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로당을 창당한 박헌영에 의해 피흘린 수많은 사람들
요10:10 벧전1:1-11
내일 모레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국군장병들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현충일입니다. 정부는 1953 휴전이 되면서 1956년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6월을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하는 것은 6일 현충일을 비롯하여 25일에는 6.25전쟁, 29일에는 제2해전이 일어났던 날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한지 2년만에 일어났던 6.25 한국전쟁 중에 군인, 민간인 포함해 1,500,000명 이상이 사망함으로서 인류역사상 세 번째 인명피해를 낸 전쟁입니다. 아 아 잊은 수 없는 6.25 한국전쟁은 6.25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려면 해방 전 이 땅에서 발을 붙였던 공산당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을 중심으로 일어난 공산주의혁명으로 국호를 러시아에 소련으로 바꾸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다
조선의 공산의 시작은 박헌영이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위대한 영도자라는 별칭을 얻고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는 조선의 레린이라고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다.
박헌영은 1922년 조선에 잠입하던 중 단동에서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10개월 복역 후 1924년 1월 출소 후 1925년 4월 17일 을지로1가 아서원 음식점에서 박헌영 김재봉 등 20여명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것이 이 땅에서 공산당의 시작이다.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은 1923년 블라디브스크에서 활동하던 인물인데 일본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사하면서 박헌영은 졸지에 조선공산당 지도자로 올라서는 행운도 따랐다.
조선 공산주의 자들이 독립운동하는 목적과 자유민주주의 자들이 독립운동하는 목적과는 완전히 다르다. 자유민주주의 자들이 독립운동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권 즉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지만 공산주의 자들이 독립운동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려는 정치체제를 만들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 살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목표가 아닌가요?
박헌영은 1925년 조선공산당을 도입한 이후 조선일보에 기독교를 배척하는 글을 쓰는 선봉장이 되었고 개벽이라는 잡지 1925년 12월호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 내면이라는 글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제국주의 영토확장을 위해 첨병구실을 한다는 글도 게재했다. 언더우드선교사가 자기를 도와주었으며 승동교회도 출석하는 박헌영은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기독교와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교회다니던 박헌영이가 무신론자가 되어 기독교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는게 가능할까? 하기야 김일성을 보면 가능하고도 남는다. 김일성 어머니는 강반석이다. 반석은 베드로라는 뜻이며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설립한 숭실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김일성 집안 역시 기독교 집안으로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장로였고, 북한의 부주석을 지낸 김일성 외삼촌 강양욱도 목사였다. 이런 기독교 집안의 김일성이가 공산주의 최고 수장이 되면서 1백년 전 동양에서 가장 큰 교회였던 장대현교회는 현재 김일성 동상과 소년궁전이 있는 만수대로 대체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박헌영이나 김일성이가 기독교를 배반하는 것도 일치했으니 앞으로 그들이 무슨 일을 계획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1925년 11월 25일 박헌영은 공산주의 반일운동하다 수감되었다가 1927년 11월22일 병보석으로 석방되고 1928년 함흥에서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트크로 탈출할 때 가수 김정구의 형 김용환이가 그들이 탈출하도록 도와 준 후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을 보면서 만든 노래가 눈물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박헌영과 그의 아내 주세죽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코바에 가서 국제 레닌대학에 입학하여 공산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조선인으로 레닌대학에 입학하여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자가 박헌영이가 최초가 아닌가 한다.
