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절부터 20절까지는 야곱이 에서를 위하여 많은 예물을 앞서 보내어 준다는 내용입니다.
간구를 한 야곱은 거기서 밤을 지내며 묵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서 자기의 형 에서에게 줄 선물을 따로 구분하는데(13절), 양과 염소 그리고 낙타와 소와 나귀 등 여러 종류의 가축들로 준비합니다(14,15절). 속이는 자 야곱은 형 에서를 위해 예물을 택하여 여러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거리’를 둡니다(16절).
여기서의 ‘거리(상거)’는 어떠한 상황에 닥쳐서도 숨돌릴 만한 여유가 있는 거리를 가리킵니다. 여호와께 벧엘 언약을 가지고서 간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여 계속된 불신과 불신앙적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을 결코 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해하여 죽이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벧엘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28:15)라고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여전히 여호와께 간구를 하면서도 인간의 생각과 수단을 버리지 못합니다. 택한 백성은 절대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주어질 때에 담대하여지고 걱정이나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은 인간에게서 담대함은 물론 평안함과 기쁨을 모두 상실하게 합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차있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되고 되지 않고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있습니다. 야곱이 살고자 형에게 아첨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자 계획하셨으므로 살리는 것입니다. 생사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를 주장하시는 여호와 전능자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참 신앙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줄 예물을 각각 여러 떼로 나누어 종들에게 맡기고 에서를 만났을 때에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할 것을 지시하여 줍니다. 즉 예물의 출처와 주인은 야곱이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라고 말입니다(17,18절). 이렇게 둘째와 셋째와 각 떼로 나눈 모든 종들에게 지시를 하는데 이렇게 하는 야곱은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19,20절).
위 본문에서 ‘형의 감정을 푼 후에’라고 하는 것을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내가 그의 얼굴을 가리울 것이다...그리고 그 후에’입니다. 즉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줌으로 얼굴을 가리운다는 것은, 예물로 피해자의 눈을 덮어 가해자를 보지 못하게 하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물로 형 에서의 분노가 풀리기를 소망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를 받아 주리라’는 말은 ‘그가 나의 얼굴을 들어 올릴 것이다’라는 뜻인데 이는, 형이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려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용서함으로 그를 죄인된 위치에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이 이름대로 반드시 언약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아직도 확실히 믿지 못하는 야곱은 두려울 뿐만 아니라 생각도 매우 복잡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살기 위한 꾀를 스스로 만들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종들에게 지시한 내용은 아주 그럴듯한 것 같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곱의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적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과 걱정을 놓지 못하여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서의 감정이 풀리거나 풀리지 않는 것이 야곱의 수단과 방법, 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꾀와 이삭의 꾀 역시 그것으로 위기를 면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한 것이 아니라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은 어리석고 비열한 생각을 가지게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은 지혜롭고 담대한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21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가족과 소유를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네고 홀로 남아 어떤 사람과 씨름하며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축복을 요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이름을 받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줄 선물들을 자신보다 앞서 건네고 야곱은 장막에서 그날 밤을 지내다가(21절) 그 밤에 일어나 자기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 자기의 소유도 건너게 한 후(22,23절) 홀로 남아 머뭅니다. 자신은 더 진행할 담력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 염려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진행하지 못하고 홀로 남게 되는데,
그때에 벧엘의 하나님께서 또 야곱을 찾아와 주십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4,25절)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직전에 찾아오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으로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즉 ‘언약’ 때문이며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이루어짐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은혜 언약은 열조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또한 이삭에게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야곱에게 계속 이어집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은혜언약’에 대해서 좀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은혜언약’을 성경은 다른 표현으로 ‘복’이라고도 하며 이를 ‘절대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먼저 은혜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아담이 여호와의 법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호하십니다. 죄로 인해 사영체(死靈體)가 된 그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리고 이 ‘복’은 인간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복이 성취된다하여 ‘절대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이 ‘상대언약’ 혹은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행위언약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행해야만 그 언약이 언약대로 이루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율법 조문에서 계명과 율례 등이 행위언약입니다.
