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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계에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정보원으로는 흔히 미국잡지가 거론된다.
당시 『민국일보』 기자였던 이구열은
“뉴욕 중심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 폴록, 데 쿠닝, 마더웰, 로스코 등의 작품이 특집으로 소개되던
라이프(LIFE)나 타임(TIME) 잡지에서 찢어낸 원색도판이
작가들의 지저분한 작업실 탁자와 벽면에서 흔히 목격”되었다고 하였고,
평론가였던 방근택도 『타임』, 『라이프』, 『아트 뉴스』 등의 잡지가 미국 미술에 대한 주요 정보원이었다고 했다.
한국 미술가들이 미국잡지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추상표현주의는 비전통적 기법이 강조되고,
그 기법에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시대의 표현이자 자유라고 하는 이념적 가치의 구현이라는 해석이 가해진 모습이었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유럽의 앵포르멜(1)에 대한 정보가 1950년대 후반에
동시적으로 전해지면서 별다른 변별력을 갖지 못하고 동일한 미술로 수용되었다.
한국 미술계에 소위 뜨거운 추상인 추상표현주의의 열풍이 밀어 닥친 배경에는 한국전쟁 이후 암담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개된 추상표현주의는
“우리는 이 지금의 혼돈 속에서 생에의 의욕을 직접적으로 밝혀야 할 미래에의 확신에 걸은 어휘를 더듬고 있다.
바로 어제까지 수립되었던 빈틈없는 지성 체계의 모든 합리주의적인 것들을 박차고,
우리는 생의 욕망을 다시 없는 ‘나’에 의해서 ‘나’로부터 온 세계의 출발을 다짐한다”는
1958년 현대미술가협회의 선언문에서 드러나듯 젊은 세대가 주도한 전위적 미술이었다.
추상표현주의는 한국전쟁 이후 암담한 현실을 표현할 조형언어를 제공해주었고,
현대미협전 외에 현대작가초대전이나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을 통해 전개되면서
아시아의 전통에 대한 관심과 정치현실을 반영하는 등 한국의 현실에 적응한 양식으로 정착하였다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은 동일한 사조로 언급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사조로 취급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포함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등
양대 사조에 대한 서로 상충되는 정의들이 존재하고 있다.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은 탄생배경과 추구해온 사상을 공유하고 있으며
작품성향에서 역시 미묘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다만 추상표현주의가 초현실주의나 큐비즘 등의 영향을 받아 미국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반면,
앵포르멜은 전통적 법칙을 탈피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한 유럽의 작가들에 의해 탄생되었다.
이러한 탄생과정과 지역의 차이는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의 구분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법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한국과 같이 양대 사조의 사상과 작품성향은 공유하지만 탄생지역과 과정을 공유하지 않는
제3국의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의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용어의 제정이 요구된다.
추상표현주의는 60년대 중반까지 현대작가초대전이나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같은 전시공간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지만 그 후 서서히 냉각되며 70년대의 모노크롬 회화(2)에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 그의 그림은 한마디로 그림 같지 않다. 순수한 추상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는 무를 추구하고 있다. 그의 절대적이고 순수하고 시적인 세계 앞에 서면 우리자신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는 유태계출신 러시아인으로 10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어려서는 미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이 살았다.
공부를 잘 해 예일대 장학생으로 들어가 처음에는 노동운동가가 되려 했다.
그래서 철학, 언어, 역사, 미술사, 경제학 등등 공부했지만 결국 적성에 안 맞아 포기하고
뉴욕에 미술학교를 다니면서 웨버 등 친구들과 어울리며 미술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뉴욕에서 <아티스트노조>를 만들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는 사실 50이전까지 생활이 너무나 어려웠다.
1968년 예일대에서 명예예술학 박사학위 받는 등 화가로서 서서히 유명해지고 이름이 나자 자살했다.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유명해 지는 것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의 자살은 고흐를 연상시킨다.
그는 색채를 종교이상으로 생각했다.
이를 통해서 삶을 조명하고 탐색하고 명상하고 성찰했다.
로스코는 화가라기보다 고뇌하는 철학자처럼 보인다.
Mark Rothko 그가 어린 시절 겪은 상실감과 소외감이 그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주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의 예술의 기반이 되었다. 자연히 그의 그림 세계는 우울하고 비관적이고 실존적이다.
유럽의 칸딘스키가 창시한 추상미술은 미국으로 건너가 이를 한 단계 더 높인 '추상표현주의'로 꽃피운다.
이로서 미국미술도 드디어 세계미술사에 정식 등재되었다.
'추상표현주의'에는 '액션페인팅'과 '색면추상(color-field)'이라는두 흐름이 생겼는데,
폴록과 로스코가 각각 이 흐름의 대표자였다.
이렇게 그는 미국미술사에 중요한 한 복판에 서 있었다.
그의 그림은 마음을 잡아 잠시도 그림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유혹한다.
