계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적화통일의 꿈을 버리는 수 밖에 없었다. 더이상 전쟁을 계속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다. 세계최강국인 미국을 북한으로 부터 밀어내고 인공의 영토를 회복 시키는 데 만족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한반도에 민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달성 하려면 3차세계대전을 감수해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겨우 5년만에 또 세계대전을 치르는 것은 국내외 여론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전의 남한의 영토를 대강 회복한 시점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양측은 각각 한반도에 자국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나라를 복원시키는 데 만족해야 했다.
1951년6월23일, 전쟁발발 거의 1년만에 소련유엔대사 야코프 말릭은 서방 라디오 생 중계를 통해서 한국전쟁 종식을 제안 했다. 6월30일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이에 응답하여 전쟁종식을 위한 회담을 하자고 제의 했다.
냉전이라는 화산이 있었다면 한국전쟁은 처음 있는 화산 폭발이었다. 그러나 한민족은 통일을 위한 전쟁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인공과 남한의 공산주의 신봉자들은 한반도에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지기를 민주주의 신봉자들은 민주주의 국가가 만들어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대다수의 국민은 그저 한나라가 되기를 숙원 했을 것이다.
여기서 끝나다니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다.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앗아간 일년동안의 아귀다툼의 결과가 본전이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영원한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나가면 떳떳한 독립국가가 될 줄 알았다. 해방의 기쁨도 잠깐, 38선이 그어 졌다. 조금 있더니 38선을 없애고 한나라를 만들려는 전쟁이 터졌다. 한나라가 되는 마지막 기회였다. 휴전 협상은 이 기회를 박탈하려는 수작이었다.
1951년6월30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 했다. “한국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중공군은 압록강 북쪽으로 철수해야 한다. 인공은 무장해제 해야한다. 소련과 중공은 인공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해야 한다. 유엔의 보증하에 모든 협상에 한국이 반드시 참석해야하고 한국의 통치권과 영토를 침해하는 합의는 있을 수 없음을 확인 해야 한다.”
이승만은 휴전반대 입장을 휴전이 될 때 까지 고수 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국수주의 적인 태도는 미국 언론과 정부의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휴전협정 문서에 남한 측의 서명이 없는 것도 이승만이 남한 대표의 참석을 거부 했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으로 이승만과 한국은 열강이 좌지우지 하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한국은 정식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다. 그저 유엔 관할 지역일 뿐이었다. 미국의 군사 경제원조 없이는 유지 할 수도 없는 나라였다. 한국은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키질 힘이 없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든가 아니면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 현실 이었다.(This Kind of War 에서)
1951년7월1일 김일성과 중공군 사령관 팽 더후웨이는 라디오를 통해서 휴전 회담에 찬성 한다고 발표하고 개성에서 만날 것을 제안 했다. 7월8일 양측 대표는 개성에서 7월10일 11시에 회담을 개시 하는 것에 합의 했다.
개성은 38선에서 3 마일 이남에 있었지만 인공 영토였다. 유엔군 측은 조속한 시일 내에 전투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에 따지지 않고 동의 했다. 유엔군으로 전투에 참여한 17개국은 적군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 했다. 1. 현재의 전선에서 전투를 중단 할 것 2. 38선 근처에 비무장지대를 만들 것 3. 포로를 교환 할 것 4. 회담을 감시할 국제위원회를 구성할 것.
미국은 일단 전투를 중단하고 회담을 시작하자고 제안 했으나 중공과 인공 대표는 막무가내 였다. 그들은 유엔군 철수 부터 하라고 떼를 썼다. 전선은 고정되었으나 전투는 계속 되었다. 회담때마다 인공영토로 들어가야 하는 유엔군 대표는 백기를 들고 회담에 참석 해야 했다. 결국 중간지대인 판문점으로 회담 장소가 옴겨 졌다.
전쟁은 협상 테이블과 38선 근처의 고정된 전선에서 계속 되었다. 새시대에 등장한 두개의 사상,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어느쪽이 나은가를 온세상에 보여주기위해서 안간 힘을 쓰기 시작 했다.
거제도에 잡혀있는 포로들의 선택은 사상의 우위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표증이었다. 미국은 되도록 많은 포로가 대만(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을 선택 할 수 있도록 사상교육에 몰입 했고 인공과 중공은 자국으로 모두 돌아오게 하기위해서 포로들을 밖에서 조종 했다. 이로 인해서 거제도 수용소 안에서는 폭력이 난무 했다.
