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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인 文明 최마루]
* 언제나 영혼의 시를 갈구하는 잉여시인 최마루입니다
* 특별 관심분야 - (문학,철학,역사,교육,예술,환경,국방,의학)
* 국적 : 대한민국
* 이메일 : choe33281004@nate.com
* 현역 필 : 강원도 백두산부대 포병 [군승단- 제 9대 대암사 주지] 만기 전역
* 최마루의 기타 명 : 아호는 = (祐榮) 수계명 = 명국 닉네임 = (크리스탈 최)
* 취미 : 고도의 정신분열을 포함하는 정신적 해이를 체포하는 연구
* 성격 : 치밀함과 완벽주의, 이해와 관용이 통하며 정의파 및 개혁 혁신주의
* 즐기는 음식 : 각종 탕류 면류 찌개류 채소무침 등, 하루 한 갑 정도 끽연,
소주는 한 병 반 정도
* 관심 및 좋아하는 운동 : 유도 격투기 승마 사격 무에타이 권투 배드민턴 등
* 94년 5월 – 전국 대학교 공모전 텍스타일디자인 경연대회 손수건부문 입선
* 94년 5월 – 예비군 부대장 표창 < 사격부문 1위 >
* 1984 ~ 2016년 현재 9월 초까지 수필 및 詩 80권 분량 이상 창작 집필 완료
전) 건설사 - 광고, 홍보, 기획 <관리업무 및 주 업무는 광고 카피라이터>
전) 사)상생정치연구원 부위원장 및 사무총장
전) 대한민국 시문학연구협회 사무총장 겸 대구. 경북 지회장
전) 대구카누연맹이사
전) 현대시문학 편집간사
* 국가상훈편찬위원회 인물대전등록 제의 (본인 거부)
* 제 17 . 18대 대통령취임식 특별초청
* 대통령감사장 수상
* 현재 전업 작가 활동
** 시인 최마루의 문예 약력 **
* 등대지기문학동인회 회장 < 2018년 기준 필력 36년째 >
* 현대시문학등단 < 신인문학상 수상 >
* 현대시문학인협회회원 (문단 계간지 분기별 발표)
* 현대시문학 편집장
* 현대시문학회 대구지회 부회장
* 사)녹색문단 / 창조문학신문사등단 <신인문학상 수상>
* 사)대한민국 시문학연구협회 / 월간 시와 시인 계간 문학창조 등단
* 종로시인협회회원
* 월간 시와 시인 계간 문학창조협회회원
* 오솔시협회회원
* 2013년 8월3일 저녁 / 29년간 창작시 3000여 수 집필
* 2014년 12월6일 저녁 / 10년간의 퇴고 작 1760여수 집필
* 2016년 9월9일 저녁 / 습작기 창작시 1500여수 완작
* 2018년 7월1일 자정 / 창작 700여수 완작
* 2014년 제 1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 문학부문 대상 수상
* 사) 대한민국 시연구협회 제2회 조지훈 문학상 전체 대상 수상
* 사) 녹색문단주최 대한민국 100인 녹색지도자상 대상 수상
* 사) 녹색문단주최 2009년 대한민국 베스트 작가상 수상
* 현대시문학주최 평론가가 뽑은"2009년 한국을 대표하는100인 작가"선정
* 현대시문학주최 평론가가 뽑은"2011년 한국을 대표하는 50인 작가"선정
* 현대시문학주최 평론가가 뽑은"2013년 한국을 대표하는 50인 작가"선정
* 가칭) 사) 대한민국 노벨문학상 추진위원회 위원장
* 문학일보 문학상 보리피리물레상 수상
* 2013년 4월5일부터 미전지역으로 한국문학 알리기에 참여
* 미네바주 발행하는 코리아포스트지에 2013년 4월5일자로 시제 귀촌 등 발표
* LA총영사관에 비치되는 < 월간 한인회보 4월호 >에 시제 귀촌 등 발표
* 대구 앞산공원 등산로 시화대에 사랑의 쉼터, 인생이 담긴 밥 발표
* 월간한국문단 전주문학신문 신인상공모 최종 심사위원장
* 공존나눔, 세계문화축전 전국 백일장 심사위원 초대
* 창조문학신문사 녹색문법대회 - (녹색문법문학상 수상)
현) 한국문단회원 현) 녹색문단회원
현) 녹색문법심사위원 현) 월간[한국문단]특선문인
현) 녹색성장포럼회원 현) 녹색연합회원
현) 녹색산업포럼회원 현) 창조문인협회회원
현) 창조문학신문작가협회회원 현) 창조문학신문 문학기자
현) 한국문단 낭만시 공모전 최종 심사위원
전) 사) 대한민국 시문학연구협회 상임이사 겸 사무총장
< 전국 시도군 각 지회 총괄지휘책임자 >
전) 사) 대한민국 시문학연구협회 각종 문학행사
< 전국 운영위원회 총괄수석위원장 >
전) 사) 대한민국 시문학연구협회 부설 시와 시인 문예대학 교수
전) 원탑SS 시스템안전비계 관리이사
* 한국 환경 N.G.O협의회 37개 단체 후원 27개 단체 주최하는
전국 청소년 글짓기 및 그림 대회장 심사위원
전) 한국 환경 N.G.O협의회 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
* 2012년 문화예술교육 전문 인력 양성 프로그램 과정 3기 수료
* 낭만시공모전 심사위원
* 2017년 3월1일 대구 수성구 소재 수성못 상화동산 초중고교 백일장 심사위원
현) 가칭-대한민국 노벨문학상을 위한 작가세상 이사장
현) 월간 한국문단 이사
현) 문학일보 자문위원
현) 녹색문단 자문위원
현) 한국문단과 함께하는 낭만시 공모전 자문위원
현) 한국전통문화발전연구회 연구위원
* 시사랑문학신문 대표
{신문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아 00787 / 대표 최마루 시인}
2010년 제1회 시사랑 문학신문 신춘문예 대표 - 신춘문예 주최 주관
시사랑문학신문 신인문학상 매년 봄,가을 원고모집
** 최마루의 인터넷 문예 주소**
나를 나에게 행복하게 팔던 날 / 대한민국 시인 文明 최마루의 한적한 무대
* 다음 카페 - (나를 나에게 행복하게 팔던 날) - http://cafe.daum.net/poemopen
* 다음 블로그- (대한민국 시인 文明최마루) - http://blog.daum.net/poemopen
* 네이버 카페 - ttps://cafe.naver.com/poemopen
-시인 최마루의 고매한 추억을 훔쳐간 세월
* 네이버 카페 - http://cafe.naver.com/greatpoetmaru
-찬란한 잉여 시인 최마루의 고혹한 산방
* 네이버 블로그 - https://blog.naver.com/choe33281004
-인생사 면경에 어우러진 시인 최마루
*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poetmaruchoi
https://www.facebook.com/maru.choi.7?ref=tn_tn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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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최마루의 신념
제 삶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 오직 한국문학 발전에 일평생을 바칠 것입니다
더불어
사) 대한민국 노벨문학상 추진 협의회를 설립하고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인들이
대거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조국 대한민국에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함이 시인 최마루 일생에 최상의 사명입니다
아울러
우리에겐 흐린 날도 가끔은 있지만 하늘은 분명 맑은 날이 더 많습니다
