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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1)
2018년 09월 06일
법문 강의에 들어가기 앞서
금강경은 조계종의 소의경전이니까 모두 다 좋아하고, 독송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스님, 저 스님의 강의를 10번 정도 들었다는데 여기서는 반 정도 듣다가 더이상 나오지 않더라고요.
처음에는 아주 좋아했습니다. 왜 좋아했느냐면 다른 곳에서 들은 것과 색다르니까 좋아했는데, 듣다 보니 그 맛이 색다르지 않다 생각하고 그만두는 형국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다니면서 10번 정도 들었다는데, 과연 얼마나 알았을까요?
결국에는 제대로 모른다는 말입니다.
결국 자기 수행에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입니다.
법문을 자기 수행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겁니다.
우리가 세속에서 이야기하는 이런저런 것을 탐닉하고 맛을 볼 뿐 정신적으로 마음이 깨달아지고 이러면 정말 좋은데 그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 온갖 치장을 하듯이 이것저것을 알아야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적 호기심은 나쁜 것은 아니고, 그걸 통해서 자기가 참답게 마음이 밝아지는 쪽으로 나가면 좋은데 그게 쉽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기만의 옳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상이 있어서, 이에 따라 누구에게 법을 들으면 자기 마음에 들면 듣고 마음에 안 들면 듣지 않고 안 나오게 되고, 그래서 공부 체험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의 젊은 층이 그런 부분이 있거든요. 자신이 아는 것이 많아요, 그래서 참으로 온통 믿어야 하는데, 믿음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믿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큰 지혜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데, 믿음이 없으면 그 바다에 확 뛰어 들어갈 수가 없으니, 그 맛을 직접 체험해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식의 논에 의하면 신성취(信成就)라고하여, 믿음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데, 믿지 못하므로 주변에서 서성거리기만 할 뿐입니다.
저도 옛날에 믿음이 부족하니까 괴로웠는데, 꿈에 한쪽 발은 여기에 두고 한쪽 발은 저기다 두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지요, 이쪽 세계(자기가 아는 것)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하는데,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즉 나라는 것, 내가 옳다는 것, 내가 잘한다는 것에 매여서, 저쪽으로 가려고 하지만 이쪽 세계의 것을 놓지 못하니 꼼짝 못 하는 형국이었습니다.
니가 지금 그러고 있으니 공부가 안되지. 두 발을 떼어라 이렇게 외치고만 있었지요!
이게 업식인데, 우리가 업식에 휘말려서 여기서 벗어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하면 될 것 같지만 업식을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해야 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믿음, 신성취(믿음에 대한 성취)가 있어야 그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쉽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렇게하지 못하는 자신을 답답해하지만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젊은 층하고 오랜 인연이 있어서 그분들이 나를 좋아하기는 해도, 두 발을 다 못 띄더라고요!
나를 찾아오기는 하는데 자신이 옳은게 있어서 온통 받아들이지 못하더라고요!
내가 좋아 찾아왔으면 내 말을 믿고 받아들여서 공부하면 되는데, 스님 말씀이 옳기도 하지만, 자기도 옳은 것이 있으므로 온통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한쪽 발은 이쪽에 다른 쪽 발은 저쪽에 놓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지식, 알음알이를 놓지 못하더라고요.
좋은 대학 나오고 머리 좋고 나와 만난지도 몇 십년이 된 사람도 이 공부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 그럴까? 나도 문제는 있지만, 본인들도 자신이 아는 만큼만 알고 그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라는 정도만 알 뿐, 참으로 나를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더라고요, 그러니 저도 그 사람이 믿는 만큼의 마음의 차원밖에 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행자가 들어오면 스님분들이 행자에게 고무신을 닦으라고 시켰는데, 행자는 고무신을 반짝반짝하게 닦았습니다.
