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일요일
일요일이면 아내는 교회로 가고 난
늦잠을 잔다
잠을 깨도 그냥 누워서 생각을 한다
하늘나라에서 천사 옷 걸친 아내는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까
지금쯤 믿음 없는 남편 위해
성경책 위에 얼굴을 묻고 있을 시간,
싸늘하게 식은 찬밥 앞에서
난 또 한 덩이 찬밥이 된다
아름다운 일요일, 그래 난 참 행복해-
살기 위하여
혼자 술을 마신다 또 하루를 살고
하루분의 먹이만큼
작아진 몸으로
기름방울처럼 물 위를 떠돌다가
가련한 짐승들 어미 품에 잠든 곁으로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신다 살기 위하여
조금씩 작아지며 나는
죽어간다
얼마나 더 작아져서 죽어질 것인가
기우는 밤, 작은 별들 하늘에 떠 있다
아버지는 힘이 세다
아버지는 힘이 세다
세상 누구보다도 힘이 세다
손수레에 연탄재를 가득 싣고
가파른 언덕길도 쉬지 않고 오른다
꼭두새벽 어둠을 딛고 일어나
국방색 작업복에 노란 조끼를 입고
통장 아저씨를 만나도
반장 아줌마를 만나도
허리 굽혀 먼저 인사를 하고
이 세상 구석구석
못쓰게 된 물건들을 주워 모아
세상 밖으로 끌어다 버린다
나를 키워
힘센 사람 만들고 싶은 아버지,
아버지가 끌고 가는 높다란 산 위에
아침마다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목
산다는 것은
목을 내놓는 일이다
목을 씻고
하늘을 우러르는 일이다
저녁에 돌아오며
목을 만져보는 일이다
밥과 법
밥이 있다
법이 있다
밥이 있고 법이 있는가
법이 있고 밥이 있는가
밥 속에 법이 있는가
법 속에 밥이 있는가
밥이 법을 먹으면 콩밥이 된다
법이 밥을 먹으면 합법이 된다
밥이 법이다
법이 밥이다
닭집
닭장 속에 닭들이 한 마리씩 죽어갔다
부릅 눈 뜨고 날개 퍼덕이며
할딱대던 닭,
닭집 아줌마는 하느님이시다
벼슬이 크고 빛나는 닭부터 하나씩
목숨 깊숙이 칼날을 밀어 넣고
손 씻고 돌아서서 한 줌 모이를 던져주면
목숨 붙은 닭들은
한 알의 모이를 더 먹기 위해
벼슬을 세우고 쪼고 할퀴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닭장은 점점 비워지고
마침내 남아 있는 한 마리의 닭,
빈 닭장을
왔다- 갔다- 하다
눈을 내려 감고 모이 접시 앞에 서 있다
쥐잡기
쥐를 잡았다
연탄집게 끝으로 내리쳤다
어둠 속에 빛나던 두 눈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콘크리트 바닥에 누웠다
흐린 불빛 아래 쓸쓸한 너의 주검
마지막 허공을 휘젓던 꼬리가 가난의 끈처럼 길어 보였다
상상이나 했으랴, 마지막 이런 모습을
너의 집에도 먹을 거라면 환장하는 새끼들과
눈콩알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배꼽이 예쁜 계집이 있겠지
나는 아직 따듯한 너의 주검을 하얀 종이에 싸
눈 속 깊이깊이 묻어 주었다
분신焚身
쥐 한 마리
연탄 화덕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다
추운 겨울날
불의 옷을 입고
캄캄한 어둠을 응시하던
눈
실족이었을까?
나는 생각하였다
한 개피 성냥을 만지작거리며
타고
타고
한 줌 재로 남은 죽음
곁에서
산 낙지를 씹으며
리펑, 덩샤오핑
천안문 발포
어항 속에 낙지가 헤엄을 친다
1989년
6월 6일
초고추장 종지 속에서
꼬물대는 낙지발
광주, 사인 규명
10만 운집
난도 당한 낙지발이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법질서 파괴 시
단호대처
깻잎에 쑥갓을 놓고
오이, 고추, 마늘을 싸
꼭꼭 씹어 삼켰다
끌려가는 소
끌려만 가고 있네, 빗소리 한사코
수군대는 논둑길
먼 하늘에 두 눈알 박고
굳은 입술 다문 채 끌려만 가네
찬비 맞는 봄풀들 검은 머리 흔들며 우네
동구 밖에 장승
비 뿌리는 하늘만 쳐다보네
주막거리 지나 우두봉(牛頭峰)
바라보며
피눈물 흩뿌려 거친 바람 잠재우고
돌아보고 돌아봐도
하얀 꽃잎만 흩날리는데
끌려만 가고 있네,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길
독새풀 파릇이 돋아나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으로
곧은 뿔 잘라지겄네, 움머-
넓은 발 피집 잡히겄네, 움머-
두 눈 크게 뜨고 쓰러지겄네, 움머 움머-
길선생
역사를 가르치는 길 선생은 불온하다
침을 튀기며 하루 종일
학생들 앞에서 핏대를 올리고
불온한 미소를 짓고
퇴근 후엔 고바우 만나 외상술 마시고
박봉인 주제에
봉준이가 긋고 간 술값 갚아주고
