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동네 꽃 지는 날 윗동네에 갔다. 한창 핀 꽃 터널에서 나이를 잊은 사람들이 꽃잎처럼 팔랑댄다. 포즈를 취하는 꽃잎들이 삶의 한 컷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의 뒷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긴 겨울을 이겨내지 않고 꽃피는 나무가 있기나 할까. 시간 속에 성숙하고 만개하는 게 어디 꽃이나 나무만일까. 봄을 즐기는 사람들 틈에서
지나간봄에게 달려가 본다.
봄은 은빛으로 다가온다.
누런 잔디와 연둣빛 잔디가 섞여 있는 이른 봄이면 묏등에 앉아 은비늘을 뿌린 듯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을 멀리서 내려다봤다. 어린 나이에도 얼음이 풀린 물은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보였다. 심심한 손을 잊으려 잔디를 한 움큼 훑으면 아직 떨구지 못한 씨앗이 미련처럼 손에 잡혀 흩어졌다. 숨은 듯 피어 있는 뽀송한 할미꽃을 처음 찾은 것도 그때였다. 팥죽빛 꽃을 감싼 은빛 잔털은 너무나 여려서 어린아이 두 뺨의 솜털 같았다. 저 아래 강가에는 버들강아지가 무리 지어 피어나며 봄을 재촉하겠지. 어딘가로 강물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싶은, 꿈꾸는 아이도 그렇게 봄 앓이를 했다.
봄은 불신으로 찾아온다.
햇살이 순한 봄날 보리밭 이랑 사이로 살구꽃 잎, 복숭아꽃 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날 아이는 붉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아버지 앞에 앉았다. 봄볕 아래 앉으면 감은 두 눈으로 들어오는 빛 사이로 화려한 세상이 펼쳐졌다. 빛살 놀이에 세상은 더욱 아름다웠다. 가끔은 나른한 병아리처럼 졸기 일쑤여서 고개가 휘청하며 눈을 떴다.
아버지는 이발하다 가위나 면도날이 잘 들지 않으면 가죽 혁대에 쓱쓱 문질렀다. 머리 손질이 끝나면 비누 거품을 묻힌 둥근 솔을 뒷목에 쓱쓱 발랐다. 부드럽고 차가운 느낌이 오소소 전해졌다. 정돈되는 머리카락 끝부분과 밀려나는 뒷목의 솜털을 촉감과 청각으로 짐작했다.
드디어 눈앞에 그늘이 지면 면도날의 섬뜩함에 질끈 눈을 감았다. 차가운 솔이 이마와 두 뺨을 쓸며 얼굴 면도가 시작됐다. 이마 선을 경계로 유난히 노랗게 자란 잔 머리카락과 보스스한 귀밑 잔털이 비눗물과 함께 면도날에 밀려 나갔다. 귀밑머리에서 뺨으로 밀어 올리는 그 어디쯤에서부터 이이는 늘 두려움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아래에서 위로 길게 날이 스쳐 지나가다 멈출 때면 확 그어지는 섬뜩함에 진저리치곤 했다. 붉은 꽃잎처럼 뚝뚝 떨어지는 피를 상상하며 봄은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아버지는 그때에도 완전히 믿지 못할 불신의 존재였다.
봄은 애잔함으로 넘쳐온다.
봄은 할아버지의 해소 기침 소리가 심해지는 계절이다. 담배를 즐기신 탓에, 환절기엔 기침 소리가 더 잦아진다. 밤새 가쁜 숨으로 뱉어낸 가래로 가득 찬 재떨이도 더러운 줄 모르고 비워내던 소녀가 그 방에 앉아 있다. 자고 나면 장판에 살비듬 들이 꽃가루처럼 떨어진 방, 할아버지는 봄이 지겨웠을까. 하얀 수염을 이쪽저쪽 넘기시다 은빛 용각산 뚜껑을 열고 조그만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한 번 떠서 툭, 목으로 털어 넣던 야윈 팔이 금방이라도 내 손에 잡힐 것만같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속으로 되뇌던 말은 은단 통에서 은단 몇 알을 꺼내 손바닥에 톡 떨어뜨려 주시던 할아버지의 얼굴로 마감된다. 한 세기 가까이 사시면서도 소리 내어 ‘사랑한다’ 말해주지 않았지만, 핏줄은 짠한 것이라고, 봄은 알려 주었다.
봄은 흔들리며 온다.
봄에는 스카프가 제법 잘 어울린다. 연분홍 스카프나 목련 꽃잎 빛깔 스카프로 멋을 낸 여자를 보면 눈길이 더 머문다. 봄바람에 살랑대는 엷은 스카프는 여인의 미소와 함께 봄을 밝히는 전령이 된다. 봄바람에 여인의 치맛자락이 살랑대고 스카프가 날리면 봄은 꿈틀거린다. 생의 의욕과 삶의 갈구가 극점을 달려 자제하기 힘들다. 오죽하면 신라 시대 여승 설요는 봄날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름다운 꽃향기에 마음이 설레는데 어찌할거나, 꽃다운 이내 청춘’이라 탄식하는 반속요(返俗謠)를 읊으며 환속하고 말았을까.
봄은 눈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온다.
사월 초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산장에 갔다. 짙은 어둠과 낯선 불안을 안고 밤길을 올 친구를 걱정하며 서성거렸다. 자정이 지나가는 절벽 같은 어둠 속에서 눈발이 코 끝에 앉더니 눈꽃이 하늘을 덮었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제는 더 이상의 속상할 일은 없겠지 하고 안심하는 순간, 가슴 치는 일이 생겼다. 지친 어깨를 벽에 기댈 즈음이면 늘어진 몸을 애써 일으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생기곤 했다. 드물게 평화로운 시간이 길어지면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불안이 스멀거리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사월의 눈보다 더한 오월의 눈이 내리듯 인생길은 예고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사월의 눈이든 오월의 눈이든 계절을 거역할 수는 없다. 이튿날 아침, 내린 눈을 치우자 냉이꽃이 피었고 쑥이 향내를 한껏 올렸다. 화살나무 이파리는 세어지고 두릅은 다물었던 입술을 벌려 햇살을 한 움큼 퍼먹고 있었다. 때아닌 한파도 움트는 생명을 어찌하지 못하니 묵묵히 자신의 계절을 살아낼 뿐이다. 모든 일은 봄눈(春雪)처럼 덧없이 사라질 것이니까.
사람들은 알까. 연분홍 잎을 단 벚꽃보다 벚꽃 진 자리가 더 붉다는 것을, 떠나보내는 일은 언제나 서글픔을 동반한다. 떠나온 것들은 더욱 쓸쓸하다. 떠나온 고향, 떠나보낸 사람들, 흘러간 시간과 지나간 기억들로 이 봄 명치끝이 붉어진다. 기억 속의 봄들은 때론 난만했고 때론 세찼지만 지나고 보니 모두가 아지랑이처럼 아련하다. 봄날의 충동조차 한 줄의 이야기가 되고 한 사람의 역사가 되듯, 뽀얀 물안개처럼 할미꽃의 잔털처럼 아이의 솜털처럼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처럼 이 봄도 때론 잊히고 때론 기억되리라. 꽃을 보낸 나무의 눈시울이 제 모습을 찾을 때쯤 연둣빛 잎들 사이로 열매들이 오종종할 테다.
그러고 보면 오지 않는 봄은 단 한 해도 없었다. 불신의 봄을 믿음의 봄눈(春雪)으로 보니 모든 것이 참 따스하다.
첫댓글
찾아주심 감사드립니다. 황사가 심합니다. 조심 하십시요 .늘 건강하시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