마치 사람들은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80년 전 왜정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별하는 님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눈물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을 알면 이 노래는 뼈속까지 공산주의자요 6.25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2인자인 박헌영을 사모하면서 만들어진 노래인 것을 안다면 다시는 부르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이다. 김용환은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박헌영을 바라보며 두만강을 건너가는 내 님은 언제 돌아올까라는 애틋한 사연을 간직하면서 이 노래를 작사했다고 한다. 후에 작곡가 이시우가 이 가사에 곡을 붙여 "눈물 젖은 두만강"이 만들어지고, 1936년 김용환의 동생 김정구가 오케레코드社에 취입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공산주의 골수분자를 사모한다는 이 노래의 배경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본다. 당시 박헌영은 조선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는 공산주의자인 항일투사였다고 하는데 자 진짜 박헌영은 남로당(남조선로동당)의 우두머리이며 6.25한국전쟁 남침을 한 주역중의 한사람이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피흘리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인물이인데 그래서 이 시간 박헌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충남 예산 출신이며 머리는 명석하였기에 경성보통고등학교(경기고)에 다니면서 서양문물에 일찍 눈을 떠 미국유학을 꿈꾸며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YMCA 영어학당에서 영어공부도 하였고 또 일요일에는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를 다니면서도 거기서도 영어를 배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
박헌영이 상해 체류하던 1932년 4월에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 대장을 살해하는 의거가 일어났을 때는 공산주의 활동에 해를 끼치다 하면서 윤봉길의사를 비난하였던 박헌영은 이 윤봉길 여파로 1933년 7월 5일 상해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년형이 구금되어 있는 동안 1933년 박헌영의 친구 김단아는 주세죽과 눈이 맞아 모스크바로 도망가서 재혼하는데 1937년 스탈린 숙청 때 김단아는 일본 간첩으로 총살 당하고 주세죽도 일본간첩의 아내라는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면서 토사구팽당한 것이다. 그 후 주세죽은 박헌영이 북한 외상이 되었는 소식을 듣고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스탈린에게 여러번 탄원서를 냈지만 박헌영한테는 김일성이 주선해 준 윤내라라는 여자가 생겼는데 이 여자는 박헌영의 다섯 번째 여자이다. 박헌영의 여자관계를 보자.
(1) 두 번째 부인 정순년을 만나다
1939년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활동을 하다 충북 청주에서 두 번째 부인 정순년을 만나 동거하다 태어난 아들이 원경스님이다. 1987년 원경스님은 박원순 등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를 세워 대한민국의 역사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좌경역사관 전파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2) 세 번째 여자 이순금을 만나다
1941년까지 지하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 피해 3년간 광주 벽돌공장에서 위장취업을 하는 동안 만난 여자가 이순금인데 광주벽돌공장에 숨어 있는 박헌영과 서울에 있는 소련영사관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3) 네 번째 여자 현엘리스를 만나다
박헌영의 인생에 또 한번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현엘리스라는 여자 때문에 결국은 미국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체류하던 시절에 만났던 현엘리스는 상해 임시정부 외무차장 현순목사의 딸로 현순은 박헌영과 공산당원으로 친밀한 사이인데 그의 딸이 박헌영을 흠모하지만 박헌영은 주세죽과 결혼한 사이. 현순목사가 미국 갈 때 딸을 데리고 가게 되니 현엘리스는 미국에서 대학 나오고 미 군정시절 남한에 와서 미군 군속으로 근무하다 박헌영을 만나게 되면서 미 군정은 조선공산당 책임자인 박헌영과 만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박헌영에게 미군관련된 정보를 넘기다가 들통이 나면서 그녀를 추방시키다. 현엘리스는 미국으로 가서 공산당활동을 하다가 체코를 통해 북한에 들어와 영어를 능통하게 잘해 북한외무성에 근무할 때도 박헌영이가 도움을 주었는데 결국 이 여성과의 관계로 미국간첩으로 처형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2.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등장하는 박헌영
8.15 해방을 맞아 지도자가 없이 더 큰 혼란을 맞이했는데 놀라운 일이 생긴다. 다음날 16일에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해서 서울 시내 곳곳에 이런 벽보가 붙은 것입니다. 대중의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와 우리를 지도해 달라, 박헌영 만세. 우리는 박헌영 동지여 어서 출연하라. 우리는 박동지를 기다린다.