(인민군 이학구 대좌는 2군단 작전참모로 춘천 지역 공격을 담당했다. 한국전쟁 중 가장 전쟁준비에 충실했던 김종오 대령의 6사단이 춘천 지역 방어를 맡고 있었다. 예상을 뒤 없고 2군단은 김종오 대령에게 크게 패했다. 이학구는 죄천되어 13사단 참모장으로 대구 전투에 참여했다. 9월 1일 총공격이 실패하고 9월 16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 한 직후 유엔군은 총공격에 나섰다. 퇴각하던 중 인민군 13 사단장 최용진은 이학구의 작전지휘가 틀려 먹었다고 기압을 주었다. 화가 난 이학구는 9월 20일 최용진에게 권총을 쏘고 부하 한 명을 대리고 미군에게 투항했다. 최용진은 팔에 권총을 맞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미군은 그를 처음에는 후대하고 인민군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방송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은 일반 포로와 마찬 가지로 거제도 수용소에 집어넣었다. 미군과 협조한 이학구는 인공을 배반한 역적이었다. 만약 그가 수용소 안에서 미군과 협조하려고 들면 다른 포로들이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인민군 포로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그는 수용소 안에서 항미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그는 수용소장 미 육군 도드 준장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포로교환 과정에서 남한으로 귀환할 것을 원했으나 미군은 이를 거절하고 대전 전투에서 인민군 포로가 된 미군 딘 소장과 포로 교환이 되어 인공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에 미군은 귀순자들을 일반 포로와 똑 같이 취급했으나 국군은 대부분 남한 국민으로 우대했다.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 일까요? 3부 한국전쟁 10장 낙동강 전투 참조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의 9월공세를 유엔군이 제압한 후에 이루어 졌다. 서울이 수복되자 유엔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지리멸멸 퇴각하는 인민군을 북에서 압박 했다.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였다. 수 많은 인민군이 투항 했다. 인민군 포로의 수는 나날이 불어 갔다. 낙동강에서 싸우고 있던 인민군은 미군의 폭격으로 차단된 보급로 때문에 북쪽에서 보충병을 보내기가 어려 웠다. 인공은 남한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어 갔다. 북에서 내려온 보충병도 강제로 전쟁터로 징집된 양민이 많았다. 인민군 지휘 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이들이 인공에 충성할 리가 없었다.
10월에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인민군 포로는 더 빠른 속도로 증가 했다. 10월19일 평양이 국군에게 점령 된 후 평양 포로수용소는 초 만원이었다. 1950년8월말 인민군 포로는 겨우 1740명에 불과 했다. 11월 초에 3만5천, 12월에는 무려 14만명에 달 했다. 이들을 서울, 인천, 부산에 잠정 적으로 수용 했다. 미군은 북한이 유엔군 손에 떨어지고 전쟁이 곧 끝날 것으로 생각하여 포로 수용문제에 대해서 항구적인 계획를 세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중공군의 개입은 미군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대책없이 잡아들였던 포로 관리 또한 혼란에 빠졌다.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한 유엔군과 국군은 퇴각을 시작 했다. 포로들도 같이 움직여야 했다. 내 버려두고 퇴각 하면 적에게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1950년11월 거제도에 포로 수용소를 설치 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 했다. 일단 모든 포로를 부산에 집결 시켰다가 1951년1, 2월에 거제도로 이송 했다. 1950년12월23일에 피난민을 실은 배들은 부산을 거쳐 거제도에 도착 했다. 1951년 초 거제도는 주민 10만, 피난민 10만 , 포로 17만3천이 모여 사는 섬이 되었다.
포로 안에 골수 공산주의 세력과 친 대한민국 반공 세력이 대립하기 시작 했다. 이학구를 중심으로 친공세력은 해방동맹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반공포로들에게 폭력을 가했고 때로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반공포로들은 이관순을 중심으로 대한반공청년단을 만들어서 해방전선과 대립했다. 두세력은 서로 결투도 했다.
미군은 두세력을 한곳으로 모여서 분리 수용 했다. 폭력사태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오히려 이들이 집단 행동을 하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인공은 이들에게 평양에서 지령을 내렸다. 단파라디오 와 철조망 밖에서 안으로 쪽지를 넣어서 서로 연락 했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거제도와 부산을 점령하고 지리산 빨지산과 합류하여 남조선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이북에서 거제도에 내 던져진 피난민들은 여기저기에 흑담집을 짓고 정착 하기 시작 했다. 밀가루 배급을 받아서 수제비를 끓여 먹었다. 때로는 주민들이 해다준 주먹밥을 고맙게 받아 먹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용소는 구세주와 같은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수용소 철조망 밖에는 장이 섯다. 포로들은 미군이 준 옷, 담요등등을 주고 음식, 떡, 엿등을 사먹었다. 담요 넉장이면 통돼지 한마리도 구할 수 있었다. 주위의 바, 상점, 창녀촌도 지역 경제를 도왔다.
