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은 그의 수신자들에게 믿음의 공동체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살아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언급합니다.
16절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에 반대 개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16절에 보면 세 가지 항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세 가지로 보는 사람이 있고, 어떤 학자는 육신의 정력 아래에 하부 개념으로 안목의 정력과 이생에 자랑이 있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 가지로, 그러니까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에 대한 말씀을 잠깐 나누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 뭘까요?
안목의 정욕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표적인 것을 한번 우리가 들어보면 아 안목의 정욕이 이런 것이구나고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안목의 정욕은 시기입니다. 시기 시기하다 할 때 시기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생기는 탐욕이 눈이 만들어내는 탐욕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안목의 정욕을 생기게 하는 세상적인 수단이 있어요. 그것을 SNS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SNS를 하면서 행복해해요.
근데 과연 이게 행복한 일일까요?
많은 시간을 투자해요. 저도 어떨 때는 꽤 많은 시간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해요.
그럼 과연 SNS에 많이 노출되는 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까?
그렇지 않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SNS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을수록 우울감을 호소한다고 합니다. 우리 내면의 탐욕이 아름다운 것을 즐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게 만들기 때문인 거예요. 탐욕이 없으면 그냥 아름다운 것을 즐기면 돼요. 근데 이 탐욕은 아름다운 것을 비교하게 만들어요.
나보다 잘 사네, 나보다 더 예쁘네 나보다 더 행복하네.
그래서 SNS를 많이 할수록 상대적인 박탈감에 빠져서 우울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SNS는 실제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도구인 거예요.
SNS로 인한 우울증을 카페인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카페인 우울증은 대표적인 소셜미디어인 카카오스토리 그리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앞자를 따서 카페인 우울증이라고 해요. SNS에 노출된 타인의 모습을 보고 상대적인 박탈감과 우울감에 빠지고 일상생활에 집중하기 어려운 게 이 우울증의 특징인 거예요. 그래서 이 대표적인 안목의 정욕이 SNS인 거예요.
사람들은 행복하려고 또 소식을 알려고 사람과 교제하려고 SNS를 많이 접하고 보지만 정작 그 안에서 느끼는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과 그리고 우울감이라는 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SNS가 자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상대적으로 우울감도 더 늘어납니다. 그래서 안목의 정력을 조심해야 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생의 자랑이에요. 이생이라는 게 뭘까 성경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이걸 번역하는데 그냥 오늘은 제가 재산이라는 단어로 이 이생 생리조정 생이라는 단어를 한번 번역해 봤어요. 그러니까 이생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는 재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재산을 사랑하게 되면 자기 만족을 위해서 쓰게 됩니다.
반면에 재산을 소유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재산과 소유를 흘려보내게 돼요. 내가 이생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를 판가름 할 수 있는 도구가 있는데 내가 나의 만족을 위해서 쓰며 나는 이생 그러니까 재산을 사랑하는 사람인 거예요.
반면에 재산을 흘러가게 하는 데 쓰면 나는 인생을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을 사랑해요. 그래서 그것을 자기를 위해 써요. 그럼 당연히 사람이 행복하고 만족해야 되는데 문제는 자기를 위해서도 행복감이나 만족감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거예요. 오히려 소유하지 않고 흘려보낼 때 더 많은 만족감과 행복감이 우리 가운데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그리고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7절에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에서 지나가되라는 단어가 있어요. 이 세상도 지나가되 그 정욕도 지나가되 이 동사는 현재 진행형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도 세상의 정력도 지금 지나가고 있다는 거예요. 나를 떠나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만 모르는 거죠. 이게 내게 지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를 떠나가고 있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지혜롭지 못해서 이것이 지금 나를 떠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과 그리고 그 정욕이 나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를 떠나가고 있다. 이게 지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몰라요. 우리가 병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자극하는 건 되게 어려운 일이에요. 우리가 병에 걸리지만 그 병이 내 삶에서 내 몸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건 되게 어려워요. 만약에 안 달면 되게 큰 고통이 따르는 거죠. 어제보다 오늘 더 아프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아파요. 그러면 지금 이것이 이 병이 내 삶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근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게 지금 병이 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이 세상과 그 정력이 우리가 정력을 그렇게 느낀다는 거죠. 지금 이게 떠나가고 있는데 나에게부터 멀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정작 그것을 잘 모르고 그래서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거죠. 떠나가고 있는 것을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을 점점 가치 없어지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거죠. 왜 그 자체를 모르니까 그리고 거하다는 말은 머무르다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는 의미예요.
이런 거죠. 세상은 지금 나의 삶에서 떠나가고 있는 중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내 안에 점점 머물러 있다는 거죠. 세상을 사랑하는 건 떠나간다는 거예요.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떠나가고 있다는 거예요.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내 삶에 계속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이것은 나에게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에게서 떠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내 삶에 머물러 계신다는 거예요.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시고 머물러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나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이 여러분과 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껏 이제껏 많이 사랑하셨잖아요. 아멘인가요? 이 기침이 여러분 지금까지 세상의 것 많이 사랑하셨죠?
할렐루야 좀 아멘 하세요. 맞잖아요. 지금까지 세상 것 많이 사랑하셨잖아요. 그럼 앞으로는 좀 덜 사랑하면 사역이 안 될까요? 앞으로는 제가 완전히 사랑하지 말라고 안 할 테니까 좀 덜 사랑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게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게 그분의 뜻이 내게 머물러 있게 되어 떠나가지 않고 재산권 사랑하면 떠나가는 것이고요. 사라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머물러 있고 자리 잡게 있고 된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우리가 세