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예수의 빛 원문보기 글쓴이: 열린마음
2. 미지의 세계로
1970년 여름. 종로2가에 위치한I.L.I. 영어교실에 한 중년 신사가 들어와서, 내 반 젊은이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저 나이에 다시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면 아마 무슨 곡절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수업이 끝나자, 나는 琉?가까운 다방으로 모시고 가서 물었다.
“박 선생님, 지금 이 연세에 다시 영어를 공부하셔야 한다면 무슨 사정이 있으실텐데, 제가 알아도 무관한 일이면 말씀해 주시지요. 참작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제가 필요한 것은 영어가 아니고 실은 서반아어입니다. 제가 곧 알젠틴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반아어를 공부해야합니다. 그러나 영어 하는 사람은 서반아어가 훨씬 쉽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먼저 듣기로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서반아어 공부를 위한 준비공부 정도로 알면 되겠습니다.”
“네, 그렇습죠.”
그리고 나서 그의 태도가 좀 진지해지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젠틴’에 제 처남이 가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저더러 와서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 동안은 답을 못하고 차일 피일 하고 오다가 얼마 전에 결심을 했습니다. 정선생님도 혹시 남미에 관심이 있으시면 저와 함께 떠납시다. 제가 그 동안 큰 돈은 벌지 못했습니다만, 평생 먹고 살만큼은 벌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그 돈만 하면, 우리 두 가정은 걱정 없습니다. 그리고 큰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웬만한 사업이면 다 할 수도 있습니다.“
(남미... 알젠틴... 탱고의 나라... 낭만의 나라... 초원의 나라... 강에는 팔뚝만한 고기가 잡힌다는 나라... 소값이 쌀값보다 싸다는 나라... 땅을 믿고 살 수있는 나라...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릴 줄 아는 나라... )
그 날은 답을 못하고 헤어졌다. 며칠 동안 가족과 의논을 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보았다.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끝까지 남는 것은 부모 형제와 생이별하는 일이었다. 타지방으로 이사를 하는 일도 아니요, 일본이나 미국 정도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또 미국 가기 만한 거리를 더 가야하는 나라가 알젠틴이다. 어린 시절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 나라가 ‘시베리아’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시베리아 보다 더 먼 나라, 이 세상 끝이랄 수 있는 나라가 알젠틴이었다. 떠나면 그것로 마지막이라는 각오도 해야했다. 그러나 나는 드디어 결심을 굳히기로 했다. 60년도 말의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 피곤해진 나는 새나라 새천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꿈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나를 의지하고 꿈에 부풀어 있는 젊은이들을 버려야 하는 일이었다. 이 젊은이들의 모임을 ‘연우회’라 했다. 연우회는 주로 내 반에서 수강한 젊은이들과 이들의 가까운 친구들로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내 반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와서 수강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급반은 저학력 소지자가 상당 수 있었다. 이들은 저소득층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무시당하고 있는 층이었다. 이들의 문제는 저학력이나 저소득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 자기자신을 활용할 줄 모른다는 문제가 더 컸다 이들의 눈은 언제나 밖으로만 향해 있었고, 자기자신을 볼 줄 몰랐다. 정신을 가다듬고 살피면 길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길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이 없었다. 모든 것은 조상 탓이요, 사회 탓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당장은 뱃속 편한 방법일지는 모르나, 그런 식으로 일생을 살아 갈 수는 없는 일이라, 보고 있는 나는 안타까왔다. 이들을 도울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러나 먼저 ‘써클활동’부터 시켜보기로 했다. 한 사람씩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그리고 집단을 통해, ‘나’와 ‘너’를 재발견하면서, 각자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써클’이었다.
