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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갈2:15-21
주신 말씀 갈2:15-21절 말씀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바울은 이신득의 복음전파자로 자기변호를 합니다.
갈 2:11-14에서 바울의 베드로 책망사건 회상을 통해 율법주의적 잔재를 지적하였습니다.
본 단락은 이신득의 원리의 절대성과 확실성을 강조하고 율법으로의 회귀의 부당성을 지적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15-16절에서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된다는 이신득의 원리의 절대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고 인정될 육체가 없다고 선언하여 이신득의 원리가 구원의 절대적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17-18절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죄에 대하여 죽으심으로 그 대가를 지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되기 위하여 다시 율법을 준수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므로 율법회귀는 부당합니다.
19-21절은 바울은 믿음 안에서만 사는 자신의 굳은 확신을 피력함으로써 이신득의의 원리의 확실성과 율법주의 부당성을 재 강조합니다.
성도의 삶에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는 언제인가? 즉 성도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는 언제인가?
첫째로 오직 믿음만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줄 믿을 때입니다.(15-16)
15절에서 의롭게 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 선언하십니다.
의롭게 되는것(δικαιου)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효 종결되었으며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 세우신 신약의 절대율법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문자적 규정으로써 구약 율법이 있고
다음은 하나님께서 시대를 불문하고 자연과 양심에 삼위하나님의 직 간접적인 선언을 통하여 선악의 기준이요 심판의 근거로 제시하신 절대 율법을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이라고 할 때 문자적 구약 율법을 말합니다.
16절 말씀처럼 오직 믿음만이 사람을 의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결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신약시대에나 해당되는 말이요 , 구약 시대에는 오직 율법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 아니냐는 반론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구원을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시대에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창15: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 한 것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그가 어떤 의로운 행위를 해서도 아니고, 율법이나 규례를 잘 지켜서도 아니라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자기 생명을 잃을 것을 두려워해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남편이 요즘 말로 막장이니 어떻게 의인이라 할 수 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 여기신 것은 오직 하나님을 진실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무수한 제물을 드리며 절기 때마다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것이 더 큰 의 일 것입니다.
사1:1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 염송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절기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그들을 반가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많은 제물을 드리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여도 그것이 그들을 조금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과 경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51: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라”합니다.
이로보아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도 행위의 제사가 아니라 마음의 제사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대를 막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사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주실 줄 믿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헌금을 많이 한 것으로 봉사를 많이 한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돌아보아 진실한 마음으로 믿음에서 떠나지 않음으로 성도의 삶에 순간 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는 귀하고 아름다운 성도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는 언제인가?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17-18)
17절에서 만약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되어지는 일이라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줄 알고 율법의 속박을 벗어버렸던 자들은 죄인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고 , 그렇게 된다면 결국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인데,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never..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에서 [하다가(제툰테스)~나타나면(휴레데멘)]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연히 율법을 폐기하는 이방인들과 같은 죄인으로 자신의 모습이 발견된다면 율법의 잣대가 적용될 때 율법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한 자들은 모두 죄인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결코 그럴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하다가 율법에 대하여는 죄인으로 보여지는 것이 왜 진짜로 죄인이 아닌지, 그리고 왜 그리스도께서 결단코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헐었던 것(카탈로우)는 일반적으로 어떤 건축물을 헐다, 무너뜨리다는 뜻이지만,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폐하였던 바로 그 율법의 조항들을 자신의 구원을 위해 다시 지키려고 애쓴다면 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는 죄인으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시 세움으로 율법에 대하여 의인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진정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범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신 분을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만드는 죄악보다 더 무서운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흉악하고 큰 죄라해도 이보다 더 무서운 죄 즉 하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를 몰아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야합니다. 네로보다 히틀러보다 본디오 빌라도가 수천년동안 성도들의 정죄를 받게 된 것은 그가 원하였든지 원하지 않았든지 간에 그가 판결권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극악한 죄인으로
취급하였기에 그처럼 모든 성도들과 교회의 정죄와 천상의 정죄를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 되게 하는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율법주의가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함을 명심하고 항상 자신을 살핌으로써 항상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되시기를 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은 자들은 율법의 그 어떤 규정과도 상관없이 의인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인된 자들은 절대로 율법으로 자신을 판단하거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율법적 윤리적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항상 죄 의식속에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온전히 믿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시기를 원합니다. 오직 주님의 온전하신 속죄를 믿으며 그로 말미암는 축복과 자유를 항상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성도의 삶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는 언제인가?
셋째로 내가 사라질 때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19-21)
19절은 고정관념에 대하여 죽는 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 수 있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마9:17에서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됨이라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둘이다 보전되느니라” 하십니다.
즉 낡은 생각과 사고의 틀, 곧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그들은 이제
껏 알지 못했던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라 하는 말은 그것과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서 더 이상 요구를 받는 일도 더 이상 지배되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찔러도 때려도 만져도 반응없는 자 같이 율법의 유혹을 완전히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고정관념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의식과 사고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야 성공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버리고, 섬김을 밧는 자가 높은 자라는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죽는 성도가 되어 오직 하나님의 백성다운 의식과 생각으로 내면을 채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0절에서 바울 자신의 자아는 이미 죽어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부이고 또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라는 의미심장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신의 삶과 율법주의자들의 삶을 대비시킴으로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자인 것처럼 자기들의 의를 주장하지만 자기 의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는 의롭지 못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킬 것을 주장하며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들 자신의 의를 쌓아 가면 쌓아 갈수록 그들을 위하여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는 더욱 더 감춰지고 가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에 대하여 죽은 바울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의 의지와 자아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죄악된 의지와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철저한 예수의 종이 되었기에 자신의 의지대로 선이나 의조차 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한다면 그 역시 그의 능력이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천국에 이르러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린다 해도 그 역시 그의 의와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과 바울의 삶이 다른 것은 바로 자신을 부인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주장하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예수님만을 위하여 살아 가시를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의 삶을 통하여 크게 영광 받으시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실 줄 믿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씀은 바울 자신이 과거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음을 표현하는 한편, 십자가에 못박힌 그 효과가 영구적으로 지속될 것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육체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바울에게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희생적 대속적 십자가였다면 바울의 십자가는 율법과 죄에 대한 죽음과 해방의 획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바울 역시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의 길을 따르므로 십자가 고난뒤에 있는 궁극적인 영광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며, 이것은 곧 더 이상 내 자아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곧 그리스도께서 나의 참된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적 연합은 바울 자신을 완전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주어서 그런즉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절 말씀처럼 죽은 자로 사는 자가 진짜 사는 자입니다.
자신의 자아가 완전히 죽어서 더 이상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고 오직 자기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만 살아가게 된 바울같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는 그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요 , 그 어떠한 삶보다도 아름답고 행복한 삶인 줄 믿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과 판단을 땅 속에 묻어 버리고 자기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무조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신 말씀처럼 주님을 위하여 자아를 포기하는 그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위하여 죽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그런 진정한 삶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주님을 위하여 죽은 자로 살므로써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성도의 삶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는 언제인가?
첫째로 오직 믿음만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줄 믿을 때입니다.(15-16)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17-18)
셋째로 내가 사라질 때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19-21)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동해야 한다면 교만하게 자기 공로를 내세워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참 자유를 주실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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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구별의 영을 가지신 님들께 좋은 일이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