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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 동란 전후의 이야기(26)
군 입대를 기피하고 얼굴 모양을 평소와 다르게 콧수염을 기르고
신사복 차림에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은근히 자랑을 하고 다니는
20대 초반의 형들도 있었다.
1956년에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나의 만화책 보기이다.
틈만 있으면 만화책을 보는데 친구한테서 빌려도 보고 가게에서 빌
려도 보았다.
그 때엔 왜 그렇게 만화책만 눈앞에 어른거리는지 참으로 특이한
징후라 생각한다.
코주부 김 용환 의 삼국지 만화는 거의 압권이었다.
그리고 김 용환 선생의 펜화로 그린 삼국지 인물 그림에 나는 홀딱
반하였다.
동아일보의 고바우 김 성환의 만화도 인기가 있었는데 ‘거드름 피
우면서 가는 사람보고 누구냐고 하여 대답하기를 저 사람은 경무
대에서 똥 푸는 사람이다’ 라는 만화는 당시에 압권의 걸작 풍자만
화였다.
신동헌의 만화도 참으로 재미있었고 뒤이어 나온 신동헌 그림과 비
슷한 신동우의 만화도 대단히 인기 있었고 정운경의 아지매 만화
도 많이 읽혔다.
나는 그 중에서 박기당의 만화를 참으로 좋아했다.
내용도 좋고 또 만화 속의 그림 표정이 너무 실제적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익살스러운 내용이 많았다.
만화가 이름을 잊었는데 '타잔'이란 만화는 여러 권 씩 차례로 나
왔는데 그 타잔 만화 기다리느라고 만화가게 앞에서 참으로 조바
심을 많이도 내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되면서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을 읽고 동네
친구들과 후배들을 한 방안에 모아 놓고 읽었던 고전의 내용을 등
장 인물 거의다를 빠뜨리지 않고 신바람 나게 이야기를 해 주었는
데 그 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그 이야기 듣던 일들을 회상해 주어
옛 생각을 하기도 한다.
수호지는 그때 '학원' 이라는 학생를 대상으로 하는 아주 건전하고
유익한 잡지에 연재되었는데 후일 정음사에서 간행될때 삼국지와
수호지는 그 즉시 사서 지금까지 지니고 다닌다.
내 경험으로 하여 말한다면 중학교 연령 3년 과정에서 얻은 고전문
학과 그 외 유익한 책들 속에서 얻은 지식 등 정서적인 것은 나의
평생의 사고를 좌우하는데 영향을 준 그런 지식의 습득 시기가 아
니었나 생각해 보기도 한다.
열여섯살 여름 방학 어느날 우리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까지 모두
데리고 도보로 동삼동으로 갔다.
태종대 못 가서 왼쪽으로 서발이란 지명이 있는데 그 곳 마을 뒤 왼
쪽 언덕을 넘어서면 동해바다의 장관이 펼쳐지는데 특히 그 곳엔
'곰푸' 라 불리는 맛이 좋은 쇠미역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온동네 사람들이 그 곳으로 곰푸를 뜯으러 갔다.
지금 처럼 바다에 관리하는 임자가 있는 때가 아니었다.
모두들 바다에 들어갈 옷차림을 바꾸느라고 준비하는중 나도 수영
복을 갈아 입을려고 멀찌기 떨어진 커다란 바위 뒤로가서 수영복
을 갈아 입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지난해 가을 우리집 돌담 울타리를 넘어와서 코스모스를
마구 한 아름 씩이나 꺾어갔던 그 여학생이 있었다.
아무도 몰래 먼저와서 수영복을 갈아 입는 후생주택 28호 에 사는
Y J J 라는 동네에서 제일 예쁘다는 그 여자애가 놀라면서 벗어논
평상복으로 몸을 가리면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그 여자애는 수영복은 다 갈아 입은 상태 였지만 나도 크게 당
황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렇게 맞딱드리다니!
예고 없이 일어난 그러한 장면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좀처럼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다.
서로가 당황하였고 나는 뒷 걸음으로 얼른 그 장소를 피해 다른 곳
으로 가서 수영복을 갈아 입었다.
그 여자애와 이후에도 장소가 다른 곳에서도 가끔 지나 쳤지만 한번
도 말을 건네 보지 못한 사이였는데 세월이 다 지난 지금까지도 기
억 되는 것은 어이된 일인가?
