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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블로그(Blog)!
―씨앗이야기 3
한상준
“입석(立石)도 못 봤네?”
“들어감서부터 눈에 콩깎지가 씌였던가베요.”
땡볕에 졸음 겨운 강아지처럼 눈꺼풀이 끄먹끄먹 내려앉았다.
“안 볼껴?”
“빠져나와 부렀는디요, 뭐.”
이번 채집지는 군내(郡內)였다. 아랫녘 바닷가 K군, B군 쪽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다시 들고날 수 있는 인근이었다. 그래, 납덩이같은 눈꺼풀을 부비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며칠 동안 퍼부은 술탓이기도 했다.
여름날 최적의 쉼터인 다리 밑, 수동교(水洞橋) 아래로 내려가 낮잠을 청하기엔 그래도 선배인 권 부장에게 좀 지나치다 싶어 나무그늘 아래 차를 세우고 무람없이 눈을 붙이려는 내게 그가 지청구를 해댔다.
“무신 잠이랑가, 샛똥빠지게.”
권 부장의 채근을 한쪽 귀로 흘렸다. 의자를 한껏 밀쳐 몸을 길게 뉘였다. 차창 사이로 바람 한 줄금 휘익 지나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상큼한 바람이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갈 질이 수월찮다니께, 그러네.”
소나기밥에 체한 얼굴로 빤히 내려다보는 그를 몰라라 하며, 몸을 외로 꼬았다. 체한 건 정작, 나였다. 어쨌거나, 채집 분야에서 이력이 붙은 권 부장이었다. 또한 이 지역 출신이었다. 인근 지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소상하게 알았다. 충청도에서 처가인 전라도 이곳으로 터전을 옮긴 지 5년째인 나는 아직도 군내의 면소재지는 들락거렸지만 자연부락까지는 잘 몰라 곧잘 헤매곤 하였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차문을 열고 나갔다.
“안즉도 중천이구마는 그라요.”
실눈으로 중천볕 한번 올려다보고는 눈꺼풀을 후다닥 닫아버렸다. 몇 군데 더 들려야 했다. 오산마을 이장에게선 옥수수와 조, 쥐눈이콩 등 흔해 빠진 씨앗 서너 가지를 수집해 놓았다는 전갈을 받아놓고 있었다. 안골과 한천마을도 지난번엔 그냥 지나쳤었다. 오늘은 꼭 훑고 가야 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렀지만 잠귀신에 홀린 눈꺼풀은 섣불리 치켜 일어서려 들지 않았다.
“연타석으로 홈런을 치드라니, 원.”
내리 사흘을 주독에 빠져 있던 걸 두고 이르는 핀잔이었다.
“누구땀시 주야장천 들입다 술잔 부었는디라?”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권 부장이 승진 가도에서 비껴 서 있긴 했으나, 그 또한 승진욕을 아예 접어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 권 부장이 자신의 처지를 밀쳐두고 앞서 나를 먼저 생각해 주리라 여긴 건 요망일 뿐이었다.
“또 내 탓허는 디,”
권 부장이 손사래를 쳤다. 그의 말을 내가 토막냈다.
“그걸 다 주라 헙뎌, 내가. 쪼매 나누자고 허는 것도 하도 내차게 마다해부니께, 이러코롬 성질을 부리는 거지라.”
올해부터 멸종 상태에 이른 토종씨앗을 채집하여 납품하게 되면 인사고가와 보너스가 주어졌다. 본사로부터 실적 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은 지사장의 지시라고 했다. 토종벼 종류 중 이제 거의 멸종 상태인 다사금(장망)을 입수한 권 부장이 그걸 내게는 한 톨도 건네지 않고 남김없이 회사에 납품해버린 걸 꼬집는 것이었다.
비정규 한시직인 채집사원에게는 보너스만 주어줬다. 내가 보너스에 욕심을 내서 다사금을 손에 넣으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걸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딴은, 그는 자신의 고향인 이 지역에 오랜 기간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 본사로 올라갈 사람이었다. 인사고가에 반영되는 이른바 ‘물건’을 입수한 걸, 굳이 내게 넘길 위인까지는 아니라는 점 나 또한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채집사원으로 일해 줄 걸 권했을 때, 내가 선뜻 응하게 된 내막을 그에게 긴요히 전했었다. 나의 심지를 한껏 동의해 준 건 그였다.
권 부장은 S 종묘사의 토종씨앗 수집팀 중간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임시직인 채집사원을 모집하고 독려하여 일정 지역의 토종씨앗을 단기간에 사재기하는 다국적 기업의 자회사인 S 종묘사 사원이 되어 있었다. 각 종묘사마다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씨앗은행에서 토종씨앗 채집사원을 뽑아 매집에 나서고 있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권 부장은, 지역 연고자를 배치하여 실적을 배가하려는 회사의 방침에 따라 자신의 고향에 일시 파견되어 내려온 것이었다. K대 농대 선배이자 노동운동판에서 한때,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선배가 자신의 고향에서 농약사를 운영하고 있는 후배에게 채집사원 입사를 권했고, 나 또한 우수 토종씨앗을 보존, 개량, 보급하면서 지역의 농민운동과 문화운동 그리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모색, 관여하고 있던 차여서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씨앗 채집은 우수종이건 비우수종이건 가리지 않았다. 굳이 비우수종까지 매집하고 있는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우리 땅에서 채종되는 모든 씨앗을 보존, 전시하기 위한 씨앗은행의 채집이라며, 마땅하고 당연한 회사의 방침이라 했다. 이제는 누가 파종하지도 않아 보관하기에도 귀찮아하는 밭보리와 배추씨, 오이씨, 호박씨 심지어 종류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흔한 옥수수 씨앗 그리고 비우수종까지 매집하는 까닭에 대해서 나는 일단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씨앗은행으로서 모든 종의 종류를 다량 확보하고자 하는 건 당연한 책무일 수도 있겠다 여기며 접어두고 있었다. 기실, 다종다양한 생물종의 번식과 생산 자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된 게 이미 오래 전이었다. 소득의 창출과 확대를 위한 농업으로 생산방식이 바뀌면서 농업생산 품종의 선별과 식재 및 수확은 철저히 자본주의체제에 따라 지배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S 종묘사는 바로 그런 체제를 더욱 강고히 하고 있는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의 한국 내 자회사였다.
