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과 용서(1)
주님께서는 부활 선물로 당신 교회에 ‘죄를 없애는’ 사죄권(赦罪權)을 주셨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요한 20,22-23).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계신다. 용서는 성령을 통하여 베풀어진다. 성령강림 전례는 더욱 힘 있게 “친히 모든 죄를 사하시는 성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령의 은혜와 성령의 자신은 항상 현존한다. 용서도 현존한다. 우리의 온 생활이 용서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 또 실로 모든 사회가 이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이거나 아니거나 우리는 모두가 복음과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용서의 분위기에 하도 익숙해 있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하느님이 우리의 극악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관대하심을 누누이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의 분위기 속에서 마치 자비가 이 세상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산다. 가톨릭 신자들의 심중에는 이러한 용서에 대한 인식이 깊이 파고들어 있어서, 오히려 악의 중대성을 별로 느끼지 못할 만큼 달갑지 않은 현상을 낳는 기회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개신교 신자들이 또 비그리스도교인이 죄악의 중대성과 구제할 수 없는 무능력에 대하여 더욱 깊이 통찰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용서해주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손해의 보상(補償)▶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하여 우리 죄가 참으로 씻겼다는 것을 믿는다. 용서란 우리가 죄악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보아 눈감아주신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때로 너무나 쉽사리 간과해버리는 문제가 있다. 죄는 자기 자신과 남에게 손해를 끼친다. 가령 어떤 사람의 결점을 들추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명예를 손상시킨 사람이 있다고 하자.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용서해준다. 그러나 그 손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명예는 훼손되었고 그 죄악은 침해를 계속한다. 참으로 그 죄가 씻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죄의 씻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거스른 완악한 마음이라는 죄의 핵심이 없어진 것이다. 그 죄인은 하느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회개하여 다시 한번 올바른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또한 죄의 결과가 제거되는 시작이기도 하다. 우선 보상하겠다는 생각이 회개와 용서에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훔친 것을 갚는 것처럼 때로는 매우 실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중상모략과 같이 보상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어떤 다른 방법의 선행으로 보상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범죄자는 또한 자기 행동에 대하여 고통을 받고 싶은, 보속(補贖)하려는 원의를 느낀다. 보속의 형태는 교회 전통 안에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다. 보속은 보상, 선행, 고행 그리고 연옥에서 갚아야 할 죄의 잠벌(暫罰) 등이다.
옛날, 참회자는 부과된 고행을 유익한 선행으로 대치할 수 있었다. 가령 예루살렘 순례 대신에 나그네를 위하여 다리를 놓았다. 더 옛날에는 대속(代贖)의 일종으로 순례자의 고통 덕분에 교회 내의 어떤 공동 고행이 면제되는 관습이 있었다. 여기에 ‘대사(大赦)’의 기원이 있다. 고행 대신에 선행을 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죄에 상응한 잠벌’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한편 교회는 ‘성인들의 공로의 보화(寶貨)’를 꺼내주시기를 하느님께 간구했다.
이 오랜 관습의 이면에 영원한 가치를 지닌 신앙의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로서는 그리스도 용서의 보고(寶庫)에서 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자비를 베풀어주려는 노력이고, 우리 각자로서는 어떤 선행으로 우리의 선의를 구현하려는 노력이다.
커다란 보상 행위는 우리의 삶 자체이다. 우리의 삶에는 종말이, 죽음이 있다.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그 세례로 세례를 받는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예수님의 은총으로 자기 온 생명을 선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우리는 너무나 안이하게 모든 것이 교회의 용서로 단번에 자동으로 끝나고 해결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용서란 그저 마음의 짐을 벗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은총 속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와 다른 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악에 대한 투쟁에 예수님과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선이 악보다 더 강하게 되었다는, 무엇보다도 중대한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용서는 보상하려는 노력을 포함해서 참으로 구원이며 해방이며 쇄신이고 새로운 창조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는 여러 해에 걸친 성장 과정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성장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격정이 사라질 줄 기대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겸손과 선에 성장하는 한편 감정의 발작은 여전히 일어난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 선이 악보다 더 강하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죄와 죄책감에 짓눌려 일생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죄의 용서이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랑하고 겸손하며 평온한 분위기가 나아가 일종의 확신이 지배해야 한다.
첫댓글 용서란 그저 마음의 짐을 벗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은총 속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와 다른 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악에 대한 투쟁에 예수님과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죄의 용서이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랑하고 겸손하며 평온한 분위기가 나아가 일종의 확신이 지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 선이 악보다 더 강하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죄와 죄책감에 짓눌려 일생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죄의 용서이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랑하고 겸손하며 평온한 분위기가 나아가 일종의 확신이 지배해야 한다.
우리가 죄의 용서이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랑하고 겸손하며 평온한 분위기가 나아가 일종의 확신이 지배해야 한다.
죄의 씻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거스른 완악한 마음이라는 죄의 핵심이 없어진 것이다. 그 죄인은 하느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회개하여 다시 한번 올바른 방향을 잡은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용서해주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하여 우리 죄가 참으로 씻겼다는 것을 믿는다. 용서란 우리가 죄악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보아 눈감아주신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활 선물로 당신 교회에 ‘죄를 없애는’ 사죄권(赦罪權)을 주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요한 20,22-23).
* 성령의 은혜와 성령의 자신은 항상 현존한다. 용서도 현존한다. 우리의 온 생활이 용서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 또 실로 모든 사회가 이 경험을 지니고 있다.
*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 선이 악보다 더 강하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죄와 죄책감에 짓눌려 일생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죄의 용서이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랑하고 겸손하며 평온한 분위기가 나아가 일종의 확신이 지배해야 한다.
우리가 죄의 용서이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랑하고 겸손하며 평온한 분위기가 나아가 일종의 확신이 지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 선이 악보다 더 강하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하여 우리 죄가 참으로 씻겼다는 것을 믿는다. 용서란 우리가 죄악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보아 눈감아주신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샬롬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 선이 악보다 더 강하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죄와 죄책감에 짓눌려 일생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우리가 죄의 용서이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랑하고 겸손하며 평온한 분위기가 나아가 일종의 확신이 지배해야한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요한 20,22-23).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 선이 악보다 더 강하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요한 20,22-23)
용서는 보상하려는 노력을 포함해서 참으로 구원이며 해방이며 쇄신이고 새로운 창조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는 여러 해에 걸친 성장 과정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계신다. 용서는 성령을 통하여 베풀어진다.
우리가 죄의 용서이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랑하고 겸손하며 평온한 분위기가 나아가 일종의 확신이 지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