어느 날 수강생 가운데서 미리 점을 찍어 둔 몇 사람을 모이게 하고는 써클에 대한 취지 설명을 했다. 이렇게 해서 ‘연우회’는 발족을 보게 되었다. 지도교사로는 나와 김상근 목사. 집회장소는 사직 터널 옆에 위치한 수도교회였다. 격주로 모였다. 정기집회일에는 실생활에 필요한 교양강좌와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씽얼롱’도 중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다른 일요일에는 모여서 등산을 했다. 산을 내려와서는 다방에 모여 앉아서, 간단한 평가회도 가졌다. 혼자서 생활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서클’을 통해 이들은 듣고 보게 되었다. 드디어 자기자신에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총무 일을 보던 ‘강’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천주교도로서, 야심 없이 선량하게 살아 가는 순종형의 젊은이였다. 써클의 총무가 되고3개월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정 선생님, 내 속에 이런 능력이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전에는 전연 알지 못했습니다. 나 자신이 요즘 놀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발전해 나가면 앞으로 내가 어디까지 발전할지 전연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사실 그러했다. 시키는 일만 착실하게 할 줄 알던 강군은 어느새 유능한 창조적인 인물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또 한 경우는, 현충사에 소풍을 갔다 돌아오면서 기차 안에서의 일이었다. 한 회원이 말하기를
“정 선생님, 제가 솔직히 말해서 지난 번에는 일부러 몇 주 빠져 봤습니다. 몇 주 빠졌다가 다시 나왔더니 안내를 보고있던 여회원들이 나를 보고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서울바닥에서 나를 그렇게 반가와 해줄 곳이 어디 있읍니까? 어디를 가나, “너, 무슨 기술 있냐?” 아니면 “너, 돈 얼마 있냐?” 하고 날 쳐다보지, 돈도 기술도 보지 않고, 이 몸 하나만 보고 그토록 반가와 해줄 곳이 이 연우회밖에 또 어디에 있겠읍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 해도, 이 연우회만은 꼭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듣고 있던 여회원들이 “까르르”하고 웃었다. 말이 재미있어서라기보다는 ‘공감’을 뜻했다. 내가 떠나고 나면, 이 모임도 끝날 수밖에 없다. 이 모임이 어떻게 자랄지는 아무도 몰랐다. 잘되면 크게 자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흐지부지 끝날 수도 있. 었다. 이 운동이 성공하려면, 회원들은 모두가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은 먼저 자기자신을 존중할 줄 알 때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먼저 열등감이 극복되어야한다. 회원들의 열등감! 이 점에 있어서 앞날이 밝지 못했다. 시간만 지나면 해결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 명맥이 유지될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시작은 불안했다. 그러나 나는 기어코 해보기로 했다. 나는 일체를 회원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맡겼다. 그리고 벽을 만나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만 손을 써 주었다.
“이렇게 쉽게 풀리는 수도 있군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총무의 말이었다. 이들은 내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한, 머리를 모으고 지혜를 짜서 스스로 일을 처리해 나갔다. ‘연우회’란 명칭도 회원들이 채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홍역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연우회 활동은 회원들의 잠재력만 키운 것이 아니라, 다른 잡것도 아울러 싹틔우고 있었다. 다른 잡것이란 명예욕과 허영심이다. 이런 현상은 간부급 회원들 사이에서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의 개발과 회원들의 개발에 흥분하면서, 이 성장의 기쁨을 간부 몇 사람이 계속 누리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파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연우회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리고 회원들은 경험과 훈련이 부족한 상태라, 이 문제를 극복할 힘이 없었다. 지도교사 두 사람의 힘으로 바로잡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지도교사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가면, 그 때는 독재가 되고 만다. 그것은 곧 자살 행위이다.
나는 훌훌 털고 떠나기로 했다. 남미로 가서 다시 해보는 거다. 새나라에는 할 일도 많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젊은이들도 많으리라. 그래서 나는 본격적으로 이민 준비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영어공부를 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서반아어 문법책을 예문까지 통째 암기했다.
박 선생 가정은 그 동안 처남이 북미로 재이주하게 되면서 목적지가 북미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박 선생은 나와 잠시 만나고 헤어지게 되었으나, 그가 나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그때는 그도 몰랐고 나도 몰랐다. 나보다 먼저 알젠틴에 도착한 사람들에게서는 계속 어두운 소식만 날아왔다. 이들은 이민 수속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족을 두고 혼자 떠나기로 했다. 혼자 가서 모든 것을 알아본 다음 가족을 부르던가, 아니면 내가 다시 나오던가 하기로 했다.
