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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유년기 부터 사주명리학에 입문하게된 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저의 기억에 의존해서 작성하는 것으로서 저의 주관이 개입된 글들입니다.
그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간혹 사실과 다르게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분명한 기억을 토대로 기록합니다. 그 어떠한 포장은 없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더불어, 그간 제가 만나본 역술인 중에는 진정성이 없는 역술인도 많이 보았지만 그 분들의 실명은 기록하지 않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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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 경남 밀양 활성이라는 곳에서 설씨(薛氏)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신라의 원효대사님의 직계 후손이며, 평산신씨 가문 출신인 할머니의 영향인지 유달리 불교와 한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성장했었습니다.
1975년 제가 69년 1월 생이다 보니 68년생과 함께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첫 학교생활을 시작합니다. 한글 등 조기 교육의 부작용인지 몰라도 1학년 학교 수업이 시시하여 수업시간 내내 잠만 자고 왔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의 가정 방문과정에서 담임선생님이 아버지께 '진관이가 수업시간에 계속 잠을 자는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아버지께서 '이미 한글을 알고 구구단을 외우고 있으니 학교 수업이 재미가 없을 겁니다'라고 답하여 당시 교육환경에서는 담임선생님이 깜짝 놀라 하시던 기억이 있습니다.(그 당시에는 대부분 국민학교 1학년때 부터 빨간색연필로 줄 긋기를 배우면서 ㄱ ㄴ ㄷ ㄹ .... 1 2 3 4 등 배우기 시작하는 세월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선생님의 암묵적 동의하에 수업시간에 내놓고 잤었습니다. 때로는 저를 깨우는 친구에게 담임선생님이 "깨우지 마라, 그냥 놔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수업시간 잠결에 듣기도 했었습니다.
1976년 당시 흑백TV가 있었습니다.
KBS 방송 부산에서 채널9 에서 방영되던 인형극은 저에게 친숙하게 다가왔고, 그 즈음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에서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에게 시집가면서 타고 간 말 천리마가 죽고 그 혼백이 들어가서 다시 출생한 말 '번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을 그린 '동명성왕', 삼국통일의 과정을 설명한 '김유신 장군' 등 인형극을 보면서 매번 등장하는 번개도사 등 도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신비로움 그 자체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고교얄개로 유명했던 아역배우 출신 이승현씨가 등장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도사의 등장 또한 저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더우기 1979~80년 당시 유행하던 KBS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의 도사들의 행세 또한 저에게 큰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 저의 집에 있던 가정대백과사전에 성명학,관상,손금이 포함되어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무섭게 느껴졌었습니다. 이 당시 보았던 성명학과 관련한 특이한 내용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책을 볼 수없습니다. 당시 유명한 배우인 한진희,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등 많은 연예인 사진이 함께있었는데 이렇듯 이 당시 가정대백과사전의 존재는 역학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는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런 책을 접하였다고 하여 의당 역학에 입문한 것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1980년 초등학교 6학년 시절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부산진구 부전동 서면 국민은행 옆 조그마한 서점인 청학서림에서 역학전서라는 역학서를 처음 보게되었습니다. 당시 그 내용은 당사주, 손금, 관상, 성명, 꿈풀이 등 내용이 기록된 것 들이었고, 그것을 보게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홀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1981년 즉 중1때에 이미 당사주를 이용하여 이웃 친한 아주머니들을 상대로 당사주 감정을 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역학에 입문하여 감정하게된 첫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다 부산진구 부전동에 있는 부전시장 앞 현재 등기소 당시 즉결재판소 앞을 지날 무렵에는 상당수의 역학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상당한 수입이 되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나이가 어려서 누가 누구인지는 감히 알지 못합니다.
