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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6:1-9 여호와께서 : 칼빈
다윗은 지극히 어려운 갖가지 위험들로부터 구원받은 후에, 그가 겪었던 극심한 고통과 고뇌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말합니다.
또 이에 따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보호가 얼마나 신묘하고 엄위한 것이었는지를 말합니다.
그가 겪었던 절망적인 상태는 그가 보호를 받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소망이 다 무너져 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다윗은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대해 이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1. 본문 1-4절은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 도다 (2)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 지소서 하였도다” 입니다.
1) 본문 1절 첫 부분은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인데 이 시의 첫머리에서부터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매혹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었던 것을 공언합니다.
2)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라는 갑작스러운 표현은 보다 강조적인 형태로서 자신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고는 기쁨을 누리거나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무익한 쾌락을 좇아 방황하게 되며 근심으로 에워쌈을 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이러한 무익한 생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은 복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유혹도 자신을 하나님에게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의 존재가 없이는 그에게 아무것도 기쁘거나 유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의 인도하심과 지켜 주심 아래 자신을 전폭적으로 드리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유익들 중에 그 한 부스러기조차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2절도 역시 같은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특히 하반절은 주석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는 말씀을 그들은 획일적으로 ‘나는 이제까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많은 유익을 얻었으므로 내 일생동안 같은 길을 걸어 나아가리로다’라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가 마땅히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 즉 궁핍함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시기로 간주해야 옳은 것인지는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한 점입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אקרא(에크라)라는 동사의 미래형을 사용하는 것을 보아 다음과 같은 의미를 받아들이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1절에서와 같이 ‘그가 들으실 것이다’라는 단어는 과거 시제, 즉 ‘그가 들으셨다’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연결 접속사는 ‘......때’(when)의 시간적인 결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히브리인들에게는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즉 ‘내가 환난 중에서 그에게 부르짖었을 때 그리고 내가 가장 큰 고통 중에 빠져 있었을 때에도 그는 내게 귀를 기울여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풀이입니다.
혹 처음 해석을 취하는 자가 있다 해도 우리는 그들과 이 문제에 대해 변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러한 ‘날들’을 강력하게 지적하기 시작하고 있는 다음 구절의 문맥을 볼 때 나중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4) 또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에 합당하도록 확대시키려는 의도에서 자기는 사망에서 피할 길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많은 원수들 가운데 혼자 덜어져 착고와 사슬에 묶여 구원에 대한 모든 소망이 끊어진 자와 같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죽음에 붙여진 자였고 엎드러지고 사로잡힌 자였으므로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음부의 고통이 네게 미치므로” 라고 말하면서 이와 동시에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가 앞에서 말했던 바 하나님으로부터 비참하게 버림받은 것으로 보일 때가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에 적합한 때요, 좋은 때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2. 본문 5-6절은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입니다.
1)먼저 5절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입니다
(1)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칭호를 통해서 계속하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의 칭호 앞에 둠으로써 자기가 말한 바 하나님 사랑의 열매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은혜로우시며” 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은혜로서 도움을 베풀어 주기 위하여 준비를 갖추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이것에서부터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베푸시는 ‘공의’가 나옵니다.
(4) 여기에다 ‘자비하시다’ 는 말을 덧붙인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환난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여호와만으로 안식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덧붙여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같으신 자비에 우리의 생각을 몰두할 수도 있고 육체적 쾌락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보잘것없는 자, 즉 자기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자부심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는 자와 같은 사람들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평하심에 대한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6절은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 하셨도다” 입니다.
(1) ‘낮게’라고 번역한 말은 종종 나쁜 의미로도 해석되어 올바른 충고를 따르지 않는 분별력이 없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말이 악인들에게서 멸시를 당하는 자와 자기들을 넘어지게 하기 위해 놓아둔 올무를 재치 있게 빠져 나갈 재주나 주의력이 없는 사람, 쉽게 덫에 걸리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자녀들은 이와는 반대로 매우 간교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지켜 나가고 유지해 나아갈 온갖 방책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를 어린아이라고 하여 자신은 자기 안전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자기가 당한 위험들을 전혀 물리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 말을 헬라어로 τὰ νήπια(타 네피아), 즉 ‘작은 어린아이들’이라고 번역한 칠십인역은 매우 적절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런 자부심이나 대책을 가질 수가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사 그들과 그들의 안전을 방해하려는 모든 위험 사이에다 자신의 섭리에 따른 은밀한 보호를 개입시키신다는 것입니다.
