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의 유래
인삼(고려인삼)은 유사 이전에도 자생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문헌상으로는 불과 1500여 년 전의 중국 문헌에 실려 있을 뿐이다.
양(梁)나라 때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注)》 및 《명의별록(名醫別錄)》에는 고려인삼보다도 중국 상당삼(上黨參)이 더 좋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고증에 의하면 상당삼은 초롱꽃과에 속하는 만삼(蔓參)이며 인삼이 아니라고 한다.
양서(梁書)》에도 무제시대(武帝時代)에 고구려·백제가 인삼을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고, 수(隋)나라의 《한원(翰苑)》 중의 고려기(高麗記)에 마다산(馬多山;개마대산으로 추측된다)에서 인삼이 많이 산출된다는 기록이 있으며, 진(陳)나라의 관정(灌頂)이 편찬한 《국정백록(國定百錄)》에도 고려에서 인삼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1123년(인종 1)에 중국 송(宋)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가서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당시에 이미 홍삼(紅蔘)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한국의 문헌으로는 《삼국사기》 또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올라 있는 인삼의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799년(신라 소성왕 1)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발견하여 당(唐)나라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 조공한 인삼에 관한 기록은 당나라 숙종 때 이순(李珣)이 저술한 《해약본초(海藥本草)》에도 있는데, 이 기록에는 당시에 인삼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가공 기술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 고종 때쯤에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창간하고, 조선에 들어 1417년(태종 17) 최자하(崔自河)가 중간(重刊)한 《향약구급방》의 <방중향약목(方中鄕藥目)>에 기록되어 있는 170여 종의 향약(한국에서 생산되는 약제)에는 인삼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 인삼이 <人蔘>으로 적혀 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인삼의 삼을 <蔘>으로 쓴 것은 조선왕조 이후의 문헌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인삼을 <人蔘>으로 적은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 고유의 인삼의 고명(古名)은 <심>인데, 이것의 어원이 통용되기 시작한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동의보감》 《제중신편(濟衆新編)》 《방약합편(方藥合編)》에 인삼의 향명(鄕名)이 <심>이라 기록되어 있어, 근세까지는 <심>으로 통용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겨우 산삼채취인(채삼꾼)의 별칭인 <심마니>에서 그 이름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함경남도 지방의 산삼채취인들은 인삼을 <방추> 또는 <방초>라 하는데, 어원은 방초(芳草)일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는 인삼을 귀개(鬼蓋)·신초(神草)·토정(土精)·옥정(玉精)·혈삼(血參)·황삼(黃參)·인신(人身)·활인초(活人草)·지정(地精) 등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고려인삼을 보통 조센닌진이라 하지만, 별칭으로서 오타네닌진[御種人參(어종인삼)]이라고도 한다.
이 오타네닌진이라는 명칭은, 18세기 초반, 자생하는 인삼이 전혀 없는 일본에 인삼의 종자(일본어로 다네)가 조선으로부터 처음으로 전래되었는데, 이것을 에도시대[江戶時代(강호시대)] 어약원(御藥園)에 파종하여 1728년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인삼재배에 성공하였고, 또 여기서 채취한 인삼 종자가 민간인에게 보급되어 일본에서의 인삼 재배가 발전되었다는 데 유래한다.
인삼의 속명인 Panax의 어원은 Pan(모든汎)+aco(의약;axos)이며, 따라서 Panax는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이다. 종명인 schinseng 또는 ginseng은 각각 신삼(神參) 또는 인삼의 중국음을 표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