그런 힘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40년대, 로스코는 세계대전의 전운에 몸서리쳤고실제로 참혹한 전쟁이 발발되면서
인간 존엄성이 여지없이 짓밟히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벗어나고자 새로운 형태의 추상미술을 요청 받았다.
그것이 바로 색면추상이다.그의 그림 앞에서 서면 관객들은 숭고해지고 경건해지고 울컥해진다
"내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내가 그 작품을 그릴 때 느꼈던 종교적인 경험과 동일한 체험을 한 것이다"
라고 한 그의 말을 직접 그림을 보니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Blue-Orange-Red-1961National Gallery of Art, Gift of The Mark Rothko Foundation
[유럽추상미술- 앵포르멜]
세르게이 폴리아코프
-1900년 러시아 모스크바 출생의 세르게이 폴리아코프 Sergei Poliakoff는
러시아 혁명 후 동유럽 각지를 돌며 도피생활을 하다가 1923년 파리에 정착하였다
마티에르를 이용하여 앵포르멜적이고 서정적·기하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마띠에르(Matiere) ; 작품의 표면효과 (붓질, 나이프의 사용 흔적 등)
Sergei Poliakoff-Composition series
폴리아코프는
뉘앙스가 풍부한 색면(色面)의 배합을 기조로 한 추상화를 그렸다.
중후한 색조로 편편한 판면을 긴밀하게 결합하는 독자적인 추상회화를 추구해나갔다.
Poliakoff는
카지미르 S.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의 《흰색 위의 흰 사각형》을
파리에서 보고 깊은 충격을 받는다
말레비치, 1918년. (뉴욕 근대 미술관)
ㅡ《 절대주의 구성 : 흰색 위의 흰색 (Suprematist Composition : White on White) 》
계속해서 폴리아코프의 Composition 연작
-Sergei Poliakoff-Composition
앵포르멜의 선구자 -장 포트리에 Jean Fautrier
쟝 포트리에(1898-1964)의 인질 시리즈와 같은 비정형의 작품을 보면
두툼한 질감과 덩어리진 추상적 형상에서 고통스런 인간의 삶을 반영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2차 대전 중 죽은 시체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이나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들로
직접적인 체험의 결과에서 나온 침울하면서도 열정적인 감정의 표출로 보여진다.
이같은 추상미술은 캔버스에 붙여진 마티에르(두꺼운 질감)를 많이 사용하며,
두꺼운 흔적들은 응어리지고 풍화작용의 결과와 같은 시간성을 느끼게 하여
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시각화한다.
이제 '아름다움'은 꽃이나 꾸며진 여인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그 이미지를 상상하게 하는 '객관식 문제풀이나 감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주관적인 개인의 느낌이나 판단'이 중요하게 된다.
Jean Fautrier-Head of a Hostage series
Skinning(The Grand Hostage)
-Jean Fautrier
포트리에의 마티에르는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상실된 인간의 존엄성과
대중의 고난, 고통, 살인, 부패 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림 속에 표현된 육체는 부패되고 깊은 상처가 곪아가고 혹은 타박상을 입고 썩어가는 동물적인 살이다.
화가의 격한 분노의 본능적 감정은 마티에르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두껍고 거친 마티에르로부터 스며 나오는 인간의 이미지는
마치 유물이 발굴되는 것처럼 잔혹한 기억들이 떠오르게 한다.
작가가 체험한 잔인하게 고통 받는 인간의 끔찍한 상황은 화폭의 질감과 서정적인 색채에 의해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이 직접적으로 깊은 감동을 주면서 전달된다.
포트리에의 작품 안에서 형상이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의 회화는 구상화가 아니다.
그는 형식적인 재현이 아니라 감동과 의미를 중시하는 내적인상의 재현을 위해 노력했다.
추상도 구상도 아닌 포트리에의 작품은 진정한 의미의 '비정형' 회화이다.
앵포르멜 미술의 기원은 전쟁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억압된 인간의 극한적인 정신구조를 다루고 있고,
기존 가치의 상실에 대한 대안으로 인간의 실존에 주목하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1947년 비평가 '미셸 타피에'와 화가 '마티외'가 기획한 전시회는 또 다른 가능성을 연다.
마티외 자신이 ‘서정적 추상’이라 명명한 이 방법은 즉흥성이 절정에 달한 사태를 보여 준다.
이 방식은 급속히 유행하게 되어 1960년 '파티에'는 108명의 앵포르멜화가를 조사해 모아놓은 책
[또 다른 형태론]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정신적 즉흥’을 행위의 시발점으로 본다.
그러나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업을 익히 알고 있던 마티외는 1951년 그들과 대립하기 시작,
사실상 미국인들에 비해 파리에 거주하는 미술가들에게 회화란 더 격렬하고 덜 극적이다.
미국작가들과 구분하기 위해 그들은 곧 ‘앵포르멜’, 또는 ‘타시즘’(Tachism) 이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된다.
화폭은 그들의 감정적,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표출하는 극장이었다.
