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우리’가 익숙했었던 우리. 그러나 어느새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입니다. 경쟁과 적자생존 속에서 빈부격차, 정치 이념 갈등과 남녀노소로 갈리며 개인과 개인의 소통도 막혀갑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니 더 기쁜 삶-일상 고수에게 듣다’를 10차례에 걸쳐 진행해 더불어 사는 삶이 주는 맛을 나눕니다. 일곱번째는 전북 익산 금마면 미륵산 사자암 향봉스님(74)입니다.
전북 익산 금마면 미륵산 해발 380m 깍아지른 절벽 제비집같은 사자암에 향봉 스님이 있다. 그는 무리동물인 사자보다는 홀로 살아가는 산중호걸 호랑이에 가깝다. 이 고지에서 구름을 벗삼이 공양주도 없이 홀로, 손수 밥하고 빨래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사자암 가는 계단을 오르기 전 ‘바른 불교 바른 신앙’란 바위글씨가 먼저 맞는다. 아니나 다를까.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전국 대부분 사찰에서 찬란히 빛나는 연등이 이곳엔 하나도 걸려있지 않다. 이곳에선 부처님 오신날에만 연등을 단다.
향봉 스님이 이번에 낸 책 이름이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불광출판사)이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사격으로 보나, 절 살림살이로 보나 화려한 것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데, ‘화려한 점심’이라니. 때마침 암자를 찾은 서너 불자들이 마련한 밥상이 차려졌다. 수십년 전 보리고개 때 선보이곤 했던 개떡과 김치와 맑은 죽 한 그릇이 놓여있다. 저 산 아래로 펼쳐진, 찬란했던 백제의 왕궁터와 한반도 모양의 호수를 바라보며 먹는 그 맛을 어느 고급 레스토랑이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보통의 절들은 불자들이 스님을 뵈면 엎드려 3배를 하고, 식사 때도 스님 탁자와 재가자 탁자가 마치 반상 구분처럼 엄연히 나뉘는데, 절도 받지 않고 한 상에 둘러앉아 같은 밥상을 마주한다. 더구나 신자들이 스님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니 회갑연이나 고희연을 받아본 적도 없고, 일반 사찰에서 사찰 경제의 밑바탕이 되어주는 천도재도 지내지 않는다. 대학입시 합격기도 한 번 한 적 없고, 신자들에게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 한 번 낸 적도 없다.
이번에 불교출판사에서 낸 책 인세도 받지 않기로 했다 하니 이 정도면 사자암이야말로 세간의 자본주의가 넘어오지 못한 금단의 소도인 것만 같다. 불자들이 바치는 시줏물 가운데는 불심과 구도심이 담긴 무주상보시물도 없지 않지만, 시주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절에 와서 스님에게서 대접 받으려는 불자도 적지 않다. 그 시주금에 목이 매여 모든 대중들을 평등하게 맞이하기 어려운 것을 이미 30대 때 체득한 그다.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자유롭다.”
향봉 스님이 애초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그는 불교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이미 30대에 조계종 총무원의 ‘넘버2’인 총부부장을 지낸 실세였고, 내장사 같은 천년고찰의 주지까지 지냈다. 또 1980년대에 60만권이 팔린 <사랑하며 용서하며>란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30대 후반 갑자기 철이 들어” 모든 것을 버리고 인도로 떠났다. 그는 무려 15년간 인도, 네팔, 티베트, 중국을 떠돌았다. 그야말로 거지처럼 순례하다 티베트에선 고산병에 걸려 사지를 넘나들었다. 그가 죽음 목전에서 쓴 시가 ‘내 죽거든’이다.
‘내 죽거든/ 이웃들에게 친구들에게 알리지 말길,/ 관이니 상여니 만들지 말길,/ 그저 입은 옷 그대로 둘 둘 말아서/ 타오르는 불더미 속에 던져 버릴 것,/ 한 줌 재도 챙기지 말고 버려 버릴 것,// 내 죽거든/ 49재다 100재다 제발 없기를,/ 쓰잘 데 없는 일로 힘겨워 말길,/ 제삿날이니 생일이니 잊어버릴 것,/ 죽은 자를 위한 그 무엇도 챙기지 말 것,/ 죽은 자의 사진 한 장도 걸어두지 말 것,// 내죽어/ 따스한 봄바람으로 돌아오리니/ 피고 지는 들꽃무리 속에 돌아오리니/ 아침에는 햇살처럼 저녁에는 달빛처럼/ 더러는 눈송이 되어 더러는 빗방울 되어.’
그는 중국 순례에서 마음이 환해지며 오랜 의문들이 해소되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돌아와 사자암에 머문 그는 30대 때 이미 쟁취했던 것들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의 안목이 일신한 것을 본 도법 스님이 2009~2010년 고우 스님, 무비 스님, 혜국 스님 등과 야단법석 자리를 마련했고 그의 걸림 없는 선문답이 전국 선방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뒤 맞짱을 뜨기 위해 찾아온 선객들의 도전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 선문답 없이 앉아만 있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깨달을 수 없다는 그이니 대거리를 마다할 리 없다. “간절함이 사무치지 않으면 결코 깨달을 수 없다.”
그는 검객같은 선기를 내보이면서도, 소아마비 소녀가 아버지를 시켜 불전함에 500원짜리 동전 몇 개와 함께 남긴 쪽지를 보고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한다. 그토록 간절한 사람들의 마음이 사자암으로 향할 만큼 사자암은 대반석들이 둘러싸고 있어 영험 있는 기도도량이라고 자랑할 법하다. 그러나 향봉 스님은 부처와 보살을 내세워 중생을 미혹케 하는 그 욕심에마저 필살기를 날린다. “관음도량에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면 관음일 수 없고 문수도량에만 문수보살이 나타나면 문수일 수 없다.”
조현 종교전문기자(조현TV 휴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