“눈두덩 붙이려 말고 퍼뜩 일어 나거라. 이 따우로 발품 팔어 갔고넌, ‘물건’ 같은 건, 택도 없는 소리다.”
다사금을 입수하게 된 경로에 대해서도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사금은 사실 남도 쪽에서 보다는 중부지방 특히 충청도 쪽에서 지역저항성을 지니고 있는 볍씨였다. 친환경유기농업 지원과 확대를 위해 연구기관을 설립한 뒤 토종씨앗 보급에 앞장서고 있는 ‘흙살림’에서 개량화해서 시험재배를 거치고 있는 종자로 알려져 있었다.
“국밥집이서 먹은 나물 찬이 맛이 간듯 허도만, 아랫배가 영 묵직허요, 시방.”
‘물건’에 대한 기대감이 바싹 솟고라지지 않기도 했지만, 뱃속마저 메스껍고 묵직한 탓이었다. 눈두덩을 내리감은 채 심드렁하니 대꾸하는 내게 권 부장이 속내를 읽었다는 듯 다시 채근을 해댔다.
“항꾸네 먹은 밥에 너만 그런 건, 술 탓이다. 암튼, 뒷간에도 갈겸, 보고 가장게 그러네, 야가.”
뒷간 이야기에 퍼뜩 변의를 느꼈다. 발칫잠이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달아났다.
“고래심줄멩이로 질기네, 그랴.”
차문을 열고 나가 입석 앞에 섰다.
수동(水洞)마을. 표지석의 궁체 글씨가 눈에 들어 왔다. 의외로 덩치가 컸다. 스물 남짓 되는 호수(戶數)에 비해, 입석의 풍체가 여간 나볏한 게 아니었다. 강바닥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듯 보이는 단단하고 미끈하게 잘 빠진 돌이었다. 거무튀튀하나, 육덕이 듬직하여 귀공자다운 면모를 뽐냈다.
조선조 세종 12년(1430년, 庚戌)…. 마을의 내력이 빼곡히 적혀 있다. 여느 마을이건 초입에서 꼼꼼히 보고 새긴 뒤, 들곤 하였었다. 권 부장이 내게 전수한 채집 수칙 가운데 하나였다. 마을의 노인들과 말 길을 트고 말 기운을 돋우는데 매우 요긴했다. 마을의 오랜 자취를 들먹이면 어르신들은 그만 깜빡 뒤집어졌다. 그려, 그려, 오래 됐제. 근디, 시방, 이렇게 쥐똥 싸놓은 것멩이로 드문드문 헐렁헌 마을이 되야 부렀다네, 원. 것도 몇십 년 사이에 그리되었어. 그러기 말씸이요. 이 무신, 해괴한 짓인지 모르겠구만이라, 이렇듯 맞장구치며 거들고 나서면 금세, 먼 길 나섰다 막 돌아온 품엣자식 대하듯 하였다.
600여 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마을이었다. 유장했다. 80년대 초반까지는 90여 가구, 500여 명 가까이 되는 마을민이 살았단다. 스무 가구 남짓 남게 된 게 불과 30여 년 사이라 했다. 이렇듯 오래된 마을이 언제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몰라 내력을 이 돌에 촘촘히 적어둔다고 새겨 놓았다. 돌아와 고향에서 말년이라도 보내겠다고 하는 자식들도 없지만, 그나마 도시에서 거덜나 이제 살려고 내려온다 설치기라도 하면 애당초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막아서는 게 또한 농촌의 아비와 어미 심경이었다.
방금 만나고 나온 이장, 김 씨의 얼굴이 얼핏 떠올랐다. 예순 여덟으로 마을에서 두 번째로 젊은 축에 들어, 이름뿐인 마을 청년회장도 겸하고 있다면서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던 김 씨였다. 수동리만이 아니었다. 시골이면 어디건 다 그랬다.
“여그 마을도 넉넉―허다, 참.”
권 부장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회한이 담긴 투로 내뱉었다. 나는 그를 힐끗 건네 보았다. 다시 입석으로 향하려던 시선을 돌려 빠져나온 마을 안섶을 훑어보았다. 집집이 넓은 터에 양지발로 들어선 남향받이에다 배산임수의 터전이었다. 마을 옆 산, 옆구리에 들어선 저수지 둑에는 키 큰 자귀나무로 보이는 몇 그루가 붉은 꽃잎을 피우고 있었다. 따듯하고 온후하게 눈에 차들어왔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수동천 또한 제법 수량이 넘쳤다. 물 걱정 없이 논농사 지을 수 있는 수로와 마을 옆으로 꽤 넓직한 밭고랑을 둔 촌락이었다. 마을에 들 때엔 그 또한 흘려버린 풍치였다. 오늘따라, 눈에 잘 띄지 않던 올망졸망한 풍경이 나중에야 보였다. 어찌 동북풍 안개에 수숫잎 꼬이듯 했다. 거쳐 온 앞마을에서도 마을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고즈넉한 정자를 되돌아 나오면서 보았었다. 하여, 앵글에 담지 못했다.
입석에 표기해 놓은, 마을이 열리며 심어진 수령 600여 년 가차이 되었다는 느티나무가 우산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람한 자태였다. 어느 마을에서나 보게 되는 오래된 나무는 정겹기만 한 게 아니었다. 묘목에서부터 지금처럼 거목이 되는 수십, 수백 년 동안 마을의 대소사를 옆에서 지켜보고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웃고 울기를 함께 해온 터라, 마을과 연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품에 안고 있는 존재였다. 채집 나가면 앵글에 꼭꼭 담아두곤 하였다. 당산나무 격인 느티나무, 팽나무 등 넓은 그늘을 거느린 큰 나무들의 기품 있는 자태를 담은 사진들이 4GB 용량 두 개의 USB에 저장되어 있었다.
오늘은 출발부터 달랐다. 권 부장이 동승하겠다고 따라나선 것도 딴은, 그랬다. 일주일에 두 차례 정도 채집에 나서는 임시직으로 입사하여 처음 채집에 나서는 내게 그가 서너 차례 동행했을 뿐이었다. 그게 벌써 5개월 전이었다. 어쨌거나, 여느 마을에 들고나며 눈여겨보던 표지석, 당산나무, 우산각 혹은 그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풍광 등속을 곧잘 찾아내, 앵글에 담아두던 여분의 일마저 소홀히 했다.
