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쇄국정책
김상현, 36세. 김재성, 35세. 김증헌, 36세. 김익현, 36세.
김기문, 34세. 김낙현, 36세. 김익수, 38세. 김갑교, 32세.
김봉상, 34세. 김명수, 38세. 김직현, 36세. 김용우, 34세.
김학수, 38세. 김영로, 37세. 김석상, 34세.김덕수, 38세.
김영윤, 37세. 김귀수, 38세. 김영규, 37세. 김영구, 37세.
김영익, 37세. 김영규, 37세. 김용현, 36세. 김영전, 37세.
김영관, 37세.
19C 중엽부터 조선 왕조는 안밖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안으로는 60여 년간 계속 되어 온 세도 정치로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삼정(전정:토지세, 군정:군포, 환정:환곡)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밖으로는 서양의 여러 나라의 선박이 통상을 요구하며
우리나라 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가 우리 나라를 엿보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라는 개혁으로 우리보다 먼져
근대화를 하였다.
모두 조선을 욕심내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고종이 12세 나이에 왕통을 이어가니,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어 실권을 잡았다.
흥선군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여 세도를 부리던
안동김씨를 몰아냈다.
인재를 능력에 따라 초당파적으로 골고루 등용하였다.
관재를 개혁하여 비변사 기능을 축소시키고,
의정부 기능을 강화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정치를 과감히 추진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농민을 괴롭혀오던 서원도 대폭 정리하였다.
흥선군이 힘써 추진한 일은 경복궁의 중건이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300년 가까이 황페 되어 있었다.
왕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권에 적극적이었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백성들은 부역 동원으로 고통을 받고있었다.
기득권을 잃은 일부 양반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병인양요
러시아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부터 빈번히
두만강 국경을 넘나들었다.
대원군이 집권하자, 서양의 침략을 걱정하였다.
당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 보려고 하였다.
프랑스와 교섭이 뜻되로 되지 않았고,
국내에서 천주교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지자,
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몰래 잡입해있던 프랑스 선교사 9명과
국내 천주교 신자 8천명을 체포하어 처형을했다.(병인박해)
프랑스는 병인박해를 항의하고 조선과 교섭도 할 겸,
함대를 동원하여 강화도를 침입했다.
한때 강화성이 프랑스에 점령을 당하였다.
정족산성을 지키던 양헌수 부대가 이를 물리쳤다.
이 사건이 고종 3년(1866)에 일어난 병인양요다.
신미양요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소란을 피웠다. 평양 사람들이
선박을 불태운 사건에 미국은 공동조사 요구와 통상 제안을 한다.
고종 8년(1871년)에 미국은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그들의 아시아 함대를 동원하여 강화도를 침입해 왔다.
어재연등이 이끈 조선군이 광성진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조선군의 전사자는 344명, 포로 20명, 미국 전사 3명, 부상15명)
이사건을 신미양요라 한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대원군은 두 차례에 걸친 양요를 겪으면서
천주교를 더욱 탄압하였다.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양이가 쳐들어온다.
싸우지 않고 화친하는 자는 매국노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라는
척화비를 서울 종로등 국내 중요한곳마다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서양 및 일본의 통상요구를 거부한 조선의 대외정책은
왜세 침략을 막기 위한 자주적 행동이라 할수 있으나,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이는 시기가 그만 큼
늦어진 결과를 가져왔다.
대원군은 외척이
권세를 잡고 정치를 어지럽히는 페단을 막으려고,
고종의 비를 간택함에 있어 의도적으로 아비 없는
민씨를 맞아 드렸다.
이 며느리에 의해 정권을 잡은지 10년만에
권력에서 물려나야 했다.
대원군과 며느리 민비와의 갈등으로
여려가지 변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김상현(尙鉉, 36세)은 철종조 문과급제,
각조 참의와 대사간, 고종조에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세자시강원의 좌빈객, 판이금부사 엮임. 보국숭록대부(정1품.)
김재성(在聖, 35세)은 무과로 급제, 병조참판.