시인 文明 최마루와 인연이 깊으신 모든 분들께
늘 다복이 이채로우시길 진심으로 고대 합니다
** 인터넷 전체 사이트 "최마루 시인" "시인 최마루 " 클릭하시면
다채로운 삶의 향기처럼 우러나는 풍부한 감성들과 함께
시인 최마루의 문학세상에서 언제나 아늑하게 만나실 수가 있습니다 **
* 文明 최마루 시인의 발자취와 시어 향기 *
* 고즈넉한 이 세상에 바람처럼 살아가는 시인 최마루의 오색향기 넋두리
1. 숙명의 전생 연보
고려중후반 파계승
조선초 선비로 과거급제
미서부지역 목화밭 대농장주
조선말 군인
68년 잡놈으로 대한민국 대구에서 경주최씨 다천공파 33世로 출생
본적은 경북 달성군 구지면 가천리
국적은 한국이며 최마루 시인의 영혼은 지구의 전 지역과 대우주 밖에 이동 중으로
늘 무지개빛 진혼의 엄청난 고뇌 안에서 사계의 노래를 항상 사모하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하얀 영혼의 상태는 극히 지고지순한 동양화였으며
끝없는 대우주와 담백한 하늘 가까이로 가끔은 상상의 여행을 좋이 하였으니
곧 땅위에 풀들과 희귀한 벌레와도 극진하게 어울리는 모임을 좋아하기에 이르렀다
한때 싱그러운 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어의 고운 낱말들을 채집하기도 했다
고교시절 당시 대구의 앞산 승마장 밑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이 미개발지역이어서
홀로 산책을 다년간 즐겨하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시인의 심상에 무궁무진한 꽃을 피우기에는 그야말로 매우 적합한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참으로 문학의 대정원을 이루어 내는 최상의 황금같은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엔 미묘한 일이겠지만 무슨 일이든 아예 미치지 않고서는
소중한 꿈을 살아생전 이룰 수가 없음을 최마루 시인은 삶의 애잔한 경험들에서
일찌기 깊이 깨닫고 있었다
감수성이 유별난 시인으로 이승에서 굳이 하고픈 말을 찬란하게 그려본다면
시인 최마루를 영혼의 밖에서 이해하려말고 인간의 가장 고귀한 감성 안에서
함께 고민할 줄 알아야만 시인과 대자연에게 비로소 친숙한 벗의 경지에 이르게 됨을
아름답게 고지해본다
아울러 아래 그의 문학적인 소양을 여러 각도로 추론해보면
나는 시어를 위하여 심각한 고민 끝에 30대 후반부터 단란한 가정을 포기했다
이 무렵 수십 년간의 엄청난 열정과 수많은 번민들에 휩싸인 고열로
무려 어금니 다섯 개를 발취하게 되었다
아울러 나의 일생에 생업과 동시에 창작을 겸하기에는 죽도 밥도 되지 않았기에
단호한 결심에 의거하여 나는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걸 내려놓아버렸다
가장 죄스러운 것은 가족들의 생계가 문제였으나 크나큰 사명을 위해서는
내 주위의 사랑들을 잔인하게 멀리하는 것밖엔 별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주어진 한계를 벗어나서 위대한 조국 앞에 바위처럼 맹세한 대각오에
더욱 한발 다가서고 싶었기에 아예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수많은 극한의 방황을 마루 일생에 운명으로 만나서
다년간을 곡주와 함께 거리를 해매이며 지성이 메마른 부랑자처럼 살았지만
수많은 별들과 달까지 한때는 애증의 계곡에서 극한의 깊은 사랑에 빠지기도 했었다
내 심각한 방황의 끝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나의 정체성에 대한 촉각이 심히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불혹의 중반을 넘어 머리카락에 하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였으니
실로 인생무상을 무각의 촉감에서 적나라히 실감하게 되었다
항상 시간의 마디에서 울렁이는 삶의 끝에서 깊이 각오하건대
끝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았던 시어를 내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킬 것이며
나는 그 모질고도 모질은
사명의 경계에서 한국 언어의 마지막 검투사가 되기로 깊이 다짐하였다
2. 최마루 시인의 영혼이 서린 창작의 노래
시어에 대한 나의 소중한 집착은 곧 이승을 떠날 때까지의 더없을 몸부림이며
마지막 희망의 포효하는 날개인 것이다
나에게 있어 시인의 삶은 우연히가 아니라 운명이었으며 머리를 감다가도
식사를 하다가도 언제 어디에서라도 내손엔 반드시 필기도구가 있어야했다
이렇듯 상상의 연못에 깊이 몰입하다보니 무려 십여 년이 지나던 어느 시점에서
고운 심성의 안으로 단어들의 정원을 이루었으니 바람이 불든 눈이 나리든 무엇이 아른거라든
온통 세상은 이미 내 안에서 시어의 의미들로 소소히만 각인되어버렸다
나에게 오로지 창작은 신이 내린 기쁨이었으며 희망의 절대적 소산이었다
내 불온했던 구리 빛 삶에 있어서 시어나무에 어여쁜 열매들을 감히 교감해보면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시인으로서의 생애에 최상의 기쁨이었고 향수였으며 이 땅에 뿌리내린 진정한 행복이었다
더불어 나의 울긋불긋한 삶에 그 어떠한 파동이 혹독하게 밀려와도
나는 조국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언어에 나의 고결한 영혼을 더욱 고혹하게 싣기로
피맺히게 맹세하였다
3. 최마루의 출생과 유년기의 향수
1968년 10월 7일 아침 8시30분경 대구 비산동 예전 오스카극장 뒤편에
아버지 최천* 어머니 박*수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이 세상을 방문했다
1972년경 아버지의 가구사업이 크게 실패하자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유가방향의
가천리 일명 갈래 마을 어귀로 이사를 했다
당시 시인의 어머니는 소담한 미장원을 운영하였으며
본래 간호사 출신이셨던 어머니의 목가적인 성품에 보다 탁월한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유년시절부터 감성이 매우 풍미로웠다
특히 어머니의 진정어린 모성애는 장남인 마루에게만큼은 유난히 남달랐다
나이 5 ~ 6세경 거의 2년 정도 조용하고 낭만스러운 시골에서 전원적인
동심을 키워왔으며 이후 7세 봄 즈음 다시 대구로 이사 후 어린 시절의 향수를
아련히도 가슴속에 저장해두었던 것이다
시골은 절대적인 양면성을 두고 있음을 시인은 아주 어릴 때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세상에 농부만큼 고생의 업보를 지고 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섭취하는 농작물의 대다수는 땀이 아니라 호젓한 낭만 뒤에 숨은
그들의 피와 영혼인 것이다
나의 섬약한 마음 안에 대자연에 대한 관찰자적인 입장의 성장이
