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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에스더 9 : 24 - 28
제목: 부르에 임한 하나님의 섭리
일시: 2011. 6. 5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Mighty man을 의미하는 아하수에로 왕은 BC 485-465 20년간 페르시아를 통치했던 왕이다. 그는 바벨론 이후 권력을 잡은 왕으로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지방을 다스렸다. 그에게는 교만하고 미련한 신복하나가 있었는데 그 유명한 하만이다. 그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 모르드개를 싫어하여 자신의 추종자들과 더불어 아하수에로가 왕이 된지 12년째 니산월 제비를 뽑았다. 에스더 3장 7절에서는 부르를 던졌다고 하는데 “부르”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택일을 하는 제비로서 주사위와 같이 6면 입방체로서 각면에 숫자가 있었다. 부르라는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에 따라 택일을 했다. 하만이 이 부르를 던져 얻은 것은 페르시아력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뽑았다. 아달월은 오늘날 태양력으로는 2-3월이다. 그 달에 뭐를 하겠다는 것인가? 유대인들을 다 몰살시키겠다는 것이다. 왕은 하만에게 왕의 반지를 주어 전권을 위임했다. 하만의 지휘 아래, 니산월 13일에 왕의 조서가 전국에 내려져 왕의 인장으로 공식공문이 내려갔다. 그 공문에는 아달월 13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다 죽이고 재산을 탈취하라고 했다. 한편 하만은 아하수에로왕과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즐기는 동안 수산 성은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아달월 13일은 유대인들에게 죽음의 날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날을 생명의 날로 바꾸셨다. 그날은 절망과 파멸의 날이었지만 축복의 날로 바꾸셨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기막히고 놀라운 섭리를 말하고 있는 성경이다. 오늘은 하나님의 섭리에 은혜를 받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섭리는 잘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섭리라 하면 잘 모른다는 것이다. 만일 잘 안다고 하면 섭리의 매력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역사를 구성하는 수많은 소품들이 있고 사건들과 해프닝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일이나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이 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유리한 것인지 불리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전도서 3장 11절에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라고 솔로몬은 기록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그 섭리를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깊이를 잴 수 없고 그분의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내 삶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허다하다. 왜 내게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는가? 왜 내게 이러한 사람을 붙이시는가? 왜 이러한 기회를 주시는가? 인생의 수 많은 일들이 다 이해되지 아니하는 것이 노말하다는 사실을 알라. 하나님이 당신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우리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기 때문이다.
일의 시종을 잘 알 수 없고 우리의 지혜와 경험으로 측량할 수 없는 인생, 그것이 삶의 매력이고 하나님을 아는 과정임을 아는가! 우리가 다 알면 그분을 언제 경험할 수 있겠는가! 잘 모르기에 신비스러운 것인데 알면 김빠지지 않는가! 신비가 없어진다. 섭리는 좀 몰라야 한다. 알면 재미 하나도 없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움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신비롭고 재미있고 생동감이 넘치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5월 28일 맨유하고 바르셀로나의 결승전이 있었다. 저는 축구를 해도 여간해서 이곳 유럽의 축구경기를 잘 보지 않는다. 볼게 너무 많아서 아예 안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꼭 보려고 했다. 박지성선수가 맨유에서 뛰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하는 팀에는 세계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메시와 2010 월드컵의 스페인주역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박지성이 그렇게 뛰었는데도 3:1로 졌다. 축구를 보는 내내 긴장이었다. 박지성이 한골이라도 넣었으면 했다. 그 방송은 생방송이었다. 생방송은 아직 결과를 모른다는 것이고 앞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이 매력이다. 3:1로 맨유가 질 것을 미리 알고 보는 사람은 재미없다. 물론 승부조작하여 경기의 결과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다. 하나님이 하시면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간이 게임에 승패를 결정하면 범죄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앞을 모르기에 계속 교만할 수도 없고 절망할 필요도 없다.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고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꼬박 꼬박 알려 달라고. 그러나 알려줘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하고 근시안적인 우리에게 알만큼만 알려주신다.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을 아신다. 섭리는 그 특성상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알려 주어도 알지 못하기에 때가 되면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신학교때 히브리어 교수님이 있었다. 이전에 수학경시대회에서 입상도 하시고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교수로도 계셨고 신학을 공부하여 교수님이 되신 김선기교수님이다. 얼마나 열정이 많으신지 그는 3시간 수업에서 2시간은 부흥회이고 한 시간이 수업이다. 학생들이 질문하면 가끔하셨던 말씀이 “저절로 알게 되요”였다. 나중에 궁금해서 물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냐고? 그랬더니 답변할 것이 없어서 그랬다고 하신다. 그러나 그 대답은 명답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을 더 이상 물을 이유도 없었다. 아마 수학을 하시면서 터특하셨던 방법일지 모른다. 중고등학교 때에 수학을 공부할 때도 선생님들은 우리의 수준 만큼만 알려준다. 더 알려줘도 용량이 딸려서 이해하지 못한다. 수용이 안 되는데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는가!