스님은 고무신을 보고 이따위로 닦았다고 호통치면서 행자의 뺨을 후려쳤다고 했습니다. 행자는 생각하기를 왜 그러셨을까?
아! 바닥을 안 닦았구나 하고 바닥까지 깨끗이 닦았습니다.
스님이 다시 와서 고무신을 보고, 이따위로 닦았다고 하면서 다시 행자의 다른 쪽 뺨을 후려쳤다고 합니다.
행자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스님이 보고자 하는 것은 이 행자가 발심이 됐는가, 즉 참으로 신심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말할 수 없이 깨끗하게 했는데도 야단만 치니 당연히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하려는 발심이 된 사람은, 왜 저 스님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저럴까?
하고 생각이 든다면, 이것이 화두가 되고 이때부터 공부는 일취월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가짐입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할 때, 아닙니다, 콩으로 메주를 쑤지 왜, 팥으로 메주를 쑵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안되는 것이고, 이해가 안되면 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 왜 왔습니까? 공부하려고 온 것입니다.
깨닫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목적이 정확하게 서 있다면 어떤 것이 와도, 법문(공부재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도인의 눈에는 어떤 것을 봐도 그것이 도의 근원이고, 개의 눈에는 먹을 것, 똥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뭐가 도입니까? 뜰앞의 잣나무다, 마른 똥막대기이다.
라고 조주 스님이 말씀하셨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면, 조주 스님을 확실히 믿고 참구하면, 조주스님이 이렇게 말씀한 뜻을 알게 되고, 조주 스님과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현묘한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현묘한 도리이고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라고 물으니,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라고 말했는데, 문자를 모르는 이 사람은 “짚신시불, 짚신이 곧 부처다.” 라고 받아들이고 참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지게의 꼬리에 짚신을 달아놓고 이것이 부처라고 생각하고, 큰 스님을 믿고, 왜 큰스님은 짚신이 부처라고 했을까? 라고 참구했습니다.
일반사람 같으면 큰스님을 미친 늙은이라고 하며 비난했을 것이지만, 이 사람은 큰 스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잘못 알아들었어도 상관없습니다.
진실한 그 마음, 즉 그 진심 속에서 진리(부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말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당신 말 틀렸어,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틀렸다는 그 마음은 분별입니다.
자신의 알음 알이라는 것이지요.
나중에는 짚신이 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짚신도 부처고 모든 것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글자가 맞고 틀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서고, 안목이 바르면 거시서 광명(자기 마음의 광명)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여러분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공부하기보다, 이 나무꾼같이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이익이 되는 공부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드립니다.
이 금강경 삼가해는 경과 선사들이 해석한 어록이 함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선사들의 해석이 같이 있습니다.
한문을 잘 모르니까 어려워하지 말고 이 경과 어록의 뜻을 알고야 해야 합니다.
해석을 잘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뜻은 어디에 있느냐? 자기의 가슴속에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어떤 사람이 ‘짚신시불’해서 도인이 된 것처럼, 한문은 몰라도 됩니다.
뜻을 아는게 중요합니다.
오늘은 금강경 삼가해 첫 시간입니다.
서문에는 종경서, 야부서, 규봉서등 많이 있는데 어렵고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보기로 하고 경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金剛般若波羅蜜經)
상(上)
제 1 법회인유분
三藏 鳩摩羅什 漢譯 삼장 구마라집 한역
六祖 慧能大師 口訣 육조 혜능대사 구결
冶父 道川禪師 頌 야부 도천선사 송
豫章 宗鏡禪師 提綱 예장 종경선사 제강
涵虛 得通禪師 說誼 함허 득통선사 설의
漢岩 重遠禪師 懸吐 한암 중원선사 현토
雲霽 英無宗師 音譯 운제 영무종사 음역
책을 사면 책 제목을 읽고 저자와 번역한 분을 읽어드려야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 정성과 마음이 있어야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책 내용을 인용해서 말을 하거나, 들어서 얻은 내용을 말하든 그것이 똑똑한 것 같지만, 그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선지식들의 지혜를 자신이 빌려서 쓰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더불어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고, 내 지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를 놓고 나를 보아야 하는데, 우리는 잘나도 나고 못나도 나고 화가 나도 나를 찾는데, 잘나든 못나든 화가 나든 항상 그 자리에서 하는 것입니다.