그러나 이 잡상인들 사이에 끼어든 인공 간첩들은 포로들과 손쉽게 접선 할 수 있었다. 휴전협상에서 포로문제가 열띠게 토의 되기 시작하자 수용소 안에서 서로를 전향 시키기 위한 공작 또한 점점 치열해 졌다.
대만(중화민국)에서 23명의 강사가 수용소에 나타 났다. 이들은 민주국가 시민의 삶과 공산치하에서의 생활을 비교 설명 해 주었다. 미군측은 목사까지 동원하여 전향 교육을 시켰다. 때로는 협박, 회유을 반복하여 쓰기도 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전향을 한 사람들을 북한과 중공에 침투하는 스파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를 “Operation Turncoat”라고 한다.
포로수용소에 차출된 미군들은 대부분이 보통 부대에서 골치거리인 병사들이었다. 수용된 포로들이 점점 똑똑해지고 있는 반면에 감시병들은 근무에 태만 했다. 수용소 미군 장병들은 포로들의 꿍꿍이 속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주위의 바나 창녀촌의 아가씨만 생각하고 있었다.
1952년5월7일 아침, 포로수용소장 프란시스 다드 준장은 제76수용소 포로 대변인으로 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76수용소는 이학구가 지휘하는 골수 공산주의자가 모여있는 포로 집단이었다. 지프를 타고 수용소 문앞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렸다. 문은 열려 있었다. 문앞에 있던 여러명의 포로 대표와 만났다. 경비병들은 아무 생각없이 이 장면을 처다 보고 있었다. 오물을 들고 나오던 포로들이 갑자기 다드준장을 외어 싸서 문안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나포 된 것이었다.
그날 오후 수용소 부소장 빌그레그 대령은 통역장교 한무준 중위를 대동하고 이학구를 면담 했다. 다드 준장 즉각 석방을 요구 했으나 이학구가 쉽사리 들어줄 리가 없었다. 이학구는 의기양양 했다.
포로 장교수용소 부대변인 격인 신태봉 중좌를 불러 설득 했으나 이것도 실패하자 미군측은 무력으로 다드준장을 구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을 눈치챈 포로들은 다드를 이리저리 옮겨서 무력 구출을 불가능 하게 했다.
5월8일 저녁 다드는 해임되고 찰스 콜슨 준장이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에 한국전 야전사령관 격인 8군 사령관은 벤 프리트 장군, 극동군 사령관은 메튜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사흘 후면 나토 사령관 으로 임명되어 유롭으로 떠나야 했고 신임 극동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이미 도쿄에 도착 해 있었다. 나토 사령관 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츨마를 위해서
예편 되었다.
5월10일 아침, 인민군 및 중공군 포로 대표단은 신임 콜슨 준장에게 다음과 같은 다드준장 석방을 위한 요구 조건을 제시 했다.
1. ... 고문 혈서에 의한 강요, 위협, 감금중지, 대량학살 기총소사, 독가스 와 세균무기및 원자탄 실험등을 즉시 중지하고 국제법에 의해 포로들의 인권과 개인의 생명을 보장 할 것.
2. 포로 자유송환 즉각중지
3. 수천명의 포로들을 불법적으로 재무장 또는 노예화하기 위한 강제심사를 즉시 중지할 것
4. 포로 대표단을 즉시 인정하고 이와 긴밀히 협조 할 것.
어설픈 번역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다음과 같은 콜슨준장의 회답이 포로 대표단에 의해서 받아들여 졌다.
1. ... 본인은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를 살상한 유혈사건이 있었음을 시인한다. ...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 할것을 약속한다. ... 장차 폭행및 유혈사태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앞으로 이런 사건이 발생할 경우 본인이 책임을 지겠다.
2. 자유송환문제는 판문점에서 토의 되고 있다. 본인은 판문점 회의에서의 결정을 좌우할 권한이 없다.
3. ...도드 준장이 석방되면 포로들에 대한 강제심사는 없을 것을 확인한다.
4. .... 본인의 승인을 얻은 세칙에 의하여 조직된 포로 대표단을 승인 한다.
