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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갑일록(癸甲日錄)
癸甲日錄 秋淵禹性傳著
만력 12년 갑신(萬曆十二年甲申)〈선조 17년, 1584년〉
1월 1일 (기묘). 약간의 눈이 밤까지 내렸으나 아침엔 개다.
2일 (경진). 눈이 뿌리다.
3일 (신사). 큰비가 새벽부터 밤까지 그치지 않다. 박(朴) 정승이 겸병판(兼兵判 겸임했던 병조 판서직)을 사임하고 교체하려고 한 번 계(啓)를 올리자 바로 윤허되다.
4일 (임오). 맑다. 신점(申點)이 집의가 되다. 《맹자》를 읽다.
5일 (계미). 맑다.
6일 (갑신). 흐리다. 이준민(李俊民)이 병조 판서가 되고, 이인(李燐)이 호조 판서가 되다.
7일 (을유). 흐리다. 밤에 큰눈이 내리다.
8일 (병술). 비와 눈이 내리다.
9일 (정해). 맑다. 비변사에서 서익(徐益)을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임명할 만하다고 계를 올렸으나 한준(韓準)을 그대로 유임시키라고 명하고, 서익에게는 북도(北道)로 가 보고 돌아오라 하다.
10일 (무자). 맑다.
11일 (기축). 맑다.
12일 (경인). 종일토록 큰비가 내리다. 어제 숙헌(叔獻)의 병이 위중하므로 관례에 따라 의원을 파견하고 약을 보내다.
13일 (신묘). 거센 바람이 불고 매우 춥다. 새벽부터 큰비가 내리다가 늦게야 개다.
14일 (임진). 맑다. 이증(李增)이 대사간이 되다. 사헌부에서 신점(申點)을 논박하고 경질시키자는 계를 올렸다고 한다.
15일 (계사). 맑다. 황정식(黃廷式)이 집의가 되고, 정여립(鄭汝立)이 수찬이 되다.
16일 (갑오). 맑다. 백유(伯由)가 양지현(陽智縣 경기도에 있었음)으로 부임하다.
17일 (을미). 맑다. 들으니, 숙헌이 어젯밤에 별세했다고 한다. 전교를 내리기를, “내가 매우 놀라고 슬프다. 별도로 부의(賻儀)를 보낼 것이니, 전례를 상고하여 알리라.” 하다.
18일 (병신). 몹시 춥고 바람이 불다. 회부(晦夫)가 와서 밤이 깊어서야 돌아가다. 그의 부앙(俯仰)하는 태도가 예전과 다름이 없으니 우습다.
19일 (정유). 맑으며 춥다. 여기(汝器)가 와서 작별하다. 그것은 경차관(敬差官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슬)으로 진주(晉州)에 가기 때문이다. 들으니,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통문을 내어 숙헌을 조곡(弔哭)했다고 한다. 신응시(辛應時)가 대사간이 되고, 정사위(鄭士偉)가 승지가 되다.
20일 (무술). 맑다. 《맹자》를 읽다.
21일 (기해). 흐렸다 개었다 하다. 일기가 조금 따뜻해지다. 신응시가 숙배하고 사직서를 올렸는데, 대략 아뢰기를, “조정이 안정되지 못한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다행히 밝으신 판단에 힘입어 시비를 밝게 변별하시니, 이는 실로 성스러운 다스림이 새로워질 수 있는 때입니다. 인심의 거취(去就)와 국가의 안위에 관한 계기가 바로 오늘에 있으니, 진정시키는 일과 화평케 하는 일을 진실로 병행시켜 서로 위배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고, 악한 자의 처리 방도는 단지 사람을 쓰고 버림에 있어 마땅함을 얻는 데에 달렸을 따름입니다.” 하다. 성호원(成浩原)이 사직서를 올리다.
22일 (경자). 눈이 비와 섞여 내리다가 식전에 그치다. 아침에 날씨가 매우 어둠침침하다. 성영(成泳)이 사간, 이정형(李廷馨)이 장령, 성돈(成惇)이 헌납, 송몽현(宋夢賢)이 지평, 유각(柳恪)과 장운익(張雲翼)이 정언이 되다. 특명으로 김명원(金命元)을 병조 참판에 임명했으며, 이증(李增)을 경기 감사에 임명하다. 진심단(鎭心丹)을 지어 들이라 명했다 한다. 오늘 아침에 동남쪽에 가벼운 우레가 있었다고 한다. 《맹자》를 읽다.
27일 (을사). 초저녁에 크게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더니 밤새도록 비가 퍼붓고 바람이 세게 몰아치다. 《맹자》를 읽다.
28일 (병오). 맑으며 바람이 세게 불다. 어제의 정사로 여수(汝守)가 이조 판서가 되고, 정철이 부망에, 이준민이 말망에 오르다. 성호원이 세 번째로 사직하니, 말미를 더 주다.
29일 (정미). 맑다. 들으니, 한연(韓戭)에게 사형을 감면시키고 다른 법률을 적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제□특명(齊□特命 미상) 《맹자》를 읽다.
2월 1일 (무신). 맑다.
2일 (기유). 맑다. 들으니, 호원이 네 번째로 사직하니 또 말미를 주었다고 하며, 여수는 이미 사직 단자(單子)를 승정원에 보내 왔다고 한다. 승정원에서, “이제 날씨도 따뜻해졌으니 다시 글을 내려 노(盧) 정승을 부르도록 하십시오.” 하고 주청하니, 가(可)하다고 답하다. 노 정승의 사직 상소가 또 도착했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리다.
3일 (경술). 비가 내리다. 8도(道)의 감목(監牧)들이 목장을 성의껏 감독하지 않아 말에 관한 정사가 매우 소홀해지게 되었으므로 비변사에서 의논하도록 명하기를, “대간이나 시종을 거친 적이 있는 사람을 한 도에 한 사람씩 임명하여 두루 감독을 행하되 수령(守令)을 전제(專制)하여 모든 일은 감사의 통제를 받지 않고 바로 상계(上啓)하도록 하라.” 하다.
4일 (신해). 흐렸다 개었다 하다.
5일 (임자). 흐렸다 개었다 하다. 공저(公著)가 말하기를, “남쪽 지방의 사론(士論)이 지나치게 높으니 이것은 필시 유이현(柳而見)과 김홍민(金弘敏)의 말을 듣고 이렇게 된 것이리라.” 하니, 우습다. 들으니, 의금부에서 한연(韓戭)을 처음 용천(龍川)으로 유배보냈다가 특명으로 경흥(慶興)으로 유배했다고 한다. 사인(舍人) 백유양(白惟讓)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가지고 노 정승을 부르러 가다.
6일 (계축). 맑다. 들으니, 여수가 숙배하고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전형(銓衡 인재를 뽑는 일, 즉 이조 판서가 맡은 직무)을 맡으면 뇌물로 부탁하는 더러운 기풍과 벼슬 자리 얻으려고 분주히 청탁하고 돌아다니는 습속이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비록 상을 준다 하더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반드시 벼슬자리엔 적임자를 얻고 벼슬아치들은 적합한 직분을 가지게 되어 이에 따라 백성들은 자기 직업에 안주하게 될 것이니, 이것을 경에게 간절히 바란다.” 하다. 《맹자》를 마치다.
7일 (갑인). 맑다.
8일 (을묘). 맑다. 《중용(中庸)》을 읽기 시작하다. 이순인(李純仁)이 직제학, 이성중(李誠中)이 전한, 정윤복(丁胤福)이 응교, 이경중(李敬中)이 교리, 이유인(李裕仁)이 사간이 되다. 이괵(李𥕏)이 홍문관 정자(正字), 신응명(辛應命)과 유대진(兪大進)도 의망에 올랐다.성영(成泳)과 김홍민이 수찬이 되다. 여수(汝守)가 첫 정사를 행함에 한결같이 전임자가 세운 규약을 따르니, 우습다.
9일 (병진). 맑다.
10일 (정사). 비에 우박이 섞여 내리다. 우의정이 어제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변괴가 있었다는 이유로 사퇴하니, 비답하기를, “흰 무지개의 변괴가 해마다 거듭 나타나니 매우 놀랍다. 괴상한 기운이 태양을 침범함은 임금이 덕이 없기 때문이니, 사직하지 말라.” 하다.
11일 (무오). 맑다. 신호인(愼好仁) 형이 보성(寶城) 수령이 되다.
12일 (기미). 흐리다. 성호원이 숙배하고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막 어진 이를 잃고 국사를 생각하니 잠자리가 편안치 못하오. 이제 나와 함께 국사를 다스릴 사람은 경이 아니고 누구이겠소. 어찌 물러갈 때이겠소. 병이 있더라도 조리하며 국사를 행하오.” 하다. 영의정도 해에 일어난 변괴 때문에 사직하다.
13일 (경신). 맑다. 신점이 충청ㆍ경기의 감목관(監牧官)이 되다. 국법에 수령으로 감목관을 겸임케 했는데, 근래에 말에 관한 정사가 소홀해져서 그것을 개혁하고자 상께서, “대간이나 시종을 거친 적이 있는 사람을 감목관에 임명하여 두루 수령을 규찰(糾察)하고 왕래하며 조사하게 하도록 하라.” 하다.
14일 (신유). 맑다.
15일 (임술). 맑다. 들으니, 시우(時雨)가 들어와서 수원(水原) 부사의 수망에 올랐으나 낙점되지 않았다고 한다. 권문해(權文海)와 허명(許銘)이 장령, 민준(閔濬)이 지평, 심희수(沈喜壽)도 의망에 올랐다.윤정(尹渟)이 수찬, 신응명(辛應命)이 홍문관 정자, 성영(成泳)이 부응교가 되다. 유공진(柳拱辰)도 홍문관 정자의 의망에 올랐다. 화분 안의 매화에게[贈盆梅]란 제목으로 시를 짓기를,
모진 바람 매서운 눈발 뒤에도 살아 남아 / 護得風着雪虐餘
얼굴빛 처음 뿌리날 때와 변함이 없네 / 容顔不改着根初
밝은 창가에서 조용히 대하면 맑기가 물 같으니 / 明窓靜對淸如水
못난이가 어찌 쓸쓸히 홀로 지냄을 한하리오 / 鈍滯何須恨索居
하다. 매화가 주인에게[梅贈主人]란 제목으로 시를 짓기를,
꽃다운 맹서가 유달리 주인과 깊어 / 芳盟偏與主人深
옹색한 집 쓸쓸한 집에도 옮길 적마다 따랐다네 / 小齋寒齋取次尋
섣달의 바람 서리에도 의탁할 데가 있음을 알아 / 歲暮風霜知有托
성긴 그림자를 송죽(松竹)의 그늘에 잘 의지했다네 / 好㻋影倚凊陰
하다.
16일 (계해). 비가 저녁 내내 부슬부슬 내려 그치지 않다.
17일 (갑자). 맑다. 사간원에서 권문해를 논박하다. 《연주시(聯珠詩)》를 열람하다.
18일 (을축). 맑다. 아침에는 쌀쌀하다가 저녁에는 따뜻해지다. 북평사(北評事) 오적(吳積)이 방문하다. 오군은 계책과 식견이 있어서 시골 구석의 인물은 아닌 것 같으나 약간 기(氣)가 많은 데가 있다. 윤근수(尹根壽)가 대사간, 신응시는 마침 병을 앓고 있었고, 윤언명(尹彦明)은 의망에 올랐다.윤희길(尹希吉)이 장령, 황혁(黃赫)이 지평, 이정형(李廷馨)이 응교, 심희수가 수찬이 되다. 《연주시》를 보다.
19일 (병인). 맑고 따뜻하다. 《연주시》를 보다. 여승(汝昇)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짓기를,
구름 깊은 궁벽한 산골의 해가 기우는데 / 地僻雲深山日傾
베갯머리에 닭 울음 소리만이 들려오네 / 枕邊唯聽一鷄鳴
누워서 쟁기 메고 오는 이웃을 보노니 / 臥看來柜四隣出
뻐꾸기는 무슨 맘으로 밭 갈아라 권하기에 애를 태우뇨 / 布穀何心苦勸耕
하다. 들으니, 정여립이 사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한다.
20일 (정묘). 맑다. 《연주시》를 보다. 대제학 권점(圈點)에 이산해(李山海)가 7점, 정철ㆍ윤근수ㆍ홍성민(洪聖民)이 6점, 이양원(李陽元)ㆍ구봉령(具鳳齡)이 4점, 유홍(兪泓)ㆍ유성룡이 2점을 얻다. 영상ㆍ우상과 유전(柳㙉)ㆍ이인(李遴)ㆍ정철ㆍ이준민(李俊民)ㆍ유홍이 모여 권점했다고 한다. 들으니, 성균관 학생 홍유경(洪有慶) 등이 숙헌에게 제전을 올렸는데, 숙헌이 돌아가자 성균관 유생들이 사학(四學)에 통문을 내어 쌀을 거둬 동학(東學)은 참여하지 않다. 제물을 준비하고서 백단령(白團領 깃을 둥글게 마른 흰색의 공복(公服))을 입고 제물을 갖추어 성균관을 나와서 길 좌우로 갈라져 행인들을 벽제(辟除)하며 행진하는 것이 마치 유생들이 상소할 때와 같았다고 한다. 숙헌의 부고가 발표하던 날에 성균관에 거재(居齋)하는 유생들이 혹은 소식(素食)을 하고 혹은 육식(肉食)을 했는데, 소식하지 않는 자는 제명을 시켰다. 홍유경은 혼원(渾元)의 조카로 재주와 학식이 없어 성균관과 사학에서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다. 집에 있을 적에 쌀과 베로써 이자 놀이를 했는데 그 어머니가 매우 곤궁하여 어쩌다 가끔 꾸어가면 홍유경이 날 이자와 달 이자를 따져 셈하여 갖다 바치라고 독촉하므로 혼원이 항상 깊이 책망하였더니, 홍유경은 서모(庶母)가 일러바쳤다고 하면서 온갖 수법으로 서모를 괴롭혔다. 유공진(柳拱辰)과 유대진(柳大進) 등이 혼원을 공박하는 상소를 하려 할 적에 홍유경은 팔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 숙부의 간사함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였으니, 이는 혼원을 지칭한 것이다. 유공진 등이 크게 그를 칭찬하여 그 뒤 추천하여 장의(掌議)가 되게 했다고 한다.
21일 (무진). 흐리며 바람이 불다. 정철이 대사헌이 되고, 유홍(兪泓)이 예조 판서가 되다. 안자유(安自裕)는 특명으로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이산해는 대제학이 되다. 사헌부에서 계를 올리기를, “직제학 이순인은 본래 물의(物議)가 있어 시강(侍講)에 합당하지 않으니 체차하도록 명하십시오.” 하니, 답하기를, “어째서인가. 자세히 회계(回啓)하도록 하라.” 하다. 황혁이 회계하기를, “이순인은 구차하게 영합하여 용납되기를 구하며 마음가짐이 흔들리고 줏대가 서 있지 못합니다. 지금 이 직임을 줌에 이미 물의가 많았는데도 수치도 모르고 머리를 내밉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음가짐이 흔들리고 줏대가 서 있지 못하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니, 황혁은 물러나 동료들과 의논하여 계를 올리겠다고 응대했으니, 이순인의 문제에 대해 집의 정윤복(丁胤福), 장령 윤희길, 지평 황혁은 대체로 박순(朴淳)과 정철의 주장을 사용하였다. 사학(四學)의 권점(圈點) 제도를 개혁했다고 한다. 《연주시》를 보다.
22일 (기사). 맑다. 《연주시》를 보다. 이순인의 문제에 대해 사헌부에서 회계하기를, “이순인은 사물에 정통하거나 능숙하지 못하고 오활하고 우매하여 사리에 밝지 못하면서도 시세에 붙좇기는 잘해서 벼슬에 진취할 말은 곧잘 끌어들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무엇을 말하는가. 분명히 회계하라.” 하다. 이에 정윤복ㆍ윤희길ㆍ황혁이 피혐(避嫌)하여 사퇴하였으니, 대개 임금께서 추궁하고 힐문하자 임금에게 신임을 얻지 못했다는 것으로 말을 하고는, 또 아뢰기를, “이순인의 사람됨은 고관들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니, 조정에 벼슬한 이래로 오직 벼슬자리 구하기만을 일삼아 시세의 변천에 따라 직임을 옮겨 가서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이나 욕을 들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이 안정치 못한 이때에 떠들썩하게 탄핵을 하고 싶지 않아서 오직 그 자신의 조처만을 기다렸던 것이니 그 뜻이 진실로 근거한 데(이순인의 체면을 세워 주려는 마음을 뜻함.)가 있습니다.” 하다. 허명(許銘)이 계를 올리기를, “신은 어제 비로소 사은(謝恩)하고 오늘에야 동료들과 상회례(相會禮 처음으로 서로 만나는 예)를 했으므로 당초 이순인의 일을 논할 적에 함께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대체로 이 사람은 일을 처리하는 데는 졸렬하고 벼슬의 진취를 꾀하는 데는 교묘하며, 처신하는 데는 모자라나 좋은 벼슬자리엔 조급하여 일의 옳고 그름을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의 이해만을 보아서 세태의 변화에 따라 거취(去就)를 삼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애초에 분명히 대답했더라면 내가 어찌 물었겠느냐.” 하다. 네 사람(정윤복ㆍ윤희길ㆍ황혁ㆍ허명)이 회계(回啓)하기를, “이순인이 시세에 붙좇는다는 것은 시류(時流)의 기호(嗜好)에 구차히 영합하여 벼슬의 진취를 도모함을 말한 것입니다. 처음엔 조원(趙瑗)과 결속함으로써 향배(向背)를 삼았고, 또 이순인이 이이와는 젊을 적부터 서로 유익한 벗이 되었으나 이이의 세력의 성쇠를 보아 향배를 삼았으니, 이순인의 처신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이순인은 시강(侍講)이 된지가 오래되지 않고, 또 일을 맡기지도 않았다. 내가 그의 사람됨을 몰랐으나 의논이 이러하니, 갈도록 하라.” 하다.