즉 그 자리에 일체제불과 선지식이 함께 있고, 항상 우리의 마음자리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는 것은 저절로 놓아지는 것이고, 그래야 내가 없는 나(無我)를 알 수 있고, 잘 나고 못 나고, 화가 난 나는 없어지는 것이므로, 여기서 나 없는 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견성(見性)입니다.
이렇게 하여 견성을 끝없이 연습하는 것입니다.
내가 화가 나도 놓고 맡기고 쉬는 과정에서, 참나 , 나없는 나(無我)를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공부입니다.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하사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으로 俱러시니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 구
<번역>
여기서 여시아문 일시 불 제사위국기수급고독원 하사 여대비구중 천이백 오십인 구 러시니,
<해설> - 무각
한때 부처님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사 큰 비구 일천 이백오십 인과 함께 하셨다.
【六祖】
如者는 指義요 是者는 定詞니 阿難이 自稱如是之法을 我從佛聞은
여자 지의 시자 정사 아난 자칭여시지법 아종불문
明不自說也라 故로 言如是我聞이라하시니라 又我者는 性也라 性卽我也니
명불자설야 고 언여시아문 우아자 성야 성즉아야
內外動作이 皆由於性하야 一切를 盡聞일새 故稱我聞也니라 言一時者는
내외동작 개유어생 일체 진문 고칭아문야 언일시자
師資會遇齊集之時니라 佛者는 是說法之主요 在者는 欲明處所니 舍衛國者는
사자회우제집지시 불자 시설법지주 재자 욕명처소 사위국자
波斯匿王의 所居之國이니라
파사익왕 소거지국
祇者는 太子名也니 樹是祇陀太子의 所施일새 故言祇樹니라
기자 태자명야 수시기타태자 소시 고언기수
給孤獨者는 須達長者之異名이니 園이 本屬須達일새 故言給孤獨園이니라
급고독자 수달장자지리명 원 본속수달 고언급고독원
佛者는 梵語어든 唐言에 覺也라 覺義有二하니 一者는 外覺이니 觀諸法空이요
불자 범어 당언 각야 각의유이 일자 외각 관제법공
二者는 內覺이니 知心空寂하야 不被六塵의 所染하야 外不見人之過惡하고
이자 내각 지심공적 불피육진 소염 외불견인지과악
內不被邪迷의 所惑일새 故名曰覺이니 覺卽佛也니라 與者는 佛이 與比丘로
내불피사미 소혹 고명왈각 각즉불야 여자 불 여비구
同住金剛般若無相道場일새 故言與也니라 大比丘者는 是大阿羅漢故니 比丘者는
동주금강반야무사도장 고언여야 대비구자 시대아라한고 비구자
是梵語어든 唐言에 能破六賊일새 故名比丘니라
시범어 당언 능파육적 고명비구
衆은 多也니 千二百五十人者는 其數也니라 俱者는 同處平等法會니라
중 다야 천이백오십인자 기수야 구자 동처평등법회
<번역>
여(如)라 함은 가리킨다는 뜻이요, 시(是)라 함은 결정하는 말이니 아난(阿難)이 스스로 말하기를 <이와 같은 법을 내가 부처님에게 들었다.>고 말한 것은 자기의 말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그러기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고 한 것이다.
또는 <나>라 함은 성품이니 성품이 곧 <나>이다. 그것은 안팎의 동작이 성품에서 생겨 일체를 다 듣기 때문에 <내가 들었다.>고 말한 것이다.
<한때>라고 함은 스승과 제자가 만나서 함께 모이는 때이다.
