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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이 불러온 오디세이아(Odysseia) 논란(論難)에 대한 소고(小考).”
2026년 여름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신작 영화 오디세이 (Odyssey)가 불러온 놀라울 정도의 충격과 논란으로 온통 휩싸였다고 할 수 있다. 금세기 역사에 있어서 이런 열풍이 과연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일리아드>의 속편 격으로 처음 제작이 예견될 때부터 이미 온갖 화제가 난무하기 시작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2026년 7월 17일 개봉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영화 출연진의 연기나 작품성이나 완성도 이외에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충격적인 놀란 감독 특유의 고전에 대한 재해석에 관해서도 흥행만큼 뜨거운 논란(論難)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흥행과 논란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동안 제작한 모든 영화에 대한 역주행과 재평가로 이어지고 있는 기현상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작게나마 전율을 느꼈을 정도였다.
개봉하자마자 챠밍여사와 함께 <오디세이>를 관람했다.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충격의 파장이 오래갔다. 그동안 놀란 감독의 영화 전부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놀란 감독만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고 공감하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평소 리들리 스콧. 마이클 만. 로만 폴란스키. 마틴 스콜세지 같은 감독들의 영화를 좋아해서, 그런 감독들이 만든 영화라면 무조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젠 놀란 감독의 다음영화가 기다려질 정도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어졌다.
이 시점에서 작금에 말이나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치고 영화 <오디세이 (Odyssey)>나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확고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면, 현실인식이 뒤떨어지거나 아니면 자신의 말이나 글솜씨가 형편없음을 만천하에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이기라도 한 것처럼, 당대의 내놓으라 하는 글쟁이와 말쟁이들이 일제히 등장하여 극명하고도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다.
평생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받치다시피하신 모 교수님의 글이나 방송을 평소에 즐겨 찾아서 보았었는데 역시나, 그분의 헌신과 드러난 결과에 대하여 진심으로 애정과 존경을 드리고 싶다. 이어서 저명하신 분들의 이름과 글과 동영상이 줄을 서서 올라오더니, 근간의 시점에서 유튜브나 블로그를 들여다 보라. 언뜻 '도배'와 '난무'라는 단어가 적절한 타이밍에 절묘하게 떠오른다.
이 상황에서 정작 내가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언제부터 어떻게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그리스 로마 신화>와 <호머의 서사시>에 대해서 그토록 높은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하는 궁금증이다. 유튜브나 블로그를 들여다보게 되면 작금에 적어도 호머의 <오디세이>에 대해서만은 대한민국인들의 지식 성취도가 최고도로 평준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어질 정도이다. 대학 시절 하나의 놀라운 경험이었던 오픈북 중간고사라도 치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런 최고 지식의 평준화가 우리 한국인의 자연스런 저력이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수십 년을 투자한 대학교수의 논문이랑 SNS를 도배하다시피 하는 블로그에 쏟아져 들어오는 글들의 수준을 비교해 보라. 별반 차이가 없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시작해 호머를 지나쳐 베르길리우스에 이르기까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낱낱이 분석하고 자의적 해석하는 능력까지 모두 드러내 보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원전엔 없는 오디세우스의 죽음까지 이미 널리 퍼졌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 듯 떠오르는 이 슬픈 궁금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한 번 묻고 싶다.
‘호머(Homer)의 <일리아드(Iliad)>와 <오디세이(Odyssey)>를 읽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고전 원본은 아니라도 어린이 동화나 혹 만화책으로라도 제대로 읽어보셨습니까?’
‘<그리스 신화> 속의 <오디세이> 이야기였습니까? 아니면 그냥 호머의 <오디세이>만 이었습니까?’
‘다른 그리스의 <비극>을 아십니까? 혹 <아이네이스>를 트로이에서 만나보셨습니까?’
왜 이런 궁금증이 생길까?
만약에 말이다. 뉴튼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학에서 물리학 강의를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모르는 사람이 핵 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할까? 거기에 그 사람이 오펜하이머 하나에 대해서는 기가막힐 정도로 완전히 마스터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것도 하나의 능력일까? 그 능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
작금에 대한민국에서 말이나 글로써 먹고사는 사람 모두가 하나같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저마다의 지식을 뽐내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이 불러온 오디세이아(Odysseia) 논란(論難)’에 대하여, 말이나 글로써 전혀 먹고살고 있지 않은 변방에 살고 있는 한 촌부의 입장에서 떠올리게 되는 감회와 솔직한 생각과 아쉬움과 또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이야기들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다.
