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체육복을 읽는 아침 19.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240808
내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디론가 나가고 안 계시던 우리 집에 법원에서 나왔다는 덩치 크고 무서운 아저씨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망연하게 주저앉아 계시던 할머니를 이리저리 피해 가며 아저씨들은 이른바 ‘빨간 딱지’가 붙은 짐들을 살뜰하게도 실어 내갔다. 내가 직접 내 돈 주고 산 건 딱히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며 바라보다가 문득 나는 이제 부산을 떠나 서울로 대학을 가야 할 상황이었다는 생각과 그것이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철없는 분노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도박을 한 것도, 투기를 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돈 벌고자 하는 의욕에 비해 돈 버는 수완이 부족했을 뿐인 엄마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 따위도 없이 그저 ‘당신들이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기에 나는 그렇게 했고, 결과도 그럭저럭 받았는데 이제 대학은커녕 내 인생도 같이 다 망했다’는 막연한 원망만 들어찼다. 그런데 ‘공부만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길이 생긴다’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진짜 내게 기적으로 다가올 줄이야.
가전이라고는 꼭 냉장고 하나 덜렁 남아 집 전체가 냉장고를 넣어둔 어두운 박스처럼 되어버린 집 현관문을 닫고 계단 몇 개를 터덜터덜 내려와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열아홉 살의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11월의 맑고 시린 하늘 아래 섰던 그 순간, 수능 국어 문제집에서 여러 번 읽고 문제를 풀었던 김남조의 ‘설일’이라는 시의 일부가 떠오른 건 우연이라기엔 지어낸 말 같고 필연이라기엔 굳이 그 나이에 겪어보지 않아도 되었을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친구도 누구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거란 생각 위로 ‘하늘만은 함께 있어주’는 거라는 말이 빨간 딱지의 공포와 앞으로의 고달플 삶에 대한 부담을 불과 삼십 분만에 막연한 희망의 이불을 덮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다음의 삶을 연속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라면이었다.
대학이고 돈벌이고 간에 일단 끼니는 해결해야겠는데 부모님과 연락은 안 되는 상황에서 불현듯 떠오른 게 옆집 아주머니가 적십자사와 모종의 관계(?)를 갖고 계시단 말을 얼핏 들었던 기억이었다. 마침 초등학교 동창의 어머니시기도 했기 때문에 아들같이 생각해 주실 거라는 기대로 옆집 벨을 눌렀다. 아주머니와 나누었던 대화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순간의 다음 기억은 우리집 현관에 20kg짜리 쌀 한 포대와 안성탕면 한 박스가 놓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할머니는 라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안성탕면을 끓여서 함께 먹는 순간만큼은 난 참 좋았다. 초등학교(국민학교라는 명칭의 적합, 부적합을 따지기 전에 나는 일단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게 사실인데 한글 워드 프로그램은 ‘국민학교’라고 입력하면 자동으로 ‘초등학교’라고 수정해 주는 과도한 친절을 베풀고 있다.) 저학년 때 토요일 오전 수업 마치고 집에 오면 배고픈 손자를 위해 뚝배기에 두 개씩 끓여주시던 그 구수한 맛과 오후의 노란 햇살이 떠올랐고. 안성탕면 스프에 들어있는 파가 싫다고 떼를 쓰면 엄마가 체에다 스프를 받쳐 파 없는 라면을 끓여주던, 벽에 바른 시멘트가 군데군데 드러나 있는 허름하지만 참 따뜻했던 부엌이 생각났다. 그리고 할머니는 안성탕면을 ‘끓여’주셨고 엄마는 안성탕면을 ‘삶아’ 주셨기 때문에 과연 ‘끓이다’와 ‘삶다’의 차이와 고부갈등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지 고민하던 사춘기의 나도 떠올랐다. 그렇게 몇 번인가 더 지원받은 안성탕면을 삶고 볶고 끓이고 지지고 부치고 하며 그 겨울을 났고 담임 선생님의 권유에 법대를 나와서 검사가 되고 싶다던 꿈을 접고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 아이들과 라면에 대한 글을 수업 시간에 함께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소설가 성석제의 ‘소년 시절의 맛’이다. 논두렁에서, 독서실에서, 군생활에서 먹었던 최고의 라면 맛에 대해 쓰면서 그 시절에 얽힌 사연과 꿈을 그리는 짭짤한 수필이다.