(2) 끝으로 “나를 구원하셨도다”라는 말씀에서 다윗은 자신을 이 사실, 즉 가장 큰 고난에서 건짐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전 상태로 회복된 사실의 표본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3. 본문 7-8절은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 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 셨나이다” 입니다.
1) 먼저 7절 말씀은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입니다. 다윗은 이제 스스로 선한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자기 영혼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긍휼을 베풀어 주시므로 스스로 평안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평안함”이라는 말은 많은 주석가들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해석입니다.
이보다는 마음의 평안하고 조용한 상태를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극심한 질병 가운데서 자기 마음이 심한 동요와 갈등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를 볼 때 우리들 각자도 이와 같은 상태로 사망의 공포가 우리를 엄습해 올 때 평온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남다른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갈등과 내적인 동요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였고 그로 인하여 평안을 빼앗겼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모든 근심들을 가라앉히기에 적합했다고 곧이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만으로 우리 마음의 불안과 공포를 물리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서 평안함을 경험한 후에도 장래에 평안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만약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실 때에만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면,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무슨 명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떠한 능력이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추셨던 그의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조용하고도 평안하게 기다리는 것은 분명히 믿음의 명확한 증거이라는 사실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또 강한 믿음은 마음을 평안케 해주고 영혼을 차분히 쉬게 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 의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만유를 다 주관하고 계신다고 합니다(빌4:7).
이러한 까닭에 성도들은 온 세상이 멸망으로 나아갈지라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제아무리 여러 차례 이리저리 쫓겨남을 당하여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기 때문에 완전하게 또는 전적으로 떨어져 나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에 내맡깁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갖가지 복잡한 공포로 극심한 괴로움을 당하고 몰아쳐 오는 폭풍우에 쓰라린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 주시기만 하면 그들은 그 순간부터 마음속에 내적인 평안을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남을 인하여 즐거움과 기뻐할 수 있는 바탕을 얻게 됩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후자에 속하는 평안입니다.
다윗은 온 마음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게 즐거워 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גמל (가말)이란 말을 ‘후대하다’ 라고 번역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이 히브리어에서는 보통 보상해 주는 것 뿐만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것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이 사실은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라고 말하는 8절로 확증됩니다.
적당하게 말하자면 이것이 그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에서 건지사 그의 눈에서 눈물을 씻으시는 것이 그 보상입니다.
말의 순서는 서로 뒤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쓰는 관용구에 의하면 우리는 ‘주께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건지셨다.’
따라서 ‘주는 사망에서 내 영혼을 건지셨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순을 따르기가 쉽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상황이 나중에 언급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이 구절에서와 같은 어순이 결코 적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현재의 사망에서 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 크신 인자로 나를 대하사 슬픔을 사라지게 하셨고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손을 펼쳐 주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한층 더 높여지는 것입니다.
4. 본문 9절은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입니다.
1)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라는 말씀은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의 보호아래에 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계속해서 평안함을 누리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며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보호해 주시는 배려로 둘러싸여지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악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기들이 평안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모든 생활의 방향을 주관하고 계시는 것 하나만으로 자기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지켜 주시는 자이므로 자기는 살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2) “생존 세계에서”라는 말씀을 부연함으로써 다윗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도를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과하고 계신다면 거의 매순간마다 육체의 멸망이 우리를 짓누를 것입니다.
시116:10-11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이 구절들은 그가 당하였던 난관에서 경험한대로의 확신을 말합니다.
그가 이전에 고난에 봉착하였을 때에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절망 중에 생각하기를 인간은 믿을 수 없고 다 거짓되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얻었으니 하나님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인간은 믿을 수 없고 하나님만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나니 그것이 그의 확신입니다 그의 이러한 소식은 위의 9절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행하려는 동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인간은 거짓되고 하나님만 믿어야 하나니 이제부터 그는 하나님의 뜻만 신종(信從)하려 합니다.