어쩌면 깊이는 전혀 없을터고, 두서도 없을뿐더러 자칫 궤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제껏 걸어온 내 스스로의 행보를 돌아보자면 제법 긴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놀란 감독이 그랬듯이 나도 온전한 내 방식대로 <오디세이>를 분석해 보고 재해석 할테니 말이다. 하긴 그것은 이세상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무한의 자유일테니 말이다. 그저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한 저잣거리 떠돌이 시인의 푸념 정도에 그칠지라고 충분히 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때문이다.
이제 이 저자거기 떠돌이 촌놈은 대충 3.200년 전의 그리스 반도로 들어가 다른 걸인 처지의 떠돌이 유랑시인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호머를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혹시라도 호머를 직접 만나보았던 당대의 많은 유랑시인들을 만날 수는 있지않을까 하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호머(Homer)에게 바치는 가빈 서더랜드(Gavin Sutherland)의 헌시(獻詩).”
나는 항해하고 있어요, 거친 바다를 항해하고 있어요
바다를 건너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거친 파도 위를 항해하여
당신 곁으로 갑니다, 이젠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나는 날고 싶어요, 나는 날고 싶어요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처럼
저 높은 구름을 지나 날아가고 싶습니다
함께 하고 싶어서입니다, 이젠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들리시나요
저 멀리 어두운 밤을 가로질러서
나는 점점 죽어가요, 영원한 슬픔에 잠겨 있어요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데… 누가 그 뜻을 알 수 있을까요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들리시나요
저 멀리 어두운 밤을 지나며
나는 점점 죽어가요, 영원한 슬픔에 잠겨 있어요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데… 누가 그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항해하고 있어요, 우리는 항해하고 있죠
바다를 건너 다시 집으로 향하고 있어요
거친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요
당신 곁에 다가가고 싶어요, 이젠 정말로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오, 나의 신이여 —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오, 신이여 —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오, 나의 신이여 —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오, 신이여…
--- 가빈 서덜랜드 '자유와 완성을 향해 떠나는 여정'(1972년 作)
오디세이아(Odysseia)는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라틴어 이름인 ‘유리시즈의 노래’라고도 많이 불려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오디세이>는 기원전 8세기나 7세기경에 호머(호메로스)에 의해 처음 창작되었고, 그 후 수백 년 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서 집대성되어 그리스 문학의 정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수많은 논쟁의 중심에 늘 놓이게 될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호머의 창작성 진위 문제도 제기되고, 구전의 기간동안 수많은 유랑 시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번번히 시대성이 반영되었거나, 시인들 저마다의 독창성이 덧붙여졌거나, 등장인물 후손들에 의한 혈연적 영향력이나 지역적 안배 등이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시때때마다 조금씩 다른 해석이나 와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자 미상에 의해 집대성된 것을 올곧은 원본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성도 당연하게 제기된다. 그렇기에 24부(권)에 해당하는 완성본을 두고 조목조목 따져보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는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만약에, 호머를 제외하고 후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유량 시인과 전문 가수를 모시고 ‘오디세우스의 노래’ 24부 전체를 듣고자 한다면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과연 죽기 전에 끝낼 수는 있었을까? 이 전곡을 다 들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왕이라도 힘들었을 것이다.
<오디세이>의 해석과 전개 과정이 모두 그 시인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면, 그는 틀림없는 현대의 크리스토퍼 놀란(영화감독) 이었을 것이다. 놀란은 이 실로 어마어마한 24부의 서사시를 극한으로 집약시키는가 하면, 과감하게 빼버리기도 하고, 원작자인 호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각본 일부를 도용(?)하여 삽입하기도 하고, 거기다가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딱 오해받기에 좋을 만큼 제멋대로 해석하고 각색하여 ‘비슷하기는 한데 전혀 다르고, 엉뚱한 이야기 같은데 마저 보고 나면 그 이야기가 들어맞는’ 참으로 묘한 영화를 만들어 3시간(172분)에 함축시켜 담아냈다. 놀라운 충격이었고 또한 엄청난 감동이었다.
하긴, 호머도 없는 마당에 누가 있어서 제 나름의 분석과 재해석을 통한 자기 주장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랬음에도 172분에 담아낸 놀란 방식의 해석과 영상으로 옮겨진 <오디세이>에 아쉬움을 넘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긴 누가 어떻게 만들었든 왜 문제 제기가 없겠는가만은, 이번은 온통 ‘파격’과 ‘충격’이란 단어가 떠나지 않는 만큼 사뭇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 평생을 다 바쳐서 늘어놓아야 했을 장대한 서사시를 놀란 감독은 3시간(172분)에 함축시켜 담아내는 실로 위대한 감독임을 스스로 증명했고 과시했다. 그런데 여기에 그런 호머의 서사시를 놀란의 영화처럼 3시간도 아니고, 달랑 겨우 (2분 38초)에 담아낸 사내가 있다. 바로 가빈 서더랜드다.