곧 거룩한 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이때 벌써 나름대로 작가로서 자연스레 생성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 최마루와 시어의 운명적인 만남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거쳤지만 줄곧 허약체질이었고 건강상태는 육체와
더불어 가정사의 여러 심난한 문제가 발생되어 정신적으로도 매우 좋지 못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즈음 운명적으로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대면하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신비로운 충격에 한동안 심한 혼수상태에 빠지다
이즈음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중 3년 때 휴학을 하기도 했었다
그 시기에 깊은 독서에 심취하였으며 위대한 시인의 길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불혹을 훌쩍 넘어버린 지금에서 깊이 생각해보면
다년간 누적된 심한 내적인 피로와 아버지의 술주사로 빚어진 불운 때문에 급기야
정신적인 충격들이 시인의 몸에 화살처럼 꽂히어 있었던 절망의 시기였다
비교적 부유한 환경도 아니었으나 아버지의 심한 술 중독에 무척이나 괴로운
청소년기를 보내었다
매일 마다 아버지의 술 주사가 보통을 너머 거의 미친 이처럼 취기 전후가
너무나도 남달랐다
특히 새벽 늦도록 쓰러질 때까지 중얼거리다가 목청껏 부르는 꺽꺽한 노래
소리에 아주 경악할 정도였다
매일이 싸움이고 울음이었으니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런 꼴이 너무나
보기 싫어서 하교 후 숙제만 끝나면 바깥을 겉도는 게 시인의 유일한 낙이었다
또 다시 해가 뜨면 아버지의 지독한 술버릇에 미쳐버리고 싶었다
항상 후미진 뒷담 구석은 시인이 만든 특별한 방이 있었고 그 음지에서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분홍빛 어린 마음을 애써 달래었다
더구나 나에게 천적이었던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차량은 10분 이상을 승차하면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고 음식에는 아예 관심이 없어서 참으로 괴로운 시절로
아마 군입대전까지 앙상한 육체를 이끌고는 갈대처럼 살아야했다
당시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죽음조차 전혀 두렵지 않았으니 해괴망측한
내 삶에 대하여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거기다 몸무게보다 무거운 고심을 온통 끌고 다녔으니 항상 고단함에 쩔어 살았다
중학교 입학 시점 합기도 수련 중 대련 시합을 하다가 치명적인 부상으로
다년간 고생을 하였으며 그 후유증으로 심한 좌절감에 부딪혔다
18세 즈음 어느 가을에는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가끔은 뜻하지 않게
예지몽을 꾸기도 하였다
때로는 어떠한 느낌들이 예상대로 맞아가곤 했으며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서
유독 챙겨주신 많은 책들을 접한 것에 자못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으니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이제껏 어머니의 정성들이 숱한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참으로 신이한 건 어머니는 가끔 부업으로 품삯을 마다하고 많은 책들을 받아오셨고
나는 습관적으로 그 책들에 항상 빠져있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일곱 번 이상을 읽어보니 감성에서 이해되는 것도 있었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뒤적여보면 순간적으로 번개처럼 깨닫게 되는 것도 있었다
여기엔 어머니의 책 사랑과 많은 미담 등이 보다 시인의 자질에 부합되는 환경으로
가장 우선 근접적임을 파악할 수 있다
더구나 우아한 성격의 변화가 십팔 세쯤 폭넓게 변하였으며 어머니의 절대적
사랑에 깊은 증오와 미움들을 그나마 달랠 수 있었다
곤혹스런 세월이 흐르고 입대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미달될 뻔한 사태가
발생되었지만 징병관에게 복무의지를 피력하여 다행이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이 시점에 거의 매일 홀로 거리를 나돌고는 앙상한 들개처럼 땅과 하늘 사이에서 두루 만행을
즐겨하기에 이르렀다
하여
세상을 둘러보고 갖은 생각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고 문들어진 마음을
담백하게 정리하는 시기였다
하루라도 머릿속에 보고 듣고 채워 넣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당시에는 음식에 대한 의미조차 나에게 전혀 까닭이 되지 않았다
그저 하찮은 목숨을 연명하는 보잘 것 없는 수단일 뿐 이었다
매일같이 점차 극으로만 달려가던 아버지의 미친 주사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웠고
십대는 그야말로 향기로운 흔적이라곤 아예 없었으며 그렇게 이십대에 이르렀다
그저 허송세월이 너무나 아까왔고 무지한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었으니
매사에 모든 의욕이 절망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살아 있다는 게 너무나 죄스러웠다
집안 사정이 이렇다보니 불운하게도 형제간의 애정도 달갑지 않았다
나 역시 힘들었지만 따뜻하게 내리 사랑을 챙겨주지 못한 1남 2녀의 동생들에게
매우 미안했으며 지금 생각해도 그저 눈물이 날 뿐이다
청소년기의 성격은 내성적이면서도 다소 활발했으며 항상 궁금한 게 많았던
엉성하면서 궁금증이 무척 많았던 문학소년이었다
어릴 때부터 음식은 육식보다 면 종류나 탕 종류를 그나마 좋아했던 것 같다
운동은 율동적인 격투기 등 몸으로 부딪히는 것들을 특히 좋아했는데
아마도 시기적으로 현실에 대한 분노의 직접적인 탈출구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불혹을 넘기자 과격한 운동에는 점차 관심이 없어졌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건강상태는 제대 이후 정상적으로 완벽하게 단단해졌으니
아마도 군대 생활이 체질이라 해도 허언이 아닐 것이다
군에서 아버지의 주사를 3년 동안 지켜보질 않으니 몸과 마음의 병이 말끔하게
나아갔다
나의 야심찬 삶은 제대이후 거리낌이 없었고 여전히 주사가 심한 아버지와의
심리적 관계도 나의 새로운 삶을 위하여 스스로 단호하게 정리해버렸다
이즈음 동생들도 각각 여러모로 흩어지는 시기였다
진정 군복은 내 새로운 인생길에 최상의 의식이 되었다