23일 (경오). 맑은데 거센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날리다. 사수(士秀)가 와서 재미있게 놀았는데 얘기가 시국에 관한 일에 미치면 말할 듯하다 말하지 않아 나에 대해 의심하는 뜻이 많았으니, 가소롭다. 그의 말이, 계함(季涵)을 만난 적이 있는데, 한 가지 의논이 있다고 말하고서 서익(徐益)을 유임시키기를 청하고 나를 의주 목사에 임명하자고 했다는 것이며, 이순인의 일은 황회지(黃晦之)가 실로 주창했다는 것이다. 또 윤기(尹箕)를 만났더니 홍여순(洪汝諄)의 일을 큰 소리로 말했는데 윤기가 정철의 집에서 왔으므로 그 말이 윤기 자신의 말인지 또는 정철이 논한 나머지인지 알지 못하겠더라는 것이다. 또 박 정승을 만나 이순인이 갈리면 이성중(李誠中)이 반드시 대신하겠는지를 물었더니, 박 정승이 말하기를, “다 똑같은 사람인데 이성중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인가.”고 하였으며, 정철도, “이성중은 그의 형제에 비해서 비록 견해가 다르다고는 하나, 우리와는 도무지 상관 없는 사람이다.”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저(公著)가 마음을 다해서 시세에 영합하려 하나 도리어 저들에게 비루하게만 보이고 혐오를 당하니, 가소롭다. 공저가 지난해 12월 4일에 내게 오고, 사수도 왔는데, 공저가 말하기를, “내가 계함(季涵)을 만났는데 그 논리가 매우 공평하더라.” 하기에, 내가 무슨 일이냐고 대꾸하자, 공저가 말하기를, “계함의 생각으로는 미숙(美叔) 등으로 하여금 단지 중도부처(中道付處)나 문외출송(門外出送)을 받도록 하고자 했을 따름이고, 먼 곳으로 귀양보낸 것은 그의 뜻이 아니다.” 하다. 이에 사수가 웃으며 말하기를, “대체 누구건 사류(士類)에 대해 중도부처나 문외출송케 하고자 한 것이 과연 선비로서의 공평한 마음인가?” 하니, 공저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며, “미숙 등은 죄가 있으니 아주 풀려날 수는 없다.” 하다. 사수가, “무슨 죄가 있는가?” 하니, 공저는 말이 막혔다. 숙헌의 초상에 공저가 갔는데 숙헌의 문객이, “사람들이 이성중을 동인이라고 말하나 지금 행동을 보니 바로 서인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사수가 또 하는 말이, “여수(汝守)의 첫 정사에 공직(公直)과 김홍민(金弘敏) 제군을 옥당에 의망하자 정철이 크게 놀라 달려가 여수에게 왜 이같이 하는가고 물으니, 여수가 말하기를, ‘내가 요즈음 돌아가는 의논을 모르고, 근래 또 그대들도 만나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다.’ 했다.”는 것이며, 정철이 여수와 약속하기를 자고(子固 윤근수(尹根壽))를 대사간으로 임명하고, 심희수(沈喜壽)를 옥당에 임명하며, 모든 삼사(三司)엔 모두 신인(新人)을 등용하도록 하자 하니, 여수가 다 승낙했다는 것이다. 정철이 대사헌과 제학을 사직하는 차자를 올렸는데, 자신의 재주와 국량이 직분에 맞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비방과 배척을 당했다는 것으로 내용을 삼았다. 이에 비답하기를, “외롭게 혼자 바치는 자부함은 뭇사람이 허여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서 과감하게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은 어려운 바이니, 사직하지 말라.” 하다. 백유양이 상주(尙州)에서 돌아오므로 “노 정승이 어느 때 올라오겠는가?”고 임금이 물으니, “올 시기를 말하지 않아 모르겠습니다만 신(臣)이 본 바로는 비답(批答)을 받을 때 무릎 꿇고 절하는 거동이 어렵고 고통스러워하기까지는 하지 않아 병 증세가 그다지 심하게 보이지 않으니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해지면 올라올 수 있겠습니다.”고 응대하다. 《중용》을 읽고, 《연주시》를 보다.
24일 (신미). 맑다. 들으니, 한림(翰林) 김신원(金信元)이 사초(史草)를 쓰다 마침 일이 있어 승지소(承旨所)로 가서 한참 있다가 돌아와 사초를 보니 놓인 자리가 바뀐 흔적이 있기에 아무래도 의심쩍다 했더니, 과연 주서(注書) 신응명(辛應命)이 몰래 사초를 보고서 그 가운데 숙헌을 논한 한두 단락을 신응명이 밖으로 누설하여 김신원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기회를 엿볼 틈이 없었다고 한다. 신응명은 신응시(辛應時)의 아우이다. 들으니, 호원(浩原)이 나를 가리켜, “밤을 타서 권세 있는 이에게 출입하면서 사특한 언설을 많이 한다.”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이덕형(李德馨)이 일러준 말이다. 《중용》을 읽고, 《연주시》를 보다.
25일 (임신). 흐리다. 이정(而精)이 내방하다. 어제 회지(晦之)가 와서 이순인을 논박한 일에 대해 묻기에 나는 모른다고 답하고, 다만 지난 기사년간에 구변(具抃)이 이조 좌랑으로 있으면서 논박을 당하자, 사림(士林)의 공론이 본래 구변의 편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시원하게 여겼으나 고봉(高峰)이 홀로 근심하고 탄식하기에 누군가 물었더니, 고봉이 말하기를, “지금 사림에는 두 편이 버티고 있는 형세가 있어 서로 손을 쓰려고 하면서도 먼저 하기를 어려워하는데, 지금 구변은 비록 자격은 되지 못한다고는 하겠으나 그래도 청반(淸班)의 한 사람인데 느닷없이 공격을 가하면서도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점이 없으니, 이 뒤로 사류에 대해 손쓰는 길은 점차 막을 수 없이 되었다.” 하니, 듣는 이들이 명언이라고 했던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회지가 이 얘기를 일찍 듣지 못했음을 한탄했다. 그런데 이정은 이미 이 곡절을 듣고 있었으니, 말이 쉽게 퍼짐이 이러함이 실로 두렵다. 이산해(李山海)가 문형(文衡 대제학의 딴이름)을 사퇴하려 하니, “경에게도 이런 일이 있소. 문형의 직임을 경이 아니면 누가 맡겠소.” 하니, 이산해가 세 번째로 이조 판서를 사직하려 하니, 답하기를, “두 가지 직임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오.” 하다. 한림천(翰林薦)에 윤담무(尹覃茂)ㆍ유공진ㆍ이유징(李幼澄)ㆍ윤섬(尹暹)ㆍ이충성(李忠誠)이 올랐다. 이충성은 맨 처음 이이를 옹호하는 상소를 하여 유대진과 공이 같은 자이다. 도당(都堂)이 이충성을 옥당으로 뽑으며 말하기를, “숙헌이 힘써 천거했는데 좌중이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숙헌이 말하기를, “유대진이 이충성의 자격이 적당하다 했다고 하더라.” 하니, 좌중이 코웃음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윤섬은 윤우신(尹又新)의 아들로, 이귀(李貴)와 함께 숙헌의 문하에 출입했고, 유징은 공저의 아들이다. 《중용》을 읽고, 《연주시》를 보다.
26일 (계유). 맑다. 이산해의 사직 차자에 비답하기를, “문형과 전형(銓衡) 이 두 직임은 경이 아니면 할 수 없던 차에 내가 바야흐로 인재 얻었음을 스스로 기뻐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다시 사직하려 하오. 마땅히 앞서 보인 내 뜻을 따르고 사직하지 마오.” 하다. 《중용》을 다 읽고 《혹문(或問)》을 읽기 시작하다. 《연주시》를 보다.
27일 (갑술). 맑다. 《혹문》을 읽고, 《연주시》를 보다.
28일 (을해). 맑다. 들으니, 이준민이 박 정승과 서로 맞지 않아 사직서를 올리려다 여러 사람의 만류를 받았다고 한다. 호남 방백 구봉령(具鳳齡)이 장흥 부사 이개(李墍)에게 이처럼 화창한 때에 내지(內地)의 수령직을 주도록 장계했으나 거행하지 말도록 명하다. 《혹문》을 읽고, 《연주시》를 보다.
29일 (병자). 맑다. 들으니, 저번 조강(朝講) 때 이준민이, “동인들이 모두 서인을 사악하다고 지탄하여 논의가 근일 또 분분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도 서인이기 때문에 지금 비로소 좋은 벼슬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께서 노기 띤 음성으로, “어떤 사람이 이러는가?”했다고 하며, 도승지 이우직(李友直)이 숙헌 집의 저주(咀呪) 사건을 말하려하니, 수찬 김권(金權)이, “이런 일은 경연에서 아뢰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므로, 곧 그쳤다고 한다. 숙헌의 집에 불에 태운 쥐와 나무로 만든 인형의 변괴가 있었는데, 그 문객들이 혹은 미숙(美叔) 허봉(許篈)의 자(字) 집의 소행으로 지목하기도 하고, 혹은 박근원 집의 소행으로 지목하기도 하며, 혹은 송응개의 집의 소행으로 지목하기도 한다고 한다.
30일 (정축). 맑으며 아주 따뜻하다. 《혹문》을 읽다.
3월 1일 (무인). 가랑비가 내렸으나 식전에 멎고 저녁에는 아주 따뜻하다. 《혹문》을 읽다.
2일 (기묘). 맑다. 이공직(李公直)이 집의가 되고, 한효순(韓孝純)도 망에 오르다.황정식(黃廷式)이 사간이 되다. 이홍인(李弘仁)과 한응인(韓應寅)이 지평이 되고, 윤기(尹箕)도 망에 오르다.회지(晦之)가 예조 정랑이 되다. 그의 숙부와의 상피(相避) 때문에 체직한 것이다.최언명(崔彦明)이 도승지가 되고, 황경문(黃景文)이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특명으로 이우직을 형조 판서에 임명하다. 들으니, 양사(兩司)에서 죄를 가중하는 법을 행하고자 하는데 그 대상이 이발(李潑) 형제와 김응남(金應南)ㆍ김사순(金士純)ㆍ홍여순(洪汝諄)ㆍ홍혼원(洪渾元) 및 나라고 한다. 이발과 사순이 드러나게 윤근수(尹根壽)와 서로 미워하므로 법을 행함에 그 사감이 개입된 형적이 나타남을 곤란하게 여겨 윤근수를 체직시키고 난 뒤에 거사하려 한다고 한다. 전교를 내리기를, “군현(郡縣) 합병의 편의 여부를 감사에게 물었는데 어찌 속히 회계하지 않는가.” 하다. 《혹문》을 읽다.
3일 (경진). 흐리며 바람이 많다. 초저녁에 비가 뿌리다가 곧 그치다. 근일 가뭄이 너무 심하다. 아침엔 꼭 침침하게 안개가 끼었다가 느지막하게는 햇빛이 청명해지고 써늘한 바람이 줄곧 불어 기후가 아주 좋지 못하다. 서애(西厓)의 지난달 16일에 보낸 편지를 보다. 《혹문》을 읽고, 《연주시》를 보다.
4일 (신사). 햇볕이 매우 내리쬐다. 비망기에 이르기를, “내가 심희수(沈喜壽)를 처음 보아 진실로 그 사람됨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의 언사만은 매우 간사하고 괴이하다. 말이란 마음의 소리이니 그 말에 의해 그 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이이가 죽은 뒤에는 별로 특별한 대우를 한 일이 없는데, 감히 말하기를, ‘대우하는 도리가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에 다름이 있으니, 생각하건대, 필시 상께서 그런 뜻이 있는가 합니다.’ 하니, 이는 은밀히 나의 마음씀의 얕고 깊음을 시험함이다. 또, ‘이이를 중론(衆論)을 물리치고 등용했다.’ 하니, 내가 물리친 것은 곧 간신이 모함하는 사악한 언설이었는데 어찌 중론을 물리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서얼 허통(庶孼許通)의 일로 말하면 비록 매우 구차하긴 하나, 그 조상 대대로 전해 오던 토지의 망실이 조석간에 있음을 민망히 여겨서 한 부득이한 조처이지, 이이가 어찌 그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을 미리 알고 그 서자를 위하여 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이제 그의 말에 ‘사람들은 이이가 반드시 그 아들 때문에 이 납속의 법[納粟之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니, 이는 은밀히 다른 사람의 가설(假說)에 의탁하여 실은 그가 한 일을 배척한 것이다. 꿈에 귀양간 신하(이이로 말미암아 귀양간 허봉ㆍ박근원ㆍ송응개 등을 가리킴)를 보았다고 하면서 시율(詩律)로 표현하여 슬그머니 써 넣기까지 한 것은 음흉한 술책 아닌 것이 없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 같은 말이라 본디 헤아릴 것도 못 되나, 임금이 사람을 씀에 조기(早期)에 분변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의 사람됨이 말에는 민첩해서 혹시 우연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생각이 이와 같으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승정원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승정원에서 회계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심희수가 계달(啓達)한 사연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평일에 이이가 국사에 성심을 바치고 가사는 돌보지 않음을 경모해 오다가 이이가 죽은 뒤에 처자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항상 몹시 애석한 마음을 품어 행여나 상께서 특별히 은전(恩典)을 보여 그 노고에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다만 말이 경솔하고 사정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 그 사이에 조금도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하다. 영상이 계를 올리기를, “죽은 이이가 국사에 성심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다가 불의에 죽어 그의 임금 사랑하고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실현해 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가련하고 측은하니, 추숭(追崇)의 은정이 있어야 할 것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하여 하라.” 하다. 《혹문》을 마치다.
5일 (임오). 바람이 많이 불고 햇볕이 심하게 내리쬐다. 이덕열(李德悅)이 장령이 되었으며, 허명(許銘)이 병으로 갈리다.이충원(李忠元)이 헌납(獻納)이 되다. 홍섬(洪暹)이 이이에 관해 헌의(獻議)하기를, “이이가 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다가 그 품은 뜻을 실현해 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죽은 이에 대해 애도의 마음을 나타내고 그 사후를 높여 줌은 참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의례입니다.” 하고, 김귀영(金貴榮)이 헌의하기를, “이이가 시행한 것이 간혹 시의(時宜)에 적합치 못한 점이 있긴 했으나 그가 나라를 위하고 일을 맡아 함에 있어서는 지극히 가상하였으니 그가 처리한 일이 중도(中道)에 맞았다면 이익됨이 반드시 많았을 터인데 한 번 병들어 갑자기 돌아가니 실로 불행하다 하겠습니다. 포상과 증직의 의례로 말하면 밝으신 성상의 살핌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박순(朴淳)은, “이이를 추증(追贈)할 뜻은 신이 어제 이미 아뢰었기로 헌의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정유길(鄭惟吉)이 헌의하기를, “이이의 재주와 학식의 풍부함과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아름다움은 남들이 좀처럼 미치지 못할 점이라 조정에 두어 그 품은 뜻을 실현하는 것을 보고자 했으나 하늘이 나이를 더 주지 않아 뜻을 품은 채 죽으니, 그 사람됨을 아는 자라면 누군들 마음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경석(經席)에서 영상이 아뢴 것도 필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추숭의 의례는 불가함이 없을 듯하나, 은전(恩典)에 관계되는 일이니, 신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하다. 《대학(大學)》의 구두점 찍기를 마치고, 《논어》에 구두점을 찍기 시작하다.
6일 (계미). 흐리고 밤에 큰비가 내리다. 《논어》의 구두점을 마치다. 어제 있었던 대신들의 헌의에 비답하기를, “이이는 내가 그 사람됨을 환히 알고 있으니 아래에서 다시 계달할 말이 없다.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으니 그 직품이 이미 높은데 사후의 추증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비록 추증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다만 처자가 파주(坡州)로 갔다가 거기서 해주(海州)로 향한다고 하니 그 가는 전 노정(路程)에 상구(喪柩)를 호송토록 하고, 장례 때에 돌보아 줄 일에 대해서도 아울러 본도(本道 황해도)에 글을 내리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좌상(左相)에게서 올라온다는 기별이 있는가. 대신이 오래도록 서울 밖에 있음은 사리에 온당치 못하니 재상 자리가 오래 비어 있음이 옳겠는가.” 하다. 승정원에서 회계(回啓)하기를, “현재 아직 올라온다는 기별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이 지방에 있어 재상 자리가 오래 비어 있음은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이젠 날씨도 따뜻하니 속히 올라오도록 다시 글을 내리심이 어떠합니까?” 하니, 계한 대로 하라고 하교하다.
7일 (갑신). 맑다. 《맹자》에 구두점을 찍기 시작하다. 중이(仲耳)에게 화답하여 절구 한 수를 짓기를,
대숲 밖의 온 성에는 한 점 티끌도 끊어졌는데 / 竹外絶點埃一城
붉은 살구꽃들 멋대로 서로 자랑하니 가련타 / 紅杳謾相誇可憐
한매(寒梅)는 밤중에 풍우 일어 / 寒梅風雨中宵起
매화는 다 지고 살구꽃만 남았네 / 落盡梅花惟杏花
하다.
8일 (을유). 맑다. 아침 날씨가 매우 쌀쌀하다. 덕로(德老)가 와서 하는 말이, “어제 여수(汝守)를 만나 보았는데 양사(兩司)의 주장이 매우 준엄하여 그의 힘으로써는 죄를 가중하는 법의 시행을 그만두도록 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대개 윤근수(尹根壽) 형제가 주동한다고 한다.” 하다. 《맹자》에 구두점을 찍다.
9일 (병술). 비가 개고 바람이 많이 불다. 《맹자》에 구두점을 찍다. 한림 조인득(趙仁得)이 교서를 받들고 노 정승을 부르러 가다. 승정원의 말에 따라 교서로 부르도록 명령했는데, 사인사(舍人司)의 낭청을 보내고자 했으나 사인(舍人)이 연고가 있었고, 승정원에서 사록(司錄)을 보냄은 일의 체면으로 보아 중후하지 못한 일이라고 해서 사관(史官)을 보내도록 청했던 것이다. 마침 좌상의 사표가 들어와 계자(啓字)를 찍어 내리자 승정원에서 계자만 찍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니 잘못 찍은 것이라고 답했다 한다. 이에 따라 사표에 관한 말을 교서에다 첨가해 넣도록 하교하니, 승정원에서, ‘첨가해 넣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교서는 직접 내려보내고 사표에 대해선 다시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써서 내려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다.