김증헌(曾鉉, 36세)은 생원시 합격, 목사와 참판을 엮임.
김익현(翼鉉, 36세)은 철종조에 급제, 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폈다.
부응교, 참판엮임,
김기문(箕文, 34세)은 문과급제, 병인양요 때 양성 영정을 받들어
승희전에 봉안한 공으로, 홍문관 수찬을 거쳐 춘추관 기사관을 엮임.
김낙현(洛鉉, 36세)는 철종조 무과급제, 대사헌, 경연관을 엮임.
시호는 문경공이다.
김익수(翼洙, 38세)는
철종조 무과급제. 도총관, 승지를 거쳐 가선대부 반열에 올랐다.
사직을 하고 향리에 돌아와 임금을 사모하는 사군대를 쌓고,
초하루, 보를날에 서울을 향해 망배하였다.
김갑교(甲敎, 32세)는 고종조 문과급제, 승문원정자.
김봉상(鳳相, 34세)은
문필과 시화에 탁월하여
영남의 거유 방산 허훈과 교류로 사돈간이 되었다.
관운이 없어 번번히 과거에 실패했다.
도산과 문순공 시비(퇴계 이황과 그의 문도인
후조당 김부필이 시호가 같아 일어난 문중 싸움)가 있었다.
예리한 필봉으로 이를 막아 예조로부터,
‘문순공 문하에 다시 문순공이 나니
그 어찌 영광이 아니겠느가’. 라는 비답을 받았다.
후진을 양성하다가 졸하였으며 청오유고가있다.
김명수(命洙, 38세)는 음사로 여러 요직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직현(稷鉉, 36세)은 별시 문과급제, 여러 직을 걸쳐 경상도 관찰사엮임.
김용우(容遇, 34세)는 고종조에 급제, 찰방, 춘추관 가사관, 이조정랑.
김학수(鶴洙, 38세)는 고종조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쳐
형조, 예조 참판, 특진관에 올랐다.
김영로(永珯, 37세)는
문과 급제, 교리 선전관을 지내고 사직소를 올리고 귀향.
계속 교리, 응교, 순천부사를 제수했으나 사양하였다.
김석상(奭相, 34세)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 사간원 정언을 엮임,
갑오경장이후 사직을하고 향리에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
김덕수(德洙, 38세)는 고종조에 급제, 예조참의, 좌부승지를 엮임,
김영윤(永胤, 37세)는 도산, 병산 서원 원장을 엮임하였다.
안동향주에 추증되고 저서로 섬계유고가있다.
김귀수(龜洙, 38세)는
고종때 생원시와 문과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동부승지에 승진.
김영규(永圭, 37세)는 고종조에 동문교관으로 후진양성. 연심 유고가있다.
김영구(永龜, 37세)는
영규의 동생으로 류춘심의 학맥을 이어 실학에 힘썼다.
학부교관으로 후학 장려에도 힘을썼다.
기근이 심한 흉년에 인근 동리에 호세를 자담하는 선행을 하였다.
동민이 공의 덕을 추모하는 ‘시혜불망비’가 무주군 안성면 중산촌에 있다.
김영익(永翼, 37세)은 경서와 사기에 박통하였다.
공명정대하여 사림에 추증이 있었고 저서로 낙화유고가있다.
김영규(永奎, 37세)도
경서와 사기에 해박한 식견이있었다.
저술에 힘써 지역 사적지 발간에 심혈을 기우리고,
인물사 발간에도 공헌이크다.
임하에 은거 후진양서에 힘써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고,
저서로 익와유고가 있다.
김용현(326세)
효우가 극진하고, 사림의 추천과 도천, 어사천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도학으로 일생을 보내며 유고가 있다.
김영전(永典 37세)은 고종조에 문과급제,
승정원 좌승지, 종묘제조가 되었다.
김영관(永寬, 37세)은 고종 때 효릉참봉.
시조공 설단시 단비 건립 등에 종사했다.
광산김씨약사.
2023년, 7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