1984년 고교1년 시절 처음으로 당시 부산진역 앞 시장쪽으로 들어가서 오른편으로 조금 가면 어느 여인숙이 있었는데 그 여인숙 2층에서 달셋방을 얻어서 사주 감정하시던 혜승원 원장님을 뵈었습니다. 당시 저의 진로와 관련하여 모친의 친구분(지금은 작고하심)이 저를 데리고 그곳에 데려갔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그간 제가 아는 방식의 당사주가 아닌 나무가 어떠하고 불이 어떠하고 등 하면서 오행으로 사주 풀이를 하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이분의 사주풀이 방식이 제가 당사주에서 벗어나 사주명리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사주학이 있나보다하면서 이후 남궁상 선생님, 추송학 선생님의 사주학 교재와 최영철 변호사의 사주정설 등으로 기초를 닦으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쉽게 씌어진 책이라고 할지라도 고교생이었던 제가 혼자 읽고 이해하기에는 그리 쉬운책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육신표출 과정이 힘들어 애를 먹었던 기억 그리고 월령과 격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이 당시에는 만세력이라는 것을 별도로 구입해야하는지 조차 몰라서 거의 쩔쩔 매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1986년 윤태현선생님의 소설 '팔자'(행림출판사)가 스포츠신문에 광고난 것을 보고 소설 '팔자'를 구입하면서 부록으로 받은 붉은 색 표지의 얇은 만세력이 저 생애 첫 만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저의 사주를 세워봤습니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역학자가 되어야 겠다는 자긍심과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후에 발간된 소설 팔자 2.3권을 연속으로 읽어내려 갔었습니다. 비록 이 책이 저자의 눈높에서 각색된 것이겠지만 이 소설로 인하여 사주명리학의 연구에 의지를 불태운 이가 아마도 전국에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당시 제1권의 후반부에는 사주명리학을 공부하는 독자들을 위한 요약이론이 부록으로 첨부되어있었는데 그 내용은 당시로서는 역학이론을 정리함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1988년 제가 학원 쪽에 발을 살짝 담그고 일하던 시절입니다. 학원 옆 떡볶이 할머니를 통해서 알게된 미 하야리아부대 후문 옆 허름한 건물 2층에서 동양철학관이라는 간판으로 철학원을 하시는 당시 70~80대로 보이는 老신사를 만났습니다. 나무로된 계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좁아서 자칫넘어질 듯한 곳이었지만 내부는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환경으로서 그분은 일제시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석학으로서 그 당시 사주정설을 중심으로 공부하셨다고 하면서 사주정설 한권만 봐도 충분하다면서 권하시면서 다른 책은 볼 필요가 없다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당시 이미 부산진구 서면의 현재 국민은행 자리 1층 주차장 입구에서 역학책 복사본을 팔고있는 어느 영감님을 만나게 되면서 그분이 저에게 사주첩경(2,3,4,5,7권: 본래 사주첩경은 1, 6권은 발간된 적이 없음, 후일 이석영 이석영선생 작고 후 1권이 새롭게 추가되고 7권이 6권으로 내려앉음)과 명리요강을 소개하면서 오히려 명리요강과 사주첩경에 매료되어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결과 사주명리학에 큰 눈을 뜨게 되는 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도 당시 그 영감님으로부터 구입한 사주첩경과 명리요강은 지금도 보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 부산진구 부전역 앞에서 김동곡 선생님을 알게되는 인연이 되었는데 그 분 또한 명리요강을 중심으로 명리학을 연구하는 분으로서 이미 그 일대에서 고수로 통했었습니다.
1989년 4월 군입대를 한 달 앞둔 상태에서 부산 중구 당시 미문화원 뒤로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미화당백화점 사이에서 영업 중인 황보탁 선생님으로부터 명리요강과 사주첩경을 반복하라는 자문을 받았었습니다. 그 당시 그 일대에 나름 이름나신 분이 황보탁, 배근형, 김중산 등 그리고 부산진구 서면 일원에서는 허남원, 이승철 선생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때에는 보수동 대륙서점을 중심으로 헌책방을 자주 방문했었고 지금은 없어진 미문화원 뒤 광복문고에서도 역학도서를 구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국내 명리학의 고수들의 명리학 서적인 박재완 선생님의 명리요강, 이석영 선생님의 사주첩경, 신육천 선생님의 천고비전 사주감정법비결집 그리고 추송학 선생님의 사주명리학 서적 전반을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뜬눈으로 밤새우는 건 예사이었습니다. 이시기에 추송학 선생님의 새생활문화사에서 출간된 책 중 육효 관상 부분을 제외한 사주학 관련한 책은 아마도 대부분 읽었던 것 기억이 있고 1989. 5. 10. 군입대를 하게되었습니다.