지하에 숨어 있던 공산주의 자들이 일반 국민들에게 박헌영의 이미지 메이킹하기 위해 이런 연극을 펼친다. 3일 뒤인 8월 19일 드디어 박헌영이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 왔고 8월20일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해방후 극심한 혼란기에 좌파 중심의 건준이 유일하게 전국조직을 갖춘 강력한 단체로 부상하게 되면서 조선공산당이 건준을 장악하게 됩니다. 당시 미군정이 여론조사를 해보니까 우리국민 78%가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한다고 했습니다. 행방후에는 전국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압도되어 가고 있었다.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준다는데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지식인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 얘기안하면 대화에도 끼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까 전국조직도 공산당이 장악, 국민여론도 공산당선호, 북쪽절반은 이미 소련이 점령하여 완전히 접수하고 이미 남한도 조선인민공화국이 된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박헌영은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 2틀전인 9월6일에 사실상의 임시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기도 전에 남조선 인민공화국이 선포된 것입니다. 박헌영은 권력장악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다. 투표를 하더라도 공산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박헌영은 미 군정에도 적극 협력하겠다고 유화제스쳐를 펼쳤고 국민적 지지도가 높았던 이승만에게는 인공 주석 직을 제의하면서 남한 접수 전략을 하나 하나 실행해 나갔습니다.
3. 1946년 남로당 결성
1925년 박헌영이가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후 1946년 박헌영은 남조선노동당이라고 하는 남로당을 결성하였다. 1948년 건국한 대한민국의 운명을 뒤흔든 인물이 있었으니 어쩌면 해방 후 한반도 최고 권력자는 이승만 대통령이나 김일성이 아니라 바로 박헌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남로당이 일으킨 굵직한 사건은 '10월대구폭동사건'을 주도하면서 경찰서 습격 ,방화, 살인 등을 통해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을 통해 지리산 빨치산을 탄생시키면서 남한 내의 골치아픈 정당이 되었다
(1) 벼랑 끝 박헌영의 폭력투쟁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박헌영이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벌인 이른바 신전술이 바로 폭력투쟁이었다. 원래 막스레닌의 공산주의 이론은 혁명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폭력이라는 것이 우리 조국에는 너무나 끔찍한 폭력으로 엄청나게 많은 양민들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건이었다.
1) 1946년 대구 10월사건
박헌영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원들이 처음 일으킨 사건이 1946년 10월, 대구 10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이나 여수순천사건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폭도로 변한 시위대가 대구와 경북전역을 휩쓸면서 대구에서 경찰관 38명 사망, 경북 18개 군에서 경찰관 80명 살해하고 민간인 97명 사망한 끔찍한 사건입니다. 이태수 영천군수는 도끼와 죽창으로 난도질해서 죽였고 경찰관 부인을 완전히 벌겨벗겨서 사지를 찢어서 죽이기도 했다.
2) 1948년 제주 4.3사건
박헌영의 두 번째 지령으로 일어난 사건이 제주 4.3사건이다. 5월에 남한에서 단독 총선이 실시할 예정이니 박헌영 입장에서는 남한 권력을 다시는 뺏앗아 올 수 없는 위기에 단독 총선거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것이 제주 4.3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시절인 1998년 11월 23일 미국 CNN 인터뷰에어 이렇게 말했다. 제주 4.3사건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한 누명을 밝혀줘야 한다. 이후 무려 9년동안 폭력과 진압 과정에서 무려 10000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된 엄청난 비극이었다.
3) 1948년 여.순반란사건
세 번째로 일어난 사건인데 발단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국군여수 14연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원들이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여수 순천은 물론이고 고흥 광양 곡성 구례 보성 까지 남로당원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고 군경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까지 희생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는 무려 2600명 행방불명 4300명 중경상 1600명 전쟁이나 다름없는 참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1946년 대구 10월사건 1948년 제주 4.3사건 1948년 10월19일 여순반란사건 이 사건들을 배후 조종한 자가 공산혁명이라는 목표를 위해 박헌영은 수만명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것입니다. 김일성에게 내 준 주도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초조감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죠.
