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1번째 시간으로서 “영적 세례의 의미” 霊的なバプテスマの意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본문 중에서 6장 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私たちは、キリストの死にあずかるバプテスマによって、キリストとともに葬られたのです。それは、ちょうどキリストが御父の栄光によっ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新しいいのちに歩むためです。
여기서 성경은 세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죄 가운데에서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요,
다시 올라오는 것은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과 같이 세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례에 대해서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례라고 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신약이
되어서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는데, 구약에도 세례가 있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그렇다고
신약에 등장하는 세례와는 조금 모습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의 세례를 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0장 1절~2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2절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兄弟たち。あなたがたには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の先祖はみな雲の下にいて、みな海を通って行きました。
そしてみな、雲の中と海の中で、モーセにつくバプテスマを受け、
이 말씀은 모세에 의해 애굽을 탈출했던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기록입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세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여기
1절에 보면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海を通って行きました라고 합니다.
바다 가운데로 지나면서 세례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하지요.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바다를 건넌 것은 단 한 번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디냐 하면, 그렇습니다. 바로 홍해를 건넜던 것이지요.
출애굽기 14장에 의하면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데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옵니다.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어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제 홍해와 애굽 군대 사이에서 죽을 일만 남았어요.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모두 건너게 해주시고, 그것만이 아니라 모든 애굽 군대를 홍해 바다
속으로 잠겨 버리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로 이 홍해에 대해서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정도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영화 십계를 보시면 찰턴 헤스턴이 홍해를 향해서 손을 뻗었더니 순식간에 홍해가 쫘악 갈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사실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モーセが手を海に向けて伸ばすと、主は一晩中、強い東風で海を押し戻し、海を乾いた地とされた。水は分かれた。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민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바다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밤새도록 큰 동풍을 불게
하셔서 갈라지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마치 밀물과 썰물 引き潮と満ち潮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대가 썰물 시간대라서 바닷물이 물러가고 육지가 드러났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어떤 자연현상으로
바다가 물러가고 얕은 땅이 드러나는 현상을 가지고 모세의 기적이다 뭐다 하는 사람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냐 하면, 바로 다음 구절인 출애굽기 14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2절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イスラエルの子らは、海の真ん中の乾いた地面を進んで行った。水は彼らのために右も左も壁になった。
성경에는 분명히 물이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세상에 어느 나라에서 썰물 현상이 일어날 때 물이, 그것도 바닷물이
좌우에 벽이 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반론을 하려면 좀 성경 기록을 보시고 하던지 하지, 그냥 자기 생각으로만 성경을
억지로 해석을 하려고 하니 이런 주장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 홍해사건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 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그 사이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한 번 가라앉았다가 다시 올라왔습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세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비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있어서 이 홍해 사건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홍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꼭 홍해를 지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홍해가 없는 코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평탄한 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홍해를 지나가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사건, 홍해 사이를 지나가게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홍해 사건의 효과’ 즉, 이 홍해를 건넘으로
인해서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면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게 하신 그 이유를 아실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금 막 애굽을 탈출했을 당시에는 성경이 아직 없었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막연한 전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브라함도 알고 이삭도 알고 야곱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기간 만도 430년입니다. 거기다가 애굽에서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노예로 살아왔지요. 그러니 교육이나 제대로 받았겠습니까.
이렇게 되니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대단히 부족했습니다. 그와 같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 그 누구도 이를 평범한 자연현상이라고 우길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뒤에서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를 완전히 단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민족이 평지로 이동해왔었다면, 처음에는 편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 길은 죽음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애굽 군대가 그들을 죽이려고 추격해오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그냥 평범한 군대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14장 5절~7절
“5.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6.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民が去ったことがエジプトの王に告げられると、ファラオとその家臣たちは民に対する考えを変えて言った。「われわれは、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イスラエルをわれわれのための労役から解放してしまったとは。」
そこでファラオは戦車を整え、自分でその軍勢を率い、
選り抜きの戦車六百、そしてエジプトの全戦車を、それぞれに補佐官をつけて率いて行った。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왕 몰래 애굽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아무리 수가 많다 하더라도 노예였던 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탈출할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1절~32절
“31.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彼はその夜、モーセとアロンを呼び寄せて言った。「おまえたちもイスラエル人も立って、私の民の中から出て行け。おまえたちが言うとおりに、行って主に仕えよ。
おまえたちが言ったとおり、羊の群れも牛の群れも連れて出て行け。そして私のためにも祝福を祈れ。」
애굽 왕 바로는 분명히 그들에게 애굽을 나가는 것에 대해서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가고 나니까 마음이 바뀌어서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냥 부하들에게 시켜서 추격하도록 명한 것이 아니라 왕이 친히 추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규모는 대단했겠지요.
