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에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영적으로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보다 몇 백배나 더 많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하며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의 고백은 영들을 끌어당깁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입술은 부정적인 것이 아닌 사랑의 고백과 감사와 찬양의 고백과 신뢰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죄의 고백과 죄인됨의 고백이 전적으로 부정적인 고백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고백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의 고백은 주님의 인도와 감동이 아니면 자칫 잘못하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양의 부흥 역사에도 죄의 고백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개적인 죄의 고백을 아주 좋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집회 가운데 성령님의 감한 감동을 통하여 그러한 인도 속에서 고백을 드릴 때 거기에는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고백들이 고백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는 이들의 영혼을 떨어뜨리고 무겁게 하는 일이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은혜와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은 주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이지 우리가 잘났거나 어떤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또는 어떤 이들이 귀하고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이에게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나는 꽝인데.. 남들이 나를 아주 신령하고 믿음좋고 그러한 사람으로 보면 어떡하지? 하는 염려는 의미없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한심한 사람일수록 은혜가 임하는 것이니까요.. 주님께서는 너무나 한심한 인간들을 얘는 내가 아니면 도대체 아무 것도 못하는구나.. 하고 임하시는 것이지 잘난 사람에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 없이는, 주님 없이는 스스로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로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어떤 조건들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은 마귀의 정죄로 인하여 죄책감에 쉽게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자기 속의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하여 죄의 고백을 쏟아내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깊은 침체에 빠지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공격에 대하여 분별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죄를 용서하셨으며 그것을 다시 기억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기억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다시 주님께 기억시켜드리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고백도 주님의 인도와 감동 속에서 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감동과 인도 속에서 하는 회개는 얼마나 시원하고 후련하고 달콤하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고백하면 할수록 마치 영혼 속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 같으며 겉으로는 울지만 속은 마치 영혼이 날개를 달고 하늘높이 올라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주님이 감동하시는 회개입니다.
나는 많은 이들이 마귀의 정죄에 속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에 있어서 좀 더 자라가야 하며 그들의 공격을 분별해야 합니다.
십여년 전 목회의 초기에 어떤 자매가 한동안 우울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매는 헌신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매우 명랑한 자매였는데 이상하게 아주 침체된 모습으로 한동안 지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매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정죄의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자매에게 악한 영을 �i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매는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자아가 너무 깨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성이 너무나 슬프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자신은 너무나 악한 존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가 않아서 나는 그녀에게 손을 가슴에 얹으라고 하고 그 위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자매를 속이는 악한 영들이 떠나가도록 기도하고 명령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그녀는 눈동자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녀가 기가 막힌 표정이었습니다. 내가 기도를 시작하자 마자 가슴에 얹혀있던 것이 쑤욱 내려가버렸다며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머.. 기가 막혀.. 그럼 내가 그동안 계속 속은 거란 말이에요? 어머.. 세상에.."
그녀는 한동안 어처구니가 없어했습니다. 그녀가 다시 밝고 명랑하고 재미있는 모습으로 돌아간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이들은 아마 다시는 마귀에게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속습니다. 그것은 마귀는 시험의 전문가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있지 않을 때 언제든 찾아와서 가장 합리적이고 그 사람의 기질에 맞는 속임수를 속삭이기 때문에 또 속고 넘어지고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속임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밝은 성품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은 감사와 찬양과 경배입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삶입니다. 즐겁고 행복해하며 인생을 누리고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밝은 곳에는 마귀가 잘 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둡고 습한 죄책감과 근심과 염려와 자기 연민과 온갖 어두운 마음을 심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도 너무 골똘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은혜에 대하여 묵상하십시오.
어둠을 깊이 묵상한다고 해서 빛이 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빛을 깊이 묵상하면 어둠이 소멸되어집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술을 끊고 싶어하고 담배를 끊고 싶어하고 죄를 끊고 싶어해서 계속 술과 싸우고 담배와 싸우고 죄와 싸웁니다. 그러나 주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며 몰두하면 그런 것들은 자연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외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고독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그가 어떤 애인을 사귀었습니다. 그는 어느 정도 고독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애인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온갖 나쁜 일들이 계속 그로 인하여 생겨났습니다. 이 사람은 그와의 교제를 끊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이 들어서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나쁜 것은 알지만 그 없이 고독해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답답했습니다.
그와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 수없이 결심하고 결심하고 결심했지만 막상 그를 만나러 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돌아와서 다시 후회하고 후회하지만 또 다시 그를 만나러 갑니다.
너무나 괴로운 상황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지요. 이 사람에게 새 애인이 생겼습니다.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귀고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을 변화시켜주고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는 사람입니다. 자. 이제 옛 애인을 끊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 애인을 깊이 묵상한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 애인을 생각하고 그의 사랑과 인품을 생각할 때 그 새로운 빛으로 옛 어둠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우주안에 있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 우주 안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지 못합니다.
당신의 죄를 깊이 묵상하지 말고 현실의 어려움을 깊이 묵상해서 어둠 속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그 은혜를 묵상하십시오. 그분의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을 그분의 거룩하심을 그분의 영광을 묵상하십시오.
당신의 안에서 어두움이 사라지며 그 영광의 빛이 당신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고백을 하지 마십시오. 하루종일 자신의 죄만 묵상하고 환경의 어려운 것만 묵상하면서 어둠 속에 떨어지는 이들은 진정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묵상하는 시간에 주님의 의를 묵상하십시오.
고통스러운 환경을 묵상하는 시간에 주님의 인도와 선하심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묵상하고 시인하는 그것이 영들을,미래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입술로 주님의 사랑을 외치십시오. 입술로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자신의 부족함보다 이러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그분의 끝없는 인자와 자비를 선포하십시오.