그러나 박헌영의 승부수는 끝내 통하지 않았다. 남로당의 필사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수립 2달 뒤인 1948년 10월 여수 14연대 반란이 일어나자 대한민국의 초대국회인 제헌국회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습니다. 좌익들의 폭동과 내란음모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법률이었습니다.(1948.12.1.제정)
신생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폭력으로 전복시키려던 남로당이 설자리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본거지인 남한을 버리고 북한으로 도피한 박헌영을 소련은 어떻게 대우했을까? 사실 스탈린 정권은 처음부터 박헌영보다는 소련군 대위출신 김일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수십년 공산당 경력으로 머리가 커진 박헌영 보다는 꼭두각시로 손쉽게 조종할 수 있는 김일성이 편했던 것이죠. 그리고 마침내 48년 9월 10일 김일성이 소련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상에 선출되었다. 말이 선거였지 만장일치 박수로 수상을 뽑았다고 합니다. 투쟁경력 나이 학벌 모두가 김일성보다는 몇단계 위였던 박헌영은 김일성 밑에서 부수상겸 외상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실권은 없는 허수하비였습니다. 자존심은 상하고 투쟁경력은 망가지고 힘은 빠져가고 이런 박헌영을 또 한번 궁지로 몰아넣는 사건이 조선 정판사사건과 바로 대한민국 역사의 물줄기를 또 한번 바꾼 홍민표 자수 사건입니다.
(2)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전국적인 조식을 움직이고 대규모 집회를 수시로 하다 보니 박헌영한테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공산당이 짜낸 아이디어가 거액의 위조지폐를 찍어내기로 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은행권을 찍던 경향신문의 전신인 조선정판사에서 남로당 박헌영의 지령을 받고 위조 지폐를 찍어 공산당 활동자금을 댄 사건이 조선정판사 사건입니다. 게다가 조국혁명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수단이 문제냐 라는 생각을 했을 거고 군부대까지 당원들이 대거 침투해 있을 테니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겠죠. 그러나 워낙 많은 돈이 시중에 유통되어 경제가 흔들릴 정도가 되니까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되었고 가짜 지폐를 찍은 징크판이라고 하는 인쇄원판이 발각되면서 그만 꼬리가 잡힌 것입니다. 조사를 하다보니 주범들이 다 조선공산당원들이었고 엄청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조선정판사라는 출판사 사장이 박지원의 조부 박낙종이는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자금 및 선전활동비를 조달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거액(당시화폐 : 1,200만원)의 위조 지폐를 발행한 사건이다.
남로당 총책이자 정판사 사건을 기획한 박헌영이 북으로 도피하게 된 직접적인 큰 반역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일으킨 박지원의 조부인 박낙종의 가계는 원조빨갱이 집이다.
* 박지원의 가족사
1. 조부 간첩 박낙종 – 위폐사건으로 - 목포교도소에서 사형.
2. 부친 간첩 박종식 - 해방후 남로당 진도 책임자 - 진도 경찰에 의해 사살됨.
3. 삼촌 간첩 박종국-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 위원장.
- 9.28 수복 후 화가 난 진도주민들에 의해 맞아 죽음.
4. 아들 박지원 - 신분을 감추기 위해 미국 이민.
3대를 이어온 대역죄인의 자식이 지금 대한민국 정치를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사건으로 박낙종 등 주범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는 10년~15년 형이 선고되어, 복역 하다가 6.25가 터지면서 박지원의 조부 박낙종은 목포 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박지원의 아버지 박종식은 김대중 대통령과 목포상고 동문이며 해방후 박종식은 남로당 진도 책임자가 되고 은신처 지리산 피아골이 국군에 함락 당하자 신안으로 피신하다 진도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형사와 총격전 끝에 마지막 까지 "인민공화국'만세"를 부르다 사살되었다.
박지원은 자신의 가족사가 남로당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숨기기 위해서 고향에서 호적을 파고 신분을 세탁하여 미국에서 가발사업, 포주 노릇을 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때 김대중이 야당 대표로 미국을 방문을 할 때 충성을 맹세하고 김대중의 충복이 됩니다.
김대중이 집권하자 김대중 친북(간첩)행태에 반발하는 김경재의 자리를 차고 들어가 김대중 오른팔 노릇을 하며 국민 혈세 6천억을 비롯 천문학적인 금액을 홍콩 김정일 차명계좌로 대북송금을 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송금 때문에 감옥까지 갔다 옴)
2000년에는 남한 언론인 46명을 데리고 방북하여 김정일에게 충성맹세를 하게 한 장본이다. 이런 자가 문재인 때는 국정원장이 되었고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박지원이 독립유공자의 자손으로 둔갑하여 건국포장을 받았고 월 80만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라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 경천동지할 노릇 아닙니까? 국가보훈처는 박지원이 건국포장을 받은 사유와 박지원의 조부의 행적을 낱낱히 국민앞에 밝혀야 합니다.