수필이란 건 자신이 겪은 일을 통해 얻은 삶의 깨달음에 대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이다. 지금 이 글도 마찬가지다. 삶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거창한 데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자신이 겪은 일’, 그리고 ‘자유롭게’라는 전제는 결국 누구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 단원을 공부하면 언제나 수행평가 과제로 수필을 쓰도록 강요(?) 한다. 마침 내가 최애하는 음식 라면이 제재인 글인 데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라면 한 번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과도한 일반화를 바탕으로 이런 글제를 만들었다.
“자신이 먹어 본 최고의 라면과 관련된 경험을 쓰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깨달은 바에 대해 한 편의 완결된 수필로 작성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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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석제만큼은 안되어도 뭔가 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글이 나오게 하려면 상상만 해서는 안 될 듯싶었다. 집에서 끓이는 라면이 결코 따라잡기 힘든 것이 분식집 라면인데, 그걸 수업 시간에 아이들을 데려가 먹일 순 없는 노릇이니 그와 비슷한 경험을 교실에서 하게 해줄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버너랑 냄비를 가져오라고 해서 다 같이 끓여먹다간 이게 국어 시간이 아니라 가정 실습 시간이 될 것 같고, 설거지에, 부탄가스나 화상 위험에…… 감각적인 수업 한번 해 보려다 사유서를 쓸 순 없으니 일단 보류. 어떤 라면이 맛있었던지 떠올려 보면 역시 분식집 라면인데, 분식집마다 특성은 다르지만, 흔히 슈퍼에서 파는 라면을 끓여주는 집이 있는 반면 어떤 집은 면 따로 스프 따로 구입해 조합해 주기도 한다. 면을 따로 삶고 캔이나 큰 봉지에 들어있는 스프를 적당량 덜어서 넣는 식이다. 그때 그 스프만 따로 담겨 있던 장면이 생각났다. 늘 장을 보러 가던 식자재 마트로 차를 달렸다.
역시, 겉에 ‘라면 스프’라고 떡하니 적힌 상품을 찾아냈다. 소주잔 사이즈의 종이컵도 넉넉하게 사 와서는 교무실 버너에(교무실에 왜 버너가 있느냐고 묻지 마시라.) 주전자를 걸고 물을 끓였다. 물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수능, 입시 노래를 부르면서 수업 시간에 1분만 늦어도 세상이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동료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과연 나는 라면 국물을 끓여 들고 수업에 들어가도 괴물 취급을 받지 않을 것인가.
그날은,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속 문장을 그대로 갖다 써도 될 만한 날이었다. 그런 날 라면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캬~하는 아이들의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고생들이었습니다.― 모습을 상상하니 쉽게 결론이 났다.
“괴물 한 번 돼 보지 뭐. 인생 뭐 있냐. 분명히 재밌을 텐데.”
주전자에 과감하게 라면 스프를 부어 휘휘 젓고는 좀 전의 호기로운 대사와는 어울리지 않게 누가 볼세라 빈 박스에 곱게 숨겨 담아 수업 자료인 양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올랐다.
누가 그랬던가. 기침과 가난과 라면 국물 냄새는 결코 숨길 수 없다고. 분명히 좀 전에 점심을 푸지게 먹었을 텐데도 복도에서 슬슬 풍기는 라면 냄새에 웅성거리던 아이들의 눈이 확신과 놀람으로 차올랐다.
“쌤 설마, 라면……?”
“반장 앞으로 나와서 선생님 좀 도와주라.”
반장은 아이들에게 종이컵을 하나씩 나눠주었고, 나는 교실을 돌며 정확히 컵의 7부 선에 맞춰서 라면 국물을 따랐다. 정말 절묘하게 48번째 컵에서 마지막 국물 방울이 정확히 떨어진 후 우리는 다 같이 의식을 치르듯 라면 국물을 아껴 마셨다.
“크으, 이거 진라면이네.”
“아냐, 이거 신라면인데?”
“야, 야, 내가 라면 좀 먹어봐서 아는데, 이거 우리 언니랑 맨날 먹거든. 삼양라면이거든.”