그날 바다에서 어릴 때 부터 해변가에서 자란 나는 수영솜씨도 마
구 뽑내면서 자랑하였고 해녀들 처럼 물 속으로 거꾸로 자멱질 해
가면서 곰푸도 많이도 땄던 아름다운 추억도 있다.
1957년 2월인가 겨울 방학 끝날 무렵 나는 장차 교사가 되려는 꿈
을 가지고 부산사범학교에 지원하여 입학시험을 보았는데 불합격
하였다.
원인 분석을 하자면 학업 실력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사범학교 지원 생이 너무도 많아 경쟁율이 대
단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곳에 입학하면 수업료 등, 모든 공과금을 내지 않아 편하게 공부
할 수 있고 또 열심히 공부하면 선생님도 될 수 있었는데 참으로 아
쉬웠으나 열등 의식만 안고 말았다.
다니던 학교의 고등학교가 주간이 없어지고 야간 고등학교만 있게
되어는데 나는 아버지가 계시는 학교였던 이유로 수업료를 내지 않
고도 공부할 수 있는 점이 있어서 청구고등학교 야간부에 다녔다.
내 다정한 친구 K S I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려운
S 대학교 사범대학에 합격하여 들어갔고 평생 교직에 봉직하고 경
력이 쌓인 뒤엔 교육계의 모범이 된 이라 하여 서울에서도 요직인
곳에 교육장에도 임명되어 큰 소임까지 역임 하였다)의 아버지께
서 1956년 겨울 오랫동안 병환으로 고생하시다가 청학 동에서 조선
소로 넘어가는 언덕길 오른쪽 천막촌 꼭대기 낮으막한 텐트 속에
서 온 가족의 간호도 헛되히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셨다.
친구의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어린 동생의 쓸쓸하고 추운 겨울은
더 추웠고 그해 겨울의 부산항구 바닷 바람은 잔인하리만큼 매서
웠다.
참으로 슬픈 그 시절 친구와 그 가족의 사연이었다.
친구 K와 나는 1월 중순 한겨울 커다란 주전자 하나를 들고 청학동
에서 동삼 동으로 너머 가는 길 왼쪽 아래 벼랑길을 내려가 바닷가
에서 돌 바위를 들춰가면서 고동, 해초 그리고 방게를 잡으러 갔다.
집에 가지고 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끓여먹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나와 친구는 맑은 바닷물을 내려다보다가 바닷물 속에서 물
결과 같이 일렁이는 제법 크게 자란 미역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였
다.
서로 무언의 눈짓이 통하였던지 우리는 아무도 없는 해변가 주변
을 다시 돌아보고 약속한것도 아닌데 거의 동시에 옷을 홀딱 벗고
바닷물 속으로 갑자기 뛰어 들었다.
몇 번의 자멱질을 해 가면서 미역을 뜯었는데 미끈미끈한 미역이
잘 뜯어지지를 않았고 전후좌우도 돌볼 새도 없이 싱싱한 미역이
탐이
나서 뛰어 들었는데 우선 한겨울에도 가장 추운 그 때의 겨울바람이
우리를 가만 놔둘리 없었다.
추위가 몰려드는데 이건 보통이 아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많이도 노닐던 곳 이지만 한 겨울의 우리들 동심의
장소는 그게 아니었다.
우선 엉덩이부터 시려 들어오는데 흡사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
이 시렸다.
시리다 못하여 아픈 통증까지 느껴졌다.
앞 배아래 부분도 거의 동시에 시려 오는데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물 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이 덜 시렸다.
나는 너무도 추워 옷 벗은 곳으로 얼른 나오고 싶었는데 내 친구는
연신 자멱질을 몇 번 더하면서 열심히 미역을 땄다.
따낸 미역을 돌 바위에 던져 놓은 채 우리는 사시나무 떨듯이 우둘
우둘 떨면서 옷을 주워입었다.
누가 시킨다면 한 겨울에 그렇게 했을 리 없었는데 스스로 한 행동
이지만 참으로 도전하는 용기가 대단하였고 한편으로 미련하기 짝
이 없었다. 여담이지만 후일 우리가 서울에 와서 공부할 때 막걸리 잔을 기울
이면서 그때의 일을 얘기하고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친구와 나는 그해 겨울 추운 바닷물 속 미역 뜯는 경황 속에
서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무심코 홀딱 벗은 아랫도리를 내려다
보다가 사춘기의 성징이 내려 다 보이는 신체아래 부분에 나타나
평소와 다르게 변해있는 사실을 그 때 처음 발견하고 부끄러워서
'너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하니 내 친구도 그 때 처음으로 확
인하고 그도 그런 심정이었다 하면서 그 때의 똑같이 느낀 마음가
짐 때문에 손바닥을 치면서 쑥스럽게 웃으면서 회상한 적이 있었다.
