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공의 두 얼굴: 인연법적 공(무자성)과 인연법 너머의 공(제일의공)>에서 ‘덧붙임’을 따로 떼어낸 것이다.
1.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
대승 불교에서는 보통의 경우에 ‘공’이라 하면 ‘무자성’을 가리키는 듯하다. ‘인연법 너머의 공’의 시각에서 보면, 곧 인연법과 공법을 구별하는 <제일의공경>의 시각에서 보면, ‘인연법이 공’이란 용법은 형용모순이다. ‘무자성’은 인연법체서 필연적으로 추론되는 인연법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말씀에서 인연법의 지위는 공과 함께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인연법은 나와 세계의 유무와 생멸에 관한 법이며, 특히 12인연법은 중생들의 총체적인 삶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법에서 ‘무자성’은 존재의 인식에서 차지하는 관계의 중심성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무자성’을 인연법의 속성을 공으로 설명하게 되면, 공의 지위는 강화되겠지만, 인연법의 지위는 꽤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무자성’을 ‘공’으로 이름하여 인연법과 상응하는 개념으로 보게 되면, 인연법과 공의 관계가 모호해지면서 보통의 사람들이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혼동이 일어나게 될 수 밖에 없다. 나아가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 인연법과 공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역설적인 논리와 반어적한 표현이 등장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2. 이중표 교수의 ‘무아’는 인연법적 공(무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다.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는 말의 의미 [이중표 교수의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16강]
[참고] “업보는 있지만, 짓는 자는 없다”의 해석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