그리는 행위와 그 행위의 창조적 자유가 회화의 주제가 됨은 미국 화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데생이 만드는 형태에 좀 더 긴밀히 연결되어있으며, 그림의 닫힌 공간에 대해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앵포르멜 이론을 구체화 시킨 것은 비평가 '미셀 타피에'이다.
그는 [또 하나의 예술] 이란 소책자에서 본래 앵포르멜의 근원적인 생명의 징후는
구상/비구상의 대립을 부정하고, 생생한 형태를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입체파와 기하학적 추상은 붕괴된 고전주의의 마지막 절규에 지나지 않고
초현실주의는 낭만주의의 문학적 변종이라며, 가치전도를 위해 반 휴머니즘의 극한까지 밀고 갔던
니체와 다다이즘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산으로 규정한다.
1952년 6월에 타피에의 주도하에 [앵포르멜의 기표]라는 전시회가 열리면서 이 운동은 구체화되기 시작,
이 전시회의 명칭은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의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기표’와 ‘기의’를 하나로 보고
비정형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다. *기표-지각 가능한 부분, 기의-내재된 의미
타피에는 앵포르멜 미술에서는 표현의 제스처보다는 마티에르(질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것이 미국의 액션 페인팅과 다른 점이다.
포트리에 뒤뷔페 등 모든 앵포르멜 미술가들에게 '마티에르'는 일종의 '정신성 복구'의 주체로서 도입되었다.
앵포르멜 미술에서 '마티에르'는 '정신성'으로 되돌려진다.
너무 빨리 유행을 탔던 이 서정추상, 즉 앵포르멜은 이후 그 후계자들에 이르러 모방자들의 답습으로 인해
본연의 가치를 잃게 된다.
6ㆍ25 사변은 우리나라의 정신적 풍토를 기묘하게도 제2차대전 후의 유럽의 그것에다 직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듯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20대에서 전쟁을 가장 참혹하게, 가장 절실하게 살아낸 우리의 젊은 세대와
2차대전 후의 유럽의 폐허를 방황하는, 이른바 아프레게르(apres-guerre, 전후)라는 현대문명과
전쟁의 사생아들 사이에 맺어진 체험적인 공감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종의 ‘불신의 세대’였고, 급기야는 안이한 유산을 버리고 세계의 흐름에 뛰어들어 스스로를 연소하려는 세대였다
앵포르멜 미술은 60년대 중반까지 ‘현대작가초대전’이나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같은 전시공간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지만 그 후 서서히 냉각되며 70년대의 모노크롬 회화에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의의와 평가]
앵포르멜 미술을 계기로 한국 미술계는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유럽이나 미국의 미술양식과
늦게나마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국제적인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
앵포르멜은 양식적인 면에서 분명 서구 모방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권위에 대한 도전, 개인의 표현과
창조적 자유의 존중과 같은 개혁적이고 전위적인 움직임이었고 서구 모더니즘의 본격적인 수용이었다고 평가된다.
앵포르멜의 실험정신은 많은 미술가들에게 국제적 흐름에 눈에 뜨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고
60년대 이후 한국미술계에 추상을 유행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참고문헌]
『현대미술에서의 환원과 확산』(이일, 열화당, 1991)
「전후추상미술계의 에스페란토, ‘앵포르멜’ 개념의 형성과 전개」(정무정, 『미술사학』17, 2003)
「해방이후 한국현대미술의 전개」(김영나, 『미술사연구』9, 1995)
Un Art autre (Tapie, Michel. 1952)
L'art informel (Paulhan, Jean. Paris: Editions Gallimard, 1962)
첫댓글 기막힌 발췌능력은 저를 꿰뚫는 힘이 생기고 저의 배경이 모두 나와 있네요.
저는 앵포르멜을 받아드려 파리쟌느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결혼으로 막을 내렸죠.
멋진 대학생활과 젊음의 열기가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로 남아 그걸 꺼내 보여 드리겠습니다. ㅎㅎㅎ
60년대 저의 그림을 보여 드릴게요. 이 그림이 논꼴전에 출품작입니다. 제가 아직 소장하고 있어요.
그때 당시 여성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찌보면 가정에선 내놓은 계집애로 보는 경향이 있지요.
그런데 저는 개의치 않고 미술이론이 너무 좋았었지요. 그것에 아방갸르라는 의식이 있었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감상의 특권 하나로
작품 속의 '면'에 빠져 놀라운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말로 형언치 못하는 바로 그 절대적인, 궁극의 세계
자연의 무아적인 힘에 의해 면의일상님의 작품에 빨려들어가버린 순간
무의식의 세계에 닿아있음을 느낀 사람은
헤어나지 못합니다
말레비치의 그림을 보고 더 이상의 그림은 없다고 극찬을 했다지요?
저는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면의일상님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또 지금도 진행중임을 기적처럼 여기는 감상자일 뿐이며
그 소임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제가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