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시절/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 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갈이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 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 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해설> 1990년 시집 [그 여름의 끝]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인 '나'가 '당신'이라는 대상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이 어떤 존재인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둘의 관계에 대한 서술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시적 의미와 함께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드러난다.
먼저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맸던 적이 있고, 흙더미와 관련된다는 내용을 통해 그것의 속성이 식물과 관련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3연의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5연의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것이라는 표현은 당신과 '나'의 속성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준다. 즉 '당신'은 꽃(꽃잎)이고, '나'는 피어날 꽃을 품고 있는 껍질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나'와 '당신'의 속성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 시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몫을 한다.
당신(꽃)이 피어날 때 '나'는 몸뚱이가 갈가리 찢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당신이 오는 게 두렵고, 당신을 보낼 일이 아득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반드시 올 것을 알고 있다. 계절 변화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경이로운 사실이지만, '나'가 당신을 위해 부서지고 무너지듯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탄생과 그를 위한 희생의 필요성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전해 준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이성복(李晟馥): 1952 - >
* 1952년 6월 4일 경북 상주 출생.
* 1971년 서울대 불문과 입학, 1979년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 1977년 『문학과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 1982년, 이성복은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의 불문과에 조교로 부임하고,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다.
* 1984년, 프랑스의 엑스 앙 프로방스대학의 박사과정에 등록하고 프랑스로 떠난다. 1985년 귀국.
* 1986년 두 번째 시집『남해금산』을 출간했다.
* 1988년 《문예중앙》 가을호에서 「연애시와 삶의 비밀」이라는 창작일기를 내놓기도 한다.
*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라는 서양 문학을 동양고전의 정신으로 녹여 풀이한 논문을 완성하고, 제4회 ‘소월문학상’을 수상했다.
*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 [남해금산](1987), [그 여름의 끝], (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아, 입이 없는 것들](200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 [오름 오르](2004) 등의 시집이 있다.
1982년 김수영문학상(1982)과 소월문학상(1989)을 수상했다.
* 조선일보 2015년 9월 11일 만물상/'시인 이성복'
대구로 이성복을 만나러 가던 날은 날씨가 푹푹 삶았다. 그는 아파트 집에서 100m쯤 떨어진 서재에 있었다. 복덕방 하면 딱 좋을 허름한 골목에 작업실을 세냈다. 출입문에 수미재(守微齋)라 써 놓았다. 미미한 것을 지키는 곳이라 했다. 1970년대 대학 신문 기자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재밌는 걸 보면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든지 약간 헐렁한 모습이지만 글 쓰는 마음 끈을 꽉 조이고 산다는 느낌도 여전했다. 그는 쑥색 티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10년 전 계간 '시인세계'가 시인 156명에게 현대시 100년사(史)에 큰 영향을 끼친 시집을 물었다. 백석 '사슴', 김수영 '거대한 뿌리', 정지용 '정지용 시집', 서정주 '화사집' 같은 불멸의 이름이 나왔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문학 이정표다. 그런데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도 올랐다. 시집 말고 100년사에 영향을 준 시인이 누구냐 물어도 같은 다섯 이름이었다. 다른 넷은 작고한 전설이었고 이성복만 당시 쉰셋 현역이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지금 읊조려도 서늘해지는 이성복의 절창 '남해 금산(錦山)'이다. 돌보다 깊게 영원을 획득한 사랑이 해와 달, 하늘과 바다가 혼융하는 우주의 품속에 까무룩 빠졌다. 그러나 이성복 시를 몇 편씩 외우는 독자도 그가 아포리즘의 명창이라는 건 잘 모른다.
이성복 잠언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를 펼쳤을 땐 속눈썹이 다 떨렸다. 시와 삶을 벼려낸 글귀가 일부러 과녁을 비켜 간 표창처럼 쌓여 있었다. '모든 위대한 것들은 위독하다'는 대목이 절묘했다. 그가 엊그제 시집이 아닌 책을 세 권이나 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양장본에 '극지(極地)의 시' '불화하는 말들' '무한화서'라는 제목을 달았다. 강의와 대담을 엮어 자분자분 설명하거나, 시처럼 행갈이를 하거나, 서너 줄 경구마다 번호를 붙였다.