10일 (정해). 맑고 바람이 많이 불다. 《맹자》에 구두점을 찍다. 유훈(柳塤)이 함경 감사가 되다. 저번에 사헌부에서 권극례(權克禮)를 심문하도록 청하며 ‘사사로이 행차한 손님을 접대한 일이 많았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는 권극례가 미숙(美叔)을 후하게 대접하자 그것을 엿보고 고해 바친 자가 있어서 범칭하여 ‘사사로운 행차를 접대한 것’으로 논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상께서 하교하기를, “사사로운 행차를 접대함은 나의 뜻을 본받지 않음이고, 또 변방에 사변이 있는 때라 권극례의 재질이 또 합당치 못하니 체직하라.” 하다. 신립(申砬)이 북병사(北兵使)가 되다. 전날에 대신이 신립으로 하여금 서울에 와서 그 어머니를 뵙게 하고, 또 변방의 사태를 자세히 진술하게 하도록 말한 적이 있는데, 이때 임금이 김우서(金禹瑞)를 갈고, 신립으로 대신하도록 명한 것이다. 강서(姜緖)가 수원 부사가 되다. 혼원(渾元)이 수망에 올랐으나 낙점되지 않았다고 한다.정인귀(鄭仁貴)가 지평이 되고, 이정립(李廷立)이 정언이 되다.
11일 (무자). 맑다 아침 날씨가 매우 쌀쌀하며 바람이 많이 불고, 밤에는 서리가 내리다. 최경직(崔敬直)의 말에 이양원(李陽元)이 지난해 성호원(成浩原)이 떠나갈 적에 그를 기롱하는 시를 짓기를,
이미 벼슬살이에 몸 적셨다 숨으려는 건 또 무슨 일인고 / 歌罷底事咸芝素
우계(성혼의 호) 처사가 달아난 산으로 돌아가네 / 士牛溪處走還山
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오늘날 공격이 무척 심하다고 한다. 《맹자》에 구두점을 찍다.
12일 (기축). 흐리다. 아침 날씨가 매우 쌀쌀하며 바람이 많이 불다. 《맹자》의 구두점을 마치고, 《중용》의 구두점도 마치다. 사록(司錄) 박순남(朴順男)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가지고 노 정승을 부르러 가다.
13일 (경인). 맑다. 아침 날씨가 매우 쌀쌀하며 바람이 많이 불다. 들으니, 서총대(瑞葱臺)에 거둥하여 문과(文科)에 4명, 무과(武科)에 18명을 뽑았다고 한다. 《중용 혹문(中庸或問)》을 읽다.
14일 (신묘). 맑고 아침 날씨가 매우 쌀쌀하며 바람이 많이 불다. 밤에는 서리가 내리다. 근래 연일 서리가 내려 보리와 밀농사는 이미 가망이 없어졌고 올벼도 아직 씨를 뿌리지 못했다고 한다. 사간원에서 김우서에게서 가의대부의 가자(加資)를 박탈하도록 여러 날을 청하더니 이제 그 일에 대한 계는 그만두다. 김우서와 순찰사는 북쪽 정벌을 어렵게 여겼으나, 박 정승은 북쪽 정벌을 주장했는데 이제 신립이 와서는 북쪽 정벌이 매우 용이하다고 하자 임금과 정승이 뜻이 맞았기 때문에 김우서를 즉시 갈았다. 김우서는 변방의 민심을 얻어 변민들이 그를 우러러 의지하는 뜻이 꽤 있었고, 신립은 돌격을 잘하며 성질이 급하고 형벌이 가혹하여 인심을 많이 잃었으니, 지금 병사가 된 것은 실상 사람들의 바라던 바는 아니라고 한다. 김륵(金玏)이 지평이 되다. 《시전(詩傳)》을 읽기 시작하다.
15일 (임진). 비가 내리지 않다. 아침 날씨가 매우 쌀쌀하다. 사간원에서 이봉정(李奉貞)을 가자(加資)하도록 여러 날을 상계하더니 이제 그 일에 대한 계는 그만두다. 이봉정은 환관이다. 10일의 정사에 이봉정을 통정대부로 올려 주도록 명하자 정청(政廳)에서 공로도 없이 품계를 과하게 올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올려 주니 양사(兩司)에서 이 문제로 간쟁하다. 《시전》을 읽다.
16일 (계사). 비가 내리지 않다. 사헌부도 환관(이봉정)의 일에 대한 논계를 그만두다. 《시전》을 읽다.
17일 (갑오). 낮부터 부슬비가 내리다 말다 하다가 초저녁에 그치다. 수원 부사 강서(姜緖)가 방문하다. 이전(李戩)과 신립을 이전은 현재 평안 병사로 있다. 20일에 거행할 습진(習陣) 행사의 대장으로 임명하도록 명령했다가 비변사의 말에 의하여 도로 파하다. 비변사의 계에 대략 아뢰기를, “이전과 신립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그 절제를 시험해 보고자 하심은 성의(聖意)가 극히 당연하나, 그들은 외관(外官)이라서 사체(事體)가 온당치 못합니다. 습진의 절차와 세목(細目)으로 말하면 자연 이미 정해진 규례가 있어 별도 양식의 방략(方略)을 시험해 보기는 어렵고, 만약 부하의 잘못으로 인해 혹시 조금이라도 규율을 어기게 된다면 위명(威名)을 손상시킬 우려가 없지 않고, 신립은 바야흐로 중책을 맡고 있어 더욱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친히 열병하실지의 여부가 아직 판하(判下)되기 7, 8일 전에 도성 사람들 사이에, ‘신립으로 하여금 습진케 하고 친히 임석하신다.’고 떠들썩하게 전파되고 나서 이런 명령 신립을 습진 대장에 임명하는 명령 이 계시니 실로 괴이합니다.” 하다. 박점(朴漸)이 좌승지가 되다. 《시전》을 읽다.
18일 (을미). 새벽부터 비가 내리더니 신시(申時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쯤에 그쳐 버려 먼지를 적시기에도 부족하다. 《시전》을 읽다. 김포(金浦) 유생 홍필신(洪弼臣) 등이 상소하여 이이를 위해 추증하고 대(代)를 잇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할 수 없는 일.”이라 하다. 이이에게는 서자 둘이 있고 적자는 없다. 그 한 아들은 평소 친한 이가 성혼(成渾)ㆍ정철ㆍ신응시(申應時)ㆍ윤근수(尹根壽) 제군들이라 그들이 모두 회문(回文)을 내어 미포(米布)를 거둬 납속(納粟)하여 속신(贖身)을 허락받았으나, 그 다른 한 아들은 속포(粟布)가 없어 속신받지 못해 서울에서 오래도록 이런 논의가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비로소 발론(發論)되다.
19일 (병신). 맑다. 《시전》을 읽다. 들으니, 종실(宗室)과 재상들이 서총대에서 활쏘기를 관람했다고 한다. 성호원이 네 번째로 사직하려 하자 말미를 주다.
20일 (정유). 비가 내리지 않다. 모화관에서 친히 열병하고 이어 무예를 관람했다고 한다. 친히 열병할 때 군악을 연주하도록 명하자 양사에서는 천재(天災)가 있는 때라 주악을 그만두도록 두 차례나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다. 《시전》을 읽다.
21일 (무술). 비가 내리지 않다. 《시전》을 읽다.
22일 (기해). 비가 내리지 않고 몹시 덥다. 《시전》을 읽다. 한림 조인득(趙仁得)이 상주(尙州)에서 돌아오다. 노 정승이 올린 전문(箋文)을 승정원에 전하고 불윤 비답과 교서 중에 승정원이 재량하여 하라고 하다. 황정식(黃廷式)이 동부승지가 되고, 정윤복(丁胤福)이 사간이 되다. 이전에 상께서 이이와 군현(郡縣) 합병의 일을 의논하고 해당 관청이 8도 감사에게 그 편의 여부를 불어본 적이 있었는데, 전라 감사 구봉령(具鳳齡)이 그 불편함을 장계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길가에 집을 짓는 것(사람들의 의견이 구구하여 일을 완성하기 힘듦의 비유)과 같으니 물어볼 것이 못 된다. 군현을 많이 설치함은 단지 무뢰배들을 위한 땅이 될 뿐이다. 3백여 현이 다 그 적임자를 얻을 수 없으니 줄여서 2백여 현을 만들도록 이조(吏曹)에 바로 말하라.” 하다.
23일 (경자). 비는 내리지 않고 몹시 덥다. 《시전》을 읽다. 사록(司錄) 박순남(朴順男)이 상주에서 돌아왔는데, 노 정승이, “삼가 성지(聖旨)를 받잡기 6ㆍ7 차례에 이르렀으니 황공하여 죄를 기다릴 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더라고 한다.
24일 (신축). 비는 내리지 않고 몹시 덥다. 들으니, 가을보리는 겨우 두어 치가 자라 이삭이 나왔고, 봄보리는 누렇게 시들어 들에는 푸른빛이 없으며, 토질은 몹시 딴딴하게 되어 벼는 씨를 뿌릴 가망도 없다고 한다. 《시전》을 읽다. 주서(注書) 최염(崔濂)이 불윤 비답을 받들고 노 정승을 부르러 가다. 순문관(巡問官) 서익(徐益)이 서울에 오다. 충청도엔 이달 10일 뒤에 눈이 내리고 추웠다고 한다.
25일 (임인). 무척 덥다. 밤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새벽녘에 와선 점차 커지다. 서총대에 거둥하여 무신에겐 활쏘기를 시험하고, 문신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이하에겐 배율(排律) 20운(韻)을 시험했다고 한다. 《시전》을 읽다.
26일 (계묘).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다가 곧 그치다. 서익을 의주 목사로 임명하니, 비변사에서 서익이 서울에 있어야 일을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하면서 갈아 주기를 청하기에 윤허하고, 김위(金偉)로 대신하다. 홍종록(洪宗祿)과 유몽(柳夢)이 다 같이 정언이 되고, 정여립(鄭汝立)이 수찬이 되다. 노 정승에게서 또 사표가 와서 불윤 비답을 내리도록 명하다. 《시전》을 읽다.
27일 (갑진). 흐리다. 《시전》을 읽다.
28일 (을사). 맑다. 《시전》을 읽다. 도순찰사(都巡察使)의 보고에, “3월 10일, 18일, 19일에 오촌(吾村)ㆍ종성(鍾城)ㆍ방원(防垣) 등지의 호인(胡人)이 민가에 침입하여 불을 놓고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고, 혹은 뛰어 돌아다니고 혹은 잠복해 들기도 했습니다.” 하니, 비망기에, “경의 전번 질환(疾患)이 아직 낫지 않았음을 이제 듣고 내가 우려된다. 변방에 밝은 의원과 좋은 약이 없을 것이니 머뭇거리고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후회가 있을까 한다. 경의 한 몸은 전 도민(道民)의 기대가 걸려 있으니 자신을 가벼이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경이 멀리 조정을 떠난 지 이제 1년이 되었으니 어찌 나를 한 번 보고 싶지 않겠는가. 새 병사(兵使)가 부임하는 즉시 경은 사람을 택해서 경성 본영(鏡城本營)을 유수(留守)케 하고, 올라와서 몸을 조리한 뒤에 도로 내려갈 것이다.” 하다. 선전관(宣傳官)을 시켜 비망기를 가지고 가서 도순찰사에게 유시하도록 하다. 경성 판관(鏡城判官)을 문관으로 임명하도록 명하다. 본래는 문관을 임명해 보냈는데 사변으로 인해 무관을 임명해 오다가 이제 신립이 문관으로 임명하도록 상계하므로 비변사에 물어 보았더니 비변사에서도 합당하다고 하다. 신립이 누구는 상 주어야 하고, 누구는 죽여야 하고, 누구는 공이 있고, 누구는 죄가 있고, 어떤 일은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폐지해야 한다고 말하면 상감께선 한결같이 따르신다. 정여립이 서울에 들어왔다고 한다.
29일 (병오). 맑다. 비망기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이 계본(啓本)을 보건대, 조무래기 적이 출몰한다더니, 율적(栗賊)이 장차 침범한다는 기별이 있기에 이르렀고, 적병이 이미 강을 건너 밀려온다고 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내년 봄에는 응당 방자하게 도적질할 것이라고 하였더니, 이제 과연 그러하도다. 적들이 전후에 달콤한 말과 간사한 얼굴빛으로 혹은 그들의 처자(妻子)를 보내오기도 하고, 혹은 그 당의 무리를 보내오기도 하여 장차 투항하여 올 것처럼 한 것은 변장들로 하여금 그놈들이 조석간에 투항하여 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여 방심하게 하고 해이(解弛)하게 한 다음 불시에 쳐들어와서 저돌적으로 도적질하려는 것이라고 내가 당초에 이미 염려하였는데, 변장들은 유인하여 오게 하는 것만을 일삼다가 도리어 적의 술책에 빠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도다. 대저 소식이 이와 같다면 아마 농사도 짓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가장 염려스럽도다. 또한 적병들이 이미 국경에 침범하였으되 봉화대로 보고하지 않아 도무지 지난 겨울에 연대(煙臺)를 증설한 본의가 없도다. 군령(軍令)의 해이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각별히 살펴 다스려야 할 것이고, 또한 번호(藩胡) 자신이 도적이 되어 노략질하면서 율적이 장차 침범하려 한다고 핑계 대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인데, 이것을 알 수 없으니, 비변사(備邊司)에 이르노라.”비변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회계(回啓)하였다. “당초에 적을 유인해 불러서 받아들이려고 한 계책이 큰일을 그르쳤습니다. 효정(孝丁)에게 매수되어 이미 소란스러움이 적실했는데, 또 우립(牛立)이 권유하여 투항시켜 온다는 말을 반드시 믿을 수 있다고 해서 중요한 직책을 주려고 하니, 상감께서 그 폐간(肺肝)을 들여다보시듯 하시고 신들에게 하문하시므로 신들도 사리를 논하여 회계하였습니다. 지금 계본을 볼 것 같으면 율호(栗胡)의 일이 더욱 통분하다고 하였으나, 위신을 손상하고 약점을 보인 다음부터는 적들이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이른바 쇄환(刷還 외국에서 방랑하는 동포를 데리고 돌아오는 것)할 자도 거의 다 되었고, 자신이 노략질하는 사람으로서 적호(賊胡)라고 핑계하는 자도 대개 모두 번호(藩胡)의 무리로서 허(虛)와 실(實)을 분별하기 어렵고, 피차(彼此)가 서로 혼합되어 허다한 채백(綵帛)의 증여와 전후의 금옥같은 관직들이 끝끝내 그 술책에 빠지게 되어서 꼴이 아니어서 자못 수습할 수 없습니다. 순찰사(巡察使)는 그 책임이 없을 수 없고, 김우서(金禹瑞)는 북변(北邊)에서 늙은 사람이니 노련한 장수라 할 수 있는데, 겁내고 정신 없이 하여 일처리가 타당성을 잃어 오랑캐로 하여금 기세를 더하게 하였으니, 일 그르친 죄를 과연 면하기 어렵습니다.”
승정원에서는 아뢰기를, “적의 변란이 무상하고 강과 여울물이 얕아서, 조석간에 염려스러운 때에 원수(元帥)가 올라오면 소략하게 될 것 같으니 감사가 부임한 뒤에 올라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시기를, “이 말도 옳으나 변방의 보고가 연달아 있는데, 또 선전관(宣傳官)을 보내게 되면 역마 길이 소란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수삼일 동안을 보고서 처리하라.” 하다. 전 길주 목사 정원상(鄭元祥)을 잡아 가두다. 서익(徐益)이 아뢰기를, “정원상이 갈려 올 때에 해유(解由 물품을 관리하던 관리가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호조에 보고하여 책임을 면하던 일) 인정(人情)이라 칭하고 잡곡 1백 50섬을 내어 주었는데, 순찰사 차관(差官)이 50섬을 환수하고, 1백 섬은 혹은 쌀과 베로써 대납하여 창고에 넣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순찰사는 어찌하여 알리지 않고, 비변사는 어찌하여 계달(啓達)하지 않았는가.” 하다. 김명원(金命元)을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켜 함경 감사를 삼다. 서익이 아뢰기를, “유훈(柳塤)이 일찍이 회령 부사(會寧府使)가 되어 여러 사람의 뜻에 차지 못하여 백성들의 말이 대단히 많았다.” 하니, 유훈이 상소하여 사직하다. 이에 대해 답하기를, “민간의 잡음 때문에 바로 갈 수는 없노라.” 하자, 재차 상소하므로 비변사에 물으니, 비변사에서 회계하기를, “한때 민간의 잡음이므로 경솔하게 동요하지 않아야 할 것 같으나, 유훈이 자처하는 마음에 있어서 편치 못함이 없지 않을 것이고, 그가 한 도를 진압하고 여러 진(鎭)을 호령하는 데에도 편치 못하여 서로 방해가 될 염려가 있지 않을까 염려되니 다른 합당한 자에게 전(傳)하실까요.” 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김명원이나 유홍(兪泓)이 소임을 감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김명원이 합당하나 늙은 어머니가 있고 독자이니 어찌할꼬. 유홍은 그만 못할 것 같으니 경등이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북쪽 변방이 바야흐로 위급하고 가사(家事)와 국사는 일체(一體)이니, 이때는 바로 순국(殉國)해야 할 때입니다. 재주와 국량이 감당할 만하면 사정(私情)의 절박함은 고려할 겨를이 없을 것 같고, 유홍은 일찍이 이 도를 맡아 보았기 때문에 아울러 의망하였던 것입니다.” 하다. 민충남(閔忠男)은 경성(鏡城) 판관이 되고, 유옥(兪沃)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고, 신립(申砬)의 말을 따른 것임.유각(柳恪)과 권춘란(權春蘭)은 정언(正言)이 되고, 이홍인(李弘仁)은 지평(持平)이 되다.