건하게 취하면 영감한테 시비 붙고
멱살 잡고 수염 뽑고 홧김에
한강에 오줌을 눈다 부르르 떨며
보아라, 사회면 톱기사에 비친 불온한 그의 얼굴
학생들 홀짝이고
잘난 학부모들 전화질하고
유식한 동료들 멸시를 한다
안경 고쳐 고쳐 쓰고
교정을 떠나던 뒷모습은 더욱 불온하다
4월은
흐리다가
갠
개나리 진달래 자지러지는
경인국도
동강난 지렁이 한 마리 꿈틀거리며 기어간다
햇볕에 피를 말리며
아, 목마르다
4월은
어떤 교육장에서
단축수업을 하고
오늘은 자율학습이 없는 날
얄리얄리 얄라리-
아이들은 꽃을 피우며
교문 밖으로 하얗게 흩어지는데
착하게만 생긴 얼굴들
좁은 어깨 옴츠리며
목숨 같은 참가증 써 내고
숨 막히는 교육장
앞뒤가 안 맞는 절름발이 강연을 듣노라면
반은 졸고
반은 신문을 들척이고
연사는 자주 물을 마시며
이마에 땀을 씻어냈다
우중일기
비를 맞고 아침부터 흠뻑
비를 맞고
누구랑 만나 술을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길 나누고
조소를 해보고 강물에 돌을 던지고
시외버스를 타고
낮잠을 자다
강남터미널을 되돌아와도
비,
서울이 빗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친구
졸업을 하고, 취직 시험을 봐도
면접에서 떨어지고
하숙을 구해도 남도라서 힘들다며
본적을 옮기든지 죽창을 깍든지
양자택일만 남았다며
서울 근교 어디에서 선생질을 하다가
밀리고 밀려나 내려간 친구,
십 년 만에 다시 만나
버림받은 땅 고향이 더 싫어졌다고
삼학소주를 노래하며
진로소주를 마시던 친구,
한사코 눈물 글겅이며
죽어야 한당게 바닷물에 폭
빠져 죽어야 한당게
근디 사람이 쉬 죽어져야 죽지
이렇게 시퍼렇게 두 눈 뜨고 살아 있당게
저 별들 좀 보랑게
침묵하며 하나같이
같은 방향으로, 같은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저 별들을
산 15번지
눈 맞고 서울 와 비 맞고 10여 년 살았다
말단 관리 4년 하며
대학 나와 선생 되고
연애하고 밥 먹고 새끼 둘 나 기르면서
부엌으로 나갔다 부엌으로 들어오는
제비집같이 옹색한 방 한 칸 얻었다
비행기 소리 고막을 찢는 변두리의 변두리
무슨 무슨 학교가 들어서고
성냥갑처럼 예쁜 아파트가 채곡채곡 들어차면서
전셋값이 슬금슬금 기어오르는데
아, 대한민국!
올림픽만 끝내면 잘살 수 있다는데
수소문을 해봐도 이사할 엄두를 못 내겠다
3년짜리 재형저축도 2년이나 남았는데
어디로든 떠나긴 떠나야겠는데
아이들 데리고 새로 들어선 아파트 놀이터에 가
노는 모습 바라보고 있을 때도 난 자꾸
딴생각이 든다
요즘엔 제복만 봐도 가슴팍이 내려앉는다
밤마다 불온의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천 길 땅 밑을 기어다닌다
눈 맞고 서울 와 비 맞고 10여 년 살아가는 사이
난 점점 불온해지고
산 15번지엔
새로 생긴 아파트 수만큼 번지가 늘어났다
1987년 6월
출근길에 재채기를 하다가 차창을 보면
간밤 현장이 괴물의 내장처럼 널려 있었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교전하던 거리
가슴에 극약을 품고
썸머타임의 붉은 해는 한 시간씩 일찍 떠올라
파헤쳐진 공화국의 오장육부를 비췄다
졸린 잠 털며 일상의 노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배달의 아들딸들
걷어 올린 팔뚝, 매 맞은 흉터가
계급장처럼 빛났다
사랑으로도 죽음으로도 미움으로도 못 지킨
분단의 하늘 아래
얼룩진 가로수는 북쪽으로 난 가지를 흔들다가 전단처럼
푸른 잎을 날렸다
어둠을 타고 비상하던 돌멩이들은 낮 동안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오늘 밤 날아올 최루탄의 각도와 바람의
방향에 대하여 열띤 논쟁을 벌였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
저들은 애써 태연한 척 미소와 선심으로 위장하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목청 높여 입술에 침을 바르고
등 돌리고 누워 있는 황소한테도
살래살래 머리 흔드는 강아지풀한테도
알량한 공화국의 법질서 운운하며
무장한 병졸들 앞세워 닥치는 대로 패고 잡아 가두며
푸른 제복의 위용을 과시했다
철통같은 감시와 압제 속에 손수건 꺼내 눈물 찍고
남녀노소, 손에 손 맞잡고 스크럼 짜며
서울에서 광주에서 부산에서 마산에서 대전에서 진주에서
호헌 철폐, 호헌 철폐,
10만이 30만이 되고 100만이 되어 저들의 음모를 물리치던
1987년 6월, 6월의 아들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