1. 본문 10절은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하신 구원을 더욱 현저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다윗은 또다시 자기가 당한 절박했던 위험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의 참 신실함으로 말하고 있으며 자기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오랫동안 생각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나오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고 한 것은 이 말씀이 마음의 충만한 감정에서부터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3절에서 이 말씀을 인용할 때 헬라어 번역을 따라서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사도가 모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반복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한 말씀이 그 고유하고 자연적인 의미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한 것과 잘 부합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마치 자기들은 인생들의 일반적인 운명에서 제외되듯 구름보다도 더 높아지려고 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간접적으로 ‘내가 믿는고로 말하노니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가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허락해 주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가 믿기 때문에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리석은 교만으로 부풀어 있다는 사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복종하지 않았고 특별히 그리스도와 더불어 같은 믿음의 영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로’(therefore) 라고 번역한 כי (키)라는 접속사를 어떤 히브리 해석가들은 분리 접속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보다 더 정확한 의미는 다만 내 마음의 감정만을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문맥의 흐름도 역시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겉으로 나타나는 입술의 고백이 마음의 내적인 감정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분별없이 대화를 하고 마음 속에 없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무도 내가 의미 없는 말이나 과장된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진실로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익한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즉 믿음이란 마음과 동떨어진 채 있을 수가 없고 오히려 믿음은 마음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성령께서는 거룩한 끈을 가지고 마음의 믿음과 외적인 고백을 묶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말씀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진해서 자기 믿음을 애매하게 봉해 버리는 위선자들은 모든 하나님 말씀을 쉽게 부패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순서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하며 입술로 고백하기 전에 마음으로 믿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십시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절박한 위험들을 말함으로써 자기를 지켜 주신 하나님의 평안과 구원을 한층 더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2. 본문 11절은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חפן (하파즈)란 말이 ‘성급한 것’ 또는 ‘도망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고 이 말은 다윗이 사울의 얼굴을 피해 매우 급하게 도망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비유적으로 ‘두려움’ 을 나타내기 때문에 다윗이 절벽 가장자리에서 깊은 수렁 속으로 떨어질 순간에 있는 것처럼 놀라움 속에서 낙심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마음에 극심한 괴로움으로 시달리고 있었을 때 심장이 거의 가라앉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주석가들은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받은 나라에 대한 약속을 의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유능한 증인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고국에서 추방을 당하고 여러 가지 형태로 끊임없이 엄습해 오는 사망의 위협을 당했을 때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 허사가 되거나 무효화되어 버렸다는 시험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말씀은 우리가 도망다닐 때 우리는 거의 망한 자와 같았으며 약속은 나를 떠나 버린 것 같았고 더욱이 기만적인 기대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른 부류의 주석가들은 상반되는 입장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다윗은 시험을 극복해 냈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단이 계교를 써서 다윗을 절망시키려고 했을 때 다윗은 자신의 모습을 즉시 발견하고 불신앙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모두 떨쳐버렸습니다.
너는 무엇을 하느냐? 비참한 너는 어디로 급히 도망하느냐?
아무리 간접적이라 해도 어떻게 감히 모든 거짓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느냐?
하나님을 참되게 하며 허무와 거짓 그리고 모든 불신을 사라지게 하라 나의 의견에는 다윗이 직접적으로 이 예언을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혼란하며 방심하다가 사단의 올무에 빠져서 어떤 곳에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는 사람에 대해 말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단은 성도들을 자주 비틀거리게 만들며 흑암의 상태에 몰아넣고 하나님 말씀을 거의 포기하도록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성도들은 항상 확신을 가지며 성급히 하나님을 거짓되다 힐난하지도 않으며 자기들의 악한 생각을 스스로 억제시킵니다.
히브리인들은 ‘말하다’ 라는 동사를 프랑스어로 Jיay conclu, ou resolu 즉 ‘내가 결론내렸다 또는 해결했다’ 라고 하듯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 의미의 말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혹은 저항을 받지 않고 마음속에 그냥 들어갈 수 없었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이 정신적 흑암에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해석이 바른 해석이라고 봅니다.
신실한 자는 함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거나 하나님이 진실하신지, 아닌지를 묻는 일이 없습니다. 또 이러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서운 의심이 자기들의 생각을 송두리째 지배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생각을 몰아내고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근심한 나머지 헛되고 거짓된 것에 불과한 것을 바라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두려움과 번민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짙은 안개가 자기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처럼 느낀 것입니다.