이후 절도있게 내가 해야 할 일을 감지하였고 스스럼없이 내 길을 찾아 나섰다
오로지 문학을 향하는 거룩한 심성이 불꽃처럼 타오르며 더더욱 세상의 가까이에
본격적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아호는 祐榮 수계명은 明國이며 호는 문명(文明 文名) 별호는 친구들에게
크리스탈 최 또는 알롱달롱 일명(알랭들롱)이라 불렸다
아마도 정갈한 성격과 절제력 그리고 위트적인 면에서 선후배들께 좋은 인상을
착실하게 건네주었던 것 같다
5. 문학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태우다
90년 초에 휴학계를 던져두고 4월 17일 23세의 다소 뒤늦은 나이에
현역으로 입대하였으나 매우 불량한 건강상태로 모든 것이 아주 힘이 들었다
특히 엄청난 군기와 나의 체력은 충돌되어 거의 죽을 지경이었으나 오로지
자존심으로 초탄명중을 과시하는 군기의 상징인 포병부대에서 악착같이 버티어내었다
열정적으로 군 생활을 하던 중에 참으로 우연하게도 전방에서도 가장 넓은 경계선을
책임지는 21사단에서 그 수많은 군인들 중에 사단 군법당과 연대 대대급으로
심지어 철책선까지 전 부대를 순회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모시는 군승으로 차출 되었다
이후 군에서 인연이 된 혜산법사님과 성원법사님의 후덕함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으며
최고의 학력에 엄청나게 풍부한 학식 등 인품에서도 단연히 독보적인 존재들이었다
특히 혜산법사님은 인품이 매우 중후했으며 0.1톤의 거구로 일자 입술이 과히 관우인지라
그 육중한 몸으로도 축구를 하면 바람처럼 날아다녔다
성원법사님은 철학자로서 예리하면서도 지혜와 지성이 풍부하였으며 매우 담백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전역 며칠 전 사단 군법무관과 성원법사께서 찾아오셔서 막국수로 제대를 축하해주던
그 하얀 미소가 또 눈에 선하다
늘 가까이에서 이 귀한 분들과 함께 하였으며 아직까지 안부를 전하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물론 부대 인근의 사찰에서 가끔은 스님들과의 좋은 인연으로 인간세상의 불협화음을
넘나보게 되었고 부처님오신 날을 전후로 승복을 입고 산간지역으로 두루 만행도 해보았다
특히 신라시대 도선대사가 창건한 불사인 유서 깊은 심곡사 요사체에서
주지스님과 찻잔을 마주하며 가끔 덕담을 나눈 추억들이 그저 아련할 뿐이다
이때부터 나의 깊은 심성에는 늘 거룩한 지성에 목이 말라있었다
이즈음 비록 육체는 군부대에 머물어 있어도 바깥 세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울러 일평생 핏빛같은 시어에 온 목숨을 기꺼이 다할 것을 조국의 혼에 맹세하였다
시어는 영원히 늙지 않는 나의 아름답고도 위대한 이름이었다
더구나 군인의 신분이었지만 나이 지긋하신 화전민들이 승복을 입은 내 모습에
감자나 고구마를 공양했으니 그 감사함을 아직까지도 가슴 깊이에 재워두었다
군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새로운 시각의 지침서가 되어준 일생일대의 크나큰 획이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나에겐 군 생활은 천복이었고 몸과 마음이 더욱 굳건하게
변모하였으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전반적인 예술적 부분에 호감이 짙어있었다
당시 머릿속엔 온통 음악과 미술 문학 등 예술의 향기에 늘 향기롭게 취해있었다
제대 후 94년 당시 우연찮게 전국 대학교 공모전 텍스타일디자인 경연대회에서 손수건
부문에서 입선했었는데 당시 섬세한 디자인보다 나름은 추상적으로 해석한
순수한 창작이었기에 그나마 턱걸이 수상을 한 것 같다
졸업 후 다소 내성적인 성격 변화를 위하여 8개월가량 스스로 대구 반월당 흥국생명에
입사하여 사회적 현실에 감각을 익혀두었다
이후 모 섬유회사 디자인실에서 9개월 정도 디자인의 감각과 아울러
직접 상품생산에 대한 현장 경험을 체득하게 되었고 많은 작품들은 백화점으로 입성되었다
여성 디자이너 십여 명 중에 남성은 혼자여서 당연히 인기가 있었지만
당시 교제 중이었던 아내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점에 디자인의 유능한 감각을 위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지만
여러 상황상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어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절친했던 친구가 유학비 전액을 도와줄 것이니 일본으로 유학을
함께 하자고 제의 했으나 왠지 일본은 싫어서 정중히 거부했었다
20대 후반은 이상하게도 주위에서 유학의 손짓이 많았지만 결국은 금전적인
문제와 여러 사유로 부딪히고 말았다
이즈음 틈틈이 고시공부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법률보다는 문학용어에
관심이 더욱 애절했으며 항상 시집들을 아예 끼고 살았다
법학 공부를 하다가도 잠시 읽는다는 게 밤새도록 문학연구와 창작에 몰입하다보니
스스로가 미칠 지경이었다
집중력 하나는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경지였다
그러던 차에 고등학교 동기생이 대구지하철공사에 지원한다기에 막연하게
기관사가 사명감과 더불어 멋있어 보여 23일정도 공부 후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적성검사에서 멋쩍게 실패하였다
나름 관심분야였는데 생각지도 않은 봉변 같아서 여러 심난한 마음에 디자인 회사도
그만 두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니 솔직히 남성디자이너로는 해외파가 아닌 이상 여러 정황상 장래성이 아예 없어보였다
아마도 나름은 프랑스로 유학을 꿈꾸어왔는데 허무하게 실패하자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았다
당시 20대 후반으로 몇 달간 휴식을 취하며 훌륭한 비디오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관람했고
브라운관에 펼쳐진 풍경과 애절한 사랑들을 무척이나 그리워했었다
솔직히 숱한 혼란의 시기였으나 나름은 이 시기가 창작품을 일구어가는 정체성을
보다 견고한 시각적으로 건네 보는 시점이 되었던 것 같다
이후 바로 건설사 광고카피라이터를 시작으로 은행 등 금융회사를 거치면서
많은 실상들을 거의 문학적 감각으로 나의 삶 안에 습득하고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군 시절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군승으로 복무하며
문학에 대한 집념을 세워서 틈나는 대로 창작 과정을 치밀하게 습작하였고
당시 등대지기문학동인 중에 유일한 여성작가였던 정은희 시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 지혜를 만나 7년간의 열애 끝에 98년 5월17일 드디어 결혼하였다