권 부장이 다시 후욱, 연기를 길게 내뱉고는 담배를 비벼껐다. 그가 차에 타자, 나는 우산각으로 향했다. 이제 농촌은 어떤 풍광이라도 앵글에 담아둬야 할 가치의 문제였다. 기록으로라도 남겨둬야 할 보존과 존속이 중요했다. 씨앗 또한 그러했다.
팔각모양의 우산각에는 노인 몇이 눕거나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낯빤대기는 찍지 말어, 이.”
요즘 들어 누구도 잘 입지 않는 모시옷을 입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노인이 내 쪽을 건네보며 손사래를 쳤다.
“내도 마찬가지여.”
함께 앉아 있는 노인도 덩달아 저어하며, 고개를 팽 돌렸다. 그게 말인사라는 걸 나 또한 익히 아는 터였다. 사진기의 앵글은 우산각에 그늘을 드리우는 느티나무의 맨 위쪽 가지 끝에 앉아 지지배배 지지배배 지저귀며 낯도 가리지 않고 짝짓기하고 있는 조류(鳥類)에 맞춰져 있었다.
“지난번, ‘여섯 시 내 고향’인가 허는 디에 쭈구렁쭈구렁 혀갔고 나왔다고, 막내딸년이 쌩 지랄를 허드라니께.”
이마와 볼 주위로 주름고랑이 깊게 패여 있다. 나는 얼른 사진기를 내려놓았다. 나중의 작업이었다. 씨앗 채집하러 나가면 으레 싣고 다니는 아이스박스를 꺼냈다. 권 부장이 마른안주를 챙겼다.
“다리 너메까장 갔다가, 멀 놔두고 간 게 있다고 다시 왔디야?”
마을을 들고나는 축들을 눈여겨보는 습성은 어느 마을이건 같았다.
“찰랑찰랑 흐르는 개천을 봉게 발 당구고 있으먼 신선이 따로 있간디, 허겄던디라. 물 대느라 양수기 빌리러 댕기지 않아도 되고, 마을이 참 안온허네요, 이… 어르신들 안 보고 가먼, 지들 마음이 서운헐 것 같아서라.”
너스레 몇 마디 앞에다 달고, 뒤에 내심을 드러냈다.
“인근에 이런 동니는 없제.… 근디, 서운헌 것도 징허게 없능갑네.”
“무신 말씀을요? 농민 어르신들이 인자는 국보급 인사들인디라.”
쩌그, 당신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로 낙향해 사시다가 훌쩍 시상을 떠부신 그 냥반께서 헐라고 혔던 것멩이로 인자는, 이러코롬 저러코롬 농사짓는 냥반들이 참말로 귀헌 냥반들이제라, 허는 말품은 입안에 가둬버렸다.
실로 그러하다는 생각을 나는 진즉부터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농민들이 누군가? 21세기 전 인류적 화두인 환경과 식량문제를 풀어내는 최일선의 활동가가 아니런가, 말이다. 어느 농민단체에서는 국가유공자로 대우해 줘야 한다는 주장도 내세우지만, 그게 빈말이 아닌 시기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덤받이 같은 농사꾼을 두고, 국보급?”
‘낯빤대기’ 노인이 반문 하면서도, 군침이 궤는 듯 내가 들고 온 아이스박스와 권 부장이 들고 서 있는 마른안주를 번갈아 힐끗거렸다.
농촌의 어르신들은 사람 가리는 법이 별반 없다. 어느 길손인들 우산각에 들면 자리를 내줬다. 땡볕에 냉기 가신 물이라도 목을 축이라며 한 사발 우선, 들이밀곤 하였다. 몇 마디 나눈 뒤에는 당신집으로 우격다짐해서 끌고 가 찬 없는 밥상을 내놓고는 이내, 한 숟갈 더 들이미는 인정이 여직 남아 있었다.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는 겨, 시방.”
‘여섯 시 내 고향’ 노인 또한 끙, 했다. 주름진 이마에 몽니가 도드라졌다. 젊었을 적엔 한가락 했을 법한 노인이었다.
“농담이라뇨? ‘일국의 농민’이라는 말도 있다니께라.”
히죽, 웃으며 나는 얼음 속에서 막 꺼낸 맥주를 잔 가득 따라 돌렸다.
“땡볕에 앞바람 보담 훨 시원헐 거싱게 쭈욱, 드시게라.”
두 노인이 잔을 받아, 냉큼 비웠다.
“게 눈 감추듯 헐람서, 말뽄새들 허고는.”
목침에 머리대고 누워 있던 어르신 두엇이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 중 온통 백발인 노인이 ‘낯빤대기’와 ‘여섯 시 내 고향’ 두 노인을 탓하며, 맥주와 안주를 번갈아 건네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얼른, 잔을 돌려 채웠다.
“그란디, 옛날이사 달걀 노른자위 같었지만 지금은, 똥친 막가지멩이로 어디 둘 디도 없는 씨앗 나부랭이럴 머헐라고 사제는 거셔?”
백발노인이 너희 놈들 꼼짝 마, 하듯 짚어냈다.
“어찌코롬 아셨대요?”
“굴뚝 연기 매운 냉갈 맡고서야 과부집입네 허는, 그런 콧구녕이라먼 달고 다니지를 말어야제.”
“아따, 어르신 코가 사냥개 그것멩이로 우뚝허네요.”
권 부장이 개코는 개코이되, 오똑한 개코라며 슬쩍 눙치자,
“음마, 딱 맞춰 부네. 젊었을 적엔 인근 처녀들이, 박 씨, 저 코만 보고 고것도 큰 줄 알고 나래비를 섰더라네. 흐흐흐.”
“안엣놈이건 바깥 치들이건 똑 한 통속이네, 그랴.”
오뚝 날이 선 듯한 콧잔등을 쓰윽 한번 훔치고는 저녁 굶은 시어미 상으로 대꾸하는, 박 노인의 빈 잔에다 권 부장이 거품 허옇게 일도록 맥주를 따랐다.
“속빈 강정멩키로 왜 이리 딸어.”
거품을 많이 내는 권 부장을 흘겨보는 박 노인의 이마에 굵은 이랑이 도졌다. 가라앉는 거품 위에 내가 후다닥 잔을 채웠다.
