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을 위한 변명은 구차해져서 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잘못이 지적되면 일일이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조용히 침잠하여 일일삼성(一日三省)하는 자세로 살아왔다. 하지만 제자들 앞에서 스승의 과오가 억울하게 부풀려지면 치욕스러운 것을 참지 못하는 것 또한 어쩔 수없는 인지상정이다.
최근 반값 등록금이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확대되면서 언론에서도 대학과 대학교수들을 반사회적 집단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높은 대학 등록금 인상이 대학교수들의 연봉인상에만 쓰이고 있다는 보도는 교수들을 강단에 서기가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장차 학문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학생이 앞으로 대학교수가 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으면 대뜸 학문을 포기하라고 호통치는 선생의 한 사람으로서 낯이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문은 지적 호기심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지, 사회경제적 지위를 먼저 생각하면 시작하지 아니함만 못하다는 것이 평소 제자들에 대해 건네주는 충고이다.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의 기쁨이 어떤 미래의 어려움보다 크다고 여길 때 비로소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곳이 학문의 세계인 것이다.
잘못된 통계를 확인도 않고 매도에 인용해서야 |
높은 학문적 자존심 때문에 교수들은 작은 잘못에도 괴로워하며 종종 자살의 길을 택한다. 이런 교수들에게 최근 언론의 공격은 너무 지나치다. 무엇보다도 지난 몇 년간 대부분 대학에서 대학등록금과 교수 봉급이 동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통계를 확인도 하지 않고 인용하여 대학교수 봉급이 수십% 인상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언론의 지성을 의심하게 한다. 교수연봉 자체도 엄청나게 부풀려진 통계를 사용하여 교수들을 당황하게 한다.
외국에서 연구윤리 위반기준은 크게 다른 사람의 논문을 표절하는 것과 황우석 교수의 경우와 같이 객관적 자료를 조작하는 것을 든다. 이보다 심한 위반은 자료를 왜곡하여 결론을 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포퓰리즘은 세 번째 유형의 반지성적 윤리위반이다. 그것이 검찰이 되었건, 언론이 되었건, 감사기관이 되었건, 객관적 자료와 적법한 절차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면 구체적 객관성이나 합리적 절차는 쉽게 무시되고 의도된 결론만이 부각되는 경우가 흔하다. |
지식사회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
지난 십여 년간 우리사회에서 가장 많이 변한 조직이 있다면 아마 대학사회일 것이다. 영어강의가 40% 가까운 대학이 많이 있고, 해외학술지 논문은 이십 년 사이에 스무 배가 늘었다. 대학에 몰아친 신자유주의 경쟁논리로 많은 대학의 교수 연구업적은 미국의 유수 대학의 기준보다 훨씬 높다. 정년심사에서 탈락되는 비율이 낮다고 비난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탈락은 사망선고와 같기에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승진 기준을 맞춘다. 미국 유학에서 보더라도 미국의 대학원생들은 박사과정에서 쉽게 탈락하지만 한국 유학생들은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거의 모두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다. 요즘은 주말에도 연구실에 나오는 젊은 교수들이 많고, 연구 스트레스로 얻은 병 때문에 일찍 세상을 뜨는 젊은 교수들의 장례식을 종종 찾게 된다.
십여 년 전에 우리 대학들이 100대 대학을 목표로 했는데 두세 개 대학은 이미 100위 안에 들었고, 서너 개의 대학도 100위권에 들어가 있다. 정부가 사립대학 재정에 1%도 기여하지 못하고, 대기업재단을 제외하고는 법정기부금도 채우지 못하는 사립대학 재단이 대부분인 형편에서 외국대학과 경쟁하여 이런 성과를 얻은 것은 전적으로 교수들의 몫이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도 시간강사 자리를 전전하다가 평균 40세 전후해서 교수로 임용되는 교수들에게 65세 정년이 요즘 다른 직업에 비해 너무 길다는 비난은 적절하지 못하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십년 이상 투자해야 하는 전문가에 대한 사회의 대접이 이 정도면 지식사회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성숙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사회 각 부분이 포퓰리즘은 버리고 이성적 토론의 장을 가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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