그는 몸이 가볍다. 키도 큰 편이 아니다. 술은 맥주 한 컵이 고작이다. 그러나 시를 쓸 땐 '마지막 화살을 쏘듯' 목숨을 건 결기를 세운다. 카프카를 인용해 "당신과 세상이 싸운다면 세상 편을 들라"고도 했다. 이때 세상이란 다른 사람이다. 어떤 관계든 자기한테 유리하게 끌고 가지 말라 했다. 그걸 어기면 시(詩)도, 기도도 의미가 없다. 시인은 온갖 어려움에도 세상 편을 드는 극지에 서야 한다. 글쓰기도 인생도 한가지라고 했다.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발췌) (장석주, 나는 문학이다)
1980년 10월, 등단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젊은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 )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다. 이 시집은 문학청년들에게 잊을 수 없는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었다. 그의 시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라는 해석으로부터 초현실주의적 방언이라는 해석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다양한 해석의 용광로가 되었다.”라는 말로 더할 수 없는 화려한 수사로 장식된 찬사를 퍼부었다. 80년대의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이 시집을 김현은 “따뜻한 비관주의”라고 읽고, 황동규는 “행복 없이 사는 일의 훈련으로, 행복이 없는 노래의 삶으로” 이 시집을 읽는다.
1988년 《문예중앙》 가을호에서 「연애시와 삶의 비밀」이라는 창작일기를 내놓기도 한다. 송재학은 이성복의 연애시들을 두고 “동양 고전의 세계, 소월과 만해의 깊고 푸른 물을 거쳐서 나온 정서적 자아의 목소리”라고 멋지게 말하고 있다. 시인은 1987년부터 대구 대명한의원의 서찬호로부터 동양고전인 『대학』과 『중용』을 배우고, 1988년 계명대학교 중문과 교수들 사이에 『논어』 윤독회가 만들어지자 거기에 동참한다. 그리하여 1989년 말에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라는 서양 문학을 동양고전의 정신으로 녹여 풀이한 특이한 논문이 완성된다. 그해 겨울 시인은 제4회 ‘소월문학상’의 수상자로 결정된다.
1990년은 시인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진 해로 기억된다. 세 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이 나오고, 그가 오래도록 스승으로 모신 평론가 김현이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다. 이해에 『그대에게 가는 먼 길』과 『꽃 핀 나무의 괴로움』이라는 두 권의 산문집이 <살림>에서 나오고, 《현대시세계》 봄호와 《문학정신》10월호가 각각 ‘이성복 특집’과 ‘이성복 대담’을 싣는다. 『그 여름의 끝』에는 ‘당신’으로 가는 도정을 펼쳐 보여준다.
다시 송재학은 “그 ‘당신’은 소월과 만해로부터 익힌 ‘당신’이고 동양의 음양사상에서 비롯된 ‘당신’으로 내가 양이면 당신은 음, 당신이 양이면 내가 음인 그 ‘당신’이다. 그 ‘당신’은 남녀간의 당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1991년 시인은 연암재단의 교수 해외파견 기금을 받아 두 번째로 프랑스에 건너가 도교의 권위자인 프랑스 교수의 강의를 수강한다. 199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박사논문을 다듬은 『네르발 시연구』를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내고, 이듬해인 1994년에 네 번째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추억』을 내놓는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호랑가시나무의 추억』까지 오는 시가 보여주는 변모의 궤적은 시인의 정신사적 궤적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추억』로 이어지는 궤적은 ‘누이의 동생’ ‘어머니의 아들’ ‘당신의 나’ ‘아이들의 아버지’로 이어지는 궤적과 상호 조응하는데, 이는 시인의 “가족의 순환 구조”이며, “안팎의 정신사”에 다름 아니다.
◈ 서해/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해설> 1990년 시집 [그 여름의 끝]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는 애틋한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시에서 화자는 '당신'의 부재 속에서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라고 하여 부재의 확인을 유보하고 있다. 이 시에서 '서해'는 '당신'이 있을지도 모르는 공간으로, 그 공간을 남겨둠으로써 화자는 자신의 그리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화자는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가 늘 마음속에서 파도치고 있다고 하여, 강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 The last rese of summer/Andre Lieu
http://youtu.be/3nc55QYn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