“요새는 개 팔어, 염소 팔어 허고 댕기는 치들보다 씨앗 사러 댕기는 축들이 더 많당게. 트럭 대가리에 붙은 스피카에서 대고대고 소리 지르지 않고, 이녁들처럼 쫙 빠진 검은색 자가용 타고 다님서 뒷짐 떡 허니 지고, 내색 없이 대니니께 그러제.”
벌써 여러 차례 훑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타 종묘사들이 채용한 수집상이거나 종묘사의 씨앗은행에 고가로 납품하고자 하는 ‘물건’ 위주의 개인 채집상일 것이었다. 기실, ‘물건’은 절멸 상태였다. 무른 메주 밟듯 구석구석 들쑤시고 다녔다면 근동에서 ‘물건’을 입수하기는 글렀군,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금메, 땅 파묵고 사는 사람 같지도 안 헌 치들이 그라고 다니니께, 더 이상허등만, 이.”
박 노인 옆자리에서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노인이었다.
“씨앗 사서, 잘 보관허고, 전시헐라고 그러제라.”
권 부장 말에,
“나, 김(金) 간디, 촌노들이라고 속일라 허먼 못쓰제.”
김 가라 하는 노인이 빈 잔을 탁 내려놓으며 대거리를 해댔다.
“시랑에 걸어두기도 머혀서 인자 돈 살라 허는 게 있기는 헌디?”
상황을 재고 있었던 듯 ‘여섯 시 내 고향’ 노인이 분위기도 바꿀 겸해선지 맨 먼저, 씨앗이야기를 슬몃 꺼내자,
“아이고, 어르신. 지들이 금 좋게 쳐 들일께라.”
대뜸, 응수하는 것이었다. 서두르면 안 되는 게 흥정이라는 걸 권 부장이 모를 리 없었다. ‘물건’이라고 여긴 것일까? 승진욕에 상황 판단이 흐려진 것일까? 권 부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는 나를 보고 ‘여섯 시 내 고향’ 노인이 다시 나섰다.
“요 메칠 전, 이장이 오늘 수집상 온다 허드만, 거그들이었나베.”
일단, 비껴서는 것이었다. 수집상이 우리들만은 아닌 까닭에 ‘물건’에 대한 기대감과 흥정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노인네들 역시 밀고 당기는 흥정의 법칙을 모를 리 없을 만큼 세상을 살아낸 분들이었다. 거리감의 유지가 필요하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딴은, ‘물건’은 애당초 없는 경우 또한 잦았다.
“지가 지금 온당리서 30마지기 남짓 짓고 있는디라….”
삽 잡고 괭이 쥐어 못이 박힌 손바닥을 굼슬겁게 보여줬다. 나이는 비록 어리나, 동류의 처지라는 걸 인식시켜야 했다. 씨앗값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멸종 상태에 이른 씨앗을 채집하려면 훨씬 못난, 이를테면 흔해 빠진 씨앗이라 해도 귀히 여기는, 땅 파먹고 사는 농민임을 아울러 내보여야 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복무했던 노동운동판에서 빠져나와 고향과 이곳 전라도에서 농민운동을 한 지 8년 째였다. 고향에서 3년 살다, 처가 쪽의 전라도 이곳으로 옮겨와 논농사, 밭농사에 매달려온 세월만큼 여기 말로 ‘겡이’ 박힌 손바닥이랍시고 내보이는 건, 모잡이 앞에 두고 못줄 나무라는 꼴이었다. 칠팔월에 콩서리, 구시월에 감서리 내세우는 짝이었다. 그럼에도 젊은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하면, 그러는 젊은 축들을 공부하랬더니 개잡이를 배웠다며 나무라거나 깔보지 않는 게 또한 요즈음의 농촌 어르신들이었다. 귀농인들이 한둘씩 늘어나면서 농촌으로 오는 젊은이들을 자기네 마을로 데려가려는 마을 이장들이 이제는 적지 않았다. 특히 남도 쪽 여러 지자체에서는 귀농인들에게 여러 혜택을 주면서 유인하고 있었다. 이곳 지자체에서도 농업창업지원, 주택구입 및 수리비, 정착금, 교육비 지원 등 이러저러한 유인책을 쓰고 있었다.
소꿉놀이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듯한 도시것들 하는 짓을 애틋하게 여기면서도 마을 어르신들 또한 반기는 것이었다. 내 뱃속 자식들은 떠나보내면서 넘의 배 자식들은 어서 오라며 내줄 것 한량없이 내주는 노인네들 역시 애틋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라고봉게, 어디서 많이 본 듯 허네, 그랴.”
김 노인이 아는 체를 했다.
“지도 보니께, 뵙던 얼굴 같구만요.”
“‘푸른 농약사’제. 거그서 허는 디가?”
“저 저 작년에 콩 가져갔다가 이파리가 안 나서나….”
“글고 보니께, ‘푸른 농약사’고만.”
“여그서 사시는구만요?”
그때 그 일로 뵈었을 적에는 ‘한천냥반’으로 불렸던 기억이 얼핏 난 때문이었다.
“칫간허고 처가허고는 영판 멀어야헌다는 디, 처가가 이러코롬 엎어지먼 코 닿는 디라서 잠시 들렀다네.”
처가 쪽에 일이 있어 다니러 왔다는 것일테지만, 그 연세에 처가에서의 볼 일이라는 게 무슨 일일까? 하는, 일부러 처가를 찾아 터전을 옮긴 처지여서 동병상련 같은 내막의 궁금증이 농담처럼 솟았지만 내색하기에는 건방진 듯도 하여 머뭇거리는데, 김 노인이 덧붙였다.
“여그는 애시당초 글렀으니께 딴 곳 알아봐야 쓰겄네. 벌써, 여러 차례 자네 같언 사람들이 댕겨 갔다 허드네. 마을이 산 쪽으로 붙어 있다봉게, 머라도 있을깜시 들쑤시고 다녔던 갑데, 그랴. …별종이라먼 모르까?”
“별종이라뇨?”
권 부장이 내게 시선을 건네며 물었다.
“몰라서 묻는겨, 시방.”
김 노인이 권 부장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 나와 같이 다니는 자라면 의당 한 통속일 거라고 믿은 것일까? 혹은 권 부장이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자라는 걸 알아서 그러는 것일까? 김 노인의 어투가 꽤 각단졌다.