<부처>라 함은 이분이 설법하는 법주(法主)를 뜻합니다.
<계신다>함은 계시는 처소를 밝힌 것이다.
<사위국>이라함은 바사익왕(波斯匿王)이 거처하는 나라이다.
기(祇)라 함은 태자의 이름이니 나무를 기타 태자가 헌납하였기에 <기수(祇樹)>라 한 것이다.
<급고독(給孤獨)>이라 함은 수달다 장자의 다른 이름이다.
원(園)이 수달다 장자의 소유이기에 <급고독원(給孤獨園)>이라 한 것이다.
<부처>라 함은 범어(梵語)로서 중국에서 각(覺)이라고 번역한다.
각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외각(外覺)’이니 모든 법이 공함을 관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내각(內覺)’이니 마음이 공적(空寂)함을 알아서 여섯 경계에 물들지 않아 밖으로는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안으로는 삿된 것에 미혹되지 아니함을 <覺>이라 한다.
각하면 이를 부처라고 한다. <더불어>라 함은 부처님이 비구(比丘)들과 더불어 함께 금강반야의 무상도량(無相道場)에 머무르기 때문에 <더불어>라고 말한 것이다.
<큰 비구>라 함은 큰 아라한(阿羅漢)이다.
비구는 범어이고 중국 번역에는 여섯 경계의 도적을 능히 깨뜨리기에 <비구>라 한 것이다. ,중(衆)이라 함은 많다는 뜻이요, <일천이백 오십 인>이라 함은 그들의 수이다.
<함께> 한다 함은 그들이 다 같이 평등한 법회에 처함이다.
<해설> - 무각
여기서 육조스님이 ’여(如)‘자는 ’지의(指意)‘로, 가리킬지(指)자를 써서 ’가리킨다‘는 뜻이라고 하셨고,
‘시(是)’라는 것은 ‘정사(定社)’로, ‘결정된 말’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시(如是)이 두 글자속에서 불교는 이미 설명이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인이 불교가 뭡니까, 라고 물으니 영어를 잘 못해서, 나좀보시오 하고 먹는 것, 싸는 것, 이게 불교다. 라고 간단하게 했지요,
그랬더니, 아아 그러냐고 아는 척하고 가더라고요, 다알지는 못했겠지요,
무엇이냐면 앞에서 ‘여’라는 것은 가리키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 다음에에 ’시‘라는 것은 결정된 말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경계가 닥치면 이때, 그 자리는 가리키는 뜻을 의미하여, 자기의 자성 자리로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면서 손가락으로 저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으므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것은 참마음의 본체자리 즉 자성자리입니다.
자성이라고 이름만 있지 달리 이름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야기 할 때, 텅 비어 고요한 자리 ’공적(空寂)‘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달리 말해서 ‘진여(眞如)’는 ‘참 진’자에 ‘그럴 여’자를 써서, 참으로 그러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붙이다 보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여(如)‘에 말을 붙이다 보니 ’가리키는 뜻(지의:指意)‘으로, 가리키는 그것, 진리의 본체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是)‘라는 것은 결정된 말, 결정되서 나온 것이란 무엇일까요?
경계가 닥치면 이 경계를 소화시켜내는 것인데,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했을 때, 이것을 먹으면 돼지라는 이름이 존재할까요,
여기서 가지가지 모습으로 분리되어 내 몸이라는 결정된 말이 생긴 것이고, 똥으로 나오면 똥이라는 결정된 말이 생기는 것이고,
이 똥이 거름이 되어서 나무가 되면, 나무라는 이름의 결정된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와서 나무로 들어가면, 나무라는 결정된 말이 되고,
풀이되고, 꽃이 되고, 열매가 되고, 그 이름은 순간순간 바뀌어서 비라는 것이 가지가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지나가다 독사가 마시면 독사가 되고, 새가 마시면 새가 되는 등, 온갖 것이 다 되는 것입니다.