1989~1991 년 군복무시절입니다.
군 부대에 있으면서 사병들은 물론이거니와 훈련교관, 헌병대장 등 하사관에서 부터 영관급 장교에 이르기까지 군 간부들과 그 가족들을 상대로 많은 임상을 경험하면서 사주명리학의 통변체계를 정리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명리요강으로 기본 틀을 잡고 사주첩경과 추송학 선생님의 사주명리학 명리학 시리즈물을 덧붙여서 사주명리학 체계를 완전히 세웠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휴가때에는 집에서 명리정종을 읽었습니다. 그 시절 군대 생활하시던 분은 아시겠지만 뻬찌까(화덕난로)가 있었는데 그 옆에 서서 그리고 군인법당에서 명리요강을 열심히 읽고 이해하고 자연을 관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참 이 시절에 추송학 선생님께 조후와 관련한 질문을 편지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추송학 선생님께서는 단 한번도 저를 만난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질문에 친서로 답을 주셨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었습니다.
제가 군 복무를 하면서 휴가를 나오던 1990년대 들어 박도사에 대한 소문이 여기 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월간역학이 발간되면서 그 속에서 매월 연재되는 자평진전 번역본 등은 그 당시로는 신선하면서도 좋은 학습교재이었습니다.
1992~1993년 이 시기에는 멋을 좀 내기 시작합니다. 월간역학에서 얻은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제는 고전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궁통보감(난강망), 자평진전, 적천수 등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리고 연해자평과 명리정종을 덧붙여 고전을 정리했었습니다. 그때가 20대 중반의 나이...
그 시기에 동양인의사주팔자(김성진 저)라는 책이 그 당시 즐겨보았는데 훗날 한국인의사주팔자라는 책명으로 다시 출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김봉준 선생님의 쉽게푼역학1.2권도 도움이 되었던 시절입니다.
1993~4년 부산 금정구 청룡동에서 사주학과 관상학의 대가이신 이인섭 선생님과 처음 상면하게 되면서 그로 부터 인연법(진여비결)의 존재를 알게됩니다. 이 대학자는 현재는 귀농하셔서 충북 제천에서 사과농사를 짓고 있으십니다. 겸손과 인자함 그리고 실력을 두루갖춘 이인섭 선생님은 저의 젊은 시절 역학정진에 훌륭한 도반의 인연이있습니다.
1994년 경 특히 1994년 여름경 까지만 해도 나름 사주명리학 공부를 좀 한탓인지 자신감이 절정에 이르러 천방지축으로 까불던 시절이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부산진구 부전시장 앞에서 철학원을 하시면 김동곡 선생님의 인연으로 당시 경남 양산군(현,양산시) 상가건물 2층에서 '○○○○연구소'를 운영하시던 역술인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당시 ○○선생님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제가 만나본 역학인들 중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이 분의 사주풀이는 20대 중반인 필자에게는 도무지 추정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통변들로서 그 분의 이론에 대한 학문적 존경과 부러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분이 훗날 부산 금정구 남산동으로 사무실을 옮겨서 학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분과의 만남은 자만에 빠져있는 저에 대한 '겸손하라, 더욱 정진하라'는 의미에서 선현이 인연되게 한 것이었나 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이름있는 술사은 대부분 거품이 많았고, 이 처름 무명의 역술인의 실력은 엄청난 것으로서 이름값과 실력은 무관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1994년 그 과정에서도 서울에서 사계단법 기본서와 부산 금정구 서동 정석환 선생님으로 부터 인연법, 팔주법 등 필사본을 입수하면서 계속하여 또 다른 필체의 인연법 필사본(내용이 동일한 것으로서 한사람의 강의를 여럿이 노트한 것으로 추정)을 입수하게됩니다.