당시 아직 정부도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뉴욕타임즈 기자들이 취재하러 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건 유명해진 사건이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원들 유죄확정, 최고 무기 징역 선고 이런 실상이 알려지자 공산주의에 막연한 호감을 가진 일반 국민들의 충격을 받았다. 아 공산당은 독립운동하는 투사인줄 알았는데 공산당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구나. 이미 발각되었는데도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오히려 폭력으로 뒤집으려 하는구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전 까지 공산당을 두고 보던 미 군정도 본격적으로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1946년 9월에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마침내 박헌영 체포령이 내려지면서 결국 박헌영은 북한으로 도주하기로 결정하는데 정판사 사건으로 수배를 받던 박헌영은 경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시체로 위장 관속에 누워서 장례차를 타고 38선을 넘어 월북하였다.
(3) 홍민표 자수 사건
북으로 간 박헌영은 1949년 4월 남조선 전 당원이 봉기 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남조선을 해방하고 9월 20일 조선인민공화국 총선을 실시하라고 남로당 총책 김삼룡에게 지령을 내립니다. 김삼룡은 서울시 책임은 홍민표에게 2000만원을 주면서 6만 당원을 동원해 수류탄 만개로 폭력혁명을 일으키려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으로 손발이 묶인 남로당 이렇게 엄청난 음모를 쉽게 실행하기에는 어려웠다. 계획이 지연되는 중 수류탄 1000개가 발각되어 경찰에 압수됩니다. 화가난 북한 정권은 홍민표에게 평양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평양으로 가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직감한 홍민표는 서울 을지로4가에서 무교동까지 거리를 활보하면서 나좀 제발 잡아가시오. 서울 한복판에 남로당 거물이 제발로 나타나자 수사본부 요원들이 곧바로 체포했다. 붙잡힌 홍민표는 경찰의 협조 속에 남로당 핵심간부들을 찾아가 설득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폭력투쟁이 손실만 있었지 이득은 없었소.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져 남로당은 이제 끝났습니다. 박헌영이 개인 목적을 위해 폭력투쟁을 지령하는 것에 언제까지 복종하겠습니까? 박헌영이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지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생명은 귀하고 한번 죽으면 두 번 살지 못합니다. 우리 같이 자수합시다. 두시간 동안 계속된 설득에 남로당 특수부대 사령관 조병수를 비롯해 남로당 핵심 16명이 결국 눈물을 흘리며 자수와 전향을 결의했습니다. 이 날이 1949년 9월 16일 박헌영이 남조선을 해방시키고 총선을 실시하겠다던 9월 20일이 오기 나흘전 이었다. 박헌영의 남로당이 사실상 왜해되는 순간이었다.
4. 박헌영이 김일성 수하로 들어가다
북으로 올라간 박헌영과 김일성은 본격적으로 경쟁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박헌영은 1900년생 김일성은 1912년생. 박헌영은 경성고보를 나와서 20년 넘게 조선의 공산당 조직을 총지휘한 거물인데 김일성은 아무리 소련군을 업고 북한 권력을 장악했다지만 박헌영이 보기에는 한마디로 듣보잡이었습니다. 그런데 1946년 7월 말 소련 수상 스탈린이 박헌영과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부릅니다. 각각 남북한 정세보고를 들은 뒤 김일성에게는 소련군정 협력 받아 북한의 소비에트화 정책을 조기 실현시키도록 투쟁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박헌영에게는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분토하는 그대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것을 지켜본 공산당원들이 소련의 의중이 김일성에게 기울어져 있구나 짐작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박헌영은 가뜩이나 위조지폐사건으로 본거지를 버리고 북한으로 가게 되니 사실상 자기 아래라고 생각했던 김일성의 수하로 들어가는 형국이 되고 만 것이다.