또 언젠가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소설가 이 외수 씨가 방송 대담에
나와서 그분이 소설을 쓸 때 경험 없는 묘사는 독자들의 공감을 불
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주제로 ‘춥다’ 는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그 분
의 경험담을 이야기 하는데 춥다가 잘 묘사되지 않아 한 겨울 한 밤
중인데도 홀딱 벗고 양재기 들고 나가 대문간 앞에 웅크리고 서있
으니 갑자기 무섭게 추위가 밀려와 몸에 닿아 느껴지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아래턱을 까불며 아래 윗 잇 빨을 다다닥 부딪쳐 가면서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가 추위에 대한 묘사의 글을 썼는데 아주 금
방 술술 잘 써 지더라 하고 웃으면서 말을 했는데 피난시절의 이런
경험을 한 나 이기에 나는 그 분의 말에 온전히 공감하였다. 이렇게 친구와 나 우리 둘은 그해 겨울 가난한 피란생활 가운데 추
운 바닷물 속에서 미역을 뜯어가면서 발가벗고 비밀스럽게 사춘기
를 뛰어 넘었다.
그 이후도 너무나 가난하여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면서도 걸어
서 그 먼 보수동의 야간학교를 다녔고 참으로 성실한 내 친구는 수
소문 하여 새벽에 동아일보 신문 배달을 시작하였다.
구역은 자갈치 시장과 남포동 일대가 담당이었고 조금 있다가 나
도 친구에게 부탁하여 같은 신문을 배달했는데 구역은 영도다리 건
너 오른쪽 대평동 바닷가 동네였다.
처음 신문배달을 시작 할 때는 나도 고학하면서 용돈을 벌어가면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는 결심으로 좀 멋도 내려는 기분으로 시작했
는데 막상 시작해 놓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우선 책임감이 뒤따르는데 한번 약속을 해놓고 내 자신이 뛰어드
니 내가 다부지게 마음 고쳐먹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
다.
이 때에 어른 사회가 어더하고 우라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대하여 눈이 떠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 당시의 사회상을 알게 된 것이다.
우선 동아일보 지사에 소개시켜준 내 친구에 대한 약속 이행이었다.
내 친구는 아주 성실하고 또 책임감도 강하여 신문지국의 상(尙)씨
성이신 지사장의 신뢰가 대단하였고 선배들도 아주 신임하는 그런
위치였기 때문에 나도 어설프게 임했다가는 내 친구 위신에 피해
줄까 보아 그것이 크게 조심스러웠다.
새벽 신물 배달을 나가게 되니 야간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거의 자
정인데 새벽 3시반정도는 일어나야 영도청학에서 걸어나가 조선공
사 앞 해안 길을 따라 영도다리까지 급히 걸어도 꽤 시간이 걸리곤
했는데 당시는 통행금지가 새벽 4시에 해제되기 때문에 더 일찍 집
에서 나설 수도 없고 또 고단하여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여 매일
새벽 할머니께서 손자 깨우시느라 애를 쓰시게 만들어 드린 경우가
되었으니 참으로 스스로 떳떳하게 제일을 챙겨하는 것이 얼마나 어
려운 것인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새벽에 독자들이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열일을 제쳐 놓고라
도 반드시 배달에 임해야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정확한 신문 배달은 신문사의 명예와 관계되는 것이기 때
문이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그날 하루를 시작하는 기쁨을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소식 좋은 글이 게재 되었더라도 그날 독자에게 정확
하게 배달되지 않으면 신문의 생명력은 없어진 것이나 마찬 가지
이기 때문이었다.
공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니 아무 곳에서나 나태하
고 태만한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이 때부터 일하는 것과 책임감에 대해서 항상 내 자신을 추스
리는데 게을리 하지 않은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함부로 말하는 것도 삼가는 법을 배웠고 동료 고학생들과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다니는 동아일보 지국은 부산 본역 앞 국제극장 옆 높은 축대
위 길건너에 있었는데 새벽 4시반에 부산본역에서 싣고 온 신문을
삼륜차에서 내리면 40계단 아래에서 대기하던 우리들은 그 즉시 커
다란 신문 뭉치를 어깨에 메고 단숨에 지사 2층건물로 올라가 널찍
한 마루바닥에 각기 펼쳐 놓고 신문을 오늘날의 기계로 접은 모양
으로 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개키기 시작하는 방안의 동작은 참으로 볼만하였다.