4월 1일 (정미). 맑다. 전라 좌도의 쌀 5천 석과 경상도 쌀 4천 석을 북도에 수송하라고 명하다. 비변사에서 순찰사 군관(軍官) 박홍진(朴弘進)과 회령(會寧) 판관 윤귀수(尹龜壽)를 잡아들여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지난번에 이탕개(尼湯介)를 유인하여 오게 할 때에 두 사람이 일을 그르쳐 사로잡지 못한 까닭이다. 순찰사가 그때 보고하지 않았는데, 비변사에서 풍문으로 들은 것이다. 한림(翰林) 이충성(李忠誠)에게 불윤 비답을 가지고 노(盧) 정승을 부르러 가게 하다.
2일 (무신). 맑음. 《시경(詩經)》을 읽다.
3일 (기유). 구름이 끼고 무덥다. 밤중에 내리기 시작한 비가 날 샐 때까지 내리다. 《시경》을 읽다. 전 아산 만호(阿山萬戶) 최몽린(崔夢麟)을 처참하라고 명하였다가, 양사(兩司)에서의 진언(進言) 때문에 우선 참형을 정지하고, 금부(禁府)로 하여금 추국하여 자백을 받도록 하다. 지난해에 순찰사가 아뢰기를, “전 아산 만호 최몽린이 호인(胡人)을 침노하여 학대하는 바람에 변란의 일을 야기시켰다.” 하므로, 금부에서 잡아들여 국문하였고, 올해 정월에 사형을 감하여 외딴섬에 충군(充軍)하기로 하여 길을 이미 떠났는데, 신립(申砬)과 서익(徐益)이 서로 계속하여 말하기를, “최몽린이 첩(妾)을 위하여 두 벌의 갖옷을 준비하다가 원망이 생기게 하였다.” 하니, 최몽린을 북쪽 국경에서 처참하여 변방 백성들에게 사죄하게 할 것을 비변사에 문의하라 하였다. 비변사에서는, “국경에서 효수(梟首)하는 것은 단지 약점을 보일 뿐만 아니라, 이미 누차 형벌을 받아도 불복하였기로 사형을 감하였다가 갑자기 베어 죽이는 것은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체제가 아니니 불가하다.” 하고, 대간에서도 말하기를, “자백을 받은 뒤에 죄를 정할 것이다.” 하므로, 금부로 하여금 다시 국문하도록 하고, 이어서 비망기를 승정원에 내리기를, “최몽린을 죽여야 하거늘 조정에서는 고식적(姑息的)으로 하여 마치 비변사에서 최몽린을 비호하듯이 하니, 비변사 당상(堂上)은 대죄(待罪)하라.” 하다. 지난달 28일 밤중에 전교하기를, “금부로 하여금 처리하게 한 일을 비변사에 문의하라.” 하니, 비변사에서, “국기(國忌)인 대제(大祭)를 지낸 다음에 의계(議啓)하겠다.”고 회계하더니, 오늘 아뢰기를, “최몽린이 이미 왕옥(王獄)에 하옥되었으니, 추국하여 자백을 받는 것이 자연 옥사를 다스리는 통상적인 규례입니다. 만약 옥사(獄事)가 끝나기도 전에 곧장 죽이게 되면 옥사의 체제에도 해로움이 있고, 인심도 혹 불안함이 있을까 하여 신 등이 일찍이 이런 뜻으로 회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후에 명령을 받은 신하들이 탑전(榻前)에서 아뢰는 말이, 모두 최몽린은 재앙의 괴수라 하고, 성상의 뜻도 빨리 형전(刑典)을 보여 장래를 경계하고자 하시니, 이러한 한때의 현명하신 판단을 신등이 어찌 감히 이론(異論)을 제기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처참하도록 금부에 이르라.” 하였는데, 마침 양사(兩司)에서 모두 자백을 받아 죄를 정하기로 말을 하여 우선 정지하였다고 하다. 상공(上貢)한 호인(胡人)이 예조에서 잔치할 때에 반드시 이제신(李濟臣)과 김수(金燧)는 원망하되, 최몽린에게까지는 미치지 않고, 아산(阿山)에서 두 벌의 갖옷을 만들므로 육진(六鎭)의 번호(藩胡)가 모두 난을 선동하였다는 것은 반드시 없는 일이라고 하자, 식자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탄식하다. 김우서(金禹瑞)는 비록 돌격하여 말할 만한 공은 없으나, 북쪽 백성들이 자못 서로 친숙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데, 신립(申砬)은 예리함이 지나치고 기세를 부려 형장(刑杖)이 너무 혹독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바라보았고, 북쪽 백성의 성격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기를 좋아하는 것은 호인들이 우리 국민을 만나면 배불리 먹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므로 그러는 것인데, 지금 신립으로 김우서와 바꾸면 백성들이 북쪽으로 들어가려는 염려가 있게 될까 두렵고, 김명원(金命元)이 일찍이 경성(鏡城) 부사로 있으면서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고 무비(武備)를 닦지 않고, 오직 주색(酒色)에 빠지는 것을 일삼아 폐단이 여러 가지이므로 백성들이 대단히 괴롭게 여겨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문관을 얻어 원으로 삼는 것이 달갑지 않다.” 하면서 다시 김명원 같은 자를 만나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민심이 이러한데도 김명원으로 방백(方伯)을 삼았고, 정언신(鄭彦信)은 본래 재간이 없어서 진실로 여망(輿望)에 흡족하지는 못하나, 정언신 같은 사람은 재상 중에서도 얻기 쉽지 않기 때문에 보냈는데, 북병사가 되어서 은혜를 백성에게까지 행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안도하고, 곤임(閫任 병사(兵使))을 받은 다음에도 비록 적을 소탕한 공은 없으나 대단한 손실은 없는데, 다만 조정에 있는 박순(朴淳)이 대대적으로 북벌하자는 의논을 주장하니, 정언신이 불가하다고 고집하고, 서인(西人)들이 또한 정언신이 일찍이 동인을 옹호한 뜻이 있다고 하여 심히 비방하여 배척하였으니, 이이(李珥)가 일찍이 임금 앞에서 정언신을 갈려고 한 것이 모두 이러한 까닭이다. 계획이 이미 이루워지지 못하매 서익(徐益)을 보낼 것을 건의하니, 오로지 정언신의 단점을 살피려는 저의이다. 서익이 돌아오기 전에 정철(鄭澈)의 무리가 대중에게 공언하기를, “서익이 돌아오면 정언신이 응당 갈릴 것이라고 하더니, 이때에 와서 과연 이 같은 명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위태하게 여기다. 성호원(成浩原)이 다섯 번째로 사직서를 올리므로 체차(遞差)하였다고 하다.
4일 (경술). 가랑비가 저녁때부터 밤새도록 내리다. 《시경》을 읽다. 조강(朝講)에서 정철이 아뢰기를, “성혼(成渾)을 퇴휴(退休)하게 하지 마시고 한가한 직책을 주어 경연(經筵)에 출입하게 하십시오.” 하였으나, 결정이 없으므로 정원에서 취품(取稟)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하다. 비망기에, “사헌부와 형조에서 추고(推考)하여 거두어들인 속포(贖布)를 3개월마다 녹계(錄啓)하고, 북도에 수송하라.” 하다.
5일 (신해). 맑고 밤새도록 세차게 바람이 불고 몹시 춥다. 《시경》을 읽다. 윤두수(尹斗壽)가 병조 참판이 되고, 이정립(李廷立)이 이조 좌랑이 되고, 서익이 수찬이 되고, 오억령(吳億齡)이 부수찬이 되고, 성혼이 동지(同知)가 되다. 정여립(鄭汝立)이 사직 상소를 올리니, 답하기를, “그가 스스로 상소하였으니, 체차하라.”고 하시자, 정원에서 비답이 온당치 못한 것으로 아뢰니, 알았다고 답하다. 새로 홍문록에 든 사람으로 결원된 자리를 보충하라고 명령하다. 비변사에서 서얼 중에 죄 있는 사람이 곡식을 바치고 속면(贖免)하는 기한을 올해까지로 할 것을 건의하니, 답하기를, “서얼들이 모두 그르게 여기니, 서서히 사세를 보아서 하라.” 하다.
6일 (임자). 흐리고 비가 뿌리다. 《시경》을 읽다.
7일 (계축). 맑음. 시경을 읽다. 지난날 조연(朝筵)에서 우상이 아뢰기를, “유훈(柳塤)을 끝끝내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훈이 내 뜻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이는 유훈이 북쪽을 정벌하는 것이 옳다고 한 까닭이다.
8일 (갑인). 맑음. 《시경》 1편을 마치다.
9일 (을묘). 맑음. 《시경》 2편을 시작하다. 처음으로 정여립의 상소를 보았는데, 상소 중에는 다만 그가 병이 있어 벼슬하기 어렵다는 것만 말하였을 뿐 다른 일은 말하지 않고, 말단에 단지 말하기를, “지금 나라 일이 어렵고 염려스러운데, 안으로는 사류(士類)들이 흩어지고 밖으로는 전쟁이 곧 일어나려고 하니, 신처럼 어리석고 재빠르지 못하고 변변치 못한 사람이 어떻게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하다. 서애(西厓)의 편지를 보니, 편지에 이르기를, “남쪽 지방 사우(士友)들이 끊어져서 서로 방문하지 않고 있어 오직 최효원(崔孝元) 한 사람만을 보았는데, 긴 대 천 간(竿)을 기르며 포의(布衣)와 금서(琴書)로 그 속에 살면서 언론이 격렬하고 기상이 늠름하니, 고사(高士)라 할 만하고, 덕원(德元) 같은 사람도 전일의 경거망동한 과실을 아프게 여기니 또한 가소롭다.” 하다. 주서(注書) 최염(崔濂)이 좌상의 처소에서 돌아와서는 좌상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말하더라고 하다.
10일 (병진). 천둥이 치고 비 오다가 잠시 후에 바로 그쳤는데 매우 어둡다. 비망기에, “거인(居仁) 곽사원(郭士源) 등이 서로 교하(交河)에서 방죽을 막는 일로 송사하는데, 사대부(士大夫)들이 많이 그 사이에 끼어 있기로 전번에 규명하여 아뢰도록 전교한 지가 이미 몇 달이 지났으되 전혀 한 마디 말도 없구나. 풍기(風紀)를 맡은 사람이 이러하니, 다른 사람은 더구나 뭐라고 말할 것인가. 속히 살펴 아뢰도록 사헌부에 이르라.” 하니, 사헌부에서는 피혐(避嫌)하여 물러나다. 윤두수(尹斗壽) 형제도 그 속에 끼어 있기 때문에 덮어두고 아뢰지 않은 것이다. 지난달 보름 후에 호남 지방에 큰눈과 우박이 내렸다고 한다. 《시경》을 읽다.
11일 (정사). 맑고 아침에는 매우 춥다. 사진(士進)이 내방하여 간직하고 있던 《의례도(儀禮圖)》를 두루 보여 주었으니, 이것은 이기(李芑)가 저술한 것으로 점구(點句)가 매우 자상하다. 성인의 글을 읽어서 사업이 저와 같으니, 그가 글 읽을 때에 어찌 이러한 의사가 있었으리오. 반드시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이 있었으리라. 다만 벼슬을 잃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데 이르고 만 것이니, 독서하는 사람의 경계가 됨직하도다. 《시경》을 읽다. 들으니, 윤자고(尹子固)가 심수경(沈守慶)을 찾아가 보고, 갑자기 묻기를, “동인과 서인이 반드시 번복이 있겠지요?” 하니, 심수경이 답하기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다. 윤자고가 재삼 번복 번복이라고 말하니, 가소롭다. 지평(持平) 이홍인(李弘仁), 사간 정윤복(丁胤福)이 일찍이 집의(執義)가 되어서 피혐(避嫌)하여 사직한 사연이 사헌부와 같았다. 대사간 윤근수(尹根壽)가 피혐(避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경이 참으로 그러한가. 사헌부에서 규찰한 뒤에야 알 것이거늘, 어찌 저 사람의 말 때문에 피혐하여 사직한단 말인가.” 하니, 사양하여 아뢰기를, “신과 형 윤두수(尹斗壽)의 이름이 곽사원(郭士源)의 입에 올랐는데, 거인(居仁)의 편이라고 하여 사헌부에 고소하게 되었다고 하나, 이 송사하는 지역이 다만 교하(交河)에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신 형제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이러한 무고가 있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곽사원이 남의 사주를 받아 그렇게 말한 것일 것입니다. 또한 두려운 것은 거인(居仁)과 같은 편에 구종(具悰)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 송사를 전담하여 사리에 어긋남이 특히 심하고, 그가 문 밖에 사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혹 서로 알 것이라고 여겨 본의 아닌 말로 지적했는지도 모르나 □□□□ 신은 진실로 구종의 얼굴도 알지 못합니다. 이 일은 대개 신이 오랫동안 폐기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천히 여기는 바이고, 이미 하류(下流)에 살고 있으므로 지목하기 쉬운 까닭에서라고 여겨집니다. 사간원에서 이르기를 헛된 명의를 인용하여 송사를 조장하였고 교하(交河) 관원의 추열(推閱 심문(審問))도 각 사람마다 달랐고, 문초하는 때도 동일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급히 규명할 수 없으므로 정철 및 윤근수 등의 출두를 청하다. 한림(翰林) 이충성(李忠誠)이 좌상의 처소에서 돌아왔는데, 좌상이 말하기를, “그릇된 천은의 중첩됨이 이런 극한에 이르렀으니, 한 번이라도 사은(謝恩)하고 죽고 싶으나 병환이 낫지 않으니, 황공함이 한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더라고 하다.
12일 (무오). 구름 끼고, 신시(申時) 후부터 비가 뿌리다. 《시경》을 읽다. 들으니, 신입(申砬)이 배사(拜謝)하므로 인견(引見)하였다고 하다. 신립이 아뢰기를, “신이 비변사에 참여하였다가 이때 습속이 장차 나라를 망칠 것을 알았습니다. 박순(朴淳)이 한 마디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은 감히 말을 못 하니, 이러하고도 어찌 능히 망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립의 생각에, 다른 사람은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고 박순 혼자 말한다고 여겨서인데, 언어가 분명하지 못하여 상감의 들으심을 그르쳤다고 정계함(鄭季涵)이 공직(公直 이경중(李敬中)의 자)에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윤근수가 또 남이 업신여기고 천히 여겼다 해서 사직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형도 없는데 형수를 도적질하였다는 설도 있고, 장인도 없는데 장인을 쳤다는 설도 있으며, 사람을 죽였다는 이름이 한 가지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은 성인에게 미치기도 하고, 시호(市虎 시장에 범이 있을 리 없지만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세 사람쯤 되면 믿게 된다는 것)의 속임이 세 번 전하기에 이르기도 하였으니, 말세 인심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오. 경은 마땅히 안심하고 직임에 나아가고, 사헌부는 마땅히 공론을 채집하여 참작하여 아뢰라.” 하다. 이경중(李敬中) 이하가 또다시 사직하였는데, 사간원에서 전례대로 나오기를 청하므로 모두 직임에 나아가다.
13일 (기미). 개었다가 오후에 비와 우박이 내리다. 《시경》을 읽다. 들으니, 10일 천둥이 치고 비 올 때에 과천(果川) 등지에서 큰 우박이 내려서 오래도록 녹지 않았다고 하다. 성혼(成渾)이 이조 참판, 홍성민(洪聖民)ㆍ구봉령(具鳳岭)이 의망한 것임.배삼익(裴三益)이 정언(正言), 특명으로 이산해(李山海)가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가 되다. 이우직(李友直)ㆍ정탁(鄭琢)ㆍ윤의중(尹毅中)이 의망한 것임.
14일 (경신). 개었는데 아침 날씨가 매우 차다. 《시경》을 읽다. 순찰사의 보고에, 방원(防垣)의 호적이 국경을 침범하였다가 도로 물러갔다고 하다. 대사헌 정철이 피혐해서 사직하여 집의(執義) 이하와 같이하다. 집의 이하는 여론이 모두 직임에 나아가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겨 처치를 불가하게 여겨서인데, 정철도 사직하다. 대사간 윤근수가 자기 이름이 송사하는 사람의 입에 올랐다고 하여 사직하다. 사간과 헌납(獻納)이 집의 이하가 피혐해서 사직하였기 때문에 직임에 나아가는 것이 불가하다는 말이 있는 까닭으로 처치함에 타당성을 잃었다고 하여 사직하고 모두 물러가 대기하다.
15일 (신유). 개었는데 아침에는 춥고 저녁에는 덥다. 《시경》을 읽다. 배삼익(裴三益)이 일찍이 장령이 되었던 것으로 사직하다. 옥당(玉堂)에서 양사(兩司)가 다 나오기를 청하다. 이산해(李山海)가 사복시 제조를 사직하니, 답하기를, “사복시의 일이 지극히 한심스럽도다. 모든 치무(治務)로 말할 것 같으면 재주 여부를 막론하고 오직 그 마음에 사욕이 없는 사람이라야 그 하는 일도 볼 만하고, 직무도 거행되는 것이다. 지금 그러한 사람을 구하려고 하면 경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내 들으니, 경이 이조 판서직을 맡았을 적에 사람들이 감히 사삿일로써는 벼슬을 구하지 못하여 문에 그물을 칠 뻔하였다고 하니, 진실로 근세에 들어 보지 못한 일이다. 경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에 보답하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못 하고 있으나, 내가 경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지금 계사(啓辭)로 인하여 대략 나의 뜻을 알렸으니, 경은 부디 사양하지 말지어다.” 하다. 들으니, 옥당에서 양사(兩司)를 처치할 때에 정자(正字) 이국(李𥕏)이 의론이 맞지 않으므로 곧장 나가 버렸다고 한다.
16일 (임술). 개었는데 매우 춥고 온종일 찬바람이 불다. 《시경》 2편을 끝내고 3편을 읽기 시작하다. 들으니, 호원(浩原)의 아들이 아버지의 병이 위중하므로 본직(本職)을 바꾸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17일 (계해). 개었는데 아침에는 춥고 저녁에는 덥다. 《시경》을 읽다. 성혼의 아들을 체차하라고 답하니, 승정원에서 내의(內醫)로 하여금 병을 보게 할 것을 청하자, 상당한 약제를 보내라고 명하다. 좌상이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라고 명하다. 양사에서 두 왕자의 궁을 건축하는 토목 공사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18일 (갑자). 맑고 덥다. 들으니, 최언명(崔彦明)이 전번에 경연에 들어가 마정(馬政) 때문에 파직된 사람을 쉽게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자, 사람들이 모두 의아스럽게 여겼다 한다. 허명(許銘)이 장령이 되고, 오억령(吳億齡)이 정언이 되고, 이산보(李山甫)가 승지가 되다. 《시경》을 읽다.