그 사랑과 감사를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보여주십시오.
오늘도 여전히 무한하고 모자람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덮으시고 함께 하시는 그분께 모든 영광과 감사와 사랑과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오, 주님.. 백만번도 더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II.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회개를 의지하면 그것도 우상이 된단다. 회개가 다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주님이 회개의 영을 주실 때만이 생명이 된단다.
회개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며 회개를 섬기는 것과 주님을 섬기는 것은 다르다. 사명도 우리의 주인이 아니며 사명을 섬기는 것과 주님을 섬기는 것은 다르다. 이 두가지의 차이점을 분별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속고 눌리고 실제를 잃어버리게 된단다.
주님을 보지 않고 복음전파만을 보아도 눌리고 영이 죽는 단다. 주님을 보지 않고 사랑을 보아도 영이 죽지. 그것들은 다 우상이 될 수 있단다.
우리의 영이 망가지는 것은 나쁜 것 때문일때도 있지만 좋은 것일 경우도 많단다.
좋은 교리, 지식, 열심, 능력.. 다 이런 좋은 것 때문에 교회가 파괴되고 성도들이 미워하며 마귀에게 눌리고 속지...
산악과는 생명이 아니다. 악이 생명이 아닌 것은 당연하지만 선도 생명이 아니란다.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다.
오직 주님을 보아라. 주님 허락없이 함부로 회개하고 전파하고 움직이고 하지 말아라... 이 말은 어려울까? 아니다. 습관이 되면 쉽다. 사람들이 다 주님을 붙잡지 않고 다른 좋은 것을 붙잡고 사는 삶에 익숙해져서 처음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 뿐이지...
주님 안에는 회개도 진리도 복음도 사랑도 거룩도.. 모든 것이 다 존재한단다. 그리고 주의 영 안에는 항상 자유함이 있단다... 회개도 진리도 사랑도.. 어느 순간에 자유함이 사라지면 그것은 중심에 주님이 떠나시고 껍데기의 행위만 있는 것이란다.
주님없는 회개는 죄책감으로 눌리며 주님없는 사역은 영혼이 지치며 주님없는 편안함은 영혼을 나태하게 하고 주님없는 고통은 그저 괴로울 뿐이다.
주님이 처음에 회개를 요구하셨을 때 사람들은 열심히 회개를 하지. 그런데 주님이 다른 영으로 인도하시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회개를 한다. 이것을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지. 그래서 처음에는 바른 회개를 하다가 나중에는 마귀에게 눌려 버린단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란다.
III.
우리는 육을 가지고 태어나며 일정 기간동안 그러한 어둠 속에서 헤메고 자라가게 되어 있으며 주님을 그것을 잘 아신다.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사단은 항상 균형을 무너뜨린다. 죄책이 없는 것도 문제이며 너무 죄책에 빠져도 문제다. 사단은 항상 너무 띄웠다가 너무 떨어뜨린다. 그들은 중간과 균형에 있게 하지 않는다.
자매는 자책의 기운이 너무 많구나...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거룩해지고 자라며 우리의 통회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밝고 맑으면 나는 그에게 회개와 자기 부인에 대하여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가 별로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아보지 않고 그 결과 자책과 어두운 기운이 많으면 나는 그에게 주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은혜 속에 푹 잠기기를 권한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한국에는 거의 대다수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용납이 뭔지 모르며 억압과 눌림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에게는 꾸짖음보다는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책보다 주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자꾸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IV.
적용을 시키는 분은 성령님이시며 영의 역사이며 기름부음이다. 그러므로 바깥의 말씀을 율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내 안에 활활 불타오르게 역사하시는 분이 주의 영이시다.
우리는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이 내면의 영의 감동이 없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내면의 기름부음이 안에서 지지해주지 않는데도 다윗은 이렇게 했다.. 하고 따라 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그것은 옳지만 우리의 영을 소성사키지 못하며 영이 안에서 병들고 약해지게 된다. 오늘날 이와 같이 내적인 감동없이 외적 법으로만 움직이는 경향이 너무 많다.
중요한 것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주의 영이 지금 그 말씀을 적용시키시고 함께 하시느냐 그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내면의 감동, 영의 역사가 빠지면 율법이다.
신앙생활 힘들게 하는 것은 쌩깡으로 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임해서 금식을 할 때는 입맛도 없고 아무 것도 먹기 싫고 기분이 청량하고 기도만 하고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은혜가 없으면 힘이 빠지고.. 자꾸 먹을 것만 생각나고.. ^^
예전에 일 주일간 금식하려고 작정했는데 은혜없으니 무지 힘들었다. 그 때만 해도 날라리의 영이 충만히 임하지 않은 터라 끝까지 한다면 한다.. 한 번 결정한 건 한다.. 이런 식으로 버텼는데 예배 시간에 얼마나 힘이 없는지.. 옆에 마침 은혜엄청 받고 씩씩하게 박수치는 자매가 있었다. (남이 은혜받는 거 보면서 시험드는 사람들 위로를 받으세요.. 저도 종종 그랬습니다.)
예배 후에 그 자매가 와서 "형제님 왜 그리 힘이 없으세요?" 하기에 거들먹거리고 온갖 폼을 잡으며 "아.. 제가 금식을 해서요.." 했더니 며칠째 이신데요" "아.. 3일째입니다." 했는데.. 자매 왈 "저는 13일째인데요."
그 때의 비참함이란.. 아.. 정말 너무 슬픈 이야기이다. 챙피해서 까무라치는 줄 알았다.
지금은 싫으면 안한다. 은혜가 흘러 잘 될 때는 하고 싫으면 하지마라. 그 흐름으로 가야한다.
첫댓글 예수님의 영으로 새롭게 인도함 받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