그날 오후 9시30분에 도드 준장은 석방되었다. 미군측의 굴욕적인 타결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문제를 해결한 후에 유럽으로 떠나려 했으나 벤 플리트 장군이 임명한 콜슨 준장 주도하에 만족 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이 사건이 마무리 되고 있었다.
신임 유엔군 사령관(도쿄 극동군 사령관, 벤 플리트 8군 사령관의 상관)마크 클라크 대장은 즉각 도드 준장과 쿨슨 준장을 대령으로 강등 시켜 예편하게 했다.
즉각 포로 대표와의 합의 사항을 부인했다. 물론 석방된 도드 준장도 합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클라크 대장은 거제 포로 수용소에 신문기자들이 오지 못하게 하고 보도 관제를 한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판단 하고 이들의 출입을 허락 했다. 그리고 미 제2사단 부사단장이었던 헤이든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 했다.
절묘한 인제 발탁이었다. 그는 뉴 올라안스 출신이다. 그러나 미 육사 졸업 후 그는 주로 중국에서 근무 했다. 1930-1934년 베이징 주재 미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 하면서 만다린 중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 할 수 있게 되었다. 1942-1945 중일전쟁 때는 버마전선에서 중국군과 협조하며 일본군과 싸운 경험이 있는 장군이었다. 누구보다도 동양인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지휘관이었다.
보트너의 별명은 “Bull”이었다. 황소 같은 추진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선 수천명을 한 지역에 배치한 수용소 구조를 500명 단위로 분리 수용하기 위해서 새로운 막사를 짓기 시작 했다.
그리고 포로 수용소에 게양된 적기와 초상화를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거부하자 수용소 안으로 탱크와 함께 병력을 투입하여 이를 모두 제거 했다. 큰 무력 충돌 없이 누가 그들의 보스인가를 보여주었다.
다음 단계는 철조망 주위의 잡 상인들이었다. 이들에 섞여 포로들과 인민군 지휘부와 연락하는 스파이들이 큰 문제 였다. 보트너는 이들이 철조망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수용소 주위의 민간인 마을을 철거 할 것을 주장 했으나 벤 플리트는 인도적인 입장에서 이를 반대 했다. 그러나 벤프리트의 상관 클라크는 보트너의 손을 들어 주었다. 2일 만에 수용소 주변의 마을은 사라 졌다. 주거지를 일은 주민들에게는 토지등 아무런 보상 없이 그저 이사에 사용하라고 트럭을 제공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전쟁 중에는 사람의 도리나 상식은 통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수용소 설치와 철조망 주위의 마을 철거 당시에 농토와 가옥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었다. 논과 밭을 평평하게 뒤집어 엎고 막사를 지었다. 마을 철거 때는 가옥을 모두 불 살라 버렸다. 수용소 설치 당시 징발된 토지가 2백오십만평, 가옥이 3천호 였다고 한다. 수용소 주위 마을을 소개 하자 주민의 1/3은 집단 수용되었고 나머지는 친척집에 들어 갔다. 장사에 능한 사람들은 부산국제시장등에 자리를 잡았다. 주민들은 정부에 탄원하여 수용소 패쇄 후 막사에 들어가서 살 수 있었다. 60년대에 정부에서 그나마 소액의 보상을 해 주었다.
한달 만에 새 막사가 완공 되었다. 분리 수용을 포로들이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었다. 골수 분자들이 모여 있는 제76수용소가 문제였다. 보트너는 될 수 있는 한 유혈 사태를 만들지 않고 분리 수용절차를 끝낼려고 했다. 보트너는 수용소 옆 빈터에서 낙하산 부대 까지 동원하여 수용소로 돌격하는 훈련을 시행 했다. 포로들은 그 위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포로 대표 들에게 분리 수용을 통고 함과 동시에 구내 확성기를 통해서 포로 이동계획을 여려번 방송 했다. 대표들이 포로들에게 이 사실을 숨길지도 몰랐기 때문 이었다.
포로들은 천막지주로 만든 창과 칼등 잡다한 무기들고 저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군이 최루탄을 던지며 수용소 안으로 들어 갔다. 미군은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며 포로들을 압박 했다. 포로 대부분은 이에 질려서 순순히 새 수용소로 분산 수용 되었다. 그러나 약 천5백명은 수용소 안 참호에서 완강히 저항 했다. 곧 낙하산병과 충돌 했다. 일부 포로들이 도망가려 하자 포로간부들이 이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결국 자기들끼리 싸우는 꼴이 되었고 그들의 저항은 수분내에 제압 되었다.