19일 (을축). 맑고 대단히 덥다. 《시경》을 읽다. 승정원에서 도순찰사를 소환하도록 여쭈었더니, 답하기를, “병사가 지금 이미 부임하였으니 감사가 부임한 다음에 올라오라고 선전관에게 일러 보내라.” 하다.
20일 (병인). 맑고 덥다. 《시경》을 읽다. 주서(注書) 유공진(柳拱辰)이 불윤 비답(批答)을 가지고 노(盧) 정승을 부르러 가다.
21일 (정묘). 비는 오지 않고 대단히 덥다. 황해ㆍ강원 두 도에 이달 10일 이후에 비와 우박이 내려 큰 산이 모두 하얬다고 하다. 한재(旱災) 때문에 훌륭한 말을 구하였으니 이는 도승지 윤탁연(尹卓然)의 계달을 받아들인 것이다.
22일 (무진). 대단히 덥다. 신시 후부터 가랑비가 내리다가 밤부터는 점점 커져 낙숫물 소리가 들리다. 훌륭한 말을 구하는 교서(敎書)에, “토목 공사 때문에 백성들이 혹 수심하고 원망하며, 군(郡)ㆍ읍(邑)을 합병하는 일 때문에 수령을 이동해야 한다는 근심이 있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군과 읍을 합병하는 것은 백성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고, 인책할 뜻이 아니니, 지어 올린 승지를 추고(推考)하여 고치게 하십시오.” 하니, 답하기를, “전부터 교서는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승지가 지은 것이 비록 합당치 못한 곳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겼으니, 추고하여 고칠 필요가 없다.” 하다. 김우서(金禹瑞)가 파직되었으니, 승정원의 주달에 따라 비변사와 의논하여 한 것이다. 《시경》 3편을 끝내고 4편을 읽기 시작하다.
23일 (기사). 맑고 대단히 덥다. 《시경》을 읽다. 임금이 사족(士族) 황유경(黃有慶)이 거인(居仁)이 함부로 상언(上言)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은 것으로 실정을 알고 있음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형조로 하여금 국문하라고 하므로 한 차례 형벌을 받았고, 곽사원(郭士獂) 등의 공초에서도 말하기를, “황유경은 사건에 간여하지 않았다.” 하였으나, 오히려 형벌을 가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사간원에서 형벌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고, 형조 당상ㆍ낭청(郞廳)을 심문하여 파면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사대부(士大夫)들이 많이 그 사이에 끼었다고 하니, 논계(論啓 임금의 잘못을 따져 간하는 것)하지 말라.” 하다. 황유경은 거인(居仁)의 주인이고, 거인 등이 송사하는 방죽은 교하(交河)에 있었는데, 곽사원(郭士源)이 가지고 있는 입안(立案)에 위조 도장을 찍은 흔적이 있고, 사대부들이 양쪽에 끼인 자가 매우 많으니, 곽사원은 바로 송한필(宋翰弼)의 인척이라, 이이(李珥)가 힘쓰기를 매우 단단히 하므로, 송사 맡은 관원이 감히 함부로 결단하지 못하여 몇십 년을 끌다가 임오년 무렵에, 임열(任說)이 판윤(判尹)이 되었는데, 완의석(完議席)에서 말하기를 “한때 공론을 쥔 사람들이 모두 곽사원을 두둔하므로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므로, 서윤(庶尹) 김행(金行)이 묻기를, “누구냐?” 하였더니, 임열이 대답하기를, “이조 판서다.” 하였으니, 이이를 가리킨 것이다. 김행이 말하기를, “이조 판서가 판윤을 겸한 것이 아닌데, 어찌 능히 본부(本府)를 지휘하느냐.” 하니, 듣는 사람들이 전하여 가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사간원의 주달에 따라 교서(敎書) 중에 합병군읍(合倂郡邑)이란 말을 고치고, 승지를 추고하다. 토룡(土龍)에게 제사지내다.
24일 (경오). 맑음. 《시경》을 읽다. 사간원 황유경에게 정형(停刑)하자는 계에 답하기를, “자신이 사대부이면서 간사한 소인들과 공모하여 각기 그 당을 심어 전답 일로 싸우며 이익을 다투고, 나이 늙어서 형벌과 문초를 더할 수 없는 자 두 사람이 서로 대치하여 종적을 감추고 자취를 숨겨서 주선하고 후원하여 송사 맡은 관원을 공갈하고 협박하니, 이것은 조정의 씻을 수 없는 수치인데도, 한 사람도 항론하는 자가 없으니, 전조(前朝)의 임염(林廉)의 때와 무엇이 다른가. 그의 주인된 자가 마땅히 그 종놈을 통쾌하게 죽여 조정에 사죄하여야 할 것인데, 감히 그 늙고 간사한 것을 안아 키워 주고 그 못된 짓 하기를 조종하여 조정을 더럽히니, 그 죄만 해도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자신 또한 이 사이에 반드시 끼어있지 않았다고 보장하기 어려움에랴. 이와 같이 논한다면 황유경은 반드시 죽여야 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하다. 승지 박점(朴漸)이 경연 중에 아뢰기를, “원통한 옥사를 풀어 주고 애매하게 버림받은 사람을 거두어 임용하십시오.” 하고, 이국(李𥕏)이 아뢰기를, “사대부의 지나친 버릇을 사헌부로 하여금 금단하게 하십시오.” 하고, 성영(成泳)이 아뢰기를, “중요하지 않은 벼슬아치를 도태하는 일이 결말이 없습니다.” 하다. 승정원에서 이것을 취품(取稟)하였더니, 답하기를, “폐기(廢棄)하는 일이나 금단(禁斷)하는 일도 어렵고, 도태하는 일도 할 수 없다.” 하다.
25일 (신미). 맑고 바람이 많으니 요사이 늘 부는 바람이다. 《시경》 4편을 끝내고, 다시 미숙한 부분을 열람하기 시작하다. 구봉령(具鳳齡)이 이조 판서, 성혼(成渾)ㆍ홍성민(洪聖民)이 의망한 것임.민여경(閔汝慶)이 지평(持平), 허명(許銘)ㆍ이충원(李忠元)이 부수찬이 되다. 당초에 도록에는 정여립(鄭汝立)ㆍ김권(金權)을 부수찬에 의망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새로 홍문록에 들어 있는 사람을 모두 의망하라.” 하시므로 김권ㆍ이충원ㆍ허명으로 의망하였더니, 두 사람 다 임명하도록 명했다고 하다. 배삼익(裵三益)이 장령, 이덕열(李德悅)이 헌납(獻納), 윤담휴(尹覃休)가 내섬정(內贍正)이 되다. 윤담휴는 임용할 시기가 되도록 기용하지 않다가 학문(學文)을 잘한다고 해서 특명으로 별도로 기용하다. 승정원에서 조강(朝講) 때에 영상이 버림받은 사람을 관대하게 처리하라고 한 것을 계주하니, 답하기를, “그 사람들이 한 짓을 내가 진실로 알지는 못하나, 신하 중의 간사하고 바르지 못한 무리를 가벼이 놓아줄 수는 없노라. 그러나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라.” 하다. 사간과 헌납이, 어제 비답(批答)이 엄중하고 준절하다 하여 사직하다. 사헌부에서 또 황유경(黃有慶)의 사건을 논하다.
26일 (임신). 흐리다. 《시경》을 읽다. 정언 오억령(吳億齡)이 사직하다. 사헌부에서 사간원이 나오기를 청하다. 황유경이 거인(居仁)의 집을 탐색하여 한 책자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당초 송사를 시작할 때에 공모하여 이익을 분배하기로 한 사람들의 성명록으로, 재상이나 선비의 수가 대단히 많았다. 황유경이 이 책을 형조 관원에게 바치려고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하다.
27일 (계유). 맑음. 《시경》을 읽다.
28일 (갑술). 맑다가 오후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오다가, 잠시 후에 소나기가 먼지를 적시고 그치다. 《시경》을 또다시 한 번을 두루 읽기로 하다. 황유경의 사건을 윤허하다. 사헌부에서, “박숭원(朴崇元)은 바로 황유경의 장인이므로 그 사건에 참여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승지를 교체할 것을 계하다. 박숭원이 정고(呈告)한 지 수일 만에 다시 출사(出仕)하다.
29일 (을해). 오후에 뇌성이 치고 비가 뿌리다. 《시경》을 또 한 번 두루 읽기를 마치다. 신응시(辛應時)가 대사간, 정윤복(丁胤福)이 승지, 이유인(李裕仁)이 사간, 유근(柳根)이 지평, 김권(金權)이 정언이 되다. 주서 유공진(柳拱辰)이 좌상의 처소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상감께서 전교를 자주 내리시니, 천지처럼 망극하와 감히 다시 상전(上箋)하기도 더욱 황공합니다.” 하면서 전문(箋文)도 같이 드리니, 전교하기를, “병세가 어떠하던고?” 하니 아뢰기를, “배례할 때에 마침 요통을 앓고 있어 거동은 어려운 듯하였지만, 대화를 해 보니 정신과 언어에는 쇠약하고 병든 기색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하다. 비망기에, “좌상의 사직이 이러한 데에 이를 줄은 예측하지 못하였기에 내 마음이 멍하니 맥빠진 것 같노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늙은 대신이 떠나면 누군들 떠나고자 하지 않으리오.’ 하였는데, 좌상이 전일에는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보필에 전력하더니, 지금은 어찌하여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리는가. 옛날 대신은 천하를 구제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기 때문에 그 말에, ‘죽은 다음에야 그만둔다.’ 하였으니, 어찌 만족할 때에 그쳐야 하는 도리를 알지 못해서 이렇게 하였겠는가.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의리에 타당해서이다. 만일 자신이 대신이 되었으면 나라와 더불어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을 같이해야 하는데, 오직 고요히 물러갈 생각만 품고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다가 국가의 일이 잘못되게 된다면 감히 집에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후일에 조종(祖宗)에 사과할 것인가. 비록 그러하나, 어찌하여 전일에는 심력을 다하다가 후일에는 자신의 편의대로만 하는 것인가. 진실로 내가 불민하고 어리석어 결코 함께 보필하거나 인도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기회를 보아 떠나고 몸을 받들어 물러가려고 함이리라. 고요히 생각하니, 부끄럽노라. 승지는 마땅히 나를 대신하여 전교를 써서 다시 돈독히 타일러 기필코 올라오게 하라.” 하다.
5월 1일 (병자). 맑고 뇌성이 치다. 《계몽(啓蒙)》을 읽기 시작하다.
2일 (정축). 대단히 덥고 햇빛이 쨍쨍 쬐어 초목(草木)이 시들고 누렇게 되어 서리 맞은 것 같다. 오시(午時) 경에 빠른 뇌성이 4, 5차 있고 비가 내렸으나 먼지도 적시지 못하였다. 숭례문을 닫았다. 《계몽》을 읽다. 동부승지 정윤복(丁胤福)을 보내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가지고 노(盧) 정승을 부르러 가다. 또 비망기의 비답으로 승지를 보냈는데, 모두 승정원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라 한다. 사헌부의 논계(論啓)로 교하(交河) 현감 노대하(盧大河)를 파직시켰다고 하였는데, 우거(于居) 등이 송사한 방죽 사건으로 사대부를 적발할 때에 누락한 것이 많았고, 또 도사(都事)가 추열(推閱)할 때에도 도망하여 빠지게 한 것이 있었다. 가뭄으로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수를 줄이며 음악을 중지하였다.
3일 (무인). 아침에는 안개 끼고 늦게부터는 어제처럼 뙤약볕이 내리쬐다. 《계몽》을 읽다. 이경(李璥)이 지평이 되니, 그는 호남 사람이므로 유근(柳根)이 상피(相避)하기 위하여 갈리다. 사헌부에서 김숙진(金叔珍)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그 이유는 오늘의 주청(奏請)ㆍ사대(査對)에, 음악을 연주하고 술자리를 마련해서 태평무사한 때와 같이 했으므로 즉시 윤허하다. 양사(兩司)에서 한 궁 역사를 마땅히 정지하라고 계주한 것에 답하시다. 정계함(鄭季涵)이 김숙진으로 판교(判校)를 삼으려고 하였는데, 여수(汝受)가 듣지 않았으니, 이는 전일에 한 마디 말의 혐의 때문이다.
4일 (기묘). 아침에는 안개 끼고 늦게는 햇빛이 쬐다. 《계몽》을 읽다. 대사헌 정철, 장령 윤희길(尹希吉), 집의 이경중(李敬中)이, 수찬 이충원(李忠元)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권극례(權克禮)가 사삿일로 사람을 접대할 때 음식을 사치하게 하였다는 등의 사헌부의 계사는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피혐하고, 물러가 대기하다. 권극례가 허미숙(許美叔)을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는데, 정철 등이 사접(私接)이라고 범칭하여 먼저 파직하고 다음에 심문할 것을 계청하여 권극례가 계급이 삭탈되어 중직대부(中直大夫)가 되었던 것이다. 장령 배삼익(裵三益)이 정철로 인하여 탑전에서 아뢰기를, “근래에 대간(臺諫)이 주의(注擬)하는 것이 전혀 사람을 가리지 못한다.” 하고, 사직하고 물러가 대기하다. 지평 이경ㆍ김륵(金玏), 사간 이유인(李裕仁), 정언 오억령(吳億齡)ㆍ김권(金權), 대사간 신응시(辛應時)가 배삼익과 함께 사직하고 물러가 대기하다. 순찰사 보고에, “이달 21일에 오랑캐 2, 30명이 보로지보(甫老知堡)에 돌진해 와서 포를 쏘고 물러갔습니다.” 하다. 이산해(李山海)가 첫번째 사직소를 올리다.
5일 (경진). 아침에 안개 끼고 늦게는 햇빛이 쬐다. 《계몽》을 읽다. 헌납 이덕열(李德悅)이 사피(辭避)하고 물러가 대기하다. 옥당에서 양사(兩司)가 같이 나오기를 청하고, 아뢰기를, “근래에 전조(銓曹)에서 모든 대간에 주의한 것이 혹 인망에 흡족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 경연 중에서 계한 말은 범론한 말이고, 누구를 직접 지적한 것은 아닙니다.” 하다. 정철ㆍ이경중ㆍ윤희길이 재차 사직하고, 말하기를, “이충원이 사람을 기용할 때에 천박하고 경솔한 자를 채용한 해독을 논하고, 이어서 언관(言官)의 사리를 논한 의견이 진실하지 못하다고 말한 것은 조급한 사람을 기용하여 나라 일을 그르친 것을 가리킨 것 같으니, 그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고 운운하니, 답하기를, “이충원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것은 반드시 주달(奏達)하려고 하였을 뿐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겠는가. 이충원이 비록 권극례가 논란당한 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그의 말도 근거가 없으니, 경등이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대저 말과 말 사이에 생긴 일은 마땅히 생각 밖에 두어 버리고 한바탕 웃고 말아야 하는 것이니,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기다리라.” 하다. 사헌부에서 정철 등을 나오게 하라고 청하다. 황해 감사의 장계에, 해주 지방의 굶주린 백성들이 백토(白土)를 파먹는다고 하다. 전교하기를, “대사헌이 말하기를, ‘황유경(黃有慶)이 병이 중하다.’고 하는데, 반드시 빈말이 아닐 것이니, 석방하여 보내라.” 하다. 정철이 경연 중에서, 허초당(許草堂), 우거인(于居仁) 사건을 아뢰었다고 하다.
6일 (신사). 아침에 안개 끼고 늦게부터 뙤약볕이 매우 심하다. 《계몽》을 읽다. 정철 등이 또 사직하고 물러가 기다리다. 김륵(金玏) 등이 정철 등이 나오기를 청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여 사직하고 물러가 기다리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이충원이 대간을 멸시하였으니 체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사람은 경연의 중신으로서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주달하려는 것이니 교체할 것까지는 없노라.” 하다. 사간원에서 정철 이하 모두가 나오기를 청하다.