선배들은 신문을 얼마나 빨리 잘 개키고 또 삐둘지 않게 개키는지
일의 예술에 가까운 동작들이었다.
전문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그 때에서야 알았다.
나도 한 동안 어설프게 개키다가 나중에는 선배 형들처럼 잘 개키
고 또 배달할 신문 분량을 세는데도 아주 선수가 되었다.
그 뒤로 학교에 근무할 때 프린트 물 취급할 때나 지금의 A-4 용지
한권도 삽시간에 정확하게 세곤 한다.
두툼한 종이 뭉치를 남보다 빨리 정확하게 헤아리는 데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이다.
방법은 이러하다.
쌓인 종이 뭉치 오른쪽 끝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꼭 잡고 왼쪽 방
향으로 뒤집듯 비틀면 싸여진 종이뭉치 오른쪽 날들의 간격이 띄엄
띄엄 헤이기 쉽게 세워져서 왼쪽 엄지손가락으로 일회에 다섯장씩
헤어나가는 방법이다.
익숙해지면 엄청나게 빠른 동작으로 간단히 종이 세는 것이 해결
되는 것이다.
학교에 재직 시 필경을 교사들이 직접 할 시절에 프린트 된 시험지
를 능숙히 처리하니까 동료들이 어디서 배운 솜씨냐고 놀라서 묻
곤 하였다.
바로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신문 배달할 때 배운 솜씨를 나는 평생토
록 써 먹는 셈이다. 월 말이 되어 수금 때가 되면 지사에서 찰떡을 준비하여 배달원
에게 제공한다.
그때의 찰떡은 참으로 맛이 있었고 허기진 배를 충분히 채워 주었
다.
거리를 지날 때면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어른 손바닥보다 큰 풀빵
도 가끔 사 먹었는데 그 풀빵 맛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수금할 때 제일 골치 아픈 것은 신문값을 몇 달치 떼어먹고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사라진 아저씨들과 몇 달치의 신문 값을 내지 않고
버티면서 왜 신문 늦게 가지고 오느냐고 호통을 치는 어른들 때문
에 속도 많이 상하였다.
'벼룩이 간을 내먹지 신문배달하면서 고학하는 어린학생 봉급을
떼어먹고 달아나다니! 신문을 안보고 말지!' 하는 생각도 하였다.
당시에 신문배달 하는 고학생의 월급 처리는 일정금액을 지사에 납
부하고 나머지 잘 내지 않는 독자들의 구독료를 걷어서 배달 학생
의 봉급 몫으로 정했기 때문에 상권에 있는 배달 구역은 수금이 잘
되어 아주 좋았으나 나같이 비 상권 어려운 해변가 주택에 있는 동
네 담당은 매달 신문구독료 납부 지체 독자들과 흔적도 없이 떼먹
고 줄행랑을 놓는 독자들 때문에 내 봉급은 매달 적자여서 고생은
고생대로하고 그 알량한 신문배달 고학생의 월급은 매달 늘지 않
아 마음고생도 많았다.
수금이 되거나 되지 않거나 지사에서 월급을 주는 것이 아니고 미
수금 부분이 나의 월급에 해당하는 몫이었다. 어떤 집에서는 내가
배들을 가던지 수금을 하러 가면 미리 수금 날자를 기다리고 있다
가 대문앞까지 나오셔서 얼른 신문을 받고 신문 대금을 손에 쥐어
주면서 내 어깨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시는 아저씨들이나 할아버
지들도 계셨는데 대부분 가족을 이북에 두고 오신 이북에서 피난
온 분들이셨다.
그리고 고생이 많다고 하시면서 배고플 때 먹으라고 가끔 떡을 싸
주시는 인정 많은 아주머니들도 계셨다.
명절 때는 방에 들어와서 음식을 먹고 가라고 하여 신문을 다 돌리
고 그 댁에 나중에 다시 가서 감사히 먹고 온 때도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을 많이도 만났다.
그날은 참으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서 하던 일이 더욱 잘되는 것
같았다.