당연히 우리를 닮은 아들과 딸을 아름답게 만나 오순도순 살고 있다
결혼 이후 다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2008년 겨울경 전업 작가로 자리매김
하였으며 지금껏 어여쁜 아내와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있다
술 담배는 29세경 과도한 업무상의 스트레스로 본격적으로 배웠으며 35세
이후 자극적인 삶에 온통 찌들린 나머지 그 양이 두 세배로 늘어났다
지금은 거의 하루 한 갑 이상 술은 일주일에 두어 번에 매번 소주 두병정도이다
특징으로는 술을 처음 접할 때부터 안주를 잘은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작은 10대 중반부터 기나긴 습작기를 거쳐 20대를 바쁘게 지나 30대초부터
오로지 창작열에만 집중하였다
늘 창작은 지독한 고뇌와 엄청난 지구력을 요구했다
밤새 눈알이 빠지도록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내고 있어야했다
예로 수개월에 걸쳐 20수의 시어를 대략 완성하고도 가차 없이 내버리는 창작품은
18 ~ 19수였으니 매일을 매달려도 항상 부족했다
가끔은 수면조차 아예 반납해야했다
하늘에서 귀히 내린 운명처럼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나는 날마다 시어와
함께 치열한 전투를 해야 했다
지금껏 잔인하고도 고독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숙명이기보다 내 삶의 전부이며 나의 혈액처럼 일상이 되고야 말았다
6. 본격적인 한국문학의 두드림
아울러 문학이란 거룩한 성전에 15세부터 발을 딛고는 거의 20세까지
작품들의 환경과 실체를 해부하는데 집중하였고 특히 군에서 왕성하게
한국문학의 기초적인 공부를 나름은 독학으로 체득하였다
군에서 가능했던 것은 군법당에서 불교서적을 탐독하는 일 외에 개인적인
시간을 할애하여 문학에 대한 목마름의 열정은 불태웠지만 항상 끝이 없었다
법당에서 요사체에서 매일을 무서우리만치 수많은 책들을 갈아치웠다
책속에는 정말 무지개같은 세상이 있었고 나의 짧은 생각들을 올바르게
일깨워주었다
좋은 책들은 신선한 영혼을 언제나 필요시에는 급히 불러다주었다
그래서 나에게 최고의 스승은 책들이었고 나의 불타는 영혼의 기도소리는
죽을 만큼 처절 했었다
결국은 유년시절부터 삶에 지나친 고뇌의 경험들과 수많은 저서들을 건네 본 것이
나를 운명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도록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제대 이후 예술적 부분들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때로 공허함도 부여하였으나
나의 인격적인 성숙에 소리 없이 한발 한발 앞서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가끔 본능이 이성을 지배하려함에 원초적인 의협심으로 화두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아마 이 시점부터 취미가 고도의 정신분열을 포함하는 정신적 해이를
체포하는 연구에 몰입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잠시 지난날을 아련하게 생각해보면
습작기를 거쳐 20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다양한 각도로 고심했으며
직장생활 중에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어의 나무에 밤새 매달려 있었다
결혼 후 작품 활동에 있어서 유일한 적수는 아내였으나 2010년부터는 아내도
포기했는지 소리 없이 응원하고 있다
특히 아내의 예리한 지적은 역시 시인의 아내다웠고 그런 아내가 정말 예뻤다
머리카락은 2011년부터 서서히 기르기 시작하였으며 딱히 이유라면
골몰하게 생각할 때 머리카락을 매만지면 생각이 무수히 떠오르는 게 많아서이다
보통 창작의 일과는 거의 매일 저녁 8시경 이후로 새벽 2시 ~ 4시까지이며
글의 구성이나 맥락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밤을 홀딱 새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지나친 스트레스가 엄습하면 한달에 두어 번 정도로 죽을 만큼 독주를 삼켜버렸다
일생의 여한을 풀듯 너무나 미워했던 아버지를 향하여 취기에도 서러웠던 울음을
냉정하게만 삼켜야했다
그러나 휴일은 무조건 창작에 몰두하였으며 가족과의 여행이나 외식은 거의 없이
살아왔으며 문단행사나 모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무조건 참여하였다
또한 작품의 퇴고는 기본이 대여섯 번 이상으로 정성을 다하여 작품에 몰두하였다
어쩌다 시심의 파동이 조용하면 그날은 아예 미칠 지경이 되어버린다
하여 다음날 회사 업무를 걱정하면서도 날밤을 세우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티어 직장 생활중 업무에 차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가끔은 감성을 젖게 하는 음악이야말로 문학에는 거울처럼 비추어진 꿀물이었다
더구나 심각한 천병이 내 거치른 영혼의 옷에 알맞도록 정확히 들어와 버렸으니
이제는 생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음이다
만약 몸이 다른 곳에 있더라도 머리는 항상 시어들과 함께 현장경험들에 저장해두었다
이래저래 6여 년 전부터 깊이 결심한 후 누구와도 상의 없이 아예 전업 작가로
눌러 앉아버렸다
7. 최마루의 내적세계에 깊은 다지기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창작과정에 처음은 낭만이나 전원적이었으나
20대 중반부터 글의 연막들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나만의 작품으로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제대 후 긍정적인 의식의 변화가 급격하게 바뀌게 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30대 이후 실효적인 삶의 실체와 근본을 해부하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일상의 소재를 통찰력으로 꿰뚫어서 최마루 만의 방법으로 탐구하기에 이르렀다
30대 중반에 칼럼니스트 김모 작가의 권유로 정치활동에 잠시 입문하여
언저리에서 엿보았으나 취향이 맞지 않아 문학의 길을 찾아 줄곧 정신없이
지금껏 달리고 있다
내가 작가의 꿈을 꾸게 된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초등학교 4학년 당시
이웃이며 동급생 친구였던 류승우군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등하교중 자주 그와 접촉을 했고 신이한 그의 열변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입에서 마구 흘러나오는 세계사의 현란한 명칭들과 역사의 희한한 언어들은
