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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주희(주자)가 학문으로 이룩하여 체계를 세운 유교 철학입니다.
그러므로 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도 하며, 또한 도학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나라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유학의 주류를 이루어서 모든 분야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인륜 도덕을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펴서, 이상 국가를 만듭시다!"
학자들은 이것을 성리학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리학자로서 관리가 된 사람들을 '관학파’라 하였으며, 정도전, 권근, 신숙주, 양성지 등이
관학파의 시초 인물들입니다. 관학파 성리학자들은 학문을 연구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정치에 응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시골이나 고향에 묻혀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몰두한 성리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사림파’ 학자라고 합니다. 사림파 학자들의 대부분은 고려 말의 대학자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리학의 꽃은 명종과 선조 때에 활짝 피어, 그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이황, 이이, 서경덕, 기대승, 이언적, 성혼, 조식, 장현광, 김인후 등이 그 주역을 맡았던
학자들이었습니다.
특히,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의 양대 봉우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학문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각각 독특한 학문으로 성리학을 발전시켜, 그 영향이
중국과 일본에까지 미쳤습니다.
이황은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경북 안동군 도산면 온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이황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슴깊이 새기며 자랐습니다.
"글공부보다도, 몸가짐이 바르고 행실을 삼가해야 훌륭한 사람 이 된다.”
"어머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진사 이식의 8남매 중 막내아들인 이황은 어른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 나는 나 자신이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황의 호는 퇴계입니다. 때문에 이퇴계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이황은 34살의 나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 길에 나아갔습니다. 암행어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등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이황의
마음은 학문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퇴계 이황은 벼슬자리에 있을 때, 온갖 부정을 없애려고 노력했으며 일곱 번이나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습니다.
이황은 도산 서원을 만들어 제자들을 길러 내는 데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김성일, 유성룡을
비롯한 인재들을 길러 낸 이황은 영남학파의 스승으로 받들어졌습니다.
퇴계 이황이 선조 3년인 1570 년에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영의정 벼슬을 추증하고,
문순이라는 시호까지 내려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서원에서
제향을 올렸습니다.
이황의 학문은 일본에까지 건너가 일본 성리학 발달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 유학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이이는 중종 31년인 1536년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 있는
오죽헌에서 태어났습니다.
신사임당은 이이를 가졌을 때 용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낳을 때까지 몸가짐과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을 매우 조심하였습니다. 더러운 일과 악한 일 등은
보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이이가 태어나자, 신사임당은 이이를 직접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이이를 보고 신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이는 한 번 가르쳐 주면 잊는 법이 없었고,
시도 잘 지었습니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3살밖에 안 된 이이를 데리고 놀다가 석류나무를 가리켰습니다.
“너 저 나무를 보고 글을 지을 수 있겠니?"
“예! '황금 낭리 쇄홍주'."
이이는 옛 시에 나오는 대로 말했습니다. 그것은 석류를 가리켜 '황금 주머니 속에 부서진
빨간 구슬이 들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13살이 된 이이는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29살 때 대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에
올랐습니다. 이이의 호는 율곡이어서, 이율곡이라고도 불립니다.
율곡 이이는 1568년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동호문답>을 지어 정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40살 때인 1574년에 <성학집요>를 지은 이이는 6년 뒤에 호조판서가 되고 대제학을
겸했습니다. 1583년 어느 날, 율곡 이이는 경연 자리에서 10만 양병책을 주장했습니다.
"전하, 이대로 가다가는 10년 안에 나라에 큰 위험이 닥쳐 옵니다. 하오니, 군사 10만 명을
길러서 한성에 2만 명을 두고, 각도에 1만 명씩 배치해 두도록 하옵소서.'
그러나 유성룡이 반대를 하였습니다.
"많은 군사를 기르자면 예산이 많이 들어 나라 살림이 어렵습니다.”
결국 이이의 10만 양병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로부터 9년 뒤에 임진왜란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이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은 한탄을 하였습니다.
“내가 율곡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아무튼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이룩해 놓은 성리학의 업적은 매우 큽니다.
이황은 주자의 ‘이기 이원론’사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크게 발전시켰는데, 이기 이원론이란
우주 만물은 형태가 없는 원리인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진다는 학설입니다. 이황은 '이'를
우주의 근본적인 요소로 본 주리파의 대표적인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이와 기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이다'는 '일원적 이기 이원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이는 우주의 근원을 '이'보다 '기'에서 구하는 학설을 완성하였습니다. 이것을
'주기파'라고 합니다.
이이는 김장생 등 여러 훌륭한 학자를 길러내었으며, 경기도와 충청도를 일컫는 기호학파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이는 동인과 서인이 갈라져서 싸우는 것을 크게 걱정하고 중간에서 화합을 시키려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도리어 양쪽에서 비난만 받자 벼슬을 내놓고 파주의 율곡으로
내려간 적도 있었습니다.
이이는 1584년 1월 15일 49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라에서는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청솔 간, ‘이야기 한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