누가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까 그것 ‘여(如)’라는 것, 그것이 하는 겁니다.
’지의(指意)‘ 그것이 하는데, 작용은 ’시(是)‘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시(如是)‘라는 것으로, 여기서 불교공부는 다한 것이고,
불교의 진리는 다 들어 있습니다.
알고보면 여시(如是)는 본체와 작용입니다.
불교방송에 나갔는데 법명(불명佛名)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보살님들은 세 글자를 주고, 거사님들은 두 글자를 준다고 해서 설명해줄 것을 부탁받아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법명이나 불명은 진리를 표현한 것으로 법에 대한 말이니까 법답게 알면 됩니다.
마른 똥막대기도 부처이다, 너의 불명은 마른 똥막대기다. 라고 하기는 어색하니까, 제가 지을 때는 앞 글자는 본체로보고, 뒷 글자는 작용으로 짓는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본체와 작용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짓는다고 말했습니다.
무각(無覺)에서 무라는 것도 본래 ‘무’니까 본체고, 이름과 모양이 없으니 그냥 ’무‘라고 한것이고, ‘무’에서 ‘각’이라는 작용이 나온 것입니다. 무가 각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비춰서 자신의 법명을 해석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법답게 잘 해석하면 여러분 삶이 잘 열릴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해석을 잘 하는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지혜를 얻으려면 법문을 자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수 있는 것이고, 자기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닥치는 인(因)과 업(業)도 자신이 예전에 만들어낸 것으로, 그것을 후회하지도 말고, 그것을 갖고 지혜롭게 해석해서 살아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삶은 부처님이 대신해주거나 누가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가슴 속에 있는 부처가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뭐든지 지혜롭게 잘 해석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보살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시커먼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아들이 출장을 간다고 하니 걱정이 안될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그 보살님은 아들이 요즘 승진하는 시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꿈에서 소용돌이 속에 빠져드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기보다는, 요즘이 승진 시절이니 아들이 승진할 것이라고 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아들에게 큰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걱정을 할 것이지만, 이 보살님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 꿈을 아들이 승진할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해석을 한다면 소용돌이는 관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소용돌이를 통과한 후나 아니면 소용돌이 밖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보살님은 소용돌이 안과 밖을 생각해서 해석한 것도 아니고, 무작정 자신이 믿는 데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말이 안 되는 일인데 말이 되는 일입니다.
보통 스님들이 해석을 할 때는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꿈속에서 죽고 사는 일은 자기가 생각하는 데로 자기 마음이 그려내는 것입니다.
죽음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지혜가 깊지 않으면 이런 해석이 안되고 주저하게 되는데, 보살님은 이와 같이 지혜롭게 해석한 겁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일단 지혜롭게 해석을 한 후 더이상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100% 그 방향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결국은 돌아서 가더라도 그 방향으로 가게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쓰라고 부처님은 이 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아난이 스스로 말하기를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라고 법문을 시작합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시봉하면서 법문을 가장 많이 들었고, 부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기억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백대중 앞에서 아난존자가 법상에 앉으니 잘 생긴 아난존자로부터 광명이 발하니 오백 대중들이 세 가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돌아가신 부처님이 살아돌아오셨나?
두 번째, 타방에 있는 부처님이 오셔서 법문을 하시나?
세 번째는, 아난존자가 성불해서 부처가 되었나? 하고,
부처님께서는 후에 세 가지 의심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 법문을 할 때, 미리 여시아문 이렇게 시작하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만약 아난존자가 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논쟁이 벌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말을 한다면 믿을 것이지만, 아난 존자가 한다고 생각을 하면 많은 대중이 안 믿을 것이기 때문에, 불신이 생기고, 쟁론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세 가지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여시아문,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라고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모든 의심이 제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부처님이 살아 돌아오신 것도 아니고, 타방에 있는 부처님이 오신 것도 아니고, 아난존자가 성불해서 부처가 되었나 라는 의심이 제거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시아문은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것이지 내 말이 아님을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내말이 아니여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분별하여 좋아하고 싫어하고 화내는 이것은 참나가 아니기에 자기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뭐든지, 내가라고 말하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벌써 법에 맞지 않는 것이므로 나라는 것을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난존자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내 말이 아니어야 부처님의 법에 맞는 말이며, 참 나의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라고 한 것입니다.