7일 (임오). 아침에 안개 끼고 늦게부터 쬐었는데, 아침 저녁에는 매우 서늘하여 가을 날씨 같았다. 《계몽》을 읽다. 공조 참판 정언지(鄭彦智)의 계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신의 이름 역시 곽사원(郭士源)의 추안(推案) 속에 있다고 하는데, 신이 임오년 봄에 좌윤(左尹)에 제수(除授)되었을 때에 거인(居仁)이 그편 곽사원이 위조한 문건이 벌써 패소하여 드러났는데, 형조에서 이것을 은폐하고 상언(上言)하므로 그 사건이 형조에 내려왔으나 그때의 형조 당상관이 그것을 추핵하기를 싫어하여 한성부에 계이(啓移)하였습니다. 그때 판윤은 임열(任說)이고, 우윤은 홍연(洪淵)이고, 색랑(色郞)은 서윤(庶尹) 김행(金行)이었습니다. 신이 홍연ㆍ김행과 말하기를, ‘그 상언(上言)이 단지 은폐한 일만 들었을 뿐 처음부터 고쳐서 처리하라는 말은 없으므로 형조에 환송하여야 한다.’는 것을 임열에게 역설하였더니, 임열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하루는 신이 병이 있어 출사하지 못하고 임열이 혼자 문서를 완성하였는데, 그 이튿날 신이 출사했더니, 김행이 그 계목(啓目)을 가지고 와서 하는 말이 이 공사(公事)는 형조에 이송하는 것이 옳으나, 계목 중에 한짝이 관직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 한 조목이 곤란하니, 지금 곧 판윤에게 통품(通稟)하여 이 한 조목을 삭제하자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형조에 환송하는 것이 그 주지(主旨)이므로 비록 한짝이 관직에 있다는 말이 있을지라도 갑과 을의 승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공사(公事)가 성립되었으니 고칠 것까지는 없다.’고 하였으나, 김행이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신이 마지못해 억지로 순응하여 판윤에게 품의하였더니, 판윤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우선 정지하라.’고 하여 그 뒤에 지연한 것이 거의 한 달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판윤이 말하기를, ‘거인(居仁)이 기한을 넘긴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출송(黜送)하라.’ 운운하기로 신의 뜻에 매우 해괴스럽게 여길 뿐이었는데, 완의(完議)할 적에 낭청(郞廳)에서 그 추안(推案)을 가지고 일제히 와서 말하기를, ‘이 공사는 결단코 송출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하여 역설하고, 홍연(洪淵) 역시 말하기를, ‘그것은 출송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판윤이 말하기를, ‘외부의 말을 들어 볼 것 같으면 거인이 기한을 넘긴 것이 분명하다 하니 출송하는 것이 지당하다. 저들이 어찌 나를 속일 것이냐.’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자기 말을 고집하여 김행ㆍ홍연과 논쟁하기를 분분하게 하기로, 신이 서서히 말하기를, ‘다만 그 일의 옳고 그른 것을 논해야 할 것이지, 논쟁할 필요는 없으니 마땅히 출송하여야 한다는 말은 대단히 곤란하다.’ 하였더니, 임열이 말하기를, ‘다음 자리에서 다시 의논하자.’ 하였습니다. 그 뒤에 외부 논란이 분분하였는데, 홍연은 곧 병으로 교체되었고, 김행은 양주 목사가 되었으나 논핵을 당하였고, 조금 뒤에 판윤도 논핵을 당하였으니, 그 동안 피차간에 서로를 옳으니 그르니 하였기 때문에 모두 다 논박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신의 생질(甥姪) 안만학(安敏學)이 곽사원의 아들의 말로 와서 말하기를, ‘형조에 환송하지 말라.’고 하며 밤이 깊도록 간절하게 졸랐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사오나 어찌 남의 말 때문에 동요할 수 있겠습니까. 정탁(鄭琢)이 판윤이 됨에 이르러 바로 형조에 이송하였으니, 그때 동료들은 모두 논박을 당하였습니다마는, 신만 홀로 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곽사원의 생각에는 형조에 환송한 것을 신이 혼자 주장한 것이라고 하여 원한을 품기를 골수에 사무치게 하였고, 벼슬아치들 사이에 있어서도 혹은 곽사원 편에 서서 신이 고집한다고 하였다 합니다. 대개 곽사원은 본래 한 교활한 모리배이고, 그 아들 곽건(郭健)의 장인인 송한필(宋翰弼)도 실은 똑같이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송한필 형제가 사림(士林)에 이름을 가탁하여 본래부터 벼슬아치 중에 이름 있는 사람들과 사귀고, 혹은 서로 친밀하게 지내므로, 이 때문에 사대부들 중에 그의 간사한 술책에 빠진 사람이 또한 많았고, 곽사원의 송사도 이를 빙자하여 세력을 부려 송사 맡은 관원을 공갈하고 충동하여 옳고 그른 것을 혼란하게 하여 널리 뻗어나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도 이러한 까닭에 연유한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경의 계사(啓辭)를 보고서 내가 그 곡절을 알게 되었노라. 간사한 사람의 말은 믿을 것이 못되니, 경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황공하게 여기지 말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송한필은 서얼(庶孼) 송사련(宋祀連)의 아들 송한필인가?” 하니, 회계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노라.” 하다. 사간원의 계에 답하기를, “이충원(李忠元)의 일을 윤허하노라.” 하다. 이산해(李山海)가 재차 사직하려 하니, 말미를 더하여 주다. 정철(鄭澈)이 처음으로 사직하려 할 때에 사헌부에서 조사하여 대답하기를, “유격(柳激)ㆍ이영(李瑩)이 풍악을 연주하고 술자리를 베풀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윤허하다. 유격은 정철의 구호로 면하게 되었으나 지금에서야 비로소 발론된 것이라 한다. 성절사(聖節使) 송하(宋賀)는 자기 이름이 곽사원의 초사(招辭)에 올랐으므로 북경(北京)에 나아감이 온당치 못하다 하며 소를 올려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다.
8일 (계미). 흐림. 《계몽(啓蒙)》을 읽다. 비망기에, “대사헌 정철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 하여 사직서까지 제출하게 되었으니, 그 의도는 비록 체통을 중히 여긴 것이지만 언어 사이의 일을 가지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재앙이 박두하여 일 많은 이때에 사헌부는 날마다 출사하여 백관을 규찰(糾察)해야 할 것이니, 헌부의 장이 사직하려는 것은 안 될 일이다. 빨리 나와서 직무를 수행함이 좋겠다. 이 뜻을 승정원만은 자세히 알고 있으라.” 하다. 비망기에, “교하(交河)의 논ㆍ방죽 소송 사건에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사이에 관여되었다 하나 그처럼 수효가 많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으며, 재신(宰臣)들까지도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이것은 응당 중간의 헛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규명하고 적발할 때에 상당히 온당치 못함이 있을 듯하니, 이미 지나간 일은 허물치 말고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어떠한고.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승정원의 회계(回啓)에, “비록 그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자도 많은 무고(誣告)를 입었으나, 임금께서 규명하고 적발하라는 말씀까지 계시어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지금 성지(聖旨)를 받자오니 이는 예로써 신하를 대우하는 거룩한 뜻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교(傳敎)한 사연을 사헌부에 전달하여 하지 못하게 하라.” 하다. 전교하기를, “사헌부는 곽사원의 아들 곽건을 형추(刑推)하였느냐?” 하니, 정원에서, “하지 않았습니다.” 하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하문(下問)할 일이 많이 있어도 권극례(權克禮)의 직첩을 빼앗았으므로 인대(引對)하기 어렵다. 이미 벌은 보였고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직첩을 도로 돌려주는 것이 좋겠다.” 하다. 11일에 권극례가 도착하여 대궐에 나아가다.
9일 (갑신). 흐리고 비가 올 듯하다. 《계몽》을 읽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여러 차례 기도를 올렸으나 아직도 비가 내릴 조짐이 없으니 아마도 임금께서 특별히 거행하시는 예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풍우단(風雨壇), 뇌우단(雷雨壇), 사직단(社稷壇) 중에 예조에서 친제(親祭)할 것이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전부터 심열병(心熱病)이 있어 예를 행할 적에 갑자기 발작될까 염려하여 이 때문에 망설이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옛 임금들은 자기 몸으로 희생이 된 자도 있으니 내가 친제하여 지성껏 기도를 올리겠노라.” 하다. 승정원에서 두 번이나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12일에 사직단에서 제를 올리다.
10일 (을유). 흐림. 낮에 가랑비가 내렸는데 먼지도 적시지 못하다. 《계몽》을 읽다. 영상이 친제(親祭)를 정지할 것을 두 번 청하였으나 허락지 않다. 정철이 숙배(肅拜)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대관(臺官)의 직에 있으면서부터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관의 기강의 엄숙하지 못함이 전일보다 더 심하다.’고들 합니다. 이충원(李忠元)의 경박스럽다는 기롱을 하기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신을 지적해서 발언한 것은 아니오나, 일을 논하는 데 성실하지 못하다는 꾸지람은 신이 실로 지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니며, 다른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그른 것도 아니니, 오직 그 사람됨이 어떠하냐와 그 말의 옳고 그름만 볼 뿐이다. 경은 충직하고 청렴한 사람이라 진실로 남의 없는 허물을 함부로 탄핵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고 다시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이충원 역시 우연히 생각을 진술한 데에 불과할 뿐이다. 대저 모든 일에 나는 조신(朝臣)들이 임금 앞에서 논쟁하고 항변해서 말과 얼굴빛에 나타나더라도 옳지 않음이 없지만, 물러나서는 협력해서 화열하게 각기 맡은 직무를 수행하기를 원하니, 조정에서는 내 말을 잊지 말고, 그 복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노라.” 하다. 정철이 재차 아뢰기를, “임금 섬기는 도리를 대강은 알면서 어찌 감히 남의 허물 주워 모으는 일로 마음을 삼겠습니까. 이충원의 말에는 척연(惕然)히 마음이 움직여 여러 번 옳은 말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나의 행위가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함을 두려워한 데 불과하며, 물러나서 스스로 반성하여도 대간이란 자리를 감히 스스로 가벼이 하지 못하는 의리였을 뿐이고, 그가 나와 의논을 달리함을 미워하여 그를 배척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한 마디 말이라도 합하지 않으면 곧 의심하게 되고 의심이 오래되면 곧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 마음이 아주 멀어져 같은 조정에서 적이 되어 국사는 도외시하고, 오직 의논만 비교하여 같은 자는 좋아하고 다른 자는 미워하며, 각기 편벽된 의견만 지켜 돌려가며 서로 배척하는 것이 요즘 조정간의 위태로운 증상입니다. 신이 항상 이를 탄식하고 통한히 여겨 동서의 이쪽 저쪽을 다 깨뜨려 하나로 만들어서 오직 어진 이는 채용하고 어질지 못한 이는 내버려 둘 뿐, 반드시 의논의 차이로 등용하거나 물리치지 않은 뒤에야 거의 일을 그르침이 없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미약한 신의 이 신념은 너무나도 명확하여 매양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를, ‘남과 나 사이를 공평하게 하고, 또 나의 사사로운 의견을 버리려면 어찌 〈서명(西銘)〉을 읽어 옛사람들의 미묘(微妙)한 뜻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더니, 듣는 이 중에는 믿는 이도 있고 믿지 않는 이도 있었습니다만, 드디어 천장(天章 임금의 교지(敎旨))을 내리시어 훈계하여 타이르심이 간절하였습니다. 승정원에 명령하여 등서(謄書)할 것은 대저 이하의 말씀 한 항목이니, 이것을 3정승과 6판서에게 반포해서 각각 선포하도록 하옵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장계의 사연을 보고 경의 어짊을 더욱 깊이 알았다. 왕의 말은 한 번 내리면 누구나 다 그 말을 보게 되므로 반포는 하지 않겠노라.” 하다. 김수(金晬)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것을 계장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애석한 일이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상당한 약을 급속히 내려보내어 그 도의 의원에게 치료하도록 하고, 만일 도의 의원이 치료하지 못하면 서울 의원을 급속히 내려보내라.” 하니, 회계에, “그 도의 의원이 잘 치료하지 못한다 하오니, 서울 의원에게 말을 주어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다. 윤근수(尹根壽)와 신응시(辛應時)가 수망과 부망으로 부제학에 추천이 되었으나, 말망(末望)인 김우옹(金宇顒)이 낙점을 받다. 홍성민(洪聖民)은 병으로 체직되다.
11일 (병술). 햇빛이 불처럼 이글거리다. 《계몽》을 읽다.
12일 (정해). 비가 올 듯하다. 임금께서 사직단에서 친제를 올리다가, 초헌(初獻)을 마친 뒤 기운이 고르지 못하여 곧 소막(小幕)으로 드시다. 《계몽》을 읽다. 김진(金鎭)ㆍ이명(李銘)ㆍ박민헌(朴民獻)ㆍ황삼성(黃三省)ㆍ이명생(李命生) 등을 대신의 진언에 의하여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으니, 전일 박순(朴淳)의 장계를 따른 것이다. 이조 판서가 세 번째 사직하려 하니, 말미를 더 주다. 이달 7일에 보낸 서애(西厓)의 편지를 보니, “노상(盧相 노수신(盧守愼))이 나갈 뜻은 없고, 소명(召命)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을 적마다 번번이 통곡을 한다.” 하다. 사간원의 장계에 의하여 한 궁(宮)의 역사를 아울러 정지하다.
13일 (무자). 흐려 비가 올 듯하기도 하고, 개어 불처럼 이글거리기도 하다. 《계몽》을 읽다. 정윤복(丁胤福)이 좌상의 처소에서 돌아오다. 좌상이 사직하기를, “노병(老病)이 너무 심해서 성대(聖代)에 목숨이나 보전해 살려 하였는데, 지금 불충(不忠)함이 이러하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성상의 비답을 삼가 읽으매, 달리 몸둘 곳은 없지만 제 자신을 돌보기에도 겨를이 없사오니 눈물을 흘리며 죽임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다. 정윤복이 그의 병이 위독하여 나오기 어려운 이유를 아뢰니, 비답에, “계장의 사연은 알았다. 정승의 자리가 너무 오래 비었으므로 마지못해 개차(改差)한다.” 하다.
14일 (기축). 심한 가뭄에 열이 이글거리다. 《계몽》을 읽다.
15일 (경인). 가뭄과 열이 어제와 같고 풀잎이 다 시들다. 서용(敘用)의 명을 받았으니, 한재로 인하여 별세초(別歲抄)를 실시한 때문이다. 일과를 그만두다. 윤수부(尹粹夫)가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다. 혼원(渾元)이 수망으로 추천되었다가 낙점을 받지 못하다. 오늘의 정사(政事)는 노상(盧相)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노상이 15일에 길을 떠난다고 경상 감사가 장계를 올리니, 왕이 명하기를, “체직시키지 말고 내의(內醫 내의원(內醫院)의 의관)를 보내서 호위해 오라.” 하였는데, 승정원의 주달로 사관(史官)을 보내 그것을 유시(諭示)하다.
16일 (신묘). 가물어 열이 대단하다. 일과를 그만두다. 이달 5일에 호인(胡人) 30여 명이 길주(吉州) 서북쪽 보루(堡壘)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뺏고 죽였다 한다.
17일 (임진). 새벽부터 온 하늘에 구름이 덮여 비가 올 듯하다가, 아침이 되어 제법 오더니 늦은 아침에 그쳐 겨우 먼지만을 젖게 할 정도였다. 《계몽》을 읽다. 사헌부에서 또 옥비(玉非)의 사건을 논하니, 윤허하지 않다. 옥비는 경원(慶源) 관비(官婢)인데, 성화(成化) 연간에 한 진주(晉州) 사람이 북도의 변장(邊將)으로 있으면서 경원 기생을 첩으로 들였으니, 그가 곧 옥비이다. 같은 고을의 군사 강필경(姜弼慶)이 경원에 충군(充軍)이 되어 지난 가을에 순찰사의 장계에 고하여 윤승길(尹承吉)을 경차관(敬差官)으로 삼아 옥비의 자손을 조사해 내니 그 수효가 매우 많았다. 사목(事目) 내용에 의하면, 자손으로 남자일 경우에는 그 아내까지, 여자는 그 남편까지 모두 연루하고, 그 붙어사는 자는 그 주인까지 모두 강제로 데려오라고 되어 있었다. 윤승길이 장계를 보내어 아뢰기를, “아내가 남편을 따르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이 아내를 따름은 이치에 매우 어긋나는데, 하물며 그가 정처(正妻)도 아닌 우연히 만나 첩으로 데리고 사는 자에게 같은 경우로 논단(論斷)하는 것은 더욱 부당한 일입니다. 더구나 옥비가 남쪽으로 온 지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그 열읍(列邑)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을 사람들이 그의 근본도 알지 못하는데, 지금 붙어살게 했다는 이유로 논함은 더욱 억울한 일이 됩니다.” 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윤승길이 반쯤 조사해 내다가 어버이 병환으로 중도에서 돌아가고, 성영(成泳)이 후임으로 진천(鎭川)까지 와서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김위(金偉)가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어 전후 조사해 낸 것이 5백여 명인데, 자손을 제외하고 아내가 되어 남편을 따라오기도 하고, 더러는 남편이 되어 아내를 따라오기도 하였으며, 그 아내와 남편은 양민(良民)ㆍ천민(賤民)을 가리지 않고 한 집안 식구로 논단하여 집안 식구들이 남아 나는 사람이 없었으며, 천인들은 붙어살게 했다는 이유를 붙여 그 주인까지 아울러 강제로 데려왔으므로 더러는 한 여자에 두 지아비가 아울러 관여되기도 하고, 또 첩으로 인하여 그 정처(正妻)까지 데려오기도 하여 사족(士族)들도 그 속에 많이 끼어 있게 되었다. 데려올 때 도보나 혹은 말도 타고, 혹은 수레로 혹은 업혀서 오는데,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어지러우니 듣는 이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길에서 쓰러져 죽는 자도 많았다. 식사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기도하기를, “김위(金偉)의 원수를 갚아 주소서.” 하였다. 15일에 사간원에서 장계로 사건을 밝혀 석방해 주고 아울러 김위도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이보다 앞서 우상 정임당(鄭林塘)이 장계를 올리려고 영상에게 말하니, 영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정임당이 연석(筵席)에 들어가 혼자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상은 임금의 의사를 알고 거슬리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고, 정철도 박순과 같았으므로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청의(淸議)가 일어나 정철을 비난하였다. 어제 승지 정사위(鄭士偉)가 또한 이 사건을 계주(啓奏)하였으니, 임금께서 나이 많은 이와 홀어미는 참작하라는 말이 계셨으므로 임금의 의향도 조금 변한 것을 알고 이런 주계를 한 것이다. 그러나 김위에 대해서는 일체 논급(論及)하지 않았으니, 요즘 정철ㆍ박순 등 사류(士類)들의 처사가 이러하다.
18일 (계사). 아침에는 흐리고 비가 뿌리다가, 늦게 햇볕이 쬐고, 밤에는 가을처럼 쌀쌀하다. 《계몽》을 읽다. 이산해가 출사(出仕)하다.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이 돌아오다.
19일 (갑오). 맑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몹시 가물고 아침에는 가을처럼 쌀쌀하다. 《계몽》을 읽다. 김해(金澥)가 집의(執義)로 임명되고, 이경중(李敬中)은 병으로 체직되고, 한옹(韓顒)이 지평(持平)으로 임명되고, 김륵(金玏)은 병으로 배표(拜表)에 참여하지 못하다. 정구(鄭逑)가 동복 현감(同福縣監)이 되다. 처음에는 딴사람과 정신(鄭愼)을 추천하였는데, 임금께서 “정구와 조목(趙穆)은 어째서 추천하지 않는가. 정신은 별로 급급해 하지 않는 듯하다.” 하므로, 다시 추천한 것이다.
20일 (을미). 비는 오지 않고 바람이 몹시 불고 가물다. 바람은 날마다 이렇게 많이 불다. 《계몽》을 읽다.