지금껏 내가 알고 있었던 이 세상의 언어들이 아니었다
그의 독서량과 엄청난 지식은 당시에 실로 대단 했었다
그가 읽고 느낀 감정을 그 어린나이에 책 좀 봤다는 내가 소화하기 힘들 정도였으니
성격이나 모든 면에 친구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 할 것이다
나는 그의 학식과 언변을 존경했고 부러워했었다
아니 아버지같은 미미한 삶을 완전히 갈아 치우고 싶었다
역겨운 술꾼이 아니라 한 잔의 술도 멋지게 마실 줄 아는 풍류객이 되고 싶었다
새로운 나만의 세계에서 정말 환상의 노래를 하며 아름답게 살고 싶었다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확고한 다짐의 계기가 되었다
이 귀한 친구를 13세 때 헤어진 후 2013년 가을 그러니까 33년 만에 초등
동창모임에서 극적으로 해후를 했다
도의 경지를 넘은 큰스님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지금 철도공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만남의 그 감격이야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한때는 그러니까 20대 후반 뜻이 있어 출가를 결심하였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청과 당시 교제 중이었던 아내의 만류에 머리를 깍지 못했다
피해의식이나 세상을 피하여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의 정갈한 자유와
진정한 나를 찾아서 참된 생의 여운을 깨달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허나 지금도 가슴깊이 내 나이가 칠순이나 팔순에 이르면 산방생활 내지는
늦지만 이 세상을 아주 떠나기 전에 분명히 출가를 할 예정이다
8. 등단후의 왕성한 활동
십대부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나 등단 등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홀로서 20년 이상 열성을 가지고 창작 중 2008년 우연히 계간 현대시문학에
뒤늦은 나이에 등단이 되어 적극적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은 군복무시절 서신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청학 선생의
문단과도 이 시점에서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23세 군복무시절 청학선생과의 깊은 인연으로 당시에 참으로 고운 글들이
오갔으며 선생께서 아낌없이 등단을 제의 하였으나 내 스스로의 정밀한
검증에서 실력이나 모든 면이 부족하여 정중히 사양했었다
생을 좀 더 느끼고 풍성하게 숙성한 후 불혹 즈음이나 부끄럽지 않게 인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후 시간은 한참 흘러 자연스레 문인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인사동을 거점으로 전국에 문인들과 심오한 향수들을 즐기며 그들의 생활을
함께 풍미하기도 했었다
이즈음 엄정한 심사에서 20여 편의 작품이 감히 조지훈문학상 전체 대상의
수상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문단의 활로를 개척하며 전국의 여러 문사들과 통성명을 시작했다
나름 늦은 나이에 등단해서인지 더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여지껏 문학의 정신적인 지주로 응원해주신 분은 현대시문학의 주간이신
양 하 시인이다
그의 맑은 성정은 참으로 섬세한 시인의 미소이며 드넓은 가르침이었다
2009년경 인터넷상에서 박인과 시인의 초청으로 한국문단에 또 다시 등장하여
그와 시적교감을 깊이 나누었다
특히 박인과 시인은 목사로서의 신분으로 시적분위기가 참으로 정갈한 이였고
모든 장르에 걸쳐 매우 우수한 수준을 보여주었으나 이분만이 아니라 현실은
대체로 실력 있는 작가들의 삶이 녹록하지 않은 관계로 매우 어려운 삶들을
영위하는 것에 역시 마음이 크게 무거워진다
박인과 시인은 다재다능한 이였고 평론에도 탁월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더구나 박인과 시인의 권유로 시사랑문학신문 대표직을 맡아서 외국에까지
수많은 문재들을 등용하여 한국문단으로 활발히 이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근래 활동을 서서히 줄여나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물심양면의 소모전에 지쳤고 무엇보다 창작의 시간이
최소화된 것에 부담감이 밀려왔다
작가라면 한 작품의 가치와 그 쏟아내는 고열이 얼마나 잔인한 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시인의 이름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누가 뭐라해도 그 이름을 오늘도 반드시 닦아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2013년 8월3일 저녁 9시경 29년간 3000여수와
2014년 12월6일 10년 가까이 습작한 작품 중에 특별히 퇴고한 작품이 1760여수
2018년 7월1일 자정 / 창작 700여수 완작의 시창작을 달성하고도
책을 한권도 출간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이다
언젠가는 많은 독자들이 본인의 의지와 사상을 큰사랑으로 탐구하겠지만
당장 이 글에서 밝히고 싶은 심정이 아니어서 추후 유언으로 남겨둘까 한다
하지만 등단 이후 계간지나 월간지등에서 동인들과 다수 작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동안 내 영혼의 숱한 방황과 좌절이 무서우리만치 자극적인 공포였으며
붉은 가슴은 이미 숯덩이처럼 타버렸다
한이 맺힌 글이 아니라 그 일생의 한과 함께 울고 노래한 최마루 진심의 노래인 것이다
문단과 주변에서 또 지인들이 출간을 여러 차례 제의하였으나 아직은 덜 여문
곡식과도 같아서 내심 망설이는 얄팍한 이유도 있겠다
더하여 진정한 시어는 은은한 향기처럼 세상의 곳곳으로 퍼져 나아가야만
할 것이며 사람의 근본에 아름다운 씨앗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두툼한 명성이나 명예에 대한 집요한 탐욕이 조금이라도 머리를 들면 바로
절필해야하는 게 진정한 작가의 근본정신임을 늘 잊지 않고 있다
9. 최마루의 순수문학 인터넷 창작발표
카페와 블로그는 2005년 11월11일 개설하여 90% 정도의 완성도에 어느 정도
풍미로운 해석이 끝난 작품들로 2018년 7월 초까지 7000여 수 이상 올려 두었다
카페 - 나를 나에게 행복하게 팔던 날 http://cafe.daum.net/poemopen
블로그 - 대한민국 시인 문명 최마루의 한적한 무대
