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58, 이환스님
세칭 동방교 내부조직에 말세와 불심판을 비롯한 공포심과 위기감을 불어넣어 방대한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의 대기자들과 일반 신도들을 이끌어 갈 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던 2대 교주 노영구는 각 지방의 세칭 동방교 주요 거점 교회마다 믿을만한 신도중에 밀정을 심어놓고 순회자의 일거수 일투족과 설교내용등을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하라는 밀명을 내려놓고 비밀리에 감시체계를 가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직운영의 한계를 느끼고 영적 지도력이 있는 외부 인사에게 세칭 동방교 조직을 맡겨서 위탁관리하는 방안, 대기처안의 남녀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들끼리 결혼시켜 외부로 내 보내는 방안, 일반 제도권 교회식으로 교역자들에게 적은 월급이나마 지급해 가면서 운영하는 방안,
선교를 빌미로 외국으로 무작정 출국시켜 개척하라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게 되는데 이때 학구적이고 충성스럽던, 부산의 주학교회를 나와 인수인계한 이봉상 갈렙전도사가 서울 본부로 불려 올라가 2대 교주 노영구를 보필하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세칭 동방교의 여러 가지 기밀을 알게 되고 몰라도 되는것 까지 다 알게 되어 버렸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세칭 동방교의 일반 신도들은 아무도 모르는 부산 해운대의 세칭 동방교 어느 주택에는 마당을 파고 금괴를 묻어 두었는데 그것을 다시 파서 묻어 두었던 금괴를 찾아 오기도 하고 노광공의 이적기사가 있었다는 곳의 실상을 상세히 알아본즉,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등 세칭 동방교의 많은 허구와 기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세칭 동방교의 새로운 운영방안을 두고 순회자들과 대기자들을 설득하고 의논하는 작업을 하는 와중에 회의를 느껴 세칭 동방교를 청산하고 불가에 출가, 안양 삼막사에서 수계를 받고 여생을 스님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부산의 주학교회를 책임맡아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가 서울의 세칭 동방교 본부격인 용산 소재 '수원정'으로 부름을 받아 올라갈 때 그 후임 전도사로 온 사람이 바로 이봉상 갈렙전도사다. 요즈음 세칭 동방교에서 소위 ‘이봉상 사건’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마도 이분에 대해서도 다른 여타 이단사이비 종교집단들이 실상을 알고 회의를 느껴 탈출한 이탈신도에 대하여 퍼붓는 숱한 중상모략을 뒤집어 씌우고 있을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이분은 부산인근의 세칭 동방교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보는 낯선 사람이었다. 부산을 포함해서 경남북일원의 세칭 동방교 교인들은 가끔 모이는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거의 개인사를 알뿐 아니라 멀리있는 신도라도 안면 정도는 터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정재덕 요나단목사가 서울에서 이분을 부산으로 데리고 왔던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농협에서 근무했으며 부인은 서울에서 모여중의 영어교사를 한다고 했다.
어떤 경로를 밟아 누구에게 전도를 받아 세칭 동방교에 입교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기위해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을 했기 때문에 가족과 멀리 떨어지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부산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내용을 묻는것도 금기시 되어있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냥 지내고 있었는데 내가 주학교회를 맡고 있을때도 숙식은 '초량12교회'에서 했기 때문에 '초량12교회'에서 한솥밥을 먹고 숙식을 같이하면서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내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나의 후임으로 주학교회를 맡게 된 것이다.
그후 나는 서울 용산의 '수원정'에서 일 하다가 세칭 동방교를 빠져나왔고 그동안 2년이상 신검을 기피하여 병역기피자가 되어 있었던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마치고 만기제대 한 후 취업하여 세칭 동방교와의 인연은 끊고 지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거의 3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99년 어느날 느닷없이 우리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는데 바로 그 이봉상 갈렙전도사였다. 참으로 뜻밖이었다. 우리집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금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 수원에 있는 어느 절의 주지스님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분이 중이 되었다니. . .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얼마후 시간을 내서 세칭 동방교 시절 절친한 친구였고 이봉상씨와도 서로 아는 사이인 고수(高手)흉내 내던 '누가'전도사(그도 지금은 세칭 동방교를 떠났지만) 부부와 우리부부가 이봉상씨를 만나러 수원근방에 소재한 그의 사찰로 내 차를 운전해서 찾아갔다. 오후에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수원에서 서해안 방면으로 더 나가 그가 말한 어느 절에 도착하니 밤 9시경이 되었다.
도착해서 절의 규모를 보니 상당히 큰 규모의 불사를 이루고 있었다. 30여년 만에 반갑게 만나니 이런 저런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연유도 모르고 과거의 친분도 모르는 마누라들은 하품을 하면서 졸고 앉아 있었지만 우리는 부처님 법당앞에 둥그러니 모여앉아 30여년의 세월동안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골을 메우자니 그간의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가 끝이 없어 새벽 4시까지 대화가 이어졌고 새벽이 어슴프레 밝아와서야 잠시 눈을 붙였다.
어찌해서 스님이 되셨는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다. 이야긴즉 이렇다. 세칭 동방교에서 한창 시끄럽던 그때(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 머리도 식힐겸 어느 절간으로 바람을 쐬러가서 산사의 뒤편 조용한 마루턱에 걸터 앉아 쉬고 있는데 뒤쪽에서 갑자기 “어허 아깝도다아∼! 아깝도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데 또 “어허~ 아깝도다아∼ ! 아깝도다∼ !”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뒤를 돌아다 보니 어느 노(老)스님이 죽장을 짚고 서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길래 이 스님이 말씀하셨는가 보다 하고 “스님 누구보고 그러십니까” 하고 물어니 그 노(老)스님 왈 “누구긴 누구라, 중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 그러고 앉았으니 어찌 아깝지 않으리. 어허 아깝도다아∼!” 하고는 가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 순간에 문득 자기를 뒤돌아보니 자기가 분명 스님인데 그러고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어떤 종교체험의 무아경이었던가 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에게 불가에 출가하겠다고 말하니 부인도 갑자기 듣는 말이라 난감하기 이를데 없는지라 부인 왈 “여보, 집에서 불도를 닦으면 않되겠습니까” 하더란다. 그래서 “그리해도 좋으니 집에서 나 하는데로 도와주고 나를 따라 하겠느냐” 하니 그리 하겠노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후 부인이 여러날을 두고 심각하게 생각한 끝에 다시 하는 말이 “남편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는 그리 하겠노라고 했지마는 이미 종교(당시의 세칭 동방교, 그전에는 잠시 통일교에도 몸을 담았었다는 말도 있었음) 때문에 많이 상처도 받고 경험이 있었던 관계로 섣불리 그리하겠노라 약속을 해놓고는 나중에 책임질 수 없을것 같다”고 정직하게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논 끝에 불가에 출가하기로 하고 사내아이 둘의 교육비는 할아버지(이봉상씨의 부친)가 뒷바라지 해주기로 했으며 생활은 교사인 부인이 책임지기로 하고 이봉상씨는 세칭 동방교를 청산하고 안양에 있는 삼막사로 출가해서 수계받고 받은 법명은 이환(떠날離자, 꿈幻자)이라 받았더란다.
지금은 아들 둘 모두 장성해서 서울대를 졸업했고 부인은 퇴직해서 강원도 어는 해변가 언니집에서 지내고 있으며 결혼한 두 아들은 명절때마다 부부동반해서 이곳 절의 아버지에게 인사하러 온다고 한다. 자칭 전생을 볼 수 있다는 이환(離幻)스님의 말인즉, 이환 스님과 나와는 9번의 전생인연이 있는데 어떤 생에서는 스님으로 만나 같이 불도를 딱은 도반이었다고 한다. 그날밤에 나누었던 믿거나 말거나 식의 수많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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