21일 (병신). 비는 오지 않고 매우 가물다. 《계몽》을 읽다. 이정암(李廷馣)이 장령이 되고, 임추(林樞)가 내자정(內資正)이 되었는데, 이준윤(李準尹)을 또 새로 추천하다. 들으니, “임금께서 정언신을 매우 끔찍이 여겨 또 북방에서 빨리 돌아오게 하였다.”한다.
22일 (정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햇빛이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다. 《계몽》을 읽다. 노상(盧相)을 들어오게 하여 인견(引見)하려 한다고 하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재앙을 삼가 조심할 것을 말하다. 5월 15일에 호적(胡賊)들이 오촌보(吾村堡)에 침입하여 사람과 가축을 노략질해 가다. 왕이 방책을 도순찰사에게 물으니, “변경 방어에 부임한 새 무과 출신을 병사(兵使)로 하여금 쓸 만한 인재인지를 시험해서 성적을 적어 문서로 아뢰도록 하소서.” 하였으니, 바로 순찰사의 장계이다. 이날 동서쪽에서 맑은 하늘에 천둥이 치다.
23일 (무술). 햇빛이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다. 저녁때 비가 뿌리다가 곧 개다. 《계몽》을 읽다.
24일 (기해). 비가 금방 올 듯하더니, 저녁때 많이 내리다가 곧 그치다. 《계몽》을 읽다. 상이 좌상을 인견하였다는 소식을 듣다. 상이 묻기를, “지금 조정 형편이 어떠하며 나의 처리한 일이 어떤가?” 하니, 대답하기를, “상께서 금지시켰는데도 굳이 하였으니 모두 스스로가 취한 것입니다.” 하다. 상이 이르기를, “조신들은 마음을 합하여 서로 협조하고 공경해야 하는데 도리어 치고 받고 하였다. 신하에게 죄주는 것이 어찌 내가 바라는 바이겠는가.” 하고, 또 묻기를, “유성룡(柳成龍)은 어떻게 정치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강직하고 명백하게 합니다.” 하다.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사람은 얻기 쉽지 않으니, 내가 도로 불러 오려 한다.” 하고, 또, “조정의 일을 한결같이 경에게 부탁한다.” 하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정윤복이 대신의 의사는 탐문(探問)하지 않고 자제의 말만 가지고 병세가 위독하여 나오기 어렵다고 진달(陳達)하여 체임시켰다가 되돌려 주는 사례까지 있게 하였으며, 담당 승지로서는 체직하라는 명령이 비록 내려졌더라도 사장(辭狀)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체직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을 주달해야 하는데 주달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아울러 체직하옵소서.” 하니, 비답에, “정윤복은 체직하고 담당 승지의 체직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다. 왕이 명령하기를, “25일에 정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생각을 계진(啓陳)하라.” 하였으니, 승정원에서 자순(咨詢 어떤 일을 물어서 꾀하는 것)을 청했기 때문이다.
25일 (경자). 햇볕이 이글거려 무섭다. 오후에 비가 금방 올 듯하더니, 초저녁에 은하수(銀河水)가 환히 보이고 금성(金星)이 반짝이다. 《계몽》을 읽다. 빈청에 전교하기를, “지금 오랜 가뭄이 이렇게 계속되는데 변고란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른 바가 있는 것이니, 실로 나의 덕이 부족한 탓이다. 나의 잘못한 점과 조정의 잘잘못과 모든 재앙을 완화시키고 태평세대를 이룰 만한 책략에 대해 경들은 각기 생각을 진달하고 조금도 숨기지 말라.” 하다. 빈청의 계사 및 정철의 차자를 주달하니, 전교하기를, “헌의(獻議)한 가운데 행할 만한 조목은 승정원이 살펴서 그대로 행할 것이다. 고인들은 사면(赦免)하는 것으로 경계를 삼았으나 석방하는 것까지는 좀 어려울 듯하므로 오직 형정(刑政)을 공평하게 하는 데 달렸을 뿐이다. 억울한 옥사가 화기를 상하면 재앙을 부르기에 충분한 것으로, 상홍양(桑弘羊)을 삶지 않았는데도 가물게 되었으니, 진실로 간악한 자를 가벼이 용서하여 하늘의 인자한 꾸중으로 소인들의 스스로 다행히 여기는 바탕이 되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 대사헌의 말을 들어 보니, 극히 해괴하다. 다만 이 사람은 본디 강직하고 충성스럽기로 이름이 났기 때문에 내가 우선 너그러이 용서하고 책망하지 않는 것이니 잘 알라.” 하다. 유훈(柳塤)이 아뢰기를, “조정이 화목해야 합니다.” 하고, 이산해가 올린 차자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 박순이 아뢰기를, “어진 이를 선발하고 능력 있는 이를 임용하며,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하고, 유전(柳㙉)이 아뢰기를, “조정을 진정시켜 의심을 없애서 인심이 화목하여 억울한 사람을 신원하는 데 힘쓰게 하며, 멀리 귀양가 있는 자까지도 죄의 경중을 살펴서 특별히 석방해 주는 은전(恩典)을 베푸소서.” 하고, 이우직(李友直)이 아뢰기를, “현량(賢良)한 이를 등용하고 민폐를 제거하며, 죄수들 중에 천재(天災)로 인하여 석방을 논의하는 것도 옛날 사례가 있습니다.” 하고, 임열(任說)이 아뢰기를, “궁궐의 금령을 엄히 하고 임용을 신중히 하며 민폐를 제거하고 나쁜 정치를 고치며 억울한 옥사를 심리(審理)하소서.” 하고, 정유길(鄭惟吉)이 아뢰기를,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고, 쌀을 운반할 때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으니, 잘 돌보아 주는 정치로 슬기로운 인재를 널리 부르소서.” 하고, 심수경(沈守慶)이 아뢰기를, “현재 추국(推鞫)중에 있는 사람이나 이미 판결이 내려 귀양가 있는 사람이라도 대신들과 의논하여 고려해서 처리하고, 아주 나쁜 관리로 변방에 귀양간 사람도 자세히 조사하여 심리하게 하옵소서.” 하고, 이인(李遴)이 아뢰기를, “성상의 덕을 밝히시어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실추된 것을 정비하고 민폐를 제거하며 억울함을 풀어 주소서.” 하고, 유홍(兪泓)이 아뢰기를, “어진 인재로 등용할 만한 자는 드러내며 죄수로 놓아줄 만한 자는 석방해 주옵소서.” 하고, 강섬(姜暹)이 아뢰기를, “변방에 귀양간 사람은 가을이 된 뒤에 들여 보내옵소서.” 하고, 안자유(安自裕)가 아뢰기를, “천심(天心)에 성실하게 응한다면 하늘이 용납하지 않으리오.” 하고, 정탁(鄭琢)이 아뢰기를, “억울한 옥을 심리하소서.” 하다. 그리고 여기 나오지 못한 사람은 집에서 헌의하도록 하였다. 송순(宋淳)이 정언(正言)이 되고 임국로(任國老)가 승지가 되고, 윤희길(尹希吉)이 사성(司成)이 되었는데, 이경중과 윤희길이 추천되었다. 이괵(李𥕏)이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서 두 번 사직하여 곧 체직되다. 정철의 차자는 곧 미숙(美叔 허봉(許篈)의 자) 등 세 사람을 도중에 양이(量移 가까운 곳에 옳기는 것)하자는 것이다.
26일 (신축). 뙤약볕이 매우 이글거리다. 유시(酉時)경에 비가 뿌리다가 곧 그치다. 일과를 그만두다. 정철이 피혐하니, 비답에, “이들이 조정을 어지럽힌 죄는 법으로는 용서할 수 없으나, 내가 즉시 궁문 밖에서 주륙(誅戮)을 행하지 않고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어 편히 누워 쉬게 하고, 또 그 무리도 다스리지 않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용서해 주어 개과(改過)하게 하고자 한 바람에 그 못나게시리 처단하지 못한 것이 하늘의 꾸지람을 불렀는데, 경은 도리어 이것을 말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살려는 생각을 하게 하여 장차 나라꼴이 될 수 없게 하니, 이것이 내가 놀랍게 여기는 일이다. 이 말이 다행히도 경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가 우선 너그러이 용서하지만, 불행하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내가 반드시 무슨 조처가 있었을 것이다. 염려되는 것은 이미 불러 물을 적에 숨기지 못하게 하고서 만일 벌을 시행한다면 사람들이 아마, ‘직언(直言)을 구하고는 도리어 처벌(處罰)하는구나.’할 것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다. 정철이 재차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아무리 변변찮으나 나라에서 받은 두터운 은혜가 이처럼 지극하온데 어찌 감히 있는 죄를 없다고 하겠습니까. 당초 탑전에서 변명하여 대답할 적에 신도 그 사람에게 죄가 있음을 모른 것은 아니옵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기다리라.” 하다. 사헌부에서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지난해 9월, 미숙(美叔) 등이 죄를 받던 날에 정철이 탑전에 들어가서 홀로 처벌해야 한다는 뜻을 주달하고, 그 뒤에 사람들을 향해 변명하기를, “내 의사는 이렇지 않았는데 주서(注書)가 기록을 잘못한 때문이다. 곧 최염(崔濂)이 주서인데, 그 말을 고쳐 기록하게 하려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하다. 정언신이 아뢰기를, “인심을 화목하게 하여 조정을 안정시키며, 부역을 가벼이 하여 백성의 원망을 가라앉히옵소서.” 하고, 변협(邊協)이 아뢰기를, “억울한 옥사를 철저히 심리하소서.” 하다. 정종영(鄭宗榮)은 아프다고 핑계 대다. 홍섬(洪暹)이 아뢰기를, “억울한 사람을 신원하고 백성들의 걱정을 염려하며 부역을 덜어 주옵소서.” 하고, 곽흘(郭屹)이 아뢰기를, “옥사를 공평하게 하고 부역을 가벼이 하옵소서.” 하고, 원혼(元混)이 아뢰기를, “군현(郡縣)을 합병(合倂)하는 것은 급선무가 아닙니다. 영남의 막강한 부호들이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으니 어찌 원망을 품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양원(李陽元)이 아뢰기를, “현량한 사람을 등용하고 의심을 시원하게 풀어 주며, 군사를 징발하거나 양식을 운반할 적에는 한층 더 자세히 살펴서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고, 윤의중(尹毅中)이 아뢰기를, “인심을 화목하게 하옵소서.” 하고, 김귀영(金貴榮)이 아뢰기를, “옥비(玉非)를 붙여살게 한 사람은 이미 다시 심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읍을 합치고 귀양보내는 일은 또한 후일을 기다려 처리하옵소서.” 하고, 또,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원망과 울분에서 많이 나오고, 원망과 울분이 생기는 것은 구속되어 고생하는 사람에게 많이 있다.” 하고 또, “요즘 무식한 □□□ 인하여 천위(天威 임금의 성냄)를 번거롭게 하자 혹 그들을 임금도 모르는 무도한 자로 지목하고, 혹은 임금을 기망(欺罔)한다 하여 바로 추국하라는 전지(傳旨)를 내리시니, 유사(有司)들이 받들어 행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참형(斬刑)에 처하고 있습니다.” 하다. 이산해는 사설(辭說)을 많이 늘어놓긴 하였으나 모두 범범한 말들이다. 노상(盧相)은 형벌과 부역 등에 관한 말을 대충 말하다. 어제 이산해가 올린 차자를 보고서 반드시 이 계사가 너무 번잡함을 지적했기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을 알았다. 정철의 차자를 보니, 먼저 임금의 덕을 말하고, 다음에는 정부의 할 일과 군ㆍ현을 합치고 공안(貢案)을 고치는 등의 일을 빨리 거행할 것을 말하고, 끝에는 귀양간 사람들의 양이(量移)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다만 “반드시 죽게 하면 인심이 불안해집니다.” 하고, 또, “전 승지가 오래도록 파면된 대로 두는 것이 마치 주장하는 이가 있는 것같이 하여 또한 미안하옵니다.” 하다.
27일 (임인). 뙤약볕이 내리쬐고 열이 매우 이글거리다. 《계몽》을 읽다. 이준민(李俊民)의 계사를 보니, 사(邪)와 정(正)을 구분하라는 말이 있고, 다른 재상들의 계사도 대개 서로 비슷하다.
28일 (계묘). 뙤약볕이 쬐고 열이 이글거리다. 일과를 그만두다. 왕이 명하여 옥비의 자손을 붙여살게 한 사람들을 석방하고, 그들을 북도에 들어가서 살지 못하도록 하다. 수일 전에 형조에서 정상을 참작하고 분간해서 문서로 상주하니, 이렇게 하면 석방되는 자가 너무 많아진다 하여 엄중한 말로 다시 교명을 내렸다가 지금에야 특명이 내린 것이다.
29일 (갑진). 흐림. 비가 뿌리다가 곧 개다. 일과를 그만두다.
30일 (을사). 흐림. 낮부터 흐리기 시작하여 새벽까지 이르다.
6월 1일 (병오).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다.
2일 (정미). 비가 억수로 쏟아지다. 혼원(渾元)이 연안 부사에 수망으로 추천이 되었다가 낙점되지 못하고, 권문해(權文海)가 그 자리에 임명되다. 평안도ㆍ전라도 등지에서 큰 것은 주먹만하고, 중간 것은 거위 알만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날짐승과 길짐승이 맞아 죽고 풀과 곡식이 눌려 문드러졌다고 한다. 함경 감사의 장계를 비변사에 내리고 이르기를, “곡식을 바칠 사람이 없는 돈으로 북도의 쌀을 다 사들이다가 간악한 소인들에게 모함을 당하게 되었으니, 양민(良民)이 된 사람의 호적을 적발해서 지워 버리라.” 하다. 성혼(成渾)이 상소하여 분황(焚黃 벼슬에 임명되고서 받은 관고(官告)의 부본을 쓴 누런 종이를 부모의 무덤에서 태우는 일)할 것을 청하니, 왕이 분황한다는 데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의사로 승정원에 하문하니, 승정원에서는, “서늘한 가을을 기다려 다녀오게 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라 하다. 중이(仲耳)가 일찍이 말하기를, “공저(公著)가 호원(浩原)을 세 번이나 찾아가 보았는데, 호원이 말하기를, ‘그대가 우경선(禹景善)과 날마다 상종하면서 나를 자주 찾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하니, 공저의 대답이, ‘그대를 찾은 것은 지금 세 번째인데 우경선은 다만 한 번 서로 보았을 뿐이다.’ 했다.” 하니, 가소롭다.
3일 (무신). 느지막에 맑게 갰다가 미시(未時)쯤에 다시 비가 내리다.
4일 (기유). 가랑비가 뿌리다가 곧 개다. 인동(仁同) 현감 홍사익(洪士益)의 부음(訃音)을 듣다. 김숙부(金肅夫)가 사직소를 올리니, 답하기를, “김우옹(金宇顒)의 사람됨을 내가 알고 있은 지 오래다. 그는 천성이 고집스럽고 언론이 괴벽스럽다. 대저 썩은 선비의 말은 나무랄 것조차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고 본직(本職)만 체차하라.” 하다. 이산해가 병으로 상소하여 해면해 주기를 원하니, 비답에, “경은 수십일 동안 사진(仕進)하지 않아도 좋으니 마음놓고 조리하라.” 하고, 이어서 의원을 보내 문병하다.
5일 (경술). 맑다. 숙부(肅夫)의 상소를 보니, 맨 먼저 군대가 변방에서 지쳐 경성과 지방이 시끄럽고, 백성들은 수심에 젖고 군사는 원망하여 산에 도적이 우글거린다는 등의 실정을 말하고, 한재(旱災)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아마도 묘당(廟堂)에서 규획(規劃)하는 일이 혹 잘못된 방법이 있어 백성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고, 하늘의 뜻에 합당하지 않게 한 소치인가 하옵니다.” 하고, 신하의 진언할 길을 열어 주고 임금의 듣고 보는 것을 넓히는 것이 좋다는 데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요순(堯舜)처럼 밝은 덕이 있으나 여러 신하들이 공경하고 화합하는 아름다움이 없어서 각기 자기 의견만 옳게 여겨 갈수록 서로 헐뜯고 원망하며, 조정에서 처리한 것도 이미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장차 그 설을 주장하여 이름을 ‘국시(國是)’라 하면서 기세를 펴서 정대한 사람들을 억누르며, 천하의 공의(公議)를 폐하고 자기 한 사람의 사견(私見)에만 맡기려 함이 있을 것입니다. 임금의 귀가 한 번 막히매 민심은 날로 답답해지며, 붙어 따르는 자는 날로 나아가고 의논이 다른 자는 더욱 멀어져 사람마다 겁에 질려 감히 한 마디 말도 서로 반대할 수 없으니, 신은 생각하건대, 아마도 이것은 태평세대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사(子思)가 이른바, ‘경대부(卿大夫)가 말을 하고서 스스로 자기 말이 옳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한 말이 불행히도 거의 가깝게 되었습니다. 진관(陣瓘)이 장돈(章惇)에게 말하기를, ‘배[舟]의 형세를 바로잡으려 하면서 왼쪽 물건을 오른쪽으로 옮겨 놓는다면 그 기울어짐은 매한가지인 것이다. 과연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오늘날의 형세가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지극히 어지시어 매양 여러 신하들에게 경계하기를, ‘협력해서 화열하게 각기 맡은 직무를 수행하라.’ 말씀하셨으며, 재상(宰相)도 동ㆍ서를 깨트려 이쪽 저쪽을 하나로 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 말을 들어 보면 번지르르 하지만, 행동은 모순 투성이라, 전하께서 어찌 그가 같은 패를 배치해 두고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해서 기염(氣焰)의 성함이 이미 가까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아시겠습니까. 고인들이 말하기를, ‘잘 다스려진 세대의 기상은 관대하고자 한다.’ 하였는데, 지금 조정의 논의는 날로 엄하되 간악하고 아첨하는 무리는 날로 붙고, 참소하는 말이 서로 오가며 고자질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사류(士類)로 이름이 조금 난 이는 모두 간당(奸黨)으로 그를 지목하니, 사람마다 위태롭고 두려워서 목숨도 보전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러한 풍색(風色)을 살피시고도 과연 이것이 관대의 기상이 되겠습니까.” 하다. 영상이 논의하기를, “정릉(貞陵)을 함경도에 있는 여러 능의 예에 따라 참봉(參奉)을 차출하여 임명하소서.” 하고, 좌ㆍ우상은, “이미 함경도에 있는 여러 능과는 차이가 있으니 참봉을 차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왕은, “차출하지 말라.” 하다. 예조에서 품의하기를, “노산(魯山)ㆍ연산(燕山)의 후사(後嗣)를 세우라는 명령은 이미 내렸습니다만, 어떤 사람으로 후사를 세워야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후사를 세우라는 명이 없었는데 무슨 말이냐?” 하니, 예조가 회계(回啓)하여 아뢰기를, “조헌(趙憲)의 상소로 인하여 본조에서는 후사를 세울 만한 사람의 명단을 덧붙여서 상주하였더니, ‘계(啓)’ 자를 찍어서 내려보냈으므로 신들은 후사를 세우라는 명이 계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다.