http://blog.daum.net/poemopen?from=empty
기타 다른 사이트에도 일부는 올려 두었으며
페이스북 : http://www.facebook.com/#!/poetmaruchoi 미진하게 활동 중이다
10. 최마루의 돋보기로 본 한국문단의 과제
지식이 밀물처럼 쏟아지는 이 상념의 시대에 시인만도 2만 명을 넘는다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과연 진정성을 가진 양심의 소리를 올바르게
인지하는 이가 과연 몇 명이란 말인가!
문단의 지성이 점차 엷어지고 있어 내심 크나큰 걱정이다
시인 최마루의 시각에는 한국문단의 폐단은 본인들의 소속된 문단이 최고라는
자긍심은 좋으나 전국에 문단 화합이 다소 어렵다는 것과 작가는 우러러 추앙할 수 있는
인격과 출중한 실력이 중요한 것이지 일등 문단 이등 문단은 없다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수십 개의 유명 문단에 또 수백 개 이상 각각의 지방문단에
수많은 해외문단까지 서로 다양한 목소리를 낸다면 어찌 한국문학의 통일성이
정교하게 살아 있겠는가!
여태 많은 활동 중에 더구나 작가의 이름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자신의 작품이 최고라는 독선과 아집에 실망감을 잔뜩 안겨준 이들도 있었으니
최마루 시인의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입은 적도 있었다
이 시대의 문인들에게 간곡히 청하고 싶은 것은
문학에는 반드시 탐욕은 없어야할 것이며 더불어 세계 속에 한국문학을
보다 독보적인 존재로 함께 구상해야 한다는데 그 의미를 깊이 두고 있다
이제는 곡식이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것도 옛말인 것 같다
더구나 등단자체도 수학처럼 정답이 없다는 핑계로 미달의 자가 행세를 하는
마당에 그들에게는 문학은 멋이나 폼이 아니다란 걸 분명히 명심하게 해야 한다
치졸한 책 한권 덜렁 찍어놓고는 작가라니 우리나라 천여 개가 넘는 출판계도
형편상 어려움이 많은 실정이다
이런 난감한 사항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원활하게 교통정리를 해준다면 한국문학에 좀 더 밝은
꽃이 피어지리라 생각한다
시인 최마루는 어느 대상을 질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함이지
악감정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나는 한국문학의 화합과 정직성과 뛰어난 필력들을 발굴하여 목숨보다 위대하게
시대의 풍미를 함께 연구 노력하자는 것일 뿐이다
거기다 작년 초경에는 최마루의 창작품을 모 대학에 갓 졸업한 20대 후반의
청년이 작가의 저작권을 무시하고 인터넷상에 표절하여 바로 법적절차를
진행하였지만 그의 난처한 사정을 고려하여 따끔한 질책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무리해주었다
예상은 하지만 최마루의 창작품이 현재 수천 작에 이르다보니 작품 사랑을 넘어
표절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것이다
단 한마디로 이제 그들에겐 관대함과 이해는 없으니 일절 용서도 단연코 없다
표절은 분명 작가의 영혼을 훼손함이며 기만과 함께 아주 추잡한 짓이다
이밖에 2013년 미국의 코리아포스트지에 귀촌을 발표 이후 많은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새로이 재미 문단활동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올해는 심사위원등으로 고운 흔적을 남겼고 수많은 활동으로 교류함에
문학적인 소양의 폭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근심은 한국문단의 단합된 결실로 조국에도 노벨문학수상자가
탄생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실력 있는 번역 작가의 양성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국민과 정부에서 합심단결하여 한국문학의 지성을 세계만방에 알려야
할 것이기에 시인 최마루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 사명을 절대로 잊지 않고
둔중하게 진행하여 살아생전 끝까지 완수할 것이다
나는 세계 속에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당장이 아니어도 후손들에게 혼신을
다한 밑거름을 반드시 남길 것이다
물론 올해 초에 서울의 문화체육부에 들러 이 문제로 사단법인을 결성한 후
직접 스웨덴으로 문학적인 홍보를 시도하였으나 여러 여건으로 주춤한 상태이다
지금 한국문단은 난립기이며 작가 중에 작가는 극히 드물고 각 지역의 수많은
문단마다 명성과 독선에 편향하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안타깝다
아무리 자유라지만 그 형식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작가군이
아주 협소하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에 미진한 작품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피해자는 현실적으로 독자들인 것이다
독서도 독자가 비판도 독자이지만 책표지나 종이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자의 투철한 관념이나 무엇보다 내용의 질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한국문학의 양심이 희미해지고 있는 현실이 실로 안타깝지만 단아한 진실성을
가지고 새로이 찬란한 꽃으로 거듭 피어나야만 할 것이다
오로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마다 반성과 새로운 도전정신이
이제는 절실하게 각인되어져야한다
대체로 타문단의 실정도 금전 등 이익을 우선하여 사람을 가리고 힘찬 필력들이
문전박대 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모름지기 작가가 되려는 이나 작가라면 훌륭한 인품이나 뛰어난 지성이
남달라야함을 가슴깊이 인지해야만 할 것이다
요즈음은 심각한 취업난 때문에 작가군의 사정도 급격히 역피라미드식의
형성에 한국문학의 미래가 매우 불안하다
11. 최마루의 삶의 현장 체험
나 역시 살면서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한때 심각한 고민 중에 하나였으니
딱히 이유라면 고독한 삶이 피곤하였고 나 스스로의 자괴감과 희미한 정체성에
대한 극도의 분노였다
분명한 것은 일상마다 깊은 의식이 살아있는 자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단활동은 잠시 접고 계속적인 창작에 몰두할 것이다
현재의 어려운 형편도 문제지만 활동을 빌미로 시간적인 소모가 심각하며
만나면 술로 이야기를 시작하니 다음 날까지 내 영혼이 피곤해서 싫어진다
어차피 홀로의 고독에 그 누가 꽃을 피워나 주겠는가!