올해는 한국전쟁 73돌이다. 한번쯤 정리하고 넘어갈 인물이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조선의 레닌으로 음미되고 비운의 혁명가로 역사가들은 지칭하기도 한다. 해방되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공산주의를 위해 일생을 바쳤는가를 위에서 밝혔듯이 8.15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는 남로당을 조직하였고 남한의 지식인 거의가 그가 조직한 남로당에 가입하였다. 해방 후 불안한 시대에 그는 제주 4.3사건을 일으킨 배후자였고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킨 배후자였고 마지막은 6.25한국전쟁을 일으킨 공모자였다.
박헌영의 경력은 1948년 북한 외무상 이전에는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창립의 코미테른이 인정하는 간판인물이었다는 말은 띠 동갑인 김일성보다 박헌영의 과거인력이 훨씬 앞선다는 점이다.
이승만 박사가 건국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방해가 된 인물이 당연히 박헌영이었다. 마침 박헌영과 그의 네 번째 여자 현엘리스와의 관계가 밝혀지고 1946년 10월 미군정의 체포령과 김일성의 권유로 자진 월북하여 김일성 체제 확립에 기여를 하였다. 한편 남한에서는 박헌영 월북 후 6.25까지 1년 10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에 남한 내의 남로당 조직은 궤멸의 길을 걷는다. 조직 내에 경찰의 프락치들이 깊숙이 침투했고 급기야는 박헌영의 월북 후에 지하운동을 지도해 오던 김삼룡과 이주하마저 김삼룡의 비서였던 안영달의 밀고로 남로당 거물급들이 대부분 검거되는 바람에 남한 내 남로당원들은 위촉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한에 있던 박헌영은 남침만 하면 자신을 따르는 20만명의 남로당원들이 봉기해서 삽시간에 '남조선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헛소리를 치고 있었고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남침지원을 애걸하였었다. 결국 소련, 중국, 북한의 지도부는 남침을 감행하겠다는 파국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여기에는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뿐만 아니라 박헌영의 공명심 또한 크게 작용했으니 그는 김일성과 함께 동족상잔의 범죄를 일으켰던 민족 앞에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대죄인이라 할만 하다. 6.25가 북한군의 남침으로 발발했고 서울이 불과 3일 만에 함락되었으나 박헌영이 호언장담했던 이십만 남로당원들의 봉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을 지체한 것은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믿고 남로당원들의 봉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에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천금 같은 시간을 벌어 남한이 구출될 수 있었다고 한다.
남로당원들이야 박헌영의 삽질과 경찰의 효율적인 운용으로 박멸되었지만 중요한 사실은 6.25의 양상이 국공내전이나 베트남전쟁 같은 내전이 아니게 된 것에는 6.25 직전 이승만이 불완전하지만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남한 농민들이 이미 자기 땅을 가지게 되면서 내 땅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컸다고 하겠다.