6일 (신해). 비가 오락가락하다가 밤에 조금 많이 내리다. 내가 수망으로 연안 부사에 낙점되고, 이현(而見)이 부제학에 임명되고, 특별 명령이양중(李養中)이 장령이 되고, 윤희길(尹希吉)이 헌납이 되다. 노산ㆍ연산의 후사 세우는 일은 하지 말라 하다. 정철이 숙부(肅夫)의 상소가 모두 자기를 지적한 것이라 하여 사직하고 숙부를 지극히 찬양하면서 또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을 널리 채택하여 그 죄로써 그를 처벌하옵소서.” 하였으니, 이는 자기 자신을 가리킨 것이다.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다.
7일 (임자). 새벽부터 비바람이 크게 일어 밤새도록 몰아치다. 정철이 또 사직하니, 답하기를, “경은 별로 잘못한 바가 없으니, 번거롭게 와서 사직할 것이 없다. 사직서를 제출하지 말고 부지런히 직무를 수행하라.” 하다.
8일 (계축).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다.
9일 (갑인). 흐렸다 개었다 하다. 초저녁에 달이 나왔다가 밤중에 비가 내리다.
10일 (을묘). 새벽에 비가 뿌리다가 곧 개다. 사은(謝恩)하다. 수부(粹夫)가 어제 서울에 들어왔는데, 그 또한 와서 사은하다. 공저(公著)ㆍ허명(許銘)ㆍ여우(汝友) 등도 사은하고, 신집(申集)도 와서 대화를 나누다. 공저가 재차 말한 것도 나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여우가 말하기를, “증거 댈 만한 일이 있으니 밝히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하여, 서로 껄껄 크게 웃다. 사은을 마친 뒤 돌아오다.
11일 (병진). 맑음.
12일 (정사). 맑음. 사간원의 차자를 보니, 김우옹의 상소가 그르다는 것을 극구 논하였는데 그 사연이 지극히 참혹하다. 그 상소는 신군망(辛君望)이 지은 것이다. 답하기를, “논한 바는 십분 다 옳다. 김우옹은 진실로 망언(妄言)을 한 것이니 책망할 것도 없다.” 하다.
13일 (무오). 소나기가 억수로 퍼붓다가 늦게야 개다. 서경(署經)을 마치다.
14일 (기미). 흐리고 비가 오다.
15일 (경신). 맑음.
16일 (신유). 비. 혼원(渾元)이 성주(星州) 목사가 되다.
17일 (임술). 맑음.
18일 (계해). 맑음.
19일 (갑자). 맑음. 대궐에 나아가 하직하고, 승지 박경진(朴景進)을 만나다. 어두워서 벽제(碧蹄)에서 자다.
20일 (을축). 맑음. 마산(馬山)에서 쉬고 동파(東坡)에서 자다.
21일 (병인). 개었다 비 오다 하다. 초현촌(招賢村)에서 쉬고, 송도(松都) 왕학령(王鶴齡)의 집에서 자다. 목청 참봉(穆淸參奉) 권형(權詗)이 술병을 들고 찾아오다.
22일 (정묘). 맑음. 도사(都事) 한종주(韓宗冑)가 찾아오다. 벽란(碧瀾)을 건너 금곡역(金谷驛)에서 쉬다. 배천(白川) 군수 기대염(奇大冉)국화(國和) 이 와서 모여 매우 정다웠다. 개성부 천배성(天拜城)에서 자다. 군위(軍威) 현감 권응시(權應時)가 양사(兩司)의 계로 인하여 잡혀 와서 국문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다. 지례(知禮) 김자첨(金子瞻)이 차원(差員)으로 군위에 도착하여 술자리에서 그 자리와 기물들이 매우 화려함을 보고 장난으로 싸서 자기 고을로 보내고 이어 안동으로 떠나다. 권응시가 취중에 글을 지어 안동에 통고하기를, “도적은 얼굴을 묶고 수염이 없으며, 보통 체격에 나이 40세쯤 되는 사람으로 관청의 물품을 훔쳐 갔는데 관청의 힘이 약해서 잡지 못하였으니, 거기 도착하는 즉시 잡으시오.” 하였다 한다. 유사영(兪思永)이 그 말을 사실로 여겨 즉시 사방 이웃 고을로 통보하고 서로서로 통보하여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감사의 장계에, “열읍(列邑)이 진동하여 엄한 경비까지 하였습니다.” 하다. 대사헌 정철이 잡아다 국문하기를 청하려 하니 공호(公浩)가 그를 극구 말렸다. 다음날 19일에 양사에서 아울러 발론하였는데, 사간원에서는 죄가 군율(軍律)을 범하였다는 말까지 하였다. 들으니, 임금이 다시 정전(正殿)으로 돌아오셨다 하니, 3정승이 계청한 때문이다.
23일 (무진). 맑음. 관청에 올라 여러 아전들의 예알(禮謁)을 받다. 소첩(訴牒)이 60여 권이나 쌓여 있다. 아전놈들은 아주 미련하고 백성들도 사나워서 포시(晡時 지금의 3시~5시까지다.)에 마치다. 광문(廣文)은 곧 선양중(宣養中)이다.
24일 (기사). 맑음. 아헌(衙軒)에 나가 앉다. 소첩이 매우 간단하다. 번고(反庫 창고의 물건을 뒤적거려 조사하는 것)한 것을 보고하기를 청하다.
25일 (경오). 맑음. 평원당(平遠堂)에 나가다. 소첩이 어제보다는 조금 많다.
26일 (신미). 맑고 열이 이글거리다. 아헌에 나가다. 소첩이 간단하다.
27일 (임신). 맑고 열이 이글거리다. 서풍(西風)이 밤새도록 크게 불다. 일찍 사창(司倉)에 나가 메밀과 입으로 씹어먹을 만한 쌀을 갈라서 놓다. 공망(公望)이 온다는 선문(先文) 기별을 듣다. 관청에 옮겨 좌기(坐起 관청의 우두머리가 사진(仕進)하여 일을 보는 것)하다. 소첩이 조금 복잡하다.
28일 (계유). 비가 오지 않다. 밤에 동풍(東風)이 크게 불다. 공망이 오다. 내가 병으로 휴가를 받아 나가지 못했는데, 공망이 바로 아헌(衙軒)으로 오다. 밤이 깊도록 서로 대화를 나누다.
29일 (갑술). 맑음. 동풍이 계속 불고 초저녁에 비가 쏟아지다가 곧 그치고, 천둥과 번개가 치다. 공망이 남대지(南大池)에 갔다 돌아오다. 평산(平山) 부사 박정립(朴挺立)이 번고 차원(反庫差員)의 임무를 띠고 도착하다.
7월 1일 (을해). 맑고 열이 이글거리다. 평산 부사와 사창에 좌기하여 번고하고, 관청으로 옮겨 좌기하다. 평산 부사가 병이 나서 갑자기 돌아가다. 공망과 얘기하다.
2일 (병자). 비가 두 차례 쏟아지다. 공망과 작별하고 관청에 좌기하다. 번고하기 위해 사창으로 옮겨 좌기하다. 소첩이 조금 복잡하다.
3일 (정축). 맑다가 밤중에 거센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다. 관청에 나가서 번고하다.
4일 (무인). 비. 아헌에 좌기하다.
5일 (기묘). 아헌에 좌기하다. 서울에서 온 편지를 받아 보고 공호(公浩)가 장령에서 체직되었다는 소식을 듣다. 지난번에 형조에서 거인(居仁)과 곽사원(郭士源) 등의 죄를 도장(徒杖)의 율에 비추어 처단한 것을 왕명으로 온 집안을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율을 적용하도록 고치다. 사헌부에서 구종(具悰)ㆍ곽건(郭健) 등도 거인 등과 같이 처벌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그때 정철이 세 차례나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나 가부를 얻지 못하자 다음날 곧 나왔는데, 공호의 무리들과 의론이 서로 같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공호, 집의(執義) 이유인(李裕仁), 장령 이충원(李忠元)이다. 세 사람이 사피하여 아뢰기를, “거인(居仁)은 구종(具悰)이 없으면 다만 하나의 도적 종놈입니다. 어찌 명사(名士)들에게 붙어서 위세를 부릴 계획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곽사원은 늙은 간인(奸人)으로 곽건의 인척으로 도와서 강적을 만들게 되었으며, 곽사원은 만일 곽건을 자식으로 두지 않았다면 다만 일개 시골의 교활한 사람이었을 뿐이니, 어찌 조신들에게 붙어서 현란시키는 술책을 부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비답에, “곽건을 처벌하지 않고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 사직하지 말라.” 하다. 정철이 사직을 청하며, “어제 논열(論列)하려 하였사오나 죄를 기다리고 있는 몸으로 문득 다른 일을 논한다는 것이 지극히 황공하므로 입을 꾹 다물고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이미 서로 용납되지 않으니 직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모두 물러나 기다리다. 지평 한옹(韓顒)이 양사가 다 잘못이 없다고 나오기를 청하다. 이양중 등이 또 피혐하여 물러나 기다리다. 정철의 사직소의 대개에 , “이른바, ‘세력 있는 사람을 끌어잡았다.’는 것은 곽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장인 송한필(宋翰弼)을 가리킵니다. 송한필이 일찍이 일대(一代) 명사들과 교유하였는데, 신과도 먼 친척이 되어 서로 안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저번에 정언지(鄭彦智)의 이른바, ‘본래 조신(朝臣)의 이름난 사람들과 사귀었으므로 이들에게 의지해서 세력을 부린다면 아마 송사를 맡은 관리들을 움직일 것이다.‘한 것이 이것입니다. 지금 이유인 등이 정언지의 의논을 이어받아서 송한필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곽건에게 분풀이하고, 겸하여 조신들이 간인을 도와 세력을 만들었다고 의심하니, 모든 사대부로서 송한필과 아는 자는 어찌 다 무식해서 도리에 맞지 않는 것만 서로 구하겠습니까.” 하고, 물러나서 기다리다. 한옹도 물러나서 기다리다. 사간원에서, “계를 올려 이유인 이하 몇몇은 체직하고 정철은 출사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곽사원이 곽건이 아니었다면 그가 어찌 세력을 의지해서 이처럼 간사한 술책을 부릴 수 있었겠는가. 양쪽이 매한가지이니 처벌하는 것이 옳지만, 대간이 논박을 받아 공무를 집행할 수 없으므로 아뢴 대로 하라.” 하다. 정철이 사직을 청하며 아뢰기를, “삼가 비답을 살펴보오니, 시종 곽건이 세력이 있었다 하시면서 반드시 처벌하려 하시니, 이 때문에 이유인 등의 논의는 옳은 것이 되고 신이 말한 바는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신의 직을 빨리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람의 보는 바란 전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경의 뜻이 비록 이러하나 뭐 나쁠 것이 있느냐. 사직하지 말고 직무에 나아가라.” 하다. 김해(金澥)는 집의가 되고, 이홍인(李弘仁)ㆍ유몽염(柳夢冉)은 장령이 되고, 윤정(尹渟)은 지평이 되다. 심희수(沈喜壽)가 지평에 추천되었는데, 비망기를 다시 내려보내면서 이르기를, “이렇게 경망한 사람을 어찌 대간의 물망에 올릴 수 있겠는가. 추천하지 말라.” 하다. 전월 26일에 정철이 숙배(肅拜)하고 상소하니, 비답에, “김우옹의 말은 한바탕 웃음거리도 되지 못함은 다 내가 아는 바다. 서로 따질 필요도 없이 직무에만 충실하라.” 하다.
6일 (경진). 맑음. 사창에 나가 보리를 받아들이다.
7일 (신사). 맑고 열이 이글거리다. 관청에 나가 번고(反庫)하다. 소첩이 간단한 것 같다.
8일 (임오). 맑음. 사창에 나갔다가 관청으로 옮겨 좌기(坐起)하다. 번고를 마치다.
9일 (계미). 맑음. 관청에 나가서 팔 쌀을 따로 갈라 놓다. 동년(同年) 변양우(邊良遇)가 들르다.
10일 (갑신). 비. 아헌에 좌기(坐起)하다. 정철이 곽건의 일로 사람들의 말이 있다 하여 사직하니, 비답에 “모든 일을 처리할 때에 한때 임금과 신하의 의견이 다 같을 수 없는 것은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반드시 그렇게 되는 바이다. 나의 의견이 비록 경의 의견과는 같지 않지만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다. 대사간 신응시(辛應時) 등이 또 정철을 처리하는 데에 사람들의 말이 있다 하여 사직하고 모두 물러가서 명을 기다리다. 집의 김해가 양사의 출사를 청하다. 권응시는 곤장 1백 대를 치고 직첩을 다 빼앗았다.
11일 (을유). 맑음. 관청에 나가다. 소첩이 매우 복잡하다. 저보(邸報)를 보니, 정철이 임금께 올릴 회계(回啓)를 지체한 죄로써 체직되고, 홍성민(洪聖民)이 대사헌이 되고, 성영(成泳)이 집의가 되고, 유몽염(柳夢冉)이 장령이 되었다 한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곽건의 죄를 다스리지 마옵소서.” 하니, 비답에, “아마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하다. 사간원이 재차 아뢰니, 비답에, “이러한 논의는 아뢰지 말라.” 하다. 8일에 성호원(成浩源)이 분황(焚黃)하기 위해 하직하고 귀향하다. 대사헌에 추천이 되다.
12일 (병술). 맑음. 관청에 나가다.
13일 (정해). 맑음. 관청에 나가다.
14일 (무자). 큰비가 밤새도록 내리고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리다. 아헌(衙軒)에 좌기(坐起)하다. 저보를 보니, 다음과 같은 것들이 씌어져 있었다. 이현(而見)이 10일에 서울로 들어오니, 전교하기를, “산 넘고 물 건너 애써 부름에 나와 주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다. 이산해가 사직하면서 차자를 올리니,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며 윤허하지 않다. 병조 판서 이준민(李俊民)이 사직서를 제출하니, 전교하기를, “변방의 일이 매우 어려운 때에는 사마장(司馬長)이 그 직임에서 오래 근무해야 하므로 관례대로 사면할 수 없다. 하물며 이준민은 점잖은 사람이고, 변방의 일에 환히 통달하였으니, 더욱 경솔히 개차할 수 없다. 곧 조리해서 직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만일 두 번 다시 사직서를 제출한다면 계(啓) 올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말라.” 하다. 사간원에서 곽건의 사건을 논하니, 답하기를, “진실로 그 아비의 죄로 무죄한 그 자식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곽건도 제 자신이 범한 실제의 죄가 있다. 곽건은 어떤 사람이길래 어찌 나라의 법에서 함부로 날뛸 수 있겠는가. 곽사원이 이 사람과 함께 그 악을 저지름이 없었더라면 그는 다만 하나의 늙은 간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거인(居仁)과 함께 나란히 겨룰 수 있었겠는가. 그가 거인과 수십 년 동안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우열을 다투어서 유사(有司)들이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면 곧 해를 입었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이 한 가지 사건은 민간인들끼리 하는 소송이 아니라, 조신들을 거짓으로 끌어들여 함정에 빠트리고, 수치가 조정에까지 미쳐 더러운 욕을 보였으니, 그가 선비의 풍기(風氣)를 해치고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힌 죄가 크다. 사리에 비추어 이 무리들을 엄중히 다스려 불의(不義)에 대한 경계를 삼아야 한다.” 하고, 윤허하지 않다. 이어 비망기에 이르기를, “서얼 송한필(宋翰弼)이 명사들과 결탁하여 삼굴(三窟)을 만들어 그의 사위 곽건과 함께 곽사원을 모주(謀主)로 삼고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송사를 좋아하였으니, 곽사원의 간사하고 비밀스러운 계책이 모두 그가 계획해서 지도한 것 아님이 없으며, 시비를 어지럽히고 교묘한 수단으로 속이며, 조신들을 모함하고 소송관을 협박하여 필경에는 조정을 욕보이게 하였으니, 그 흉악하고 음흉한 행동이 지극히 해괴하다. 이제 원흉들이 차례차례 처벌을 받았는데 송한필만이 독한 뱀과 물여우 같은 간악한 괴수로서 법망(法網)에서 빠졌으니, 나라의 형정(刑政)이 땅에 떨어져 장차 나라 꼴이 아니게 되었다. 잡아 가두고 엄중히 심문하여 정죄(定罪)하라.” 하다. 신응시 등이 3굴이란 말 때문에 피혐하고, 이어 아뢰기를, “치죄하지 마시옵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다. 정철의 사직소에 대강 아뢰기를, “요즘은 송한필과 서로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옳지 못한 일에는 비록 임금의 명령일지라도 받지 않음이 있는데, 하물며 소송관에게 청탁하였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다.
15일 (기축). 흐림. 사창에 나갔다가 관청으로 옮겨 좌기하다.
16일 (경인). 새벽부터 비가 내려 진시(辰時)에 개다. 관청에 좌기하다. 소첩이 아주 적다.
17일 (신묘). 맑음. 사창에 좌기하다. 소첩이 매우 간단하다.
18일 (임진). 흐리고 오후에 비가 뿌리다가 곧 개다. 관청에 좌기하다. 소송이 아주 적다.
19일 (계사). 맑음. 관청에 좌기하다. 소송이 매우 간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