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봉 성당 주임신부님 ( 이태주 알로이시오 신부님)
어린시절의 가족사진
(왼쪽 두분이 부모님,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가 이태주 신부)
성심유치원 재롱잔치
(왼쪽에서 두번째 이태주 신부, 세번째 강덕행 신부)
군 휴가때 신학생들과
(왼쪽에서 두 번째 이태주 신부, 세먼째 강덕행 신부, 오른쪽 첫 번째 이종원 신부)
신학교 합창 경연대회를 마치고
사제서품 때 김재덕 주교님의 안수
임복만 신부와 하얼빈 교우집에서
(뒷줄 세 번째가 임복만 신부,네 번째 이태주 신부, 두 번째가 박인호 신부)
김제 요촌 성당에서 은경축 미사 집전(왼쪽 배영근 신부, 오른쪽 김병운 신부)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이태주 알로이시오 신부( 팔봉 성당 주임)
아버지 4대 , 어머니 5대째 구교우 집안 9남매 중 장남
신부님께서는 1947년 2월 27일 전주시 교동에서 아버지 이종석 라우렌시오와
어머니 박양례 아네스 사이에, 4남 5녀 9남매 중 네째이면서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위로 누나가 셋 있는데, 둘째 누님 이영순 오틸리아는 '거룩한 말씀의 회' 수녀님이시고,
큰누님의 아들 박성렬 토마스 신부는 광주교구 사제라고 한다.
신부님께서 태어나신 교동 277번지는 현재 성심학교 정문 정원석이 있는 곳인데, 기억으로는
할아버지가 양말 공장을 운영하셨고, 아버지가 6.25 직후 메리야스 공장을 운영하셨다고 했다.
그때 집 정원에 있었던 돌들이 아마 지금의 학교 정원석이 되지 않았을까 싶으시단다.
성심유치원에서 학예발표회 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고종사촌인 강덕행 신부님과
찍은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신부님은 전주사범부속초등학교를 나와 전주 서중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소신학교(성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싫었으나
" 널 하느님께 봉헌" 부친 말씀에 승복
" 신학교에 가시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전동 성당에서 유치원, 주일학교를 다녔고, 중학교 때는 본당 학생회장으로 활동을 했었지요.
부모님이 구교우 집안으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셨고, 수녀님들한테서 자주 '신부가 되어야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어요. 고등학교 갈 때 중학교에서 전주고를 가야 한다고 담임선생님이
입학원서를 써주지 않아 아버지가 선생님을 찾아가서 겨우 원서를 썼어요."
소신학교에서는 깐또레스로 성가대에서 활동을 하셨단다.
소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신학대학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하신다. 그래서 하룻밤을 누나
수녀님과 다투듯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수녀님은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는데, 너는 지금 지고 있는 십자가를 팽개치고, 다른 십자가를 지려고 하느냐?
잘 생각해 봐라." 하며 문을 꽝하고 닫고 나갔단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신부님을 오목대로 데리고 올라가셨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전동 성당이 보이고,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4대째 구교우이고,
어머니는 5대째 구교우인데, 삶 자체가 신앙으로 점철된 분들이셨다. 어머니께서는
주일학교에 빠졌다는 연락을 수녀님에게서 받으면 밥을 굶길 정도로 미사참례를 중요시
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신부님이 신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신부 될 거니까 미리 연습해야
한다' 고 하시며 신부님께 반말을 하지 않고 존댓말을 하면서 극진하게 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실은 너를 얻을 때 하느님께 약속했다. 큰집과 우리 집
모두 딸만 있었다. 본당수녀님들께 기도를 많이 부탁했지. '이번에 들어주시면
하느님께 바치겠습니다.'하고 기도했는데 딸 셋 다음에 너를 낳았다." 하고 고백하셨다.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1966년 3월 광주 대건신학대학에 입학하였고, 3학년을 마치고 1969년 2월에 군에 입대했다.
처음엔 해병대를 지원해서 신체검사에 떨어졌는데, 육군에서는 갑종을 받았다.
해병대에 지원했던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신학교를 뛰쳐나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군대에서도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생활을 하니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신병 때
조치원 예비사단 신병 교육대에서 1년간 복무하던 중에 청주교구 이중권 신부님(2003년 선종)
께서 군종 참모로 오시면서 군종부로 파견되어 군인교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신부님은 사제가 되면 죽을 때까지 교회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뜻과는 달리 군종부에서 제대할 때까지 있게 되었다. 그것도 역시 하느님 뜻안에서
이루어진 것같다고 하신다.
신학교 재학시절 예체능
여러 대회서 우승 준우승 차지
학교생활은 평범했다고 강조하신다. 체육부장을 1년 했는데, 못하는 운동이 없으셨단다.