처음으로 수용소 막사 안으로 들어간 미군들에게 사람시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죽은지 한참 지난 시체가 막사안에 꺼꿀로 매달려 저 있었다. 약3천개의 창, 1천개의 가솔린 수류탄, 4천5백개의 칼, 도끼, 망치, 쇠도리깨등 잡다한 무기들이 나왔다. 76 수용소와 77 수용소를 연결하는 터널이 거의 완성 되어 가고 있었다. 각 막사를 연결하는 참호는 이미 활용하고 있었다.
이때 발견된 공산포로 작전계획문서에는 1952년6월10일에 미군에 저항하고 20일에 공산포로 전원이 탈출 할 작전 계획이 명시되어 있었다. 탈출한 포로 들은 거제도를 무력 점령할 심산이었다.
제77수용소는 별 저항 없이 분산 수용되었다. 이틀만에 보트너는 6천5명의 공산 포로들을 500명 단위로 분산 수용하는 작전을 큰 무력 충돌 없이 완료 했다.
보트너는 인공의 남일이 포로들과 접선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막사안의 체제와 운영방식을 개선 했다.
새로 잡힌 포로는 먼저 잡힌 포로들과 분리 수용 했다.
보트너는 10일 동안에 7만명의 포로를 반공과 친공 포로로 분리 수용 했다. 반공포로들은 영천, 부평, 마산, 논산, 가야등지로 이동 수용 했다. 공산포로로 부터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자들은 집요하게 위장 침투하여 간헐적으로 소규모의 폭력 사태를 유발 했다.
반공포로 석방
북한과 남한의 경계는 휴전협정을 조인 할 때 양군 접촉선으로 한다고 협상초기에 결정되었지만 포로교환 문제는 1951년12월11일에 협의를 시작한지 일년반이 지난 1953년6월8일에야 합의 할 수 있었다. 본래의 소속 국가로 돌아 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처 본인의 의사를 확인한 후에 송환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인민군과 중공군 측에게는 이들을 마지막으로 회유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휴전회담이 연속적으로 매일 계속된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여건에 따라 중단과 속계가 반복 되었다. 전선에서는 고지를 서로 빼앗겼다가 되찾으며 포화를 퍼붓는 웃지못할 전투가 쉬지 않고 계속되었고 이러는 동안 국군과 유엔군의 사상자는 매일 늘어 났다.
1953년3월5일, 스탈린이 사망 한 후로 휴전회담은 전례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 되었다. 휴전회담이 물살을 타면 남한의 휴전반대 시휘는 더욱 기세를 올 렸다. 1953년4월 이후 부터는 휴전반대 시위가 부쩍 늘었다. 정부주도의 범국민 운동 이라고 생각 한다. 신태영 국방부 장관은 인민군 무장 해제, 중공군 철수, 국제연합 관리하의 북한 총선거, 외국침략에 대하여 국제적 보증, 포로 송환 회담에 남한 대표 참여를 발표했다. 국회도 남한주도의 남북통일 보증을 주장하는 결의 안을 채택 했다. 이승만 또한 이에 부응하여 작전권을 회수하여 남한 단독으로 북진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공염불이었다. 1953년4월10일 병약자와 부상포로 교환 합의가 이루어 졌다. 대대적인 휴전반대 시위가 벌어 졌다. 4월21일, 국회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4월27일 도쿄에서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서울에 와서 이승만과 만났다.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군이 논의 되었다.
5월25일, 미국은 본국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관리위원회의 관리하에 두고 본국(인공, 중공)
에서 직접 설득 할 기회를 주고 그래도 송환을 거부 하면 정치회담에서 이문제를 다루고 , 일정기간이 지난후에는 유엔결정에 따른다는 안을 제시 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크게 반발하여 휴전회담 참석을 거부했다.
한국정부는 6월6일 한미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한 후에 유엔군과 중공군이 동시 철군 할 것을 제안 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한미방위조약은 인공과 중공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 하여 휴전후 방위 조약을 이승만에게 약속 했다.(MBC)
이에 반하여 미국을 비롯한 국제 여론은 승부를 가릴수 없는 전쟁을 그만 두고 빨리 휴전을 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미국민은 쓸데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트루만 정권을 비난 했다. 인기가 땅에 떨어진 민주당은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1953년1월20일 휴전을 약속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 했다. 한국전쟁의 원흉 스탈린이 사망하고 휴전을 약속한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이 된 마당에 인공과 한국은 휴전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미국이 절대 반대하는 북진통일을 국군 단독으로 강행 한다는 것은 어느 누가 봐도 가당치 않은 수작이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은 그를 떠난 민심을 추수릴 수 있는 유일 한 방법이었다. 아마 그가 북진통일 이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전시 작전권은 유엔군 사령관이 가지고 있다. 유엔군의 지휘권은 미군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군이 사실상 전시작전권 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통령이 국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고 명시 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한국 대통령은 국군을 어찌 할 수가 없다.