III. 하지만 모르던 것을 어느 순간 무릎을 치면서 그렇구나 할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조각 조각은 이해하지 못했는데 연결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 하나님의 기막히고 놀라운 섭리가 여기에 있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섭리는 연관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 것이다.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나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것들이 서로 만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조각들이 퍼즐 맞추기처럼 맞아지고 수많은 점들이 줄긋기가 될 때 아하라는 소리가 나오게 된다.
독일어할 때도 수많은 단어들이 들어온다.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아는 단어들이 나오면 그것으로 온갖 상상을 다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뭔가 연결이 되면서 시원해 진다. 그때 우리는 “악소”라고 한다. 그거 크게 하는 사람은 그때까지 잘 이해 못한 사람들이다. 어쩌다가 머리가 시원하게 이해되니 그 기쁨을 그렇게 심하게 표현하는 것 아닌가 싶다.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만은 사건들과 일들이 벌어진다. 수산궁처럼 어지럽다. 우리는 머릿속에 브레인스토밍을 한다. 무슨 의미인가? 왜 그럴까? 고민스럽다. 그러다가 연결이 되는 때에 악소라고 하면서 무릎을 치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마침내 알아차리고 그 놀라운 섭리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요셉을 보라. 그는 왜 자신이 형들의 손에 의해 팔려 애굽에 가서 종으로서 시련의 13년을 지내야 했는지 그 시절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그 고생을 해야 했는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떡맡은 관원과 술맡은 관원에게 기막힌 꿈해몽을 해 줬는데 왜 자신이 잊혀져야만 했는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가 되니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꿈해몽의 능력이 필요하게 되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자 서서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다가 흉년이 일어나 근동의 사람들이 양식을 얻으로 오는 그때 자신을 팔았던 형들이 자기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힐 때도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45:8)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생의 조각들이 어느 순간 연관이 되어 통할 때 우리는 전율하게 되며 하나님의 섭리와 음성을 듣게 된다.
지난 4월에 아버님이 이곳을 방문했다. 오시기 전에 늘 전화로 방문일정과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전화를 하시면서 매형에게 100만원을 울거 내셨다나? 매형이 아버님 독일 방문하시는데 아무런 찬조가 없자 이렇게 전화를 하셨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들 목사가 목회하는 라이프찌히에 간다고 하니까 선교헌금을 줘서 2000만원이나 되는데 그대는 어찌 내게 잘 갔다 오라는 인사도 없냐 모든 게 충분하지만, 사위로서 오늘 100만원 송금해라.” “아니 아버님 다음에...” “다음에 보자는 녀석 아무것도 없더라.” 그래서 결국 그가 송금을 했고 아버님은 그게 통쾌하셨나 보다. 하지만 저는 전화를 끊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두 주가 지나고 오성삼목사님이 오셨는데, 몇일 뒤 한우리교회에서 2000만원을 헌금했다고 한다. 그때 바로 연결이 되었다. 서로 말도 맞추지 않고 계획도 하지 않았는데 딱 들어맞는 그 액수...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를 경험했다. 전혀 연관이 없던 일을 인위적으로 짜맞추려고 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그렇게 채워주신 것은 2000만원보다도 더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속에서 드는 생각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참 아버님도 좀 더 크게 말씀하셔서 그냥 1억이라고 하시지....” 그런데 그 2000만원은 우리가 생각한 남은잔금을 갚는데 정확히 씌여졌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나님이 채워주실지 기대가 되지 불안한 마음이 아니다. 궁금하다.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얼마를...
왜 아하수에로왕의 아내 와스디가 폐위가 되었을까? 에스더를 위한 자리였다. 왜 에스더가 그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왜 왕후가 되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요원을 미리 왕궁에 심어 놓으신 것이다. 이후에 왕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를 준비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왜 모르드개가 내시들의 반란을 눈치채고 왕을 보호했고 보상도 받지 못했을까? 하만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기 위함이다.
IV. 섭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재수가 있다 없다든지 운명의 장난이라는 식의 말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그분의 계획이라는 말을 쓴다. 쉭살 즉, 운명이라는 말을 쓸 때는 삶을 그렇게 만드는 원인자를 모를 때 쓰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쓰는 용어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누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이끄는지 알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하나님의 때라든지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쓴다. 우리의 인생은 운명에 맡겨져 엔진 없이 그냥 떠돌다가 사라지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시고 오늘도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기기만 하면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계획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란 없다. 가끔 우리는 갑작스러운 일을 만날 때 당황한다. 그러한 일이 우리의 계획 속에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당혹해 하거나 고민에 빠지지 않는다. 그일은 그분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철저한 계획 속에 계신다. 우리의 계획이 변경되도 하나님의 계획이 변경되는 일은 없다. 혹 변경되면 그것조차 계획이시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변수가 있어 불확실한 미래가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를 당황시킬 어떠한 변수가 생겨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놀랠 일이 없다. 절대 심장병 걸리실 일이 없다. 하나님은 갑작스런 변수로 인해 당황해하시거나 고민하실 일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배 담당자 안내가 되어 있다. 그것을 짜다가 발견했는데 6월 12일 회중기도에 권현수형제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6월 6일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몇 일 전에 귀국 전 심방을 받았는데 한국가는 것이 6월 29일로 연기되었다나? 6월 6일 예정대로 가게 되었다면 권목사나 조태진 집사는 부리나케 또 변경에 들어가야 했었는데... 작은 일들 같지만 삶속에서 우리의 계획은 허접하고 허술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철저함을 깨닫게 된다.