저는 당시 이 인연법이 박도사의 인연법으로 오해했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겠지만 10년이 지난 후 서울의 신수훈 선생님의 진여비결임을 확인하게됩니다.
부산 금정구 장전동에 있는 장전초등학교 정문 맞은 편 2층에서 철학원을 운영하시던 어느 (老)역학 선배께서 저에게 적천수를 적극 권장하고 저는 그 분께 명리통감(우달인 저)을 권하는 등 상호 도움을 주고 받으며 심기일전하던 중,
어느날 상론사주학(甲은 나무, 丙은 태양 등)의 모태 이론, 일진법, 사계단법, 신사주학 등 자료를 입수하면서 역학연구의 큰 방향의 전환을 맞게됩니다.
결과 사주학 명리학의 점학적 접근에 큰 성과가 있었다. 이 시기는 저의 사주명리학 궁리의 전성기라고도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노력이 과거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무너진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분에 저는 더 큰 학문을 할 수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지 저는 ○○선생님과의 인연은 역학인생에서 제가 저 자신을 바라보게끔한 길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95년 생면부지의 칠정사여와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그런 기문학이 아닌 즉간할 수 있는 기문학 등 10여점이 입수됩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기이한 인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1995년 중순~1996년 부산에서 이름난 역술인을 대부분 찾아 찾아다니며 그들의 실력을 확인해봅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허남원,김인재 선생님이었는데 허남원선생님은 나름 논리가 정연하여 그의 노트필사본이 여기저기에 거래되었었고, 김인재선생님은 저와 같은 무인일주로서 직업군인 출신이었는데 나름 명리학에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하는분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이 당시 관상의 대가로 알려져 있던 백포 선생님 사무실을 방문(당시 동래전철역 앞 궁전예식장 맞은 편 사무실)했었지만 만나는 인연은 되지 못합니다.
1996년 사주명리학의 메커니즘을 다시 정리하는 시기이었습니다. 물상론 사주학의 정수가 담긴 자료 즉, 辛냄비에 壬물과 乙나물을 넣어 가열해야 財돈이 되니 중탕 집이다 등 이런 통변을 가능하게 하는 자료를 귀하게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 이 물상론 사주학의 정수는 세상에 공개할 시기를 살피고 있습니다. 자연의 소리에서는 또 다시 역학계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사주명리학이 인간생활의 사사로운 영역에까지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눈이 크게 떠지면서 더불어 사주명리학의 동정론을 확립하면서 동시에 하상역법과 추신론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으며 그에 대한 연구를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이 시기에는 하상역법에 이어 추신론이 점차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되고, 그와 월령도의 가령장과 함께 월령도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용신,격국을 벗어난 통변술 확장을 위한 몸부림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사주 명조를 통한 직접적인 감정은 서서히 소홀히 하게 되었고, 대신 하상역법, 추신론, 사주심역 등을 통한 감정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말경 이후에는 약 10년간은 주로 부산진구 동보서적(지금은 없어짐), 영광도서에 가서 출간된 명리학 도서를 대부분 읽어 내려가면서 그간 정리했었던 사주명리학의 프레임에 여러 다양한 저자들의 생각을 다시 검증해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생각과 저의 사주명리학 이론을 상호 비교하면서 새롭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과감한 판단을 했었습니다.
이 시기에 부산진구 부전동에 있는 월산철학관 최상순 여사님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역학인들을 상대로 사주학과 기문학을 강의하기 시작했었습니다.
1998년 PC통신 01410?? 으로 연결하는 나우누리와 하이텔에 인연되어 그곳에서 현재 나름 이름난 역학인들을 통신상에서 만나게됩니다. 이 시기에는 1993~4년 경 입수한 진여비결(인연법)을 박도사의 것으로 오인한 채 하이텔과 나우누리에 박도사의 인연법이라고 하면서 그 내용을 연재하였습니다. 그 당시 박도사 인연법이라며 인연법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저입니다. 저는 인연법 즉, 진여비결이 박도사의 이론으로 오해했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하이텔에서는 박도사가 누구이냐? 이름도 없는 사람이네 하면서 진여비결의 가치를 폄하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분위기였고, 더욱 재미있는 일은 후문에 의하면 그 당시 하이텔에서 이 진여비결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뒤에서는 더 열심히 진여비결을 공부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진여비결을 그 당시 박도사 인연법이라고 잘못 지칭했었던 제가 훗날 그것이 박도사와 관련없는 신수훈 선생님의 진여비결이라고 해명을 해도 이제는 저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웃기는 세상입니다.