그 당시 이병호 주교님께서 교수이셨는데, 학교 체육 대회에서 테니스 단식 결승전까지
올라가서 두 분이 경합을 벌였는데, 신부님께서 이겼다고 하시며 주교님께서도 테니스를
잘 하셨다고 하신다. 또 한번은 '전남 신인 테니스 대회'에 문규현 신부님과 함께
출전했는데, 결승전에서 지고 말았단다. 4학년 때는 '음악과 문학의 밤'에서
합창경연대회로 1등을 했다 하시며 기념사진을 내놓으셨다. 말씀을 들으니 예체능 모두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았다.
부제 때에는 김재덕 주교님께서 소임을 주셔서 금산 본당의 안복진 신부님께 가서
6개월을 지냈다. 호랑이처럼 무섭다고 소문난 박성운 신부님께 본당 사무 처리를
꼼꼼하게 잘 배우셨단다.
1975년 7월5일 전동 성당에서 김재덕 주교님으로 부터 사제서품을 받으셨다.
서품성구는 시편 16장11절의 '"당신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로 택하였다.
평소에 기도하던 시편에서 고른 것이었다.
첫 미사는 여수 서교동 성당에서 집전했다. 신부님이 군대에 있을 동안
아버지께서 여수로 이사를 가셨기 때문이었다.
신설 용안 .오룡동 . 송학동 성당
초대주임 맡아 발전에 기틀 마련
서품 후 함열 성당에 보좌신부로 1년 5개월 동안 계시다가 1976년 12월 15일
초대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용안 성당의 모체는 1938년 설립되었다가
1950년에 폐쇄된 석동 성당이다.용안 성당은 신설 성당이었지만 신앙의 역사가
아주 깊은 곳이었다. 신부님은 성당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 부임을 해서
있을 곳이 없어 몇 달 동안 석동공소에서 생활을 했다. 용안 신자들과 성당 내부
페인트칠을 할 때 추우면 안 칠해질까봐 실내에 연탄을 태우면서 했다. 그때 같이
고생했던 신자들이 지금도 연락을 해온단다. 그해 4월에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고,
초대 주임으로서 2년 동안 기틀을 잡아놓느라 분주하게 보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 1979년 1월 신부님은 군산 오룡동 성당으로
전임되었다. 이곳 역시 신설 본당이었다. 그해 2월9일에 성전 봉헌식을 가졌는데,
건물만 짓고 미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신자들이 미사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버렸다.
알고 보니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간이천막을 쳐 화장실 대용으로
사용하자 은인 한 분이 화장실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김영신 신부님께서
창인동 성당에서 쓰던 장궤틀을 주셔서 신자들과 사포질을 하고 페인트칠을 새로 해서
사용했다.
1984년 1월, 신부님께서는 독일 마인쯔 교구(한인 성당)로 발령을 받으셨다.
거기서도 신자들과 피정을 하고 열심히 사목활동을 하였다.
마인쯔 교구 신문에 4년 동안 124명의 성인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특별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 곳에 오는 해외 주재 한국 회사 직원들과 교포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을 기울인 결과였다. 1988년 1월, 송학동 성당으로 부임하셨다. 이곳 역시
신설 본당이었다. 송학동 성당은 창인동에서 분리 되었는데, 성전이 없어
주일 오후 4시에 창인동 성당을 빌려 주일미사를 드렸다.
감사하게도 신자들은 많이 불편했을 텐데도 자기 본당 미사라고 모두 그 시간에
나와서 미사를 드렸다. 평일미사는 구역을 돌아가며 드렸다. 두 달을 그렇게 지냈다.
있을 곳도 없어 신동 성당(박종상 신부)사제관에서 신세를 졌다
관리국장 때 중국 지하교회 사목 임복만 신부님 모셔 오는 일 수행
"임복만 신부님을 모셔오기 위해 작업을 다 해놓고 박인호 신부님과 함께 갔습니다.
마음이 설레였죠. 성탄 무렵이었는데 하얼빈에 있는 어는 교우분의 초라한 아파트에서
임신부를 처음 뵙고,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준비해서 내일 다시 모시러 오겠다고 했더니
매우 당황하시며 " 왜 미사를 안 드리고 가려고 하느냐?'고 화를 내셨어요.
팔십 평생을 수난과 핍박 속에서 사신 임 신부님의 하느님을 향한 자세에
고개가 숙여졌지요." 1995년 9월 1일, 교구청에서 5년 4개월의 생활을 마치고
인후동 성당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다. 교구 청에 오래 있다가 본당으로 가니 처음에는
다소 얼떨떨하셨단다. 그 당시 인후동 지역은 재개발 때문에 신자들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사목이 좀 어려웠다. 지속적인 성체 조배실을 마련하여 성체 신심을 앙양하였고
성서교실을 열고 복음을 전했다. 또한 성가정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해 가정교리반을
운영하였는데, 첫영성체하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그 부모들까지 전례교육에 참여하게
해서 비신자였던 부모들이 그 덕분에 신자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