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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36)
- 주기도에 있는 자와 용서 -
마태복음 6장 14-15절/ 14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제자들이 어떤 기도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에서 제자들이 기도에 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 의를 행하는 기도와는 확연히 다른 전혀 다른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신 기도에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해 나가시는 일, 그래서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알게 하시며 그 구함에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는 그의 아들들에게는,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게 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을 작정하셨기에 반드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심으로 그 기도에 있게 하시고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기도와 상관없이 느닷없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용서’에 대한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치셔서 그 기도에 있게 하시고서는 그들이 그 구함에 있는 기도에 있는 것에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에서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주시겠다고 그 뜻을 정하셨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그들의 죄로부터 용서하시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죄 용서하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이 용서의 구함에 있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용서의 구함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신 죄 용서가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시며 그들의 죄 용서를 위한 구속 사역을 해 나가심에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수행하여 죄 용서의 구속 사역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그 성취의 때가 올 때까지 예수님 안에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 있는 것은 그들에게 늘 따라다니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12명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예수님이 자신들을 “나를 따르라”고 불렀고 그 부르심을 따랐으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고자 하십니까? 예수께서 그처럼 그들을 불러 자신을 따르게 하여 그들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자신들의 주가 되셨는데, 그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이 자신들에게 나타내시는 일에서 알게 되어 하게 된 것은 “주님, 나를 떠나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뭔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고백하는지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으면서 뭔 죄를 지었다는 것을 그리 볼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제자들의 대열을 예수님과 동료들이 모르게 살짝 벗어나서 그들이 알 수 없는 자신만이 아는 뭔 일을 했기 때문인지요. 가령 밤 중에 방을 빠져나와 맛있는 음식을 사먹고 돌아와서는 안 그런 체 해선가요. 아니면 다 큰 어른이고 나이 또한 지긋한데 뭔 장난기 있는 행동을 해서인가요 아니면 무슨 사고를 쳐서인가요. 그래서 그러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는 괴로워 견딜 수 없어서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인지요. 아닙니다. 그러한 내용에서의 자신이 죄인됨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릴리 바다(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일을 하는 중에 느닷없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그를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시면서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기잡는 어부인 베드로를 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그래서 양심에 가책되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자신이 죄에 있는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낱낱이 드러내 고발하는 율법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서, 그리고 그 율법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만든 많은 계명을 가지고 의롭게 살고자 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처음부터 의롭지 못한 죄인이라는 사실의 인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에서 의인되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율법을 지킨 의에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의로운 자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 의에 있는 자신들이 또한 그렇게 매일 율법을 행하며 살아온 것에 있듯이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의에 있어야만 하는 죄인인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율법을 행하여 지킨 의로서는 의롭다 함에 있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 잡는 일을 통해서 자신이 마음에 애쓰고 힘써 수고하여도 하지 못하는 것을 그래서 고기 잡는 아무런 소득을 갖지 못한 것을 주이신 예수께서 말씀 한마디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는 참으로 기이한 일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타내시는 권능에서 죄도 사하시는 권능을 지니신 주이심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하여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그의 생각이, 그래서 율법을 보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알고 온 그의 생각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일을 겪은 것입니다.
율법의 계명을 달달 외우며 율법의 모든 계명을 행하여 그 의롭다 함에 있어 왔는데, 그리고 또한 애쓰고 힘써 지킬 율법의 준수자로 있는데, 지금 자신 앞에 계신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듯이 자신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율법관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가 단 한순간에, 참으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잖습니까? 그동안 자신은 죄가 가져올 형벌로 인해 그 두려움과 무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생을 율법을 행하여 지켜왔고 앞으로도 일생을 그렇게 율법을 행하여 지킴으로 의롭다 함에 있으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한마디로 죄와 의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는 권능을 예수님에게서 보게 되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한에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기에 죄인인 자신으로부터 주께서 떠날 것을 구하였습니다. 이는 주님께 죄 사함, 그러니까 죄의 용서를 구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고자 하는 구함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여 지킴으로 의롭고자 하는 것은 그래야만 하는 죄인임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여 지킴으로 율법대로 행하지 않은 죄에 있지 않은 의에 있었지만 율법을 행하여 의로움에 있은 그 의가 그 자신을 결코 의인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여전히 항상 율법에 자유한 자로 있지 못하고 율법의 종으로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신에게 예수님이 주가 되심으로 율법으로 결코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는 죄인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됨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 구함에 있는 자에게 그 구함의 믿음에 있는 대로 죄 용서를 주시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참으로 필요한 것은 죄 용서 받음에 있어야 하는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그들이 그 죄 용서에 있는 구원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그들이 늘 함께 하며 같이 사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통하여 겪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용서’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누군가의 과실을 용서하면, 그러한 우리의 착한 마음,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잘못하며 저지른 과실을, 곧 죄악을 용서하여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알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남에게 자비를 베풀줄 모르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서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러지 말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잘못하고 죄를 저지른 것이 있으면 용서를 베풀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를 보고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실 있게 하자는 것으로 가져나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앞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알았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렇게 기도하라”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이것에서 알게 해주시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빚)을 용서(탕감)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죄(빚)진 자들에게 죄(빚)을 용서(탕감)해 주는 것으로 증명됨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를 의미합니다. 