새나라에 대한 기대가 반이요, 불안이 반인 착잡한 심정으로 형제와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서울을 하늘에서 보기도 처음이었다. 나는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 나라의 첫 인상은 어떨까하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본 첫 인상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늘에서 보는 서울은 붉은 먼지 속에 가까스로 서 있는 도시였다(‘60년도 말).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메말라 보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지리적 조건에서라기보다는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심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부끄러웠다. 드문 드문 보이는 나무들도 주위의 메마름으로 해서 함께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다. 이 서울이 내가 마지막 보는 서울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에서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멀어져 가고 있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울이 점점 작게 멀어져 가는 동안, 내 마음에서도 하나 둘 풀어서 창공에 날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 동안 끊지 못했던 몇 가지 마지막 미련들이었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생살을 뜯어내는 것 같은 아픔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 타는 비행기는 재미있고 신나는 점도 있었다. 그러나 알젠틴 ‘에세이사’ 공항에 첫 발을 디뎠을 때는 완전히 지쳐서, 일생 동안 할 여행을 단 번에 끝낸 것 같이 진절머리가 났다. 가장 힘든 것이 음식이었다. 최고급 음식이라고는 하나, 그것도 한 두 끼면 모를까, 며칠을 계속 기름진 무거운 음식만 받고 보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때의 비행기 음식은 그러했다.)
영어가 편리하다는 것은 여행을 하면서 더욱 실감했다. 여행에 불편을 전연 느끼지 못 했으니까. 빼루의 수도 ‘리마’에서 한 쌍의 젊은 부부가 기타를 메고 올라와서 바로 내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나는 영어를 하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못하고 부인이 영어를 잘 했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라 답했다.
나는 약속보다 약 일주일이나 늦게 도착되고 있었다. 그 때는 교포들의 대부분이 ‘백구촌’이라는 후생 주택단지에 모여 살고 있었다. 백구촌은 빈민들을 위해 정부에서 지어준 집이라, 전화가 없었다. 나는 그 부인에게 내가 늦게 도착하게 된 사정을 말하고, 마중 나오기로 되어있는 사람이 내가 안 오는 줄 알고, 공항에 안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걱정을 털어 놓았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부인은 말하기를 어머니가 차를 가지고 공항에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으니, 어머니께 도와주도록 부탁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는 거듭 걱정하지 말라 하고 되풀이 했다.
남미 사람들이 친절하다더니, 나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벌써 훈훈한 남미 사람의 인심을 경험하고 있었다. BUENOS AIRES ‘EZEIZA’ 공항에 첫 발을 디뎠을 때는 새벽이었다. 새벽의 맑은 대기 속에 엷은 ‘치즈’ 냄세 같은 향기를 머금은 대기가 코에 닿았다. 대기의 첫 냄새가 이 곳은 이국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말하고 있었다.
(우유가 흔하다고는 들었지만 얼마나 흔하면 이 넓은 하늘을 우유 냄새로 채웠을까?)
하고 의아해 했다. 생소한 냄새이긴 했으나, 역하지는 않았다. 녹음 냄새 탓이었는지도 몰랐다. 에세이사 공항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서 숲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친절한 알젠틴 부인의 도움으로 나는 힘들이지 않고 내가 가야할 곳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때는 한여름. 해가 지고 날이 서늘해지자, 나는 거리 구경을 나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버스가 편리했다. 버스로 약30분 달리니 번화가가 보였다. 땅만 넓은 것이 아니라 길도 넓었다. 운동장인지 길인지 구별할 수 없는 넓은 길이 나왔다. ‘누에베 데 훌리오’라 했다. 노폭이 100미터였다. 길이 너무 넓어서 길 가운데는 주차장으로 쓰고 있었다. 광장 여기 저기에는 젊은 남녀가 쌍쌍이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해서 한가로히 여름밤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나라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여유가 이들의 몸짓에서 흐르고 있었다 몸짓만이 아니었다. 얼굴에도 마치 큰 강이 소리없이 흐르듯 여유가 있었다. 실로 부러운 여유였다.
“누에베 데 훌리오” 중심가에 세계적인 오페라 하우스 “Teatro Colon”이 있었다. 알제틴은 유럽과는 계절이 반대라. 유럽이 바캉스 시즌에 들어서면 알젠틴은 겨울, 오페라 시즌이 된다. 그래서 유럽의 일류 오페라단이 더위를 피해 서늘한 알젠틴으로 몰린다. 남미
ABC (Argnetina, Brasil, Chile)에서 알젠틴은 단연 A이다. 그러나 알젠틴 국민은 알젠틴이 남미에서 첫째가는 나라라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하질 않고, 그 선을 넘어서, 한동안은
“Argentina는 Latin America가 아니다.”