한국전쟁 당시에 헌병 사령부는 국군이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미 확인). 1953년6월6일,
이승만은 원병덕 헌병사령관에게 반공포로 석방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 했다. 남한전역에 비상경계령을 발령 했다. 모든 미국주재 관리를 귀국 시키고 휴전회담 대표를 소환 했다.
이틀 후인 6월8일 휴전협정의 마지막 걸림들이었던 포로송환협정이 조인 되었다. 휴전협정 조인은 시간 문제였다. 휴전반대 시위가 가열 되고 반미분위기가 확산 되었다.
1953년5월25일 유엔군 사령관은 상부에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할 가능성이 있으나 미연에 방지할 대책이 없다고 보고 한 적이 있었다. 한국 내에는 약 3만5천명의 반공포로가 있었다. 이들 경비를 맡은 병력은 한국군이었다. 미군은 소장외에 소수의 행정 참모와 기술 참모 정도 였다.
6월18일 부터 19일에 걸쳐서 27,388명의 반공포로가 수용소에서 탈출 했다. 6월19일 새벽2시 군국 헌병은 수용소 철조망을 잘라 놓고 무조건 수용소에서 멀리 도망가라고 했다. 부산, 마산,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수용소에서 주위 마을로 탈출 했다. 미군은 이들에게 총을 쏘앗으나 국군은 내버려 두었다. 6월21일 까지 계속 된 탈출은 부평 수용소 30명을 포함한 61명의 사망자와 1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했다.
미군은 이들을 다시 잡아들이려 했다. 이과정에서 죄없는 민간인이 포로가 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도와서 숨겨 주었다. 석방 후에 이들의 생활은 그리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반공 포로들이 자신의 반공 의지를 보이기 위해서 국군이 되었거나 입대를 강요 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용공 행위를 의심받아서 당국의 감시를 받거나 직업선택의 제한을 받기도 했다.
한국국민은 이승만의 용기 있는 결정에 대해서 열광 했지만 미국에게는 골치 아픈 사건이었다. 미국은 1952년 부터 이미 거창 양민 학살 사건, 폭압정치, 3선개헌등으로 장기 집권에 집착하는 이승만을 제거 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 했다. 군의 쿠테타나 암살을 계획 했다. 미국이 접촉한 군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종찬, 이용문, 박정희 였다. 이를 에버레디 플랜이라고 한다. 1952년5월 이용문을 앞세운 이승만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 갔다. 휴전협정 서명 거부, 단독북진, 반공포로 석방은 에버레디 플랜 실행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예상하지 못했던 4.19가 발생하여 이승만이 쉽게 제거 되었지만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긴 사건이 제임스 하우스만이 주도하여 박정희를 앞세운 5.16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다.
유엔군(미군)과 대만(중화민국) 측의 끈질긴 설득과 강요를 뿌리치고 중공으로 돌아간 중공군 포로들은 “끝까지 싸우다가 죽지않고 비겁하게 포로가 되어 살아 왔다”고 국가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하진은 “전쟁 쓰레기(War Trash)”라는 자서전적인 소설에서 이러한 처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 수용소는 냉전시대의 소극장 었다. 조국을 버리고 제3국을 선택한 포로들도 있었다. 아무쪽에서도 그들을 품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영복씨는 인민군 중좌 였다. 그는 통역 장교 였다. 그는 소련군 남침 계획서를 번역 했다. 그 내용을 보고 인민군을 탈출 하여 국군에 투항 했으나 국군 측에서 그의 사상을 끝까지 의심하여 남한 국민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포로교환 당시에 인도를 선택했다. 인도에서 2년, 브라질에서 24년, 그리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책 했다.
대한민국은 그를 전쟁 쓰레기로 만들 었다. 조국은 그를 버렸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있다.
참고; 1. 거제도 폭동 남과 북의 포로 수용소, 중앙일보 1971년9월
2.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3.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85회 한국전쟁과 포로 1,2부
4. This Kind of War
5. MBC 미 이승만 암살계획 폭로; 한국경제, 200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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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