미안하다. 그런 라면들이 아냐 얘들아. 삼양라면은 햄 맛이 강한데 이 국물에는 그런 맛이 안 남에도 불구하고 삼양라면이라고 주장했던 미각 둔한 자들은 가장 먼저 그 토론에서 발언권을 잃었다. 하지만 어느새 교실은 이 라면 스프의 정체성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이 맛을 느꼈던지, 어떨 때 이 맛을 느꼈던지 서로 나누는 친목의 식당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나는 자연스럽게 수행평가 용지를 들이밀었다.
“자! 지금 너희들이 한 얘기, 이 종이에 쓰면 된다.”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한 손엔 종이 잔, 한 손에 펜을 들고 글을 쓰는 그곳엔 백종원이 열댓 명, 황교익이 열댓 명, 이연복이 열댓 명쯤 있었다. 그들이 써낸 글 속에는 온갖 형태의 라면이 등장했다. 독서실에서 친구들과 시험 기간에 먹은 라면, 남친에게 차이고 친구들과 먹었던 매운 떡볶이 속 라면(정확히는 사리지만), 부모님이 일하러 가시고 안 계실 때 혼자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끓여 먹었던 쓸쓸한 라면, 계곡에 가족과 놀러 가서 끓여 먹은 라면은 경험을 중심으로 쓴 것들. 참치, 우엉, 양배추, 햄 같은 부재료를 곁들이거나 까나리액젓이나 후추, 파기름을 내서 끓이는 방법은 라면을 요리로 대하는 진지한 방법론의 측면, 그중에서 가장 얼큰했던 라면은, 관계를 되살려준 라면이었다.
열여덟 살이 되었어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엄마랑 얘기하는 예쁜 아이였다. 아마 그날도 학교에서 웬 이상한 문학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라면 국물을 끓여줬다느니 그걸로 수필을 써보라는 희한한 일을 시켰다느니 하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엄마에게 보여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주 토요일, 10년 만에 아빠가 끓여준 라면을 먹게 된다. 사연은 이렇다.
아이의 집에는 규칙처럼 굳어진 습관이 하나 있었다. 토요일 점심은 언제나 아빠가 자매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셋이 앉아 그걸 나눠먹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아빠의 건강이 안 좋아지시고 중고생이 된 자매 역시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그 습관도 흐지부지되었던 것이다. 함께 하는 시간이 줄면서 관계도 자연스레 소원해지던 것을 다시 이어준 것이 바로 그 아이의 글이었다. 아빠와 어렸을 때 먹던 토요일 오전의 라면 맛. 그 시간의 공기와 온도. 아빠와 언니의 표정과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이야기들. 길지 않은 아이의 삶 속에서도 가장 소중한 순간 중 하나로 새겨진 그 시간이 아빠에겐 새삼스레 다가왔을 것이고, 아이와의 추억을 현재의 관계로 다시 잇기 위해 피곤한 토요일 오전 다시 라면 물을 올렸던 것이다.
어쩌면 라면이란 건 삶의 희망을 잃은 청년들에게, 살다 보니 어느새 자식과 소원해진 아버지가 다시 용기 내 딸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신이 인간에게 슬쩍 던져 준 마법의 아이템이 아닐까. 그리고, 언젠가 그날 그 교실에서의 아이들이 춥고 쌀쌀한 그래서 따뜻한 무언가가 절실하게 생각나는 날 ‘소녀 시절의 맛’을 한 번쯤 떠올리게 된다면 ‘진’실로 ‘신라’고 좋겠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마지막 종례를 받고 하늘로 간 효석이가 내게 준 선물이 하나 있다. 선택의 순간에 설 때, 무언가 하기 망설여질 때 ‘후회하지 말고 지금 움직이라.’는 말을 늘 되뇌게 해 준 것이다. 인생은 한 번이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으로써 가르쳐주었기에 나는 결코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국어 선생으로 살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글쓰기를 통해 아이들이 자기 안에 있는 꽃씨에 싹을 틔워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볼 때, 그 싹이 저마다의 색과 모양을 가진 꽃으로 제각각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을 볼 때다. 글쓰기는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화해의 과정이므로 과거의 자신을 인정하고 앞으로의 자신을 그리게끔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기 안에 씨앗이 있는 줄도, 피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를 때가 많다. 그것들을 알려주기 위해 교사들은 관성, 나태, 고정관념과 싸우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나는 그날 라면 국물과 글쓰기를 통해 한 가정의 주말을 다시 피워낼 수 있도록 도운 셈이다. 후회 대신 기대와 희망이 있는 교실에서, 오늘도 나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