출애굽기 14장 7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選り抜きの戦車六百、そしてエジプトの全戦車を、それぞれに補佐官をつけて率いて行った。
여기서 병거라고 하는 것은 말이 끄는 전투용 차량인데, 요즘으로 본다면 탱크 정도의 공격력과 기동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어떠냐 하면, 선발된 병거 600대를 포함해서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선발된 병거라고 하면, 지금 식으로 본다면, 특수부대가 모는 탱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 규모가 어떻게 돼요? 예, 군 특수부대와 그들이 이끄는 탱크 600대를 비롯해서 애굽의 모든 탱크가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에 대해서 민수기 1장 45절~46절에 보면
“45.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이스라엘 자손이 다 계수되었으니
46.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
一族ごとに登録された二十歳以上のイスラエルの子らで、イスラエルで戦に出ることができる者すべて、
登録された者の総数は、六十万三千五百五十人であった。
라고 기록합니다.
이 숫자는 전쟁에서 싸울만한 이스라엘 자손의 수이기 때문에 미성년자와 여성, 그리고 전쟁에 나갈 수 없는 고령자는 제외된 숫자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당시 출애굽을 한 인구는 대략 200만명 정도였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200만이라 하더라도,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애굽에서 국가의 전 군사력을 총 동원해서 달려드는데, 이를 이겨낼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홍해 사건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27절~28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モーセが手を海に向けて伸ばすと、夜明けに海が元の状態に戻った。エジプト人は迫り来る水から逃れようとしたが、主はエジプト人を海のただ中に投げ込まれた。
水は元に戻り、後を追って海に入ったファラオの全軍勢の戦車と騎兵をおおった。残った者は一人もいなかった。
이스라엘 자손들이 갈라진 홍해 사이를 건넌 다음, 그 길을 따라 애굽 군대들도 추격해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홍해를 닫아버리자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홍해사건으로 인해서 애굽 군대는 모두 멸망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을 완전히 단절시켜 버리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지도도 있고 그리고 인공위성도 있어서 스마트폰만 있다면 자기 위치를 알 수 있고 목적지를 설정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길을 안내해주기도 합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지금처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지도는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지도는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남의 나라 지도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기 나라의 정확한
지도는 국가기밀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나마 평민도 아닌 노예로 살아왔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실에서 자랐습니다만, 그는 마흔 살에 도망쳐 나와서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그런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해도 다른 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건너온 홍해는 이미 막혀버렸으니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되돌아갈 수 없도록 강제적으로 만드심으로 인해서 하나님 계획에 순종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서는 이 홍해 사건을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제로 한 사람씩 물 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식의 직접적인 세례라기보다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세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홍해 사건을 영적인 세례라고 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하여 영적인 세례가 무엇인지, 영적인 세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영적 세례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고난을 대신해서 모두 받아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더 이상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여러분, 홍해 바다에 길을 내셔서 200만 명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아무리 어려움이 크다고 하더라도, 어찌 나 하나 건널
길을 내주시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홍해를 가르고 길을 내주시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게 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영적 세례는 나를 추격하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 단절시켜줍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해치기 위해서 추격해오고 있어요. 그러면 그 추격해오는 세력이 한 명이면 좋겠어요? 아니면 100명이면 좋겠어요?