신문배달과 수금을 마치고 걸어서 영도다리를 건너 지사로 갈라치
면 오른쪽 시청 뒤쪽으로 가서 배에서 물건을 내려 하역하고 어마
어마하게 많은 짐들을 목도질 하여 옮기는 아저씨들과 할아버지에
가까운 분들을 가끔 보았다.
이유는 몇 사람의 신문독자 아저씨가 아침 일찍 나가면서 그 쪽 부
두가로 수금하러 오라고 하여서 지사까지 조금 돌아가면 되기에
그 아저씨가 일하는 부두엘 가서 아저씨가 일을 마치거나 잠시 중
단하고 쉴 때까지 나는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이 하역 부두를 잊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그곳엔 참으로 처절한 우리나라 모든 남자 어
른들의 애환이 다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신분과 업종 가려가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일하는 때가
아닌 시절이었다.
일거리가 있다면 거의 닥치는 대로 노동의 현장에 나가서 일을 해
야만 되는 때였다.
‘내가 이래 뵈도 과거에 ...어떻고!’ 이런 것은 통하지 않는 시대 상
황이었다.
‘체면이 밥먹여 주나!’
바로 그런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닥치는 대로 부지런히 일을 해야만 가족 입에 풀칠을 하던 시대였
고 자기의 전공대로 일거리가 나서는 것도 아닌 시대였다.
어디에 일거리만 있다면 무조건 들고 뛰어가야 하는 시대였다.
대학원 하던 청년이 목도질을 하고, 사장이 쌀장사를 하고 연탄가
게를 열고 지게를 지고 배달을 나가던 때였다.
배고파 쫄쫄 굶는 가족들을 멀거니 보며 병약자 아닌 이상 방구석
에 늘어져 있을 강심장의 남자들이 몇이나 될까?
6.25 직후는 모든 일에 이렇게 생명을 걸고 달려드는 형편이었다.
지금 같으면 특수 운전기사가 지게차로 짐을 싣고 주루룩 왔다 갔
다 하면 되지만 그 때에는 육중한 모든 하역물은 목도질로 옮겼다.
무게에 따라 다르지만 그 아저씨가 일하던 부두엔 엄청나게 무거
운 짐을 옮기는 곳이었다.
옮기는 짐 양쪽에 열명씩 또는 열두명씩 늘어서서 어깨에 목도질
하는 질이 잘나서 맨질맨질한 아주 굵은 목도나무를 모두 등뒤 양
어깨에 메고 양손으로 목도를 움켜잡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는
옆에서 보는 어린 나였지만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호흡을
맞추는 부두 노동자들 모두의 소리는 너무도 처량하게 들렸다.
단순 노동으로서는 남자들이 하는 세상에서 막판의 일을 하는 곳이
그곳이 아닌가 싶었다.
기운을 너무 써서 아저씨들의 걷어 부친 바지 가랭이 아래 다 들어
낸 장딴지가 금방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생선창자 같은 오글오글한
핏줄이 얽혀서 있는데 비지땀까지 흘러 반질반질하여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이 그분의 가족을 위해 기운이센 청년들 사이
에 끼어 버티는 모습은 너무도 불쌍하게 보였다.
부두에는 일거리가 많아서 목도질하는 정장년이외에 할아버지들이
참으로 많이 몰려 일하고 계셨다.
서로 기운이 치우면 금방 짐이 기울어져서 낭패를 보기 때문에 일
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되는 정교함이 있었다.
그러기 위하여 모두 목도질을 하면서 합창하듯이 똑같은 소리를 내
어 가면서 발을 맞춘다.
'허이야! 허이야! 허이야! 허이야!'이렇게 소리를 맞추고 떼어 놓는
발을 맞추고 짐을 한참 옮기다가 대장 아저씨가 '서고~!'하고 '천천
히 놓고오~!'하고 이끌면 모두들 똑같이 서고, 일제히 무릎을 천천
히 굽히고 그 육중한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거의 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움직이기만 한다.
힘의 소모를 막기 위함 이었으리라.
내가 갈 때는 점심시간 전후가 많은데 부두 바닥 노동판에 옹기종
기 몰려 앉아 싸온 도시락을 드시는 모습도 참으로 애닲었었다.
어디 호의호식 이었겠는가! 집에서 아주머니들이 정성스레 싸주시
는 방구 잘나오고 배가 금방 꺼지는 보리밥은 그래도 고급이어서
좋다.