이렇듯 그 당시 PC통신을 통하여 학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사람들을 알아갔었고,
1999년에는 류지웅, 박영선, 하미경, 문정인, 박수진, 김종성 등과 인연되면서 경남 진해시의 사주 명리학의 대가이신 김분재 선생님과 인연하게 되면서 지금은 역학계에서 가장 신뢰하는 관계로 이어집니다. 이때 서울의 홍성민선생님(이영돈PD가 간다에서 소개된 역술인)도 인연되기도 합니다.
2000년 이후에는 PC통신에서 인터넷 문화로 접어들면서 역학인들을 만나는 경우를 줄이면서 현재 자연의소리 운영진을 중심으로 생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005년 경 신수훈 선생님을 만나면서 과거에 제가 박도사 인연법이라고 잘못 말한 바 있는 진여비결의 정수를 직접 전수받게되면서 인연법인 진여비결을 보다 완전한 형태로 정리하었습니다.
2007년 부터는 2009년 까지 약 3년 간은 전국에서 나름 사주 좀 본다는 상당수의 역학인들이 부산으로 저를 찾아 왔었고 저는 그들과의 만남에서 많은 토론 내지 의견을 나누던 시절이었습니다. 때로는 좋은 의견을 주시는 분도 계셨으나 가당치 않는 말씀을 하시는 분도 많았었습니다.
1990년대 부터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간 만나본 역학인들 대부분은 그의 명성은 실제 실력과는 전혀 무관하더라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름 없는 술사 중 고수가 많았습니다.
이 당시 부산 사하구에서 도원정형외과를 운영하시는 박상호 원장님과 대구의 故 석성길 선생님과의 인연은 저의 역학계에서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박상호 원장님은 의사라는 신분이면서 사주명리학의 정수마져 습득하신 분으로서 현재 자연의 소리 운영진 회장님으로서 김분재 선생님과 더불어 실전에 능한 고수입니다.
2000년대 들어서서는 그간 인연닿았던 그 많은 고수들은 하나 둘 세상을 등지면서 어느새 제가 사계에 고참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스스로 언론에 별다른 접촉이 없었음에도 자연스럽게 각종 언론매체로부터 오락프로, 시사프로에 출연, 인터뷰 등 많은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출연이 역술을 직업으로 하지 않은 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일체의 접촉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방송에 나오는 것을 저의 가족도 원치 않았고, 굳이 애써 방송이나 언론에 노출되어 저 자신을 광고할 실익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2015, 2016, 2017년 년말 처음 국운 예언으로 언론에 노출)
2010년 故 최호경 바이소호 대표와 함께 전국역학한마당 행사를 기획했었습니다.
제1회 행사때 부터 120명이 넘는 분들이 참여하시는 등 그간 5년간 5회 걸쳐 행사가 진행되었으며 매변 120~135명이 참석하는 그 당시로는 전국 최대의 역학인들 행사이었습니다.
이후 저의 개인적인 사정 등으로 6회 부터 진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다시 이어갈 것입니다.
2012년 이후 모 사이버대학교와 인연되어 그곳에서 사주명리학을 몇 년간 강의한 적이 습니다. 당시 저는 적어도 이 학과를 졸업하는 경우 최소한 어느 정도의 통변을 할 것을 기대하면서 나름 스승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강의 외 별도의 모임을 통해서도 아무런 대가 없이, 그리고 일체의 사익을 챙기지 않고 나름 최선을 다했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들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2014년 10~12월 사이 이상한 조짐이 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015년 2월 위 학교에서의 그간의 노력과 정성은 온데간데없고 얼토당토않는 루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저를 믿고 따라주는 전국의 많은 학생분들의 격려가 있었지만 하나 하나 해명하기에는 오히려 그것이 구차해지게 느끼게 되면서, 저는 '학교인연은 이제 그만 하라'는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차라리 모두 내려놓는 것이 훨씬 남자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학교의 학과장에서 저의 결백함을 피력하면서 그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저의 모든 강의를 중단했었습니다.