뭐, 사실 1명이라 하더라도 나를 추격해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100명 보다는 낫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추격했던 애굽 군대가 절반 정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뜻 생각하기에는, 절반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게 웬 일이에요. 절반이 아니라 애굽의 모든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절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애굽의 군대가 절반만 추격해 와서 절반만 홍해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바로 왕은 나머지 절반 군대를 이끌고서 다른 길로라도 추격을 계속해 와서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여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행히, 정말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다행히 바로가 애굽의 전 군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장 무시무시한 특수부대까지 포함한
전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해온 덕분에, 그 군대를 완전히 멸망 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작은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럭저럭 견딜 만 하겠는데, 이게 원 지금 닥치고 있는 어려움은 전혀 작지 않아요. 정말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내게 닥쳐오는 어려움이 너무나도 커서 감당할 수가 없어요. 정말 죽을 것만 같아요.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특별히 크나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라면, 애굽 군대로부터 추격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어려움이었다면 그게 해결되더라도 더 큰 어려움이 또다시 닥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렇게 큰 어려움이 닥쳐오고 있는 것은,
어쩌면 결과론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몰살시켜 버리신 것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를 완전히 구원해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우리는 가져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던 어떤 분은,
“아니, 지금 당장 힘든데 사람이 어떻게 결과론적으로만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씀 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과정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그 결과에 주목해야 합니다.
냉난방이 잘된 고급 호텔에서 공부를 한 학생과, 정말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에서 공부한 학생이 있었는데,
편한 환경에서 공부한 학생은 시험에 떨어지고,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한 학생은 붙었어요.
그렇다면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합니까? 아니에요. 결과적으로 시험에 붙었느냐 떨어졌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지금 형편이 편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축복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려움 속에 있더라도 이 모든 시련을 단번에 해결해 주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세례는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앞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가끔 보면 그런 분들, 여러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이래봬도 말이야.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말이야.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이 말은 무엇입니까. 이는 다 과거에 집착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 있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나를 무시하지 말아라. 내가 과거에는 이러이러한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이를 인정해
달라, 이것 아니겠습니까.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특히나 예수님을 믿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예배도 드리지 않고 마음 편히 놀러갈 수도 있고, 헌금도 내지 않아도 되는데, 특별히 부담이 되는 것이
십일조겠지요? 이게 참 부담이 됩니다. 제가 왜 그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다니다 보면 봉사나 전도처럼 이것저것 해야 될 일도 많아요.
어디 그 뿐이에요? 교회에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있겠어요? 큰 교회만이 아니라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자기가 꼴보기 싫은
사람이 반드시 한 두 명 정도는 있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만, 교회에 안 나가면 그런 사람도 안 보고 얼마나 좋겠어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그래, 과거로 돌아가자. 이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누구였냐 하면,
바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습니다.
민수기 14장 2절~4절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그들은 무슨 어려움만 닥치기만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리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노예생활을 다시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나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놀라운 능력으로 인도해냈더니, 그게 싫다는 거예요. 축복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냥 남의 종으로 살고 싶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미련한 말입니까.
이와 같은 미련한 생각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26장 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犬が自分の吐いた物に戻って来るように、愚かな者は自分の愚かさを繰り返す。
베드로후서 2장 22절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犬は自分が吐いた物に戻る」、「豚は身を洗って、また泥の中を転がる」という、ことわざどおりのことが、彼らに起こっているのです。
우리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지저분하고 낡은 옷을 버리고, 깨끗하게 목욕을 한 다음에 또다시 그 지저분한 옷을 입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장래에 하나님께서 주실 축복에 대한 소망을 버려버리고, 더럽고 지저분했던 과거에 집착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노예생활이나 하던 과거에 집착했던 광야 1세대들의 최후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5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しかし、彼らの大部分は神のみこころにかなわず、荒野で滅ぼされました。
애굽에서의 노예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그들, 과거에 집착했던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축복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결국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감사하고, 장차 놀라운 축복으로 채워주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私たちは、キリストの死にあずかるバプテスマによって、キリストとともに葬られたのです。それは、ちょうどキリストが御父の栄光によっ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新しいいのちに歩むためです。
우리가 영적인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 안에 있던 과거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도 이와 같은 영적인 세례로 거듭남으로 인하여, 주님께 순종하며 감사하고, 장래에 소망을 가짐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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