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중화학은 전 국가적으로 6개업종 8개 단지와 연구단지까지 모두가 목표연도인 81년에는 "동시 착공, 동시 준공"이란 기적을 현실화시키는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
81년도 목표인 수출 100억 불 달성은 77년 말에 이미 달성하였고 각각의 공업 단지에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서 웅장한 공업단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73년대 초 중화학을 선언하니 전내각이 결사코 반대한 것이 생각난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내각 전부가 중화학은 망국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각의 반대에 대하여 최소한의 기합도
주지 않고 조용히 불러 설득으로 무마하며 내가 책임진다고 하고 동참시켰다.
이제 수출액수가 문제가 아니고 중화학의 모든 공장이 들어서는 결과를 바라보게 되었다.
60년대의 노동집약 산업이 장치기술집약 산업구조로 개선되는 되는 것이니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중화학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사람 없었다.
이리하여 79년 중반에 중화학 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참석하에 79년 말에서 시작하여 80년도 중반에 걸쳐 단지별로 준공식을 거행하여 중화학을 홍보 선전하는 자랑스러운 일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있었다.
중화학 담당의 경제 2 비서실은 연말에 의례히 나타나는 피로현상도 해소하고 80년대의 미래에 도약을 위하는 방편으로 중화학의 준공식을 거행하는 것을 계획했다.
중화학을 건설하는 것도 기적인데 6개 중화학 업종과 1개의 연구단지를 동시에 착공하여 동시에 준공하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이리하여 이사실을 국내뿐만 아니고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중화학의 한 가지 목표인 100억 불의 수출목표는 4년 조기인 77년도에 달성하여 77년 12월 22일 박정희 대통령 참석하에 장충 체육관에서 성대한 100억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따라서 77년에 100역 불 수출 목표를 이미 달성했으므로 2,30% 정도는 충분히 초과 달성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79년 말의 중화학 준공식 거행은 박정희 대통령 참석하에 각 단지별 주관으로 단지 하나하나씩 두 달 간격으로 거행할 예정이었다.
이를 실행에 욺 기기 위하여 호남의 유일한 중화학단지로 박정희 대통령이 입지를 지정해 준 여천/여수석유화학단지 준공식을 1979년 내에 상징적으로 제일 먼저 거행키로 계획했다
오원철 수석이 박정희 대통령께 이를 보고 드렸더니 대통령은 흔쾌히 승낙하셨다.
2. 10 26 사건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까!
필자의 " 중화학에 박정희의 혼이 살아있다"라는 저서 말미에 청와대 시절의 후일담으로 10 26 사건의 비사를 기술한 바 있다.
중화학은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조 호낭이 시작하는 여천이 조수간만의 차가 3 meter 이상이어서 대형유조선이 출입할 수 없는데도 박정희 대통령의 발려로 제2정유인 호남정유를 승인하셨다.
원유하역은 원격 해상에 Buoy ( IMODCO)를 설치하여 해결하였다.
이리하여 호남에 정유공장이 들어섬으로써 여수시와 여천군 일대에 항만을 만들고 세계 일류급의 석유화학 단지로 공장과 배후주택 단지를 고려해서 당시 한국 최대의 3천만 평의 석유화학 단지를 지정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호남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여천단지 선발사업으로 건설된 님해화학의 제7 비의 준공식과 76년 11월 10월의 여수 석유화학단지 기공식에 참석하셨다.
오원철 수석이 박정희 대통령께 중화학 준공식 거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단지라고 할 수 있는 여천 /여수 석유화학단지 단지부터 시작한다고 보고 드리고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
대통령 비서실 (당시 실장 김계원) 의전실에서 약 2 개윌 전에 여천 석화단지 준공식 날자를 79년 10윌 26일로 정해 주었다.
대통령의 의전행사는 대통령 비서실의전실(Protocol ) 소관으로 2급 비밀 사항이었다 오원철 수석이 비밀로 하여 그가 신뢰하는 여천 단지 최병오 전무 준비 위원회 단장 에게만 지시했다.
최병오 단장이 한날 필자 시무실에 들렀다. 준공식이 1주일 후로 임박했는데도 의전실에서 참석 인윈등을 알려준다 든 지 준비상황 조사 등에 대하여 전연 무소식이리는 것이었다.
필자가 의전실에 전화했더니 놀랍게도 10월 26일 여천 석화단지 준공식 거행일을 경호실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여수석유화학 준공식이 지방의 십 교천 방조제 행사로 바뀌었으니 누가 왜 바꿨는지를 생각하면 통곡할 노릇이다.
필자가 추측한 바로는 차지철 경호실장의 강성 경호심의 발로로 여천은 헬리콥터에 의한 당일행사는 불가능하여 일박을 했어야 하기 때문에 여수 석유화학 단지 준공식을 취소하고 이날을 당일 치기의 삽교천 행사로 바꾼 것이다.
삽교천 행사 후 만찬 장소가 궁정동 안가가 중정 산하 기관이니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자동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으로 권력 다툼에서 이를 조정하는 것은 비서실장 소항인데 김계원 실장이 방임하는 가운데 차지철 경호실장이 행사업무를 관장하였던 것이다.
당초대로 여천 석화단지 준공식에 참석하시고 호남정유 CALTEX Beach Hse에 일박하셨으면 궁정동의 10 26 사건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 부하인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권력 암투로 일어난 일이라 사전에 막을 수 없는 운명의 비극의 역사였다.
여수단지 준공식 행사 계획을 증명하는 것이 박정회 대통령 준공식으로 준비했던 그대로 다음 해 80년 1윌 29일 최규하 대통령 참석리에 거행되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서거하셨다. 그가 남겨 놓으신 여천/여수 석유화학 단지는 한국 제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유화학 단지가 되어 한국을 빛내주고 있다.
지금 석유화학의 불경기에 대비하여국가 2대 지주 산업인 철강공업괴 더불어 피나는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삽교천 방조제는 주민의 숙원사업이었던 방조제 축조를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 최후의 준공식을 거행하여 주신 은혜를 입은 것이다.
삽교천 행사의 정식 명칭은 "삽교천 지구 농업개발 및 삽교호 준공식"이었다.
이로써 아산(군)은 농. 공, 수산업과 관광 그리고 서해를 향한 해양 도시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 (제1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