이 과정의 내용을 글로 쓸려면 아마도 A4 용지 20매 이상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이왕지사 지나간 일들 저 혼자 안고 가면 더 이상 업이 순환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냥 안고 갑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저의 결백을 믿고 저를 지키주려던 많은 이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습니다.
그래서 2015년 2월 이 모든 것이 저와 인연한 탓이라는 마음과 그간 끝까지 저의 진정성을 믿어 준 것에 대한 답례로 그리고 도원결의하는 마음으로 그분들과 동양학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역학을 함께하게 되고 2015년 6월 말에는 2월에 내려놓기로 약속한 것 처럼 모 사이버대학교와는 인연은 깨끗이 마무리를 했습니다.
2016년 여름입니다.
앞서 언급한 그간의 동양학연구회의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위하면서 저와의 인연을 이어가기위한 분들에게 많은 기회를 드릴 방편을 궁리하면서 이를 공식적으로 해산하면서,
그 연구회의 상당수의 회원과 사주명리학을 배우고 싶은 진정한 열의를 가지신 분들이 모인 '현장술사'라는 모임으로 다시 규합됩니다.
그간의 동양학연구회의 구성원이 대학의 학부생들이 중심이었던 점과 달리 '현장술사'라는 모임의 구성원은 학력, 재력, 권력과는 무관하면서 오로지 역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적구성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현장술사'라는 여타의 일반 모임과는 달리 좀더 전문적인 술사가 되는 길로 안내합니다. 이론이 말이나 글에 의한 것보다는 현장에서 이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가 더욱 중요합을 강조하면서 습득하는 과정들입니다.
이 곳에서는 파벌과 사익이 없는 오로지 동양역학만을 주제로 하여 연구하면서 공부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곳에 있는한 하늘의 인연이라는 생각뿐입니다. 과거의 상처가 약이된 탓인지 이곳에 들어오기는 까다롭습니다.
현장술사라는 단계는 저의 최측근 역학인들이 있는 진관역학회의 베이스가 되는 학습관입니다.
자연의 소리의 운영진인 이 '진관역학회'는 1999년 경 부터 류지웅, 김분재 선생님 등이 주축이 되어 스터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산경남사주공부모임 이라는 이름으로 역학을 연구했지만 2010년을 기점으로 하여 진관역학회라는 정식명칭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간 진관역학회에 잠시 머물렀다가 오래있지 못하는 나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역신(易神)의 비인부전의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연이 멀어진 이들은 항간에 알려진 역학이론의 마취에 깨어나지 못한채 진관역학회의 역학정수의 기본수의 문턱을 넘어서지도 못하고 그만 인연이 멀어져 갔었습니다.
2016. 6월 말 마곡사에서, 과거 인연법 진여비결의 정수를 전해주신 신수훈 선생님으로 부터 진여비결(眞如秘訣) 해설서를 한번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8월 한달 내내 진여비결(眞如秘訣) 해설서의 원고를 쓰는데 매진한 결과 그 9월에 인연법 진여비결(眞如秘訣)해설이라는 책명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책은 전국에 계시는 많은 독자분들로 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되면서 초판 2쇄 인쇄를 하였고, 이후 개정 증보판까지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2017. 3월 중순에는 윤경선,김초희,김재근,조소민 선생님이 저의 강의실 어록을 담은 '설진관 명리학 야학신결(野學神訣)'이라는 명리학 통변서를 출간했습니다.