이미 대한국인으로서의 문학의 역사적인 책무는 잘 알고 있다
스스로의 애국심 발로는 총을 잡고 있었던 군 시절 이미 절도 있게 체험하였다
그리고 문명 최마루 시인으로서의 사명도 익히 소신 있게 느낀바
한국인의 긍지를 한시도 져버린 적이 없었다
다시 태어나도 한국 사람으로 시인의 삶에 소설처럼 희극처럼 동화처럼 살고 싶을 뿐이다
내 삶의 경계는 오로지 문학 속에서 평온과 안식이며 은근한 절제이다
한때 잠시 절필의 시기도 있었다
고리타분한 일상이 무료하고 싫었다
편안한 직장에서 사표를 내고 공장근로자 건설노동자 심야택배 과자노점까지
삶의 현장을 싫던 좋던 여러모로 직접 체험해보았다
숱한 말보다 몸으로 부딪히며 느껴야만 진실성의 글에서 빛이 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체험만큼 소중한 결실은 여태까지 없었다
노숙자와 악수를 해보면 그의 사정을 알 수 있고 무거운 짐을 들어보아야만
둔중한 삶을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의 가치만큼은 그 어느 책에도 없었다
보고 익히는 대로 머리 속이 온통 부산해졌다
최마루는 억척의 삶을 소설같이 영화같이 스스로가 시나리오를 만들어 엮어보고
느껴보며 어떠한 고난에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낼 것이다
시어의 옷은 그때서야 비로소 화사하게 재단이 됨은 명백한 사실이다
살다가 때로는 부정한 사람들의 관념이 미웠다
시인의 삶은 참으로 외롭고 적막하며 죽을 만큼 고독하다
즐거움을 찾기보다 괴로움을 차라리 즐기는 게 편할 것 같았다
동안 80권 분량의 시집을 쓰고 보니 나 역시 세상에 할 말이 많기는 많은가보다
하기야 다른 것보다도 나에게 있어서 시어와의 만남은 세상에 아무리 즐거운
그 무엇과도 비교하겠는가!
나에게 시어는 운명적인 만남이었고 무지개같은 시어는 내 삶의 전부였음에
일평생을 감히 시인의 경이로운 길을 존경할 뿐이다
특히 인생의 종횡은 그야말로 처절한 탐구와 깊은 번민을 통찰해야만 조금의 결과물이
그나마 새어나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로서 시인 최마루는 시어 하나마다 천년의 절경을 이루기 위하여 깎고 다듬으며
시어에 칭송보다 기묘한 성찰의 감동을 부여하고 나아가 세계 속에 한국문학의
포효하는 날개 짓을 원대하게 꿈꾸어본다
이쯤에서 시사랑만큼은 오로지 나만의 깊은 질병일 수도 있겠다
12. 시인 최마루의 깊은 다짐과 사명감
언젠가는 내 시어 안에 실재하여 진정한 삶의 해부를 고결하게 찾아서
이 척박한 땅에 아름다운 흔적만 남긴 채로 가쁘게 귀향할 것이다
시어 안에 태어나 시어 속에 살면서 시어를 영원히 그리워할 나는
분명 시인의 명예로운 이름을 죽어서까지 한시라도 잊지 않을 것이다
비록 초가에 골동품같은 시어이지만 후세에게 필히 가슴에 남을 귀한
언어이기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한결같은 마음인 것이다
귀한 속내의 맹세를 진정으로 표출한다면 영원한 시인의 이름을 걸고
쉼표가 아닌 느낌표로 이 시대 진정한 언어의 검투사로 최선을 다한 생을
언젠가 아름다운 날에 위대한 조국 앞에서 조용히 마감할 것이다
한국문학의 위대한 검투사
- 영롱한 삶을 조명 하오면
굴절의 거리엔 하얀 바람들이
한때나마 철없이 에이게 불고는
빗줄기를 핥는 어둠이 물러나면
한층 주정적인 무지개빛 시어에
다소 이름없는 평온의 날개들이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오로라 같은 대의의 섬광 앞으로
내 기어이 위대한 무덤을 세워
역사의 의지에 봉토를 돋우어서
산처럼 이루어내기로 맹세하였다 -
( - 소소한 사계 중
그 어느 무덤가의 열망초 시인 최마루의 넋두리에서 - )
이상으로
대한민국 시인 文明 최마루는 세상의 모든 독자 여러분의 힘찬 응원과 격려를
두 손 모아 고이 받들 것이며 더불어 세계 속의 이웃들과 대한 조국의 온 가정마다
무지개같은 다복이 늘 풍부하게 이채로우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대한민국 시인 文明 최마루 배상
- 이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