가빈은 인간의 영혼이 '자유와 완성을 향해 떠나는 여정'이라는 주제의 노래를 아주 짧은 (2분 38초)에 담아 세상에 발표했다.
앞에 게재한 시를 읽고 의미를 음미해 보라. 그야말로 완벽한 한편의 있는 그대로의 ‘오디세우스의 노래’가 아닌가?
호머의 24권 서사시 <오디세이>를 크리스토퍼 놀란은 3시간의 영상에 담아냈고, 그 같은 서사시를 가빈은 2분 38초에 담아냈다. 그 역시 호머와 같은 노래로서 은율에 담아서 말이다.
호머의 서사시‘오디세우스의 노래’는 여러 개의 주제를 담고 있는데, 그중 가장 핵심은 노스토스(grc|νόστος. 귀환, 귀향)와 크세니아(grc|ξενία. 손님. 우정)를 가리킨다. 물론 그 외에도 방랑. 시험. 징조 등의 주제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중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려낸 <오디세이>에는 전편에 걸쳐 유독 ‘크세니아’를 거듭 강하게 강조한다. 놀란 특유의 분석과 해석의 결과로 같은 주제의 다른 영화들 보다 한층 돋보이게 되는 가장 확실한 열쇠였다고 본다.
하지만, 가빈 서더랜드의 노래는 놀란 감독과는 다르게 ‘노스토스’를 더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다. 사실 어떻게 본다면‘오디세우스의 노래’ 자체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노스토스’ 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필자의 주관적 해석으로, 사실 가빈은 이 항해의 배경이나 목표가 호머의 <오디세이>라고 표현한 적이 전혀 없다. 이 부분은 오로지 필자의 해석일 뿐이며, 그런 해석의 영역 또한 가빈이 추구한 ‘자유’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당장 영상으로 올려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를 이미 보신 분이라면, 유튜브를 통해 아주아주 쉽게 가빈 서더랜드의 ‘노스토스’를 감상하고 음미해 볼 수가 있다.
이쯤에서 필자는 팁을 하나 선물해 드리고 싶은데, 가빈 서더랜드가 영 낯설고 번거롭다고 생각되시면, 한결 쉽게 그냥 ‘세일링(Sailing)’이나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라고 치시고 검색해서 음악을 클릭하시면 된다고 알려드리고 싶다.
그러면, 아마도 당신 입에서 이런 푸념이 당장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어쩐지?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가 않다고 생각했어.’라고 말이다.
호머를 아시는 사람이라면, 크리스토퍼 놀란을 아시는 사람이라면,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 스튜어트의 (Sailing)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어린이와 아직 어린 청소년은 빼고 말이다.
이 노래는 본래 서더랜드 브라더즈(Sutherland Brothers)가 1972년에 발표한 곡이었다. 본래는 가스펠송처럼 차분하고 단아한 비교적 짧은 곡이었는데, 1975년 로드 스튜어트가 소프트 록으로 새롭게 편곡 발표하면서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팝의 명곡이다.
I am sailing, I am sailing
Home again 'cross the sea
I am sailing stormy waters
To be near you, to be free
I am flying, I am flying
Like a bird 'cross the sky
I am flying, passing high clouds
To be with you, to be free
Can you hear me, can you hear me
Thro' the dark night, far away
I am dying, forever crying
To be with you, who can say
Can you hear me, can you hear me
Thro' the dark night far away
I am dying, forever crying
To be with you, who can say
We are sailing, we are sailing
Home again 'cross the sea
We are sailing stormy waters
To be near you, to be free
Oh Lord, to be near you, to be free
Oh Lord, to be near you, to be free
Oh Lord
세일링(Sailing)이란 제목으로 바뀌고 로드 스튜어트의 목소리로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에 기빈 서더랜드는 이런 고백을 했다.
"사람들은 이 노래가 연인들의 재회를 위한 항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노래 가사의 'Sailing'은 인간의 영적인 순례자의 여행을 노래하고 싶어서 만든 곡이예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은 한국인이 어떤 민족인지 미처 잘 몰랐을까? 아니면 의도된 실수였을까?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직업적으로 조금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