또 ‘나’라고 함은 ‘성품’이니 성품이 곧 ‘나’이다.
여시아문에서 ‘아’는 성품의 ‘나’이지 업식의 ‘나’가 아닙니다.
성품의 나는 육도구류를 이미 벗어난 청정한 본래부처 그 자리입니다.
성품이 자기(참 나) 라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공부의 시작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서야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안팎의 동작이 모두 성품에서 생겨 일체를 다 듣기 때문에 내가 들었다고 말한 것이다.
일체를 다 들었기 때문에 ‘아문(我聞)’내가 들었다고 한 것입니다.
‘한때(一時)’라고 함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만나서 모이는 때입니다.
무엇을 말하느냐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한때(一時)여야지 둘이 되면 한때가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아이고 기분 나빠! 아이고 잘났어! 하고 말하는 것은, 누가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러분 몸과 마음속에 모여있는 중생들이 함께 모여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법답게 굴릴줄 알아야 합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앞생각이 중생심(분별)이 나오면 뒷생각이 빨리 깨달아라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한때’ 라고 함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이는 때라는 도리로, 이 도리를 완벽하게 알면 공부는 완전하게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과정이면서 종착점이고, 종착점이면서 과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인이면서 결과이고 결과이면서 원인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 지금 이 자리에서 ,‘나’, 무각이 말하고 있는데 듣고 있는 여러분이 스승입니다.
그런데 내가, 스승과 제자로써 둘로 보고, 내가 듣기만 하고 무각 스님은 말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한 때’라는 도리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에 부합할 수 없는 것이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무각 스님)이 하는 소리도 자기 성품으로부터 나온 말이고, 듣는 것도 자기의 성품으로부터 나온 말을 듣는 것이라고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안다면 ‘한 때‘라는 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둘 아닌 도리 ’불이법(不二法)‘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고, 불이문을 통과해야 법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이법의 도리에서 성품의 자리는 둘이 아니고, 스님과 내가 하나이고, 말하고 듣는 것이 하나인 겁니다.
성품의 자리는 텅비어 고요한(寂滅)한 것으로,허공과 같이 하나입니다.
제가 법문을 이야기해도 이 법문은 성품자리에서 나온 것이고, 여러분이 들어도 듣는 놈은 여러분의 성품이 듣는 것입니다.
물론 업식도 더불어서 듣지만 이것 또한 성품을 통해서 듣는 것입니다.
저 말소리가 자기 성품으로부터 나온 말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나에게 욕을 하더라도, 저 소리가 나의 성품자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알수 있고, 받아들일수 있기에, 그 소리를 싫어하지 않고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불이문을 통과하는 것이고, 이 문을 통과하면 여러분은 법을 볼 수 있고, 부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죽자사자 앉아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무릎이 깨지도록 절을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바른 안목이 선다면, 견법(見法), 견불(見佛), 견성(見性)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라 함은 설법하는 법주(法主), 법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기에 주인입니다.
그런데 그 법주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여러분의 가슴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름(무명)에 걷혀야 밝아져서 가슴속에 있는 참 광명이 쏟아질 수 있는데, 지금은 무명의 구름이 두꺼워 자기속의 광명이 구름에 막혀 나올 수가 없고, 그러니 말과 행이 어두운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말과 행이 밝게 나올 수 있어 좋은 것입니다.