‘푸른 농약사’를 차린 둘째 해에 이를테면, ‘씨앗발아사건’으로 지역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산 적이 있었다. 초보 농약사로서 씨앗에 대해 잘 모르던 때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보급한 씨앗이 끝내 싹을 틔우지 않은 것이었다. 그 일로 해서 종자생산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그 폐해가 어디에까지 이를 것인가를 가늠하면서 우수 토종씨앗의 보존, 개량, 보급에 심혈을 기울이고자 작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었다. 물론, 나름으로는 깔끔하게 보상 처리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푸른 농약사’에 대한 신뢰의 상실감이 남아 있는 모양이라 여겼다.
아무튼, 권 부장이 ‘별종’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물건’을 염두에 둔 대꾸일 리는 더욱 만무했다. 여러 번 훑고 지나갔다는 언급을 듣고 난 뒤임에도 그가 굳이 반문하고 나선 것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참에,
“거그 같은 사람들 허는 짓이 무슨 짓인 중 참말로 몰라서 묻냐고?”
김 노인이 다시 일갈해댔다.
권 부장과 내가 ‘별종’에 대해 모르지 않듯 ‘거그 같은 사람들 허는 짓이 무슨 짓인’가를 지적하는 바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나와 권 부장과의 입장 차는 분명했다. 그는 다국적 기업의 자회사인 S 종묘사의 씨앗은행 중간 간부였다. 씨앗은행에 전시, 보관하고자 하는 의도로 우수종이건 비우수종이건 토종씨앗이면 모두를 채집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떤 씨앗들은 그 종묘사에서 ‘씨말리기(Teminator Technology)’라는, 생식능력을 스스로 제거해버린 자손(Self―Terminating Offspring) 즉 자살씨앗(Suicide Seed)으로 둔갑하여 특허권을 취득한 채 농가에 재유통되고, 급기야 나중에는 그 씨앗을 농가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는 지역에서 농약사를 운영하면서 우수 토종씨앗으로 농사짓고 우수 토종씨앗을 보존, 개량, 보급하려는 지역농민운동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외국계인 K 종묘사 계열의 농약사에서, 국내자본으로 시작하여 어렵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농우바이오사’ 계열의 농약사로 특약점을 옮기기도 하였다. 특히 최근에는 학교급식 납품업체에 친환경농산물을 알선, 제공하는 지역식량(로컬 푸드)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덧붙여, 생·협에도 지역 농가에서 생산하는 유정란을 모아 납품 대행을 하는 등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계하는 작업도 겸했다. 뿐 아니라 가공과 유통까지 확대하여 농가의 실질소득 보장을 이루려는 지역의 경제농업 활성화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견지에서, 권 부장에 대해 줄곧 안타까운 마음을 지녀왔다. 젊은 날, 노동운동 판에서 함께 하며 다국적 기업의 기업 윤리에 대해 치를 떨던 그와의 밤샘 토론을 도리질로 떨쳐낼 수 없었다. 그들이 한국 내 자본과 어떻게 결탁하여 노조를 탄압하고 있으며 국부 유출을 자행하고 있는가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권 부장이었다. 그런 그가 다국적 기업의 자회사 중간 간부로 일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작금의 한국 사회 안에서 왈가왈부할 사안은 물론, 이미 아니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처리’한 씨앗과 그렇게 처리된 씨앗으로 인해 종다양성의 파괴가 초래하게 될 심각성에 대해 그와 토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덧붙여, 또 다른 다국적 기업의 한국 내 자회사인 또 다른 S 종묘사가 보유하고 있는 유전자 조작 기술 즉, 특정회사 제품의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결코 농작물의 씨앗이 발아되지 않도록 유전자 조작된 일명, ‘배반자(Traitor Technology)’라 이르는 종자의 파종과 모종으로 인해 파생되고 있는 환경문제 등을 그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종다양한 토종씨앗을 통해 지역저항성과 역병력의 증대를 일궈내고 이를 통해서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정한 생산체제를 갖춰 곤궁기를 극복했고 민족의 먹을거리를 해소하며 형성되어온 우리의 오랜 식탁 문화가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두고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인 거대자본에 의해 우리의 식탁이 어떤 모습으로 종속되고 있으며 또한 그런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의 농식품에 맞춰 전래적인 식습관, 우리의 입맛이 어떻게 변화하기를 강요받고 있는가에 대해 피 터지는 논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다국적 기업에 복무하고 있는 자의 의중은 무엇인지에 대해 비록 언쟁에 그치고 말지라도 확인해야 했다.
이런저런 논쟁거리를 곧이 곧 꺼내 그에게 묻고자 하는 심중이 지난 몇 개월 여 동안 내처 일곤 하였다. 함에도, 어차피 권 부장의 현재 처지를 바꿔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해서, 그가 이곳에서의 토종씨앗 채집 업무를 마치고 본사로 가게 되는 시점에 옹골차게 묻고 따지려는 내심을 나는 그동안 도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였다. ‘씨앗발아사건’ 때, 김 노인의 행색을 더듬어 본 바 농업문제의 심각성을 심도 있게 깨닫고 있으리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래,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 것인가에 대해 지레 짐작하면서도, 나는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사다놓은 쇠갈비 놓고 동서찌리 다투기라도 혔남요? 어찌 그리 화를 내고 그러시는지, 도통, 모리겄는디요?”
권 부장이 마른안주를 더 꺼내놓으며, 김 노인이 처가에 다니러 왔다는 걸 빗대어 만만찮게 맞받았다. 오늘따라 권 부장이 나를 따라나선 것 하며, 이처럼 각단지게 내뱉는 어투 또한 듣고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퍽이나 의아해 하는 시선을 그에게 건넸다.
“말 잘혔네, 자네. 나가 지금 소앙치 뒷다리 하나 놓고 글안해도 동서놈허고 다투고 있는 판인디, 그걸 아는 것 봉게, 앉아서도 천 리를 보는 가 본디, 그럼, 어찌코롬 메지를 놔야 쓰것는 가도 빤 허것고만, 이. 어디, 자네 야그를 좀 들어봄세.”
김 노인 또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칼날 흠은 고쳐도, 말 흠은 못 고치는 벱이라는 옛말도 있고 헌디. 이녁이 지금, 처가 동니에 와서 여그 동니 우세시킬라요, 험서, 그런 야그를 여서 쏟아낼 계제나 되는가를 우신에 살피고 야그를 혀도 허소, 이.”