“확실한 것도 안전한 것도 없다. 나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성도들은 이러한 문제가 자기들에게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을 덮고 있는 베일이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늘 위로 올라가 하나님의 진리를 새롭게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땅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려는 것입니다.
이 의도 때문에 다윗은 자기가 당한 시험을 말함으로써 자기는 하나님의 도와주심과 위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모든 불신앙을 떨쳐 버리고 일어날 수 가 있었던 것은 예언을 신뢰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그렇게 행하지 않은 것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서는 단지 허무한 것밖에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의 믿음이 이러한 격렬한 모양으로 흔들렸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켜 주시고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고 할 때에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말은 성도들이 의심과 불확실한 것 사이를 마음 조이며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더욱 진지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련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해 보기 전에는 이러한 유혹들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일시적으로 당했던 시험도 그가 예언한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 결과 회의로 당황해 할 때에는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
시116:12-19 여호와께서
전에 환난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말한 서원을 이제 지키려는 결심합니다.
그는 서원을 지키려는 결심을 고조하는 의미에서 두 차례 그것을 거듭 말합니다(13,14, 17-19.)
특별히 15절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에서 이 시인은 서원 이행을 결심하면서 전에 그가 죽을 자리에서 구원 받은 사실을 추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죽는 것” 을 심상히 여기지 않으시고 그것에 중대한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그 당했던 난관에서 죽음을 면하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일개의 동물의 죽음처럼 천한 것이었더면 그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의 사망 문제를 중대히 취급하셔서 특별히 귀한 목적없이는 그의 죽음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이렇게 취급하시는 사실은 너무 감사한 일이어서 그의 서원 이행(誓願履行)의 결심을 더욱 돋우어 준 것입니다.
1. 본문 12절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입니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자기 감정표현으로서는 이루 나타낼 수가 없이 큰 것이었다는 사실을 열렬한 찬사를 덧붙여 외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의문 형식은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써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무지와 한계에 관하여 그 방법이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자기 무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유일한 방편으로 삼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높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나는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를 돌아볼 때에 보답을 드리기에 적합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주신”이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속 깊이 베풀어 주셨던 모든 은혜를 다윗이 기억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칠십인역을 따라 접속사를 보충하고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다음에 마침표를 찍어서 상반절을 완전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다윗은 자기 무지와 부패와 무능력을 함께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충분한 보답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 후에 이것과 때를 맞추어 단지 한 가지 은혜가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신에게 빚진 자로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로운 것이 없다. 내가 어떻게 베풀어 주신 은혜들에 대해 하나님께 보답할꼬?’ 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어떠한 보상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열납되는 유일한 보답의 길은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윗이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실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또는 조심성 없이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그 가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본다면 그에 대한 생각 자체가 우리를 찬사로 가득 차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만은 우리들을 엉뚱한 이론으로 이끌어 우리가 결코 등한시해서는 안 될 바로 이 교훈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후대하여 주신 것이 더욱 찬양을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으셨고 또 받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모든 것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2. 본문 13절은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입니다.
다윗은 율법 아래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습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엄숙한 감사를 드릴 때에 절기도 함께 지켰고 이때에는 기쁨의 표시로 거룩한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부터 구원받은 것에 대한 상징이었는데, 여기에서는 “구원의 잔”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부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또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즉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성소에서 서원을 갚겠다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계속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자기 의무를 다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크게 당황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러한 보답을 그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보답하려는 마음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십니다.
