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의 잡다한 식견(지식)[雜識] 中에, 반(潘)씨 신(申)씨 빈(賓)씨> 2017년 作 /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일제강점기 당시 거제도 기록물 중에, 거제도 본관을 가진 반(潘)씨, 신(申)씨, 빈(賓)씨에 대한,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 선생의 자료가 있어 그대로 옮겨 본다. 실제 집안의 족보나 유적 그리고 기록물과는 그 차이가 많이 발생할 수 있으리라, 충분히 짐작은 간다. 그러나 약 100년 전, 거제시 연초면 명동리에 태어나 고향에서 사망 때까지 평생 유학자로 전국을 누볐던 김계윤(金季潤) 선생의 기록 또한 무시할 사항이 아닌지라, 번역해 게재함을 알리니 널리 ❉양해❉ 바란다. 과거 약 600년 전까지는 거제도가 관향인 성씨가 20개가 넘었다.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공식적으로 반(潘)씨, 신(申)씨 두 성씨만 남아 있다.
1) 거제(巨濟, 岐城) 반씨(潘氏) / 김계윤(金季潤)
이 고장에는 거제(巨濟)가 관향인 반씨(潘氏)의 오래된 집안이 있다. 고려의종이 방폐(放廢)되었을 때, 반(潘)씨 신(申)씨 빈(賓)씨 삼정승(三政承)이 따라왔다고 가요(歌謠)와 이언(俚諺)으로 대대로 전하고 있다. 그 근거는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 틀림없다 한다. 국사봉(國士峯)에는 반시중의 묘가 있고 고려 중기에 세운 비(碑)에 시중(侍中) 정승(政承)이라 적혀있다. 반우향(潘佑享) 반부(潘阜) 모두 거제 반씨 집안의 이름난 분들이다. 이와 같이 이름도 없는 다른 집안과 비할 바 아니니, 나라의 큰 공훈을 세운 뛰어난 집안의 부조묘(不祧廟) 사당을 세우길 논하였다. {거제도 문절사(文節祠) 건립.} [此鄕有潘氏貫巨濟亦古族也 高麗毅宗放廢時潘申賓三政承隨來之謠諺遺傳 然未見的據 國士峯有潘侍中墓而中年立碑麗時以侍中爲政承也 潘佑享潘阜皆聞人而若論立祠則似勝於他家無名之不祧歟]
2) 아주(鵝洲) 신(申)씨 / 김계윤(金季潤)
신(申)씨는 아주(鵝洲)가 관향이다. 지금의 아주촌(아양동)이라고, 민간의 구전으로 전한다. 신씨(申氏)의 묘가 있는데 비석이 뽑혀 있다. 다른 사람이 장사를 지냈던 연고이다. 아주 신씨를 잘 알지 못해 누차 찾아보았다. 지금의 청송 의성 등지를 두루 다녔다. 아주 신씨는 과거에 합격해 끊임없이 성대하게 살았던 가문이다.(거제도에는 아주 신씨 집안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일찍이 의성(아주 신씨 세거지)에 갔을 때 신씨를 만났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물었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며 또한 모른다고 말하였다. 어찌 관향에 대해 뚜렷한 증거도 없이 구전으로 말할 수 있겠느냐 했다.
[申氏貫鵝洲而今有鵝洲村諺傳申氏墓所在碑石拔棄而他人入葬故 申氏累訪不得而去云今靑松義城等地 申氏盛居科宦不絶 余嘗往義城時逢申氏而問其事則答以不然而亦云不知蓋此鄕諺傳之無證類]
[주] 아주(鵝洲)는 경상남도 거제시에 속한 지명이다. 본래 거로현(巨老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아주현(鵝洲縣)으로 고치고,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아주(鵝洲)의 성으로 신(申)·문(文)·갈(葛)·조(曺) 4성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아주 신씨는, 고려 말에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을 지낸 신익휴(申益休)를 시조로 하고, 고려 충렬왕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낸 신윤유(申允濡)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의성군의 세거 성씨이다. 고려 조선시대 수많은 과거 합격자를 낸 유명한 사대부 집안이다. 현재 전국에 약 28000명이 있다.