하고 주장한 때도 있었다. “떼아뜨로 꼴론”을 보면, 알젠틴 국민의 자부심에 수긍이 간다. 김찬삼씨가 허름한 여행자 차림새로 입장하려다가 거절 당했다는 오페라 하우스다. ‘떼아뜨로 꼴론’은 건물만이 아니라, 그 밑의 지하 부속건물 또한 가관이다. 마치 개미집처럼 땅속을 파고 들어간 부속건물은 ‘누에베 데 훌리오’ 밑을 파고 들어가서, ‘누에베 데 훌리오’ 길 한가운데에 환기통을 세워놓고 있다. 그 속에는 식당은 물론 제화점, 양복점 할 것 없이, 없는 것 없이 골고루 갖추고 있다. 그래서 ‘떼아뜨로 꼴론’은 오페라 하우스이면서 또 하나의 도시이다. 재료만 외부에서 공급받을 뿐 일체를 자체 생산하고 있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졸업반일 때. 학교에서 단체로 ‘떼아뜨로 꼴론’을 견학 간 적이 있었다. 떼아뜨로 꼴론을 다 둘러본 다음 안내인에게 물었다.
“이것을 값으로 치면 얼마가 됩니까 ?”
“떼아뜨로 꼴론은 값이 없습니다.”
안내인이 웃으며 답했다.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떼아뜨로 꼴론은 보는 이의 눈에 꿈속만 같았다. 누에베 데 훌리오를 가로지른 ‘라바제’라는 길은 극장가였다. 길 양편에 영화관이 빽빽히 줄지어 서있었다. 극장가를 좀 더 내려가면 ‘Florida’라는 알잰틴의 명동이 나온다. 본국인 못지 않게 외국인이 많은 거리이다. 여기에서는 영어는 물론, 세계 각국어를 다 들을 수 있다. 나 같은 서민은 구경이나 할까 Shopping은 엄두도 못내는 거리이다. 그래서 이 거리에서는 한번도 Shopping을 한 적이 없었다.
거기서 더 내려가면 바다처럼 넓은 강이 나온다. 달빛이 부서져 떠 있는 밤의 강은 그대로 바다이며 강이라 믿기 어려웠다. La Plata강이라 했다. 이 강 건너편은 ‘URUGUAY’, 남미의 스위스라는 나라다.
강가에는 뜻밖에도 나지막한 단층 초가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속에는 조는듯한 약한 불빛도 보였다. 그러나 이 초가집들이 실은 알젠틴 풍류객들을 위한 최고급 식당이었다. 속에 들어서면 겉보기와는 달리 초호화판이었다.
국내 비행장도 이 강가에 있었다. 크고 작은 비행기가 끊임없이 뜨고 내린다. 작은 비행기는 모두가 자가용인 것 같았다. 작다고 프로펠러 엔진이 아니었다. 모두 제트 엔진이었다. 노벨상 수상자가 다섯이나 되는 알젠틴은 겉과 속이 이토록 다른 나라였다. 이 나라에서 15년을 살면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였다. 그 반의 한 학생은 학업성적도 시원치 않고 해서, 한국학생에게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늘 무시당해 오던 학생이었다. 하루는 별일 아닌 것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그 학생과 토론을 하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 토론도 심각할 것까지는 없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잡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의 논리성에는 정말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면서, 알젠틴 청년을 학업성적 하나만으로 평가할 일이 못된다 했다.
뿐만 아니라, 참 알젠틴을 알려면 지방을 보아야 한다. 알젠틴 국민의 말대로,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알젠틴의 쓰레기장이라 할 수도 있다. 교민들의 인심만 해도 그렇다.
Buenos Aires에서는 좀 껄끄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방은 다르다. 먼저 와서 자리잡은 교민들이 뒤에 오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안내하고 또 도와준다. 가장 큰 이유는, 뒤에 오는 사람들이 한국인의 ‘이미지’를 흐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최초로 헬리콥터를 설계한 나라, 한 때 세계5대 부국 가운데 하나였던 알젠틴은 인심에 있어서나 자원에 있어서나 장래가 기대되는 나라이다. 치열한 경쟁이 없어, 특히 젊은이들이 숨을 돌릴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군정의 후유증은 의외로 깊고 크다. 한 세대가 실종 추방 등으로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으니까. 회복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또 하나는 남미형 착취라 해서 저임금 문제가 국가 발전에 큰 장애요인이 되어 있다. 그 주범은 대기업의 탈세와 공무원의 부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8월 31일자 한국일보에 의하면, 록펠러 재단과 여러 은행, 민간 투자 펀드들이 최근 작성한 비공개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에는 ‘알젠틴’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