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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예레미야(3)/기억/사랑
제목 : 하나님의 기억
성경 : 렘 2:1~8
찬송 : 305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40710 낙양교회 수요예배
렘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렘 2: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렘 2: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렘 2: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렘 2: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렘 2: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렘 2: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하나님은 죄와 우상에 물든 사회와 개인을 치유하시며 오염된 것을 씻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서에 예고된 심판은 멸망을 위한 심판이라기보다는 정화를 위한 심판의 성격이 강합니다. 심판으로 끝낼 작정이라면 이렇게 긴 장문의 탄식을 첨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2장의 특징은 하나님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연모하던 이스라엘의 사랑을 상기시켜줌으로써 배교한 이스라엘과 유다가 여호와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1~3절의 기능입니다. 4절부터는 담화의 초점이 남편인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떠나간 이스라엘을 법정으로 호출하고 심문하는 데 있습니다.
6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이끌어 내시고 죽음의 광야를 지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재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유다백성을 포함한 이스라엘은 그 땅을 더럽혔습니다(7절). 하나님은 이러한 배교와 변절의 법적 책임을 하나님의 백성을 잘 이끌 책임을 맡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제사장과 율법을 가르치는 자, 그리고 왕을 포함해 ‘목자들’이라고 불린 정치 지도자와 선지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원인은 이스라엘의 내적 타락과 풍요를 향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위험성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오늘 본문 말씀에 귀를 기울에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억
렘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렘 2: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예레미야는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꼭 그 나라에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선지자들 중에는 자기가 예언하는 지역으로 직접 간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직접 가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간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등을 떠밀어서 어쩔 수 없이 간 것입니다.
렘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막무가내로 사방 천지로 보내시는 분이 아니고, 별별 말씀을 지시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갑니다. 2장 2절을 보면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거주하였던 곳은 아나돗이었습니다. 아나돗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대략 5km 정도라고 합니다. 멀리 안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선지자들의 사역, 예레미야의 사역에 대해 생각할 때 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안 간다고 하나님의 사역이 막히는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가 말을 안 한다고 하나님의 사역이 중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나 성도는 본인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초청되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현장에서 경험하고 그 혜택을 누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이 바로 4절부터인데 그 전에 2절과 3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심정을 먼저 고백하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했는지 회상하라 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2절하)
하나님이 화자(話者)로 등장하셔서(1인칭) “내가 기억하고 있다.”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해 품었던 순수한 사랑(헤세드/인애)입니다. 담화의 초점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헤세드(인애)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첫사랑을 상기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신혼 모티브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바른 관계를 묘사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내였습니다. 신혼 시절 달콤한 사랑을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절의 담화는 그러한 애틋함을 현재 세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렘 2: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실 것인데 그 중에 첫 번째가 이스라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실 때에도 장자 곧 맏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을 시작으로 모든 열방을 구별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책임자로서 이스라엘에 대해 보장하시는 말씀이 3절 끝에 나오는데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장, 하나님의 다짐,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맹세를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결코 패할 수 없으며, 망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버려질 수 없으며, 잊혀 질 수 없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담대함과 평안함을 가질 수 있고, 대적들은 이스라엘을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억력이 좋으신데, 기억을 편향적으로 하신다는 약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날 때 결코 하나님을 인애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은혜와 혜택은 다 받으면서도, 감사는 고사하고, 찬양은 고사하고, 인애와 사랑을 고사하고 불순종과 배역을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억에는 이런 것들이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 보셨고, 다 당하셨고,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저장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만 기억하시고, 잘한 것만 저장하십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은 잘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잘한 것으로 여겨 주시고,
잘한 것으로 기억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기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쁜 것은 싹 지워버리시고 좋은 것만 기억에 저장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억양식입니다.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렘 2: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는 들으라’(쉼무)라는 복수 명령형 동사로 4절이 시작됩니다. 구약 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 이 명령형 동사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들으라’는 명령을 반복해서 선포하는 것은 주전 8~7세기 유다 백성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깨어진 삶의 회복과 변화 또한 들음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은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족속들입니다. 야곱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총체적으로 언급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렘 2: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이에 대한 대답은 ‘아무 것도 없다’입니다. 화자는 BC 6세기에 유다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조상들의 행동에 대해 질문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석가들은 이것을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법정에서 고소하는 말로 해석합니다. 화자(話者)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행동을 폭로합니다.
첫째, 그들이 나를 멀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과 멀어졌을까요?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둘째, 그들이 헛것을 따라 가서 헛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헛된 것’으로 번역된 ‘헤벨’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뜻합니다. 헛된 것을 따라 걸어간 그들은 모두 헛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헛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상을 따르는 것입니다.
레 19:4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삼상 12:21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왕상 16:26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렘 2: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을 때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수사적 질문을 통해 상기시킵니다.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무엇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협곡의 땅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메마른 땅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신 여호와께서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7절에도 반복되면서 메시지를 이끌어 냅니다. ‘말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브루구만이 언급한 대로 ‘잊어버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홀려서 여호와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화자(話者)는 광야가 어떤 곳인가를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광야는 길 안내자가 없이는 결코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곳, 항시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셨고,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내리셨고,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셨고, 하나님이 수고하여 이스라엘에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무슨 불의를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왕정시대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우리를 도와주시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뇨?’라고 질문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나 여기 있다!’ 하시고 이스라엘을 도와주시면 이스라엘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과 이스라엘이 행한 일을 비교하는 것이 7절과 8절입니다.
무익한 것들을
렘 2: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하나님은 ‘왜 내가 한 일을 망쳐놓았느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행동으로 손해 보는 것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여 열매와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잘 먹고 건강하게 지내면 됩니다. 하나님이 수익을 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맛있게 먹고 행복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더럽히고 그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먹을 것이 없고, 이스라엘이 불편하고, 이스라엘이 힘들었습니다. 인간이 잘해서 하나님께 보탬이 될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잘못해서 하나님께 손해가 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잘못하면 언제나 인간이 손해를 봅니다.
렘 2: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이스라엘이 행한 일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8절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실체입니다. 각자 제사장, 관리, 선지자중 자기에 해당하는 부분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안심하신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본문에는 없지만 ‘백성’이고 백성이 한 일은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입니다. 이런 지도자나 대표들이 인도하는 대로 갔으니 당연히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1장에서 하나님께서 살구나무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샤케드’와 ‘쇼케드’의 언어유희를 하셨습니다. 2:5~8절에서도 하나님은 아주 멋있는 언어유희를 사용하시면서 이스라엘의 행동을 한편으로 안타까워하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랄하게 비웃어 주십니다. 5절 끌을 보면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이고, 8절 끝을 보면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냐?’입니다. 이스라엘이 놀았던 것은 아니고, 아무 것도 안 한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수고했고, 행동했고, 따라갔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헛된 것을 따라갔고, 헛되게 행동했고, 무익한 것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헛힘을 썼고, 헛수고를 했고, 헛짓을 했고 모든 것이 헛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기 위해 힘씁시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은 언약 백성입니다. 그런 우리가 세상이 주는 풍요와 안락함에 빠져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탐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