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 2장 1-10절
설교제목 : 두 왕 이야기
미다스의 손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주님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가장 깊은 어둔 밤을 지나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대하는 것이 더디 온다고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생명으로 희망을 품고 있음을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 안에 희망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미다스 왕의 신화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디오니소스 신의 사랑을 받던 미다스 왕(디오니소스의 개인 교사였던 반인부수인 실레노스가 포도주에 취해 잡히고, 그를 풀어주고 보답을 받음)은 자기가 만지는 것은 모두 황금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좋은 소원이 아닌 것 같다고 기회를 주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소원을 빌어 황금 손을 얻게 되어 그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은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너무나 황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왕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황금을 소유하여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왕이 될 것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음식을 먹으려고 음식을 만지니 음식이 황금으로 변하여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딸을 안았다가 그 딸조차도 황금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미다스 왕은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 복이 아니라 저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때 디오니소는 그에게 스틱스강물에 목욕으로 하라고 하였고, 다시 그는 원래의 손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신화에는 우리에게 탐욕의 한계를 일러줍니다.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하여 부자가 되는 능력이 있어도 정작 한끼의 음식을 맛있게 만족스럽게 먹을 수 없다면 그 황금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딸을 기쁘게 안아줄 수 없다면 그 황금은 결코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 신화는 물질에 사로잡힌 팽창된 탐욕은 대상을 물화시킨다고 일러줍니다. 이 탐욕은 생명력을 앗아가고, 대상화, 혹은 도구화시킵니다. 생명은 한낫 물건, 상품, 돈의 가치로 환원시켜 버립니다. 자신의 영혼조차도 금속화시켜서 더이상 기능할 수 없는 물건 그 자체로 전락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탐욕의 위험성입니다.
이것은 그 옛날 그리스 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이 기다림의 절기에 미다스 왕처럼 우리는 다시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황금의 손을 거두어주시어 본래의 손으로 돌아오길 기도해야 합니다. 미다스 왕이 스틱스강에서 목욕한 것처럼 다시 전 존재가 정화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늙은 왕
마태복음 2장에는 두 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헤롯왕 때에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점성가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으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별을 보고 미래를 예견했던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나실 것이고,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고 헤롯왕에게 말합니다. 그때 헤롯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당황하였습니다. 기존의 왕, 늙고 낡은 왕은 새로운 왕의 출현에 대한 박사들의 보고 앞에서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헤롯 왕은 2000년, 전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던 못된 나쁜 왕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정신에 존재하는 늙은 왕의 모습일 것입니다.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상징적 사건으로 재구성해보면, 이 왕은 정신 안에 낡은 지배의 원리이자 닳아빠진 보편적 가치 체계를 표상합니다. 새롭고 신선했던 지배원리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모가 일어나고 그 영향력이 쇠퇴하여 새로운 갱신이 필요합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지배체계가 그 지배력을 잃고 한계에 도달했고, 조잡하고 난잡했던 그리스 로마 신은 그 위력을 잃고, 새로운 질서를 불러올 새로운 신의 출현을 요청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기성종교였던 유대교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경직되고 형식화된 문자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제사도 율법도 낡고 냄새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개인의 정신 안에서도 이전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체계가 어떤 영향도 감흥도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전에는 그렇게 가슴을 두드리는 감동이었는데, 어느새 형식적으로 변해버려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런 늙은 지배원리는 새로운 원리가 나타나면 즉각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더 안간힘을 쓰고 버티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구축해오던 정신체계는 쉽게 바뀔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엄청난 갈등과 긴장, 살벌한 전쟁이 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존의 체계에 익숙한 자들은 절대 새로운 체계를 수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왕을 모시기 위해서는 기존의 체계를 떠나보낼 수 있는,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 인내가 필요합니다.
새 왕
동방의 박사들은 새로운 왕의 별을 보고 이스라엘로의 모험을 감행합니다. 당연히 새 왕은 왕궁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통념으로 예루살렘 왕궁으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새 왕의 출생은 우리에게 거룩한 탄생의 비밀을 일러줍니다.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십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실 새 왕의 특성을 시사합니다. 새 왕은 누가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여관의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납니다.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곳에서 탄생합니다. 보잘것없고, 쓸모없다고 버려진 곳, 냄새나고 비천한 곳에서 거룩한 탄생이 일어납니다. 동물들이 함께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것은 본능적 과정, 우리의 존재의 뿌리가 동물적 특성에 있음을 일러줍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다만 정신의 자연적-본능적 영역 안에만 자기가 태어날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관에 들어갈 방이 없다는 것은 정신의 더 분화되고, 문명화된 장소에는 개성화 과정을 위한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의식화된 체계 속에서는 새 왕은 탄생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태어나십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쓸모없고 버려진 곳에서 태어나십니다. 가치 없다고 치부했던, 보기 싫고 냄새난다고 외면하고 무시한 그림자 영역에서 태어납니다.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영역 안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연금술사들의 말처럼, 우리의 금은 똥 무더기 속에 있는 것입니다. 기존의 문법을 뒤엎는 거룩한 탄생의 원리입니다.
융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생명은 교회로부터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은 그들이 한번 떠난 거처에 재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C.G. Jung Speaking, p97] 그러면 다음 거지주는 어디일까요? 개개인을 거주지 삼아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개성화된 인간 정신 안에서 거룩한 탄생을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성탄설교를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는 축제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태어나셨고, 영원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고 계신 영원한 탄생이 지금 시간 안에서, 인간 본성 안에서 태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탄생이 항상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나에게 그것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탄생이 고결한 영혼 속에서 완성되는 것으로,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탄생은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들려주는 순수한 영혼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거주지 삼아 거룩한 탄생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그 거주지는 우리의 어두운 무의식의 심연, 그림자의 영역, 우리가 무시하고 외면했던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별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태복음 2장의 설교를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3번을 했고, 이번이 네 번째 설교입니다. 다른 구도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단연 본문의 주인공은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낯선 곳에서 방문하는 박사들은 우리에게 어떤 예감과 직관을 불러일으키는 노현자들의 상과 유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시해야할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가리키는 지혜와 통찰을 표상합니다. 기존체계와 낡은 지배원리에 살던 이들에게 새 왕을 주시하도록 안내합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며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서 구세주의 탄생을 예감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참 빛을 발견하는 지혜의 화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주의 서사시를 다시 보도록 했습니다. 장차 다가올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 참 빛인 그리스도를 보도록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우주의 서사시를 보도록 출현하는 노현자가 있습니다. 구세주의 별이 어디 있습니까? 질문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계, 다가설 운명을 예감하게 하는 빛이 어디에 있는지 주목하게 합니다. 저는 10년이 넘게 꿈분석으로 심리치료를 하면서 많은 이들의 꿈을 보았습니다. 일 년에 몇 천 개의 꿈들을 봅니다. 요즘에는 모래놀이 상자의 그림도 자주 보곤 합니다. 꿈과 모래 놀이 상자 안에 깃든 심상을 이야기해 드리면, 어떤 분은 “좋은 얘기를 해 주셔서 믿기지 않습니다”고 말하며 의심합니다. 그때 저는 말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 안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의 미래의 상이 있음을 그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운명과 미래, 우주의 서사시를 드러낼 별이 어디에 있는지 주목하고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길을 떠날 수 있다면 그는 구세주의 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별은 하늘의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 안에서 거룩한 탄생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별은 무의식의 잠재력이 아닌 의식과 현실에서 구현되고 육화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세주의 별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거룩한 절기에 우주의 서사시, 운명의 배정을 이끌 별을 주목하여 거룩한 탄생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발견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