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우울증의 무서운 관성의 힘
술자리 독설 한마디에 넉다운되다
순조롭게 회복되는 것 같다가도 난관은 늘 있다. 우울증이 가지는 관성의 힘은 무섭다. 기분이 반짝 환해지다가 금세 어둠으로 되돌아간다. 어차피 이 싸움은 장기전이다.
참호를 깊이 파고 진지전을 할 각오를 해야 한다. 복병은 무수히 많다. 작은 상처, 사소한 부대낌에도 애써 가다듬었던 마음이 흔들리거나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늘 조심하고 심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해도 우울증은 게릴라처럼, 테러리스트처럼 내 내면에 파고들어 공격을 가한다. 중요한 것은 그럴 때마다 당황 하지 않고 맞서 싸우겠다는 마음 자세다.
회복을 방해하는 복병 중의 하나가 술이다. 적당한 술은 사람을 즐겁게 만들며 정신 건강에도 좋다. 나도 술을 좋아한다. 그러나 과도하게 마시면 실수가 일어난다. 감정 변화를 급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구든 취하면 평소 신중하거나 배려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상대방에게 함부로 행동하거나 심한 말을 할 가능성이 있다.
회사에 출근한지 보름 정도 지났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동창 친구 몇 명을 불러내 술자리를 가졌다. 이런 평범한 만남조차도 내겐 꿈만 같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만남도 어려운 상태였다. 물론 이들은 내 상태를 잘 모른다. 힘든 상황이란 것은 알지만 그런가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으로 환자였고, 심리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이런 사실을 그날 나도, 친구들도 잊고 있었다.
내가 잘 가는 이태원 고깃집에 모여 소주를 마셨다. 화기애애했다. 그러다 작은 언쟁이 일어났다.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 늘 일어나는, 그렇고 그런 언쟁이었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그동안 품었던 섭섭함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그냥 둘이 이야기하도록 놔두면 될 터인데 중간에 내가 끼어들었다.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나. 오늘같이 좋은 날 그냥 한잔하자.” 잔뜩 기분에 들뜬 내 말은 물론 호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다. “네가 뭔데 나서는 거야. 너도 똑같은 놈이야.” 그 친구는 내게도 화풀이를 했다. 섭섭함을 토로하고 공격했다.
예전 같으면 그냥 껄껄 웃으면서 넘어가거나, 아니면 야무지게 한마디 해주고 끝냈을 일이었다. 원래 그는 술자리에서 주사가 있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날은 그러지 못했다. 나는 평소 주량보다 훨씬 적게 술을 마셨는데도 어질어질할 정도로 금방 취기가 올라 있었다. 그만큼 몸이 허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심리적으로 무방비 상태였다. 상대방의 다소 비판 섞인 말이 내게는 안면을 강타하는 강펀치와 같았다. 보통 아픈 게 아니었다.
“아니. 내가 뭐….”
한마디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고 그냥 상대방의 질타를 고스란히 맞고만 말았다. 워낙 기가 죽어 있어서 뭐라고 대꾸할 말도, 기운도 없었다.
술자리가 파하고 비몽사몽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후회됐다. 괜히 술자리를 만들었다 싶었다. 매우 불쾌했다. 그 친구에게도 불쾌 했지만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었던 나 자신에게 더 불쾌했다.
이튿날 아침잠에서 깨어나니까 예전의 지옥 같은 심리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어젯밤 상황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그의 말이 비수 같이 내 가슴에 내리꽂혔다.
“넌 나쁜 자식이야.”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열풍을 불러온 이유 중의 하나가 노대통령의 설화(舌禍)였다. 그는 자신의 형 노건평 씨에게 3,000만 원의 돈을 갖다 준 사실이 드러난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에게 매몰 찬 말을 던졌다.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돈 주고 머리 조아리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남 사장은 그 길로 한강다리로 가 투신자살했다.
당시 남 사장은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극도로 신경이 쇠약해져 있을 터였다. 그런 마당에 일국의 대통령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질타를 당하니 그 충격은 그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고 말았다.
그날 나는 온종일 누워 끙끙거리며 힘들어했다. 주말인데 몸과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동안 운동으로 좋아졌던 컨디션이 곤두박질쳤다. 이럴 때는 무엇을 하든, 어떤 자세로 누워 있든 힘들었다.
암 환자의 고통이 바로 이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이 있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힘들었다. 그 고통은 겪은 사람만 안다. 오직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 외에는 삶에 어떠한 욕망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회생이 될 것 같지 않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러다 간혹 심장이 쿵 내려앉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면 저절로 몸이 움찔하면서 저절로 움직였다.
인기 그룹 AOA의 노래 제목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한 ‘심쿵해’란 표현에는 ‘멋진 이성을 만나면 심장이 쿵쾅쿵쾅 내려 앉는다’는 낭만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당시 나의 ‘심쿵해’는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질 때 느껴지는 공포감 같은 것이었다.
‘이러다가 혹시 파킨슨병으로 발전하는 것 아냐?’
다시 ‘심쿵’ 해졌다. 뇌 기능 이상으로 비롯되는 대표적인 신경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은 가만히 있어도 몸이 저절로 떨리는 병이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발작적으로 떨림 현상이 일어난다. 파킨슨병 환자의 절반가량이 우울증 증상을 보인다. 새로운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날은 가족들과 저녁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추슬러 가족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초여름 오후 신록의 햇살을 맞으며 강남 번화가를 걷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웠다.
멋지게 차려입고 나온 선남선녀들의 웃는 모습과 활기찬 동작이 마치 무성영화에 나오는 슬로비디오 동작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느릿느릿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지곤 했다.
현기증이 났다. 저녁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너무 피곤해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식당 밖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럴 정도로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생각을 놓아야 마음이 숨을 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