율법을 우리는 시내산 언약이라고 하는데 이 율법이 수여되는 시점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 홍해 길로 시내산에 도착해서 받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 주어진 은혜언약이며 복이고 절대언약이다는 것입니다. 즉, 야곱의 행위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자(어떤 사람)가 야곱을 찾아와서 야곱과 씨름하십니다. 그리고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25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의 부리는 종이 인간 야곱을 이기지 못합니까? 이것이 말이 됩니까? 어떻게 인생이 하나님을 이깁니까? 이들 하나님의 사자 혹은 천사들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부리시며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대신 행하는 자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성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였고 그리고 그 성을 불로 멸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 말씀은 곧, 죄인된 인간의 자아가 스스로는 결코 꺾이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죄인은 스스로 자아를 꺾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환도뼈)를 칩니다.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므로 어긋나고 야곱은 그로 인해 절게 됩니다(31절). 우리가 죽어야만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안되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셔서 대신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몸을 죽이고 그의 영성을 살리신 것입니다. 야곱이 절게 되므로 이제 꼼짝도 못하며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복’만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이후의 야곱은, 뒷 꽁무니에서 자신만 살고자 하던 모습에서(32:20 참조) 가장 앞으로 나서게 됩니다(33:3).
이 ‘허벅지 관절(환도뼈)’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1절)라고 말씀하시고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32절)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을 신학자들은 남자의 힘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하며 또는 남자의 생식기관과 관련된 부분으로서 생(生)의 원천을 상징한다고도 합니다.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으면 힘든 상황이므로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요 은혜의 가시가 됩니다(고후12:7~10/갈6:17 참조). 곧 환도뼈는 〈자신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의 육은 죽고 예수님의 의로 영은 살아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나로 가게 하라’(26절)고 하는데 이에 야곱은 ‘자신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의 사자는 야곱의 요구에 답은 하지 않고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27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시는지요? 축복을 구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이름을 물으며 갑자기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야곱의 바뀐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28절). 이에 야곱은 청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29절).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이름은 말하지 않는 그 사람 곧 사자는 야곱이 요구한 축복을 이름으로 축복하는데, 그 축복의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덧붙혀서 이름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해 주십니다. “너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과 겨룬 자들은 곧 하나님과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야곱은 고백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30절)고 하여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합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지만 인생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면 다 죽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오셔서 인간의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요구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가요? 그리고 이름이 축복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얼굴로 대면했으나 생명이 보존되는 특별한 인생들의 무리입니다(민23:9 참조).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서도 죽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뿐입니다. 여기서 야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셔야 합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택하심에 의해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이삭의 축복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하신 나라에 대한 계승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에서에게로 가는 야곱에게 또 찾아와 주셔서 위와 같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 축복은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변경입니다.
‘이름’은 성경 역사에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고유하신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름으로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라는 이름도 하나님께서 주셨고 야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시고 이 이름대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새 이름 그것은 곧 위로부터 오는 재창조의 행위를 뜻하며 이는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생명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셨으며 그리고 ‘임마누엘’로 오신 것입니다.
한편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명명자(命名者)에게 통치권과 소유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이스라엘의 통치와 소유는 그 이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속한 백성들을 대신하여 싸우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들을 대신하여 싸우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의 전쟁을 뜻합니다(출17:16 참조).
하나님은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 열두 아들을 주시고 이들을 애굽과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대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다윗 왕으로 하여금 하게 하심으로 성취하십니다. 【‘영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드디어 해가 돋는데 그때 야곱은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며 걷습니다(31). 야곱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주의 천사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절면서 걷게 되고 그리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람 즉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짐승의 엉덩이뼈의 큰 힘줄은 먹지 않습니다(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