적절한 보답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주 자비롭고 긍휼히 여겨 주신다면 우리는 더욱 게을러져서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시는 구원에 대한 찬송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조물주에게서 당연히 받으셔야 할 적은 보답을 가로채는 사람은 분명히 부요함을 누릴 가치가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제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햇빛과 공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모세의 의식은 폐기되었고 이와 함께 외면적인 주연은 영적인 예배로 바뀌었다고 다윗은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23)라고 한 말씀은 지금도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혀로만 찬송하지 않고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하나님은 합법적으로 찬송을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십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어떤 유익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방법으로 감사 드리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4절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입니다
다윗의 경건의 견고함은 위험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 서원했다는 사실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기들을 무겁게 누를 때에는 잠시동안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 하다가도 곧 자기들이 받은 구원을 망각 속에 묻어버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는 결코 이러한 약속을 잊지 않을 것을 다윗은 지금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경배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서로 분리될 수가 없는 예배의 두 부분, 즉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는 말씀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라는 말씀을 잘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서원함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이나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간주하는 자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죽어야 하는 존재며 보답으로 하나님을 자기에게 묶어 놓는 행위처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앞에서 자신은 아무런 보답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이 의도하고 있는 것과 그 용도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들의 마음에 무엇이든지 구한 것은 얻게 된다는 확신으로 담대해지는데 있습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더욱 감사를 드리도록 촉진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약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 주는 것은 분명히 그들에게 서원의 특권을 양도해 주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의 가장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그들과 친밀한 교제 관계에 들어가도록 내려오사 우리가 말한 목적을 위해 그들의 서원을 갚도록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술 취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 것처럼 여기면서 모든 종류의 서원을 지키되 어리석고 모호하고 경솔하게 취급하고 있는 교황주의자들이 그 근거를 여기에 두고 있는 것처럼 구실을 삼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야비한 일인가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4. 본문 15절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입니다.
다윗은 이제 성도들이 궁핍할 때에 그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살피심에 대한 일반적인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도들의 생명은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하다고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방패로 삼아서 번번이 자신을 억압하여 금방이라고 삼켜 버릴 듯한 사망의 공포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위험에 직면하여 분명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못 본 체하신 것으로 보일 때에는 우리 자신을 마치 가련한 노예처럼 멸시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우리의 생명은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악인들이 우리에게 방패가 없다는 것을 알 때에는 더욱 담대하게 우리를 대적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관심을 두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달려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에 맞서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이 우연하게 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하등의 관심도 없는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운명과 세상의 모든 동요에 얼마 동안이나마 붙들려 있을 수 있는 것은 사실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고도 공개적으로 자신이 우리 영혼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고 계신지를 나타내실 것이라는 위로를 항상 받고 있습니다.
무죄한 피가 흘려지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한 자들이 사나와져서 하나님을 내쫓을 것처럼 행동을 할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굳게 붙잡고 있도록 합시다.
즉, 성도들의 죽는 것이 사람들 보기에는 그토록 무가치하고 이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심히 귀중하며 성도들이 죽은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손을 펼치사 선하고 순전한 사람을 부당하게 핍박하는 자들의 잔인함을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 지를 무서운 실례로 보여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눈물을 병에 담으신다고 한다면 그들의 피가 어찌 그대로 패망하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시56:8).
다윗은 그 당시에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했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잦았던 그 피를 드러내고”(26:21),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서 우리는 선지자가 성도를 가리켜 ‘온유한 자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묵묵히 자기 몫의 십자가의 짐을 지도록 하며 그들의 영혼이 인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과 같이 온유의 영을 갖도록 하십니다(눅21:19).
5. 본문 16절은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성도들에 대하여 가지고 계시는 아버지의 보살피심에 대한 실예를 보여주심을 찬양한 것처럼 여기에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일반적인 교훈을 논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종들의 숫자에 포함시켜 주신 결과로 자기 ‘결박이 풀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박당한 자’란 말을 손발이 묶여서 끄는 자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구원받은 이유를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결코 자신의 경배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그 영광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자기는 단순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주의 여종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즉 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이 영광이 내게 임하였나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으로 자기 방패와 상급으로 삼아 다른 것에서는 평안을 구하려 하지 않은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모범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6. 본문 17-19절은 “(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19) 예루살렘아 네 가운데서 여호와의 전정에서 내가 갚으리로다 할렐루야” 입니다.
다윗은 다시 한번 자기가 감사에 대해 말한 것과 공적으로 말한 것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은밀한 감정으로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다 알도록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경건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백성들과 더불어 율법의 의식을 지키면서 이것들이 무의미한 경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것들을 행하면서 이것을 지키도록 하신 목적과 입술로 드리는 감사제를 드리게 하신 본래 의미를 특별히 유의했습니다.
“여호와의 전정”이라고 말한 이유는 당시에는 유일하게 그곳에만 제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곳을 떠난 제사는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거룩한 회중이 모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또 그곳은 성도들로 하여금 피차간에 거룩을 행하도록 함양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