이 '설진관 명리학 야학신결'의 원고를 정리할 당시만 해도 사주명리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기본수의 이론이 정리된 사주명리학의 기본서를 만든다는 생각만으로 이론 구성을 했었습니다. 그야 말로 명실상부한 자연의소리의 명리학 기본 교과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설진관 명리학 야학신결(野學神訣)이 세상에 공개되고 나서 명리학 도서 중에 여러차례 주간 베스트 셀러에 올라가는 등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었고, 이제는 많은 이들의 극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간의 마음 고생이 모두 연기가 되어 맑은 하늘에 떠있는 이쁜 무지개가 된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제가 많은 이들로 부터 감사의 쪽지 메일 전화 그리고 인사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인사말씀으롯 어떤 이는 발간된지 2달만에 이미 3회독을 했다는 말씀도 들었고 어떤 이는 10회독 까지 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또 그간 논리적이지 못하고 이현령 비현령이었던 명리학 이론에 논리와 결합되어 통변의 논리성을 갖추게되면서 통변술 명리학으로 명쾌하게 밝혀놓았다는 칭찬도 들었으며, 그간 그 어떤 누구도 답을 주지 못하던 이론들이 야학신결(野學神訣)에 모조리 정리되어 있어서 야학신결(野學神訣)을 읽어가는 내내 감동의 순간이 겹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처음 이 원고를 정리할 무렵에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주명리학자로서 알아야할 이론의 수준이 적어도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주명리학의 기본서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자'는 차원에서 시작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어찌 야학신결(野學神訣)이 사계의 고급 명리통변교과서가 된 것입니다. 편저자들이 더 놀란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의 역술 수준의 현주소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장래에 '설진관 명리학 야학신결(野學神訣)'보다 더 깊이있는 이론서가 계속 발간되도록 하겠습니다.
2018. 6월
야학신결(野學神訣)의 부록으로 들어가 있는 '설진관 추명가 100선'에 대한 해설서의 원고초록이 만들어졌고 올 하반기에 출간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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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드라마처럼 그림이 스쳐 지나가네요
신비의 행로를 쉬이 내 주셔서 늘 감사한 마음이고요. 비록 천학비재이지만 더욱 정진코자 하는맘 다져 봅니다. 오늘도 편안한 하루 되십시요^^
고맙습니다.
처음 공부할때는 제 팔자가 궁금해서 조금만 볼수 있으면
그만 해야지 하고 시작한것이 궁금한것이 많으니 계속하게 됩니다.
수고 많이 하신 선생님의 책도 인연되길 바라면서 기다려집니다.
감사드립니다.^^*
_()_
응원합니다.
진솔하고 담백한글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항상 후학을 생각하시고, 올바른
길을 열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항상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7년전 28살에 연산동 백포선생님께 간명받았습니다 간명지에 저의 인연을 적어주시더라구요 32살에 결혼하고 토끼띠 한여름에 태어난김씨 에 교육자 처를 만날운이라고
모든걸 다 맞추시길래 신기하고 놀란 마음에
역학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베풀어주신 설진관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햐...
하나하나 기억해 적어 놓으셨네요.
계속 이어질 내용이 더 궁금합니다. ^^
설진관선생님과 자연의소리와의 인연으로 역의 바른 이치에 대한 신비로움을 알아가게 됩니다. 항상 자연을 관조하라는 말씀을 조금씩 깨달게 됩니다. 귀한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바른 길을 알게 해주시고 이끌어 주시어 항상 감사드립니다. 귀한 분들과의 인연 소중하게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ㅡ,.^
항상 감사 드립니다~~^^
선생님과 좋은인연입니다
무더운 날씨 건강 유의하세요 !
선생님과 인연되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소고를 처음부터 읽어면서 선생님의 긴 여정에 때로는 찬사를 어떤글에는 감동의 눈물이 또 어떤 글에는 박수를 쳤습니다.
이시간 주무시겠지만 5월의 초록 만큼이나 상큼한 꿈을 꾸시길 빕니다.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역학의 길을 이렇게 소상히도 말씀해 주시니
읽는 내내 가슴이 벅잤습니다.
그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는것 자체가 큰 결례일 것이고,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하여 올바른 역학인이 되어 보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명리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ㅎㅎㅎ
감사합니다
참으로 인생드라마 처럼 연상되는군요 또한 대단한 열정 사심없는 마음이 깊이 느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