백발노인, 박 씨 어르신이 후다닥 나무라고 나섰다.
“말 많은 집 장맛도 쓰다더니, 그러코롬 시시비비를 잘 가리는 동니서 어찌 한 동니 식구라고 감싸기만 허는 겨, 시방. 쬐깐허다고 허지만도 그 쬐깐헌 밭똥까리를 언지쩍부터 지서먹고 있는지는 나도 알고 남도 알고 하늘도 아는 일인디. 어쩌자고 동니 것이 우선 혀서 권리가 있다고 허느냐고, 글씨.”
김 노인도 지지 않았다.
“말이사 바른 말이지. 이녁네 부락 가까이에 두락이 있다고 그러코롬 주장을 헌다치먼, 돌아가신 거그 장인, 장모헌티 욕짓거리허는 푁이여, 이 사람아.”
“왜, 그 냥반들까장 끌어들여, 이 시점이서.”
“이녁 장인냥반이 짠 헌 당신 큰딸 데려간다고 얼매나 고마워허먼서 거그헌티 넘긴 땅뙈기가 얼매인지를 이 동니서 몰르는 사람 있으먼 나와 보라고 혀 봐. 그러코롬 욕심을 내먼 못 쓰는 벱여. 자네 동서가 늙막에 고향으로 내리와서 땅 파묵고 살겄다고 인자 돌라고 허고 있는디, 그간 지서묵고 있다고 권리를 내세우면 되것능가. 팔아묵으라 헌다치먼 또 모리것지만 지가 짓것다고 허는디, 말여. 이녁 장모가 세상 뜸서 거그는 작은딸 몫이다 허고 간 걸, 여그 게 사람덜이먼 죄다 아는디, 아무리 십수 년을 지서먹고 있다손 치더라도 생전에 자네 장모가 큰 사우헌티 쓰던 맘을 쬐끔이라도 안다먼, 그리허먼 참말 못 쓰제.”
박 노인의 말에 ‘낯빤대기’ 노인도 ‘여섯 시 내 고향’ 노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들은즉슨, 작은 동서는 본시 이 동네 사람으로, 한동네에서 색시 얻고는 일찍이 고향을 떠 도시에서 살다 이제 내려올 태세인 터, 처가에서 물려받은 얼마 안 되는 몇 두락이라도 찾아서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겠고, 그 동안 동서의 땅으로 알면서도 그 땅뙈기를 지어먹고 있던 김 노인은 오랫동안 짓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쉬이 내놓지 않을 요량을 하고 있는 참에, 이를 협의하러 혹은 앞뒤 분위기를 살피러, 처가쪽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처가 동네에 온 것 같았다. 즈음에, 권 부장이 동서간의 불화를 빗대는 말로 이죽거리며 속내를 건들자, 처가 동네에 발걸음을 한 내막이 불쑥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다른 동서는 보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동서지간의 송사였다. 귀질기게 당신 주장을 내세우는 김 노인을 앞에 두고 외지 사람인 권 부장과 내가, 더군다나 내막을 이제 막 들어 짐작하는 판세에 끼어드는 건, 새참도 없을 고추밭매기에 품앗이 나서는 모양새였다. 이쪽에서건 저쪽에서건 뺨맞기 딱인 시빗거리였다.
나는 서둘러 노인네들의 빈잔에 맥주를 따랐다.
“그새, 파삭 식어부렀나베. 거품이 더 나는 걸 봉게로.”
‘여섯 시 내 고향’ 노인이 아이스박스를 힐끗 건네 본 뒤, 잔을 털어 넣었다. 아이스박스 속에 두어 병이 남아 있었다. 나는 서둘러 꺼내놓았다.
“안주인이 이쁘먼 처갓집 호박꽃도 곱다던디, 글 안허먼, 이런 야그는 이 동니서 본전 찾기도 어렵디 어려운 야그 것고마는, 이러코롬 꺼내놓고 그라시는 거시기를 봉게, 안댁께서 가인(佳人)이신갑네요, 그랴.”
권 부장이 또다시 느글느글하게 맞받는 것이었다. 나는 흠칫 놀랬다. 권 부장을 건네 보았다. 나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권 부장이 술잔을 비웠다.
“들었슴서도 그런 숭헌 소리를 허고 자빠졌네, 그랴.”
김 노인이 종주먹을 휘둘렀다.
‘짠 헌 당신 큰딸’이라는 박 노인의 표현은 몸체 어디 한곳이 어긋나 있거나 고림보 같은 처지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권 부장 또한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이렇듯 이죽거리며 진중하지 않은 언행을 보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를 슬몃 건네 보았다. 흐트러져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어선 아니 될 성 싶었다. 나는 아이스박스를 챙겨 둘러매고는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굼뜬 채 자리보전 하고 있는 권 부장을 일으켜 세웠다.
“저런, 저런, 어른 없는 디서 자란 것 같으니라고. …어여, 일나게나.”
박 노인 또한 권 부장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박 노인이 건네는 심한 말에도 대꾸 없이 권 부장 역시 순순히 일어났다. 인사도 건네는 둥 마는 둥 자리를 떴다.
“영락없는 잡놈이세.”
김 노인의 호통을 한쪽 귀로 흘린 채 차에 올랐다.
지체하지 않고 차를 돌렸다. 권 부장은 차에 오르자마자 의자를 젖히고는 깊숙이 몸을 눕혔다. 내가 이 마을에 되돌아들기 전 그랬듯이, 눈꺼풀을 내리닫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입석 부근에 다시 차를 세웠다.
“그냥 가자.”
그가 눈을 감은 채 툭 내뱉었다. 나는 차를 몰았다. 눅눅해진 상태로 채집하겠다며 다른 마을을 돌긴 틀렸다 싶어, 곧장 읍내로 향했다.
“자요?”
읍내 가까이 이르러, 신호대기 하면서 그를 건네 보았다.
“….”
그는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앞서 벌어진 이야기판이 의도하지 않은 어거지 판으로 흐른 게 필시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권 부장이 다분히 그처럼 이끈 것 같았다. 이 작자에게 이상 기후가 들이친 것일까? 하는 의문이 퍼뜩 일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데, 증말.”
“….”
“선배, 이참에 본사로 가요?”