5.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총살 당하다
김일성과 박헌영,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일으킨 이 두 민족사의 범죄자들이 국군과 유엔군에 쫓겨서 압록강변에서 처량하게 중공군이 그들을 구원해 주기를 이제나 저제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1950년 늦가을에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대판 싸웠다고 한다. 당연히 김일성과 박헌영은 후퇴하면서 1950년 11월 7일 유엔군의 북진으로 만포진으로 옮겨있던 소련대사관에서의 김일성은 술에 취해 박헌영에게 시비를 걸며 남침하기만 하면 튀어 나올 것이라던 남로당원들 당신이 말한 그 빨치산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남침만 하면 남로당들이 들고 일어나면 사흘이면 전쟁은 끝날거라고 했던 것을 추궁했던 것이다. 그러자 박헌영은 ‘아니 김일성동지 어찌해서 군대를 낙동강으로 다 보냈는가? 서울이나 후방에 왜 병력을 하나도 안 두었는가?... 그러니 후퇴할 때 다 독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 라면서 ‘그러니 다 내 책임은 아닌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김일성이 ‘야 이자식아 야 이자식아 만약에 전쟁이 잘못되면 나 뿐 아니라 너도 책임있다. 이 무슨 정세판단을 그렇게 했는가’ 라며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내던지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1950년 11월 7일 유엔군의 북진으로 만포진으로 옮겨있던 소련대사관에서의 일이었다. 박명림 교수[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박헌영과 김일성과의 갈등이 사실이라면 이 싸움은 박헌영의 비극적 운명의 전주곡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김일성은 6.25 남침 실패의 책임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김일성이 누군가? 이미 군사경력으로는 박헌영 뺨을 치고도 남을 자로 모든 무력을 틀어쥐고 있었기에 박헌영과 그의 동지들인 남로당계의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은 곧 굴비두루미처럼 줄줄이 꿰어서 잡혀 들어간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과 범죄사실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고용간첩으로 공화국에 반역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그 후 박헌영을 제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한에서 6.25 전쟁 직전 월북해 김일성과 힘을 합쳐 남한의 적화 통일을 시도한 "골수 빨갱이"로 인식되어 온 박헌영에게서 내각 부수상 박헌영으로 군림하며 김일성과 철저하게 손잡고 일으킨 것이 6.25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은 아마도 김일성이 어떤 인간인지 잘은 몰랐던 같습니다. 6.25전쟁이 끝나려던 1952년 말부터 자신의 전쟁 추궁할 가능성 있는 자들을 모조리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가시였던 박헌영과 남로당출신들이 1순위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53년 3월 하순 박헌영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기소이유는 이적행위로 김일성은 소련대사한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박헌영은 해방직후부터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했고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했으며 한국전쟁 패배원인을 만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죄명이 미 제국주의 간첩이라는 것이다. 박헌영은 2년 반동안 이 죄명을 인정하지 않고 버텼다. 협박도 회유도 안통하자 김일성 일당이 사나운 세퍼트를 풀어넣어 피투성이가 될 때 까지 물어뜯게 했고 결국 박헌영이 다 인정할 테니 나를 총살해달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마침내 1956년 7월 19일 목표를 위해 잔인한 투쟁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일제를 속이려고 감방에서 자기 똥까지 집어 먹던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총살이 집행되었다. 한 때 한반도 최고 권자의 눈앞까지 갔던 그의 시신은 인근 야산 잡풀속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잠깐 다녀오겠다며 관속에 숨어 북한으로 탈출했지만 끝내 고향 충남 예산을 다시는 밟지 못했다. 행방직후 박헌영의 남한 공산화 모략은 성공일보직전까지 갔었다. 만약 박헌영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지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으로 살아가고 있겠지. 하지만 그런 박헌영에게 비참한 최후를 안겨준 것은 바로 그가 평생을 바친 그 이념 공산주의 그리고 공산당이었습니다.
6. 십계명을 모방한 김일성 유일사상 10대 원칙
김일성이 기독교를 박해한 건 자신이 만들었다는 주체사상이 사실 기독교 십계명을 본따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먼저 기독교에서 구속력이 강한 십계명을 북한의 유일사상체제 확립 10대 원칙과 비교하면서 “사실상 북한에서 헌법 위에 있는 실질적인 법”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십계명처럼 북한에는 '유일사상 10대 원칙'이 있는데, 내용이 비슷하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은 북한에서 명절이 끝나면 외우는 ‘선서’와 대칭됐다. 성탄절을 본딴 ‘태양절’도 있다. 교회에서 매주 드리는 예배는 매주 선전실 등에 모여 하는 ‘생활총화’다.
기독교에서 예배 의식을 위한 종교적 공간이 있듯이 김일성주의 연구실이 있는데, 엄숙하고 성스러운 곳입니다.
십자가와 같은 상징물로 초상화, 휘장으로 불리는 배지도 있습니다.
예배에 가서 드리는 ‘회개 기도’는 생활총화 시간에 비서 앞에서 잘못을 털어놓고 용서받는 것과 같다.
설교는 목사 역할의 당 비서가 주관하는 당 정책 등의 학습으로, 설교에 앞서 읽는 성경구절은 당 비서가 회의에 앞서 인용하는 교시 말씀으로 탈바꿈했다. 회의 전 ‘김일성 장군의 노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노래’, 회의 후 ‘수령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 같은 ‘찬송가’도 존재한다.