내가 부두 일터에 수금하러 간 아저씨는 가족도 없어 부두가에 있
는 노상의 밀가루 풀빵 구워파는 곳에서 풀빵 몇개로 끼니를 대충
때우면서 나를 향해 씨익 웃으며 바지춤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
내어 신문대금을 주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해야지!'라고
격려해 주던 모습은 참으로 너무 고마운 정경이었다.
나는 이런 몇 군데를 만나면서 봉사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난리 때는 사람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와 말도 말못할 고생
을 하는 것도 많이 보았다.
부두에서부터 대로로 우마차로 짐을 나르는데 마 소가 끄는 수레가
너무 큰데 실은 짐이 산더미 같이 쌓인 것을 커다란 황소 한마리가
주인의 채찍을 맞으면서 고삐를 조이면 기운을 쓰며 앞발을 힘차게
내 디디면서 우람한 근육이 튀어나오면서 앞으로 짐을 끌고 나가는
데 코로 허연 김을 훅훅 몰아서 내 쉬어가면서 커다랗고 선한 황소
의 눈이 금방 튀어 나올 것 만 같이 충혈 되어 기운을 쓰느라 부릅
뜬 모습은 차마 안스러워서 볼 수 없는 애련 함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짐승을 함부로 마구 부리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
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 순진한 소와 말들이 인간을 위하여 저렇게도 힘을 다해 쓰다가
종국에는 인간을 위하여 소들은 제 몸까지 모두 다 내주고 말다니!
참으로 가축들은 고마운 존재이고 소중한 이웃이라 생각한다. 짐승
에게도 사람들이 잔인하지 않고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고 생각했다.
1957년 야간 고등학교 일학년 시절은 내 일생에서 참으로 삶의 의
미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1965년 군제대후 복학하고 그 해 겨울 같은 과 학생들과 서울역 앞
후암 동 쪽에 있는 신문배달 학생들만 모여 사는 불우시설에 나가
야학 비슷한 성격의 장소에서 봉사하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고
1968년부터 한 2년간은 남영 동에서 야학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친
봉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1997년 내가 쉰 일곱살일 때 어린 시절 고생할 때 이웃에게
봉사하던 사람들 생각 이 문득 문득 나서 성동구의 J중학교에 근무
할 때 집으로 바로가지 않고 2호선 전철을 타고 야간에는 영등포
지역에 있는 불우시설 학교에 나가 불우한 고학생을 무상으로 가르
치는 곳에 나가서 그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때가 있었는
데 그때 마다 나는 6.25 당시의 고생하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내 머
리에 스치고 지나 갔다.
주간에 각종 일 들을 하고 야간에 배우겠다고 눈이 초롱초롱한 어
린 학생들을 보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고 이들 때문에 나는 새로운
삶의 용기도 생겨났었다.
나는 그 때 신문배달을 하면서 첫 봉급을 탄 것으로는 할머니와 부
모님과 동생들에게 양말을 사드린 생각이 나고 내 몫으론 두툼한
비닐 비옷 하나와 유진이라는 이가 지은 영어구문론(英語構文論)이
란 책을 샀는데 이제는 다 낡아 누르스름한 그 영어구문론 책은 지
금도 내 책장에 꽂혀 있다.
이해 음력 3월에 우리집엔 또 한번의 경사가 났다.
나의 사랑하는 막내 여동생 선옥이가 건강하게 태어 났다.
피란생활 중 가장 안정이 되어가는 시기에 태어난 셈이다.
부산 시 영도구 청학 동 후생주택 27호 9평 되는 집에서...
이로서 우리 집 가족은 여덟 식구가 되었다.
나와는 열여섯 살 차이로 막내는 큰 아들이 대학에 다니다 지금 군
복무를 하는데도 내 아버지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때문에 그
가 어렸을 때를 회상하여 당시에 아주 엄했던 나의 모습을 떠올려
서 인지 지금은 큰 오빠인 나를 오빠이면서 아버지처럼 생각하여
나에게 어린 아이처럼 응석을 부려가면서 대하는 것 같다.
막내니까 그렇겠지!
내 일생 중 사춘기의 아름다운면도 꿈 많은 시기에 내 여동생이 고
생스럽지만 아름다운 오륙도가 훤히 내다 보이는 그런 곳에서 태어
난 것이다.
온 가족과 이웃들이 동생의 태생을 기뻐도 하였고 많은 축하도 해
주었다.
야간 고등학교 일학년 때 나는 잊을 수 없는 또 한분의 선생님을 만
나게 되었다.
나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깊숙이 심어주신 한찬식(韓讚植)
국어 선생님 이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