말길을 돌렸다. 그의 거취와 연관되어 있어 그러려니 싶어서였다. 오늘따라 채집하러 가는 내게 연락해 같이 가자고 나선 것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도록 하였다.
“….”
너도 천리안이냐? 하는 투로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사무실에 내려주까?”
곧장 사무실로 향할 것 같진 않았다. 채집이 끝나고 나면 으레, 그를 불러내 한 잔 하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럴 마음이 일지 않았다.
“우리 집에 안 갈래?”
눈을 뜨고 의자를 제자리로 끌어당기며 정면을 응시한 채 그가 내게 권했다. 그가 자기집에 가자고 하는 건 5개월여 만에 처음이었다. 거나히 술잔 나눈 뒤에도 바래다주겠다는 나를 뿌리치고 읍내 외곽, 북산 끝자락에 있는 그의 고가(古家)로 홀연히 내닫곤 하였다. 그는 처자(妻子)를 서울에 두고 혼자 내려와 살고 있었다.
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라, 나는 되짚었다.
“무신 일이랴?”
아직 해거름에 이르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농약사에 들러야 했다. 몇 가지 일을 마무리한 뒤에 가더라도 가야 했다. 하지만, 그의 속내로 보아 그렇게 하기가 여의치 않은 듯 느껴져 그의 집으로 곧장 향했다. 그에 대한 애증이었다.
그의 집은 네 칸짜리 한옥이었다. 부모 여의고 누이들마저 제 각각 살림을 내서 떠난 뒤, 그동안 비워놓아 둔 터라 한쪽으로 잦바듬하던 걸, 권 부장이 내려오면서 여기저기 손 보고 든 집이었다. 5녀 1남의 아들 귀한 집 종손이라 했다.
“‘종자에서 식탁까지’. 이게 S 종묘사의 사훈(社訓)이다.”
술상을 놓고 잔을 돌리자마자, 그가 뜬금없이 꺼낸 첫마디였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켜고, 자신의 블로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종자에서 식탁까지’는 또한 그의 블로그 명이었다. 최근에 올린 글을 그가 가리켰다.
테크롤로지(Technology)로써의 자살씨앗(Suicide Seed) 문제에 관해서
권 처사|조회 109|10.06.04 23:19
‘자살씨앗’ 문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 지구적 식량위기와 직접적 연관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다른 견지에서 함유하고 있는 심각성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현재의 인류는 오대양 육대륙에 걸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종족마다 생존해 온 지형과 생산물의 특장에 따른 생래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각 종족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유형과 형질을 좇아 먹을거리(식량) 또한 종족의 특성에 따라 생산, 섭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살씨앗은 지금까지 지탱해 온 종족의 유장하고도 독특한 역사와 문화성을 종국에는 용납하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흔히, 식문화라고 하는 특정 종족의 문화양식은 음식에 한정해 있는 양태만을 표출하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는 곧 ‘언어’와 ‘사유’의 근간입니다. 부드러움과 거침, 경직성과 유연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질료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견해가 통용되고 있습니다. 언어와 사유의 문제는 곧이 곧, 특정 종족의 특정함을 드러내는 표증이며 해당 종족이 결코 소멸시켜서는 아니 되는 유일무이한 인류의 문화유산이지요.
그러한 문화유산이 오늘날,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에 의해 생산, 가공된 농식품에 따라 식생활의 일률화와 문명의 균등성에 편입되길 강요받고 있는 것이지요. 신자유주의체제는 경제의 세계화체제지만 그와 동시에 먹을거리의 세계화를 촉진하게 되었습니다. 시내 곳곳에 들어서 있는 유통체인점에서 구입하게 되는 다양한 상품의 농식품들로 해서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 것처럼 보이나, 이는 실로 농업의 다양성 때문이 아니라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에서 생산, 가공하는 브랜드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치즈 하나만 놓고도 대표적인 브랜드가 몇 개나 되는지 찾아보기 바랍니다. 기절초풍하게 됩니다.
문제는 바로 이런 초국적 농식품복합체가 모두 서구의 초국적 거대자본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이들 초국적 기업 역시 서구문명에 바탕한 농식품의 가공, 생산을 통해 전 지구의 먹을거리를 서구적 먹을거리로 단세포화 하고 있습니다. 서구문명으로 대표되는 극히 한정된 양태로 문명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문화의 유색성을 허용하지 않으며 인류문화의 다양성을 끝내 허물어뜨리고 말겠다는 저들의 진의를 우리는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후기자본주의가 인류에게 가하는 가장 폭력적인 문명의 학살 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살씨앗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다종다양한 생물 분포는 어느 지역의 기후와 풍토, 땅의 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씨앗 중에는 기후에 맞는 것도 있고 땅의 질에 맞는 것도 있으며 입맛에 맞는 품종이라면 지역저항성을 지니도록 개량해서 파종하고 거둬들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살씨앗은 대개의 경우 그 지역에서 우수종에 속하는 씨앗을 유전자조작 처리를 해서 원래의 씨앗(F1)을 한해살이 씨앗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원종으로 심은 뒤 채종한 씨앗(F2)로는 다시 생산할 수 없게 됩니다. 생물의 종다양성이 사라지게 되고 초국적 농식품복합체가 간단한 화학적 처리(Teminator Technology)를 통해 만든 하나의 씨앗, 유일의 품종으로만 곡물과 채소를 생산하게 됩니다. 만약, 그러한 씨앗이 급격하고도 갑작스러운 기후변화 즉, 절대적 가뭄이나 집중호우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씨앗이 사라진 뒤, 인류의 먹을거리 문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처지에 직면하게 됩니다. …(생략)