북한 체제가 기독교 방식을 따라간 이유에 대해서는. 김일성 집안이 기독교이니 그 체계를 교묘하게 본떠 북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사상교’는 세계 10대 종교가 됐다.
해방 직후 북한은 기독교가 대단히 왕성했다. 그 중에서도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만큼 신자들이 많았다. 북한에서 기독교는 단순 신앙의 문제를 넘어 체제 유지와 직결된다. 다른 공산국가보다 기독교를 유독 탄압하는 이유이지만 북한에는 지하교인수가 최소한 10만명 정도는 된다고 한다. 나는 30년전 지하교회 예배모습을 비디오로 2시간 정도 본 적이 있다. 오늘날 목숨걸고 예수님을 믿는 곳이 북한 말고 어딘가? 하늘나라가면 북한에서 올라간 성도가 남한에서 올라간 성도들보다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속에 잠자는 한국교회는 깨어날 때가 되었다.
7.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대한민국
북한 공산주의와 남한 민주주의의 차이점은 인권과 자유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아니, 죽으면서까지 자유를 지켜야 하는가?’라고 반문 할 수 있겠지만 자유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자유가 전혀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우리나라는 자유 대한민국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바쳐 싸웠던 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 싸웠던 것입니다. 올해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3년입니다. 북한 공산당에게 먹히기 일보 직전에 우리의 우방인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 UN군의 도움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UN창립이래 처음으로 유엔군이 처음으로 파견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G2 국가, 즉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영적 부흥입니다.
베드로전서는 로마의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던 AD 65년을 전후로 하여 베드로 사도에 의해 쓰여진 서신입니다.
이 편지는 ‘소망의 서신’ 이라고 불려지는데, 베드로는 이 서신을 통하여 환난 중에 있는 성도로 하여금 곧 닥쳐올 큰 박해를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어떤 고난과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시 AD 65년경에는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는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때입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고난 속에서 교회가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이 고난을 어떻게 이기고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주는 산 소망의 말씀이 됩니다.
(1) 산 소망의 말씀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환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난을 기뻐하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역설적인(paradox) 말씀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고난을 당합니다. 아니, 주님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도 고난을 당하셨다면 죄 많은 우리 인생들이야 말할 것도 없이 고난이 있음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 하십니까? 본문 말씀 1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했습니다. 금이 정금 되는 것은 뜨거운 용광로를 거쳐서 불순물이 다 녹아 버린 다음에야 불로 연단해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거치는 동안에 정금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과 고귀한 인격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말씀하십니다.
(3)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기대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극복하면서 살아갈 때, 거기에는 주님의 놀라운 영광이 있습니다. 7절에“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1절에“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니라” 했습니다. 주님도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주님에게 영광이 찾아 왔던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고난은 쓰지만 열매는 달다’‘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고난 중에서도 해야 할 일은 인내와 충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4) 고난을 통해서 산 소망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롬5:3-4 “다만 이뿐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고난이 아무리 무겁고 숨 막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아무리 아픈 것이라고 해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산 소망’은 헬라어로‘엘피다 조산’으로 영원한 생명의 보장을 말합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아무런 소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불꽃 가운데서‘손가락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해도, 물 한 방울의 자비도 통하지 않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전서는‘산 소망’이란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1장 3절 말씀에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그 나라는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슬픔이 없는 나라입니다. 불만족이 없는 곳입니다.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모든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여러분은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절대로 실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5) 산 소망은 주님의 재림할 때 이루어 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실 때 우리 삶은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산 소망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주권자로 나의 왕으로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세상에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요16:33).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승리와 상급과 영광은 주의 재림 때입니다.
6.25전쟁 73주년을 맞는 올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의 희생의 대가로 주어진 고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일부 단체에서 최근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방관해서는 안됩니다. 이 법은 결코 건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이 아니다. 이 중요한 헌법을 폐지하려는 자들은 북한을 이롭게 하고 이나라를 혼란중에 빠뜨리는 자들인 것을 알고 믿는 우리들이 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