섭리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한다. 선은 하나님의 의도이다. 그 의도를 이룬다고 할 때 “모든 것”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다. “모든 것”은 주로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안 좋은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이란 슬픔, 고통, 무익해 보이는 것,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 그림 속에서는 아주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삶의 슬픔 조각하나 고통조각 하나만을 가지고 인생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전체적인 하나님의 의도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도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것이고 주권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수치고 약함이고 지는 것이고 죽음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 아니다. 주님은 그래 주신 것이다. 져 주신 것이다. 죽어주신 것이다. 약해서가 아니라, 강해서였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죽는 날짜와 방법과 장소를 다 당신이 결정하셨다.
V. 섭리란 결국에는 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면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다. 아이가 생선을 달라하면 어찌 뱀을 주며 떡을 달라하면 어찌 돌을 줄 수 있겠는가! 우리를 계획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고자 한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방황케 하시더니 그렇게 40년을 이끄신 것은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시다. 지는 것 같아도 이기시는 분이다. 약한 것 같아도 강하신 분이다. 죽는 것 같아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왕을 내시들의 반란에서 보호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보상을 받지 못하였고 그 사건이 기록만 되어 있었다. 왕이 어느 날 잠이 오지 않아 궁중일기를 보는데 그 사건을 다시 읽게 된 것이다. 아침에 왕은 일찍 출근한 하만에게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에6:6)라고 묻자 하만은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관을 씌우며 왕의 말을 태워서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성 중 거리로 돌아다니면서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에6:8-9)고 하도록 한다. 하만은 자신이 왕의 모습처럼 하려고 했었지만 역으로 자기가 가장 미워하는 모르드개가 존귀한 자가 되었다. 하만은 아달월 13일에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기 위해 세운 장대에 오히려 매달려 죽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만이 부르를 던져 유대인들을 멸하려고 정한 날을 오히려 유대인에게는 생명의 날로 그 대적자에게는 멸망의 날로 부르에 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전을 하더라도 짜릿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가? 그렇다면 그분의 역전 드라마를 감상하라. 오직 인내하면서 우리 앞에 펼쳐질 삶을 기대함으로 바라보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인내요 소망의 인내이다.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랴하는 믿음이 있기에 내가 지금 이해되지 않아도 지금은 조금 괴로워도 참고 이겨내는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하나님의 선물을 얻게 된다.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노래할 것이다. 우리는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종자의 모습이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라. 매일 6 바퀴, 마지막 날은 7 바퀴를 돌았다. 총 13바퀴를 돌았다. 그러나 조금씩 차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황당하게 보였다. 중간에 회의를 가진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도는 것이 무슨 전쟁인가? 돌기를 다 마치고 백성이 나팔을 불며 큰 소리를 지르니 그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나아만장군이 그의 문둥병을 치료받기 위해 엘리사에게 갔었다. 그러나 그의 치료법은 요단강 속에 7번 들어갔다 나오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화가 났다. 자신의 아람왕국에도 그러한 평범한 강은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가 인내하고 요단강에 몸을 넣었을 때 그의 병이 고쳐졌다. 문둥병에서 악종으로 악종에서 옴으로 옴에서 습진으로 습진에서 두드러기로 두드러기에서 여드름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회의와 좌절과 실망의 모든 순간을 인내로 마치자 변화가 일어났다.
중간에 그만두지 말라. 주님은 우리가 간구할 때 보물 창고에서 뭘 줄까 찾고 계시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안 나오시나 해서 돌아가 버린다. 주님은 손에 가득 쥐고 나와 주시려고 하는데 없다. 오직 인내하라. 하나님의 섭리는 끝내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이다. 에스더의 스토리는 결국 해피엔딩이며 어지럽던 수산궁이 기쁨과 즐거움의 수산궁으로 변한다.
VI. 에스더는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때 유다인의 대적 하만으로부터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록이다. 하만은 제비 즉 부르를 던져 아달월 13일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멸망당한다. 이것이 부르에 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날은 유대인들에게는 죽음이 생명이 되었다. 이후 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감사해서 절기를 제정한다. 부림절이다.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14,15일을 지키라”(에9:21). 부르는 단수이고 부림은 복수이다. 두 날을 부림절로 지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달월 14일 저녁에 별빛이 나올 때 회당에 모여 에스더를 낭독하게 된다. 그리고 하만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의 이름은 말살될 지어다 악인의 이름은 소멸될지어다”라고 청중들은 말을 한다. 에스더와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가? 우리를 계획하시고 좌절을 소망으로, 약함을 강함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머무는 지체들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