도시농부 : 인류의 식량위기를 앞당기고자 하는 기업이, 어떤 회사들입니까? 10.06.05 06:32
김 서방 ― 대표적인 회사가 몬센토입니다. 10.06.05 06:53
범바위마을 ― 인류의 식량문제를 다룬 다큐 《식량의 미래》(미국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데보라 쿤스 가르시아의 2004년 작)의 감상을 권장합니다. 10.06.05 07:11
나무그늘 ― 한국의 대형 종묘사가 IMF를 겪으며 다국적 기업으로 대부분 넘어 갔지요. 다국적 기업의 한국 내 자회사들인 신젠터코리아와 세미니스코리아가 종자의 50% 이상을 보급하고 있는데, 이들 회사 또한 베트남의 밀림에 뿌린 고엽제를 생산한, 세계적인 유전자조작(GMO) 종자 생산업체인 몬센토의 자회사로 알고 있슴다. 10.06.05 07:57
청포도송이 ― 신젠터코리아도 몬센토 자회사인가요? 10.06.05 10:01
작은 도토리 ― 경북 성주서 참외씨앗 문제로 데모하고 그랬던 종자회사지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틀릴 수도 있지만???10.06.05.11:07
청포도송이 ― 아하!10.06.05.11:09
전라도 사람 : 씨앗문제를 다룬 소설을 읽은 적 있슴다. <「‘푸른 농약사’는 푸르다 ― 씨앗이야기 1」 : 『문학들』 2007년 봄호>와 <「석포리 서촌마을―씨앗이야기 2」 : 『시에』 2008년 봄호>인뎁쇼, 읽어 보시길!(누가 찾아서 읽겠남) ㅎㅎㅎ10.06.05 17:10
도시농부 ― 찾아서 읽기 어려우니, 여기에 댁께서 작품들 ‘펌’ 해보삼!10.06.05.17:18
김제평야 ― 토종씨앗 지켜내려는 움직임 역시 일고 있어요. 흙을 살리자는 농민운동체 ‘흙살림’과 토종 종묘사 ‘농우 바이오’사가 합작하여, 우수종이건 비우수종이건 보존, 보급하고 있습니다. 비우수종은 생물 다양성을 위해, 우수종은 품종 개량을 통해 상품성까지 높여 농가에 보급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Daum 까페에서 ‘씨드림’이나 ‘한국종자나눔회’ 등을 치면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GMO 종자로 생산한 농산물(LMO)가 임계점을 넘어 식탁을 위협하는 현실이 마침내 도래했습니다. 10.06.05 18:59
햇빛농장 : 생식능력을 스스로 제거한 자손(self-terminating offspring), 자살 씨앗(suicide seed)을 만들어 낸 터미네이터 기술...작물을 이용한 ‘생물학적 무기’… 정말, 정말 끔찍합니다. 10.06.05 20:28
도시농부 : 댓글에 달린 ‘터미네이터 기술’이 무엇인지 검색해보았습니다...농부들은 막대한 수확량 때문에 수지가 맞는 거대기업의 종자를 선택하게 되지만 생물학적 “특허”가 식물 내부에 설치되어 조작된 유전자에 의해 강제되므로 결국 농민들은 수확한 씨앗을 다시 심을 수 없게 되는군요... 식량작물을 대상으로 생명을 통제하고 소유하려는 거대기업의 음모가 무섭습니다. 10.06.05 21:35
야생화사랑 : 21세기 글로벌 문명과 함께 폭발하는 인간의 욕망은 가위 사디스트적입니다. 적어도 나와 가족을 지키고 싶어 하는 사소한 인간의 바람마저 가까운 후세에 고통스럽게 무너지게 하는 악몽을 꾸게 합니다. ‘죽임’은 이제 모든 ‘생명’의 비선택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잘 생긴 ‘우리 씨앗’…과연…! 안 보이는 데서 조용히 싹틔우는 것이 씨앗 아니예요?… 흐뭇, 흐뭇∧∧10.06.05 21:55
공양보살 : 남편이랑 어린 시절 얘기하다보면 “우리는 마루타였어” 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마가린에 밥 비벼먹고 콜라 사이다 너무 좋아하고... 그런데 우리 아이들 식탁도 위협받으니 역시나 마루타의 길을 가게 하는 것 같아 씁쓸하지요10.06.06 13:53
더덕향기 : 이런 얘기를 해도 주위에서 아무 반응 없이 시큰둥해서 미칠 뻔 했는데 사람들 인식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면 좋겠습니다 10.06.06 20:28
배반자(Traitor Technology) : 카길, 콘아그라, ADM, 몬센토 등의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에 의해 생산되는 유전자종자(GMO)와 그 종자로 생산된 농산물(LMO)에 의한 식탁의 전 지구적 폐해는 오늘날 피부 색깔과 언어를 초월해 식탁의 균일화로 귀결되고 있는 상황… 그와 같은 ‘생물학적 무기’가 인류에게 어떤 끔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당신 아닙니까? 거기서 복무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종자에서 식탁까지’는 초국적 농산품복합체인 몬센토 자회사인 S 종묘사의 구호(라 해야 맞나, 사훈이 맞나 모르겠으나) 아닌가요? ..이런 글을 쓰면서 초국적 기업에 근무하는 당신은 한국사람 맞습니까? 배반자적이군요. ㅋㅋㅋ10.06.06 22:18
나는 그가 최근에 써놓은 글과 댓글을 읽고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글 말미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노인들의 사라짐…농촌의 사라짐…씨앗의 사라짐이 동질의 문제다.’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가 목을 쓰윽 자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을 쥐어 아래로 여러 차례 내리꽂았다. 짤렸거나, 승진을 포기했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살겠다는 내심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
“고향에 내리와 사는 동안 내 땅, 내 산천(山川) 같은 노인네들 보믄서 얼매나 아프던지… 안 올라가기로 혔다, 흠흠.”
그가 일그러진 웃음을 깨물며 잔을 들었다. 잔을 부딪쳤다. 잔을 털어 넣고 우리 둘은 한동안 천장만 쳐다보았다. 한참 뒤, 우리는 씁쓸하지 않은 웃음을 흘렸다.
“형의 귀농, 바라던 반디, 어찌, 좀 이상타?”
“와 바라, 이.”
그가 나를 끌고 광으로 갔다.
거기에는 그가 모아놓은 씨앗그릇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사금 뿐이 아니었다. 흰메수수, 늦들깨, 검은흐린조, 토종완두, 선비잡이밤콩, 홀애비밤콩, 어금니콩, 개파리콩, 연녹이팥, 굼벵이동부, 산도(찰벼 종류), 토종고추 종류인 수비초와 칠성초(붕어초), 상리단호박, 자지감자, 보지감자, 오누이강냉이…
‘종자에서 식탁까지’ 책임지겠다는 듯 그가 히죽 웃었다. 나는 외우느라 숨이 찼다, 흐흐흐.
한상준
전북 고창 출생. 1994년 『삶,사회그리고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오래된 잉태』, 『강진만』.
―『시에』2010년 가을호
첫댓글 특이한 형식의 소설... 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