3) 거제(巨濟, 岐城) 빈씨(賓氏) / 김계윤(金季潤)
빈씨(賓氏)는 (유적이나 후손)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여러해 전에 지석리(사등면)에 빈씨(賓氏) 한 분이 살고 있었다고 전하나 그 진위를 알 수가 없다.[此賓氏無聞而年前支石里有賓氏一人云者亦未知其眞也] / 현재 2017년 거제도에 몇 집이 거주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4) 연도에 있는 벗에게 부침[寄友人在燕都] / 거제 반씨 시조 반부(潘阜 1230∼?) 몽고 사신으로 갔을 때 고향을 그리며 지은 칠언절구 임.
黃楡塞外但回頭 황유새 밖에서 다만 머리 돌리나니
不覺飄然兩鬢秋 두 귀 밑에 가을이 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네
速返庭闈長獻壽 빨리 정위로 돌아와 길이 축수 드려라
相逢不惜萬金裘 서로 만나면 만금 갖옷도 아끼지 않으리
[주1] 황유새(黃楡塞) : 중국 동북방에 느릅나무가 많이 자생함으로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북쪽 변방을 뜻한다.
[주2] 정위(庭闈) : 부모가 거처하는 방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고려의 고향에 사는 부모.
[주3] 반부(潘阜 1230∼?) :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거제(巨濟) 반씨(潘氏)의 시조. 자는 군수(君秀), 호는 해려재(海旅齋).
1267년(원종8)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이장용(李藏用)이 고려에 왔던 몽고의 사신 흑적(黑的)에게 글을 보내 일본과 통화(通和)하지 말 것을 청한 것이 문제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때 그것을 고하지 않은 죄로 채운도(彩雲島)로 유배당할 뻔했는데 흑적의 만류로 무사하였다. 그리고 그 해 고려원종 9년(1268),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기거사인(起居舍人 종5품)으로 일본에 통화를 요구하는 몽고의 국서와 고려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몽고의 국서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반 년 이상 억류되었다가 답서를 받지 못하고 이듬해 돌아왔다. 이에 몽고는 일본이 통화를 거절하는 것을 의심하고 다시 추진을 촉구하였다.
따라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사전(申思佺), 시랑 진자후(陳子厚) 등과 함께 몽고 사신 흑적·은홍(殷弘) 등을 인도해 일본에 갔으나, 대마도에 이르러 입국하지 못하고 왜인 2명을 사로잡아 이듬 해 돌아와서 몽고에 보냈다.
1270년 비서승(祕書丞)이 된 그는 강화창(江華倉)을 풀어 군신(群臣)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274년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서해도(西海道)에 가서 전함을 만들 공장(工匠)과 역도(役徒)를 징집했는데, 마침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함 300척을 만들 것을 심히 독촉하던 중이었다. 그 해 지병마사(知兵馬事) 나유(羅裕)와 박보(朴保)의 부사(副使)가 되어 제1차 일본정벌에 참전해 이키섬[壹岐島]을 함락하고 북구주(北九州)를 치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많이 부서져 되돌아왔다. 1280년에는 궁궐에서 왕과 더불어 시를 짓기도 했다.
1281년(충렬왕 7) 좌사의(左司議 정4품)로 왕명을 받아 제2차 일본정벌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원나라의 원수 흔도(忻都)와 홍다구(洪茶丘)·범문호(范文虎) 등을 위로하였다. 1282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원(試員)이 되어 시부(詩賦)로 38인, 십운시(十韻詩)로 51인, 명경(明經) 2인을 뽑았다. 그리고 1284년에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승보시(升補試)의 시원이 되어 시부와 경의(經義)로 33인을 뽑았다. 경상남도 거제의 문절사(文節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