결국 법주(부처), 설법하는 주체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슴속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在)’는 계신다는 뜻으로, 제사위국기수급고독(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이라고 했는데, 계시는 장소(處所)를 밝힌 것으로, 어디냐면 사위국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사위국은 파사익왕이 거처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수의 ‘기(祇)’는 기타태자의 이름이고, ‘수’는 나무로, 기타태자가 나무를 헌납하였기에 ‘기수(祇樹)라 한 것이고,
’급고독‘이라 함은 수달다 장자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니 기타태자가 자신이 소유한 큰 공원을 부처님께 헌납하고, 급고독 장자는 여기에 부처님이 설법하는 장소인 기원정사를 지은 것입니다.
수달다 장자는 지금으로 따지면 사업가로, 이분은 장사를 참 잘했습니다.
왜냐하면 삼 천 년이 지난 지금도 불자들이 모두 알아주고 좋아하니까요, 아무리 돈이 많고 역사속의 황제라도, 지나고 나면 잊어버리는데 불자라면 모두 기억을 하고 고맙게 생각 하니까요.
그러니 한 생만 사업을 잘 한 것이 아니라 세세생생 사업을 잘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분은 고독(孤獨)하고 외로운 자에게 ‘급(給)’, 베풀었다 하여, 급고독(孤獨園)이라 불렸고, 이것은 수달다 장자의 다른 이름입니다.
’원(園:동산)‘은 수달자 장자의 소유이기에 <급고독원(給孤獨園)>이라 한 것입니다.
부처라 함은 범어로서, 중국에서는 각(覺)이라고 번역하는데, ‘부처 불(佛)’자는 ‘깨달을 각(覺)’자와 같은 뜻입니다.
우리들은 부처님이라 하는데 ‘각자(覺者)‘는 깨달은 사람으로, 부처님을 뜻합니다.
깨달음은 모습이 없습니다. 깨달음은 우리들 가슴속에도 있고, 모든 곳에 다 있습니다.
진리는 본래 다 있는데 모르니까 아직 못 깨달은 것이고, 깨달으면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란 하나의 고정된 고유명사가 아니고, 깨달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통명사입니다.
그래서 이미 여러분 가슴속에 있는 것이고,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본래부처라 한 것입니다.
‘각’에 모습이나 형상이 있습니까? 각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외각(外覺)’이니 모든 법이 ‘공(空)’함을 ‘관(觀)’하는 것이고,
다음은 ‘내각(內覺)’마음이 ‘공적(空寂)’함을 알아서 ‘여섯 경계’에 물들지 않으면 안팎이 모두 공적(空寂)해지니 여섯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밖으로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안으로는 삿된 것에 미혹되지 아니함을 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보고 자기는 돌아보지 않는데, 불교는 기본적으로 자기를 돌아볼줄 아는 것이 기본입니다.
‘더불어’라 함은, 부처님이 비구들과 더불어 함께 금강반야의 무상 도량에 머무르기 때문에 ‘더불어’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큰 비구’라 함은 대 비구, 큰 아라한을 말하는 것이고, ‘비구’는 범어이고 여섯 경계(육식 六識: 안식,이식,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도적을 능히 깨뜨리기 때문에, 비구라 한 것입니다.
‘중(衆)’이라고 함은 많다는 뜻이고,
‘일천이백오십인’이라고 함은 비구의 수를 말하는 것이고,
‘구(俱:함께구)‘ 라는 뜻은 그들과 평등하게 법회에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여러분이 모두 깨달아도 일불이되는 것입니다.
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위에 전등이 많은데 이곳으로 쏟아지는 광명은 한 광명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광명이라고 할 수 있고, 여러분이 모두 성불해서 광명을 밝힌다 해도 하나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세일불(一世一佛)이라고 하여, 잘못 해석해서 이 세상에 부처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성불했을 때, 우리 모두는 각각의 부처가 아니라 모두 한 부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일세 일불 이라는 말을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