개혁교회가 바른 신앙을 위한 유산으로 소유하고 있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26문답에서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당신의 은혜가 우리 속에 있는 증거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충분히 용서한 것처럼 우리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가르치고 있기에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에게 죄 지은(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완료시제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그 죄(빚)의 사함이 이미 ‘완료된’ 사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빚) 사함의 구함에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누군가를 용서하여 준 사실을 내세워 요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을 이미 예수님이 이루실 구속 사역에 두시고 이를 작정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정한 그 뜻은 우리의 죄를 용서한 그 용서에 두고서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완료된 것에서 끊임없이 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에 이어지는 것으로 본문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죄)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죄)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죄)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죄)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논리는 “너희가 너희에게 범한 사람의 잘못(과실)을 용서하였느냐?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께 범한 과실(죄)을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에게 과실(죄)을 범한 자들을 용서하는 작은 일에 있을 뿐이지만,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은 용서받을 수 없는 과실(죄)에 있는 그들을 용서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이 사람의 과실(죄)을 용서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과실(죄)을 용서받을 수 있는 어떤 기대도 갖지 말라! 그럴 수 있는 기대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람들의 과실(죄)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또한 이를 괘씸히 여기시는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과실(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과실(죄)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 죄에 그가 있음으로 그 죄값을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에서 지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으로 그분 안에 계신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에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하늘의 아버지께로부터 죄를 탕감 받음에 있음을 알게 하시는 기도에 있게 하셨으며, 그 기도에 있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죄 사함의 주를 증거하여 나갈 때 주님을 배척하며 자신들에게 과실(죄)을 범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여 줄 것을 구함에 있는 기도에 있는 것에서 제자들과 제자들이 용서를 구하는 그들 모두를 죄에서 용서하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의 요지는 우리가 사람의 과실(죄)을 용서한다는 것이 무턱대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할 수 있는 모든 죄를 아무런 조치도 없이 무턱대고 용서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죄 용서에 있는 우리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있게 되는 사람의 과실(죄)을 용서하는 것에 있는 것이 무엇에 기인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로 가르치신 기도에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주기도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이루어짐이 있습니다. 즉, 기도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임하였으며,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사람들의 과실을 용서하는 것에서 오직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고자 하는 그 복음으로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용서에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 곧 복음이 전해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권세요 그 권세에서 행해지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항상 기억하고 그 의식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자라는 것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알려 주신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름에 둔 제자들에게 그들 안에 계시고 있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그것이 용서라는 것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막고 방해하는 대적이 있습니다. 악한 마귀로 불리우는 사단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우리가 서있는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기회를 찾으며 그 기회를 얻는 대로 미혹하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사단의 미혹을 받아 얼마나 많이 넘어지는지요. 그래서 얼마나 많이 자주 주님에게서 돌아서고 대적의 한패에 휩쓸리는지요. 그럼에도 그러한 우리를 주께서는 항상 용서에 두시며 돌이켜 용서에 감복한 자로 살게 하십니다. 오뚝이 라는 게 있지요. 이리 맞고 저리 맞으며 그때마다 넘어집니다만, 그럼에도 또한 항상 일어서는 것은 그 오뚝이 안에는 중심의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의 중심에 자리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우리는 죄 용서에 있는 자로서 그분의 죄 용서하심을 전파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대속주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는 믿음에 있는 자마다 죄 용서를 받아 죄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란 것입니다. 그렇게 “너희가 사람의 과실(죄)을 용서하면”에 있게 하십니다.
그러한 주기도에 있게 하신 기도를 우리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한 기도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가르치신 것에서 나타내시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행해지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자신이 만들어서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만든 기도를 가지고 그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또한 그 기도 응답을 만들어 갑니다. 가령 건강을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죠. 온갖 좋은 음식을 먹고 보약을 마시며 좋다는 갖가지 운동을 취합니다. 사업에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공부와 노력을 하는 데요. 잘 살기 위해서 또한 얼마나 많은 계획과 준비와 근면 검소 절약 생활을 해나가는지요. 옛날에는 아들 얻기 위한 기도도 많이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기도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성은 아들을 낳을 수 있기 위한 갖가지 조치를 가져나갑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는 기도는 자신들이 만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기도를 응답받기 위해서 자신이 그 기도의 응답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는 기도는 예수께서 알게 해주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그 구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용서에 있으신지요. 그는 참으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로 알려주신 하나님의 뜻인 죄 용서에 있는 자입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교회학교<주일학교>에서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또 무엇 무엇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라고 노래합니다. 죄 용서가 없이는 하나님 나라는 정말 못갑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그런 사람이 발생해도 죄 용서가 없이는 그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혜로도 해 내지 못합니다. 그런 것으로는 결코 발생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느냐면요. 사람이 자기 의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곧 돈으로는 권세로는, 이런 저런 행위로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그것으로는 죄 용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 용서는 그러한 것을 통해서 오지 않습니다. 죄 용서는 예수께서 죄인의 속죄를 대신하는 대속주로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하고, 반드시 모든 사람이 다만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의지에 있을 수 있는 은혜인 피를 흘리셔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써만 죄 용서가 있습니다. 이 용서에 있는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