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번을 한 소녀"(흔히 진주귀걸이를한 소녀로 알려져있음)
“북구의 모나리자”라는 또다른 별칭의 이 그림은 베르메르의 그림 중에서 가장 매혹적입니다. 화가에게 살짝 고개를 돌린 소녀를 클로즈업하여 머리와 어깨를 부각시키고 있죠. 또한 그녀의 귀에 매달려 반짝이는 진주는 순결과 순수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모호한 시선과 살짝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순진한 듯 하면서도 유혹적입니다.
서양 미술가들 중에서 빛을 가장 잘 이해한 화가 얀 베르메르. 그의 그림은 일상적인 듯 하지만 그의 생애는 수수께끼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답니다. 그러나 화가는 작품으로 말을 하는 것처럼 베르메르는 그의 그림으로서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는 신비롭고 섬세한 열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르메르는 네덜란드 소도시 델프트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힐 때까지, 자신의 고향과 고향 사람의 생활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의 집은 여관을 운영했는 데요, 그 여관은 델프트의 화가들 모임 장소로 잘 이용되었다고 하네요. 화가들의 모임을 통해 베르메르도 화가의 삶에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베르메르는 렘브란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던 카럴 파브리티우스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해요. 하지만 그의 나이 22살이었던 1654년 델프트 시 중심가에 화약폭발 사건이 일어났는 데, 그 사건으로 그의 스승이 요절하게 됩니다. 베르메르는 크게 낙심했지만 힘을 내어 스승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어떤 시인은 “그러나 다행히도 잿더미 속에서 베르메르가 일어나 파브리티우스가 가던 길을 갔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21살이 되던 해에 베르메르는 결혼을 했습니다. 부유한 처가에 얹혀 살면서, 그는 20년 동안 열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았고, 그 중 넷이 죽었답니다. 당시 네덜란드 내 가정의 평균 자녀의 수는 둘이었다고 하는 데요, 그래도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고 하니 그는 운이 좋은 사람 같아 보이죠?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였는지, 여관 운영 때문에 시간에 쫓기다 보니 그랬는지, 베르메르는 평생동안 35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모두 온 정성을 기울인 작품들이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심미안이 있는 소수의 의뢰인에게만 개인적으로 팔았다고 하는 데요. 절반이 넘는 21점이 한 사람에게 팔렸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많은 이들은 적막한 침묵을 느끼지만, 그 안에 있는 강렬함 또한 외면하지 못한답니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화면 안에는 오히려 많은 시간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듯 하니까요. 게다가 감상자를 무시하는 듯, 혹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림 속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림 앞에 있는 내 자신이 다른 사람의 생활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듯한 미안함이 들기도 하죠.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그가 살던 시기의 네덜란드는 결코 평화롭지 못했답니다. 1672년부터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7년동안 전쟁을 했고, 그 와중에 암스테르담이 물 속에 잠기기도 하여 농토는 황폐화되었고, 경제는 파탄 지경이었습니다.
베르메르의 여관도 동일하게 불경기였고, 그림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궁핍한 생활을 비관했던 베르메르는 1675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게 되는 데요, 그의 아내는 “아이들에게 들어갈 돈은 많은 데, 벌 수 없게 되자 그는 심한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져 하루 반 만에 건강을 완전히 망치고 세상을 떠났다.” 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그림들과 그의 생애는 거의 200여년 동안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그림은 결코 묻히지 않죠. 현대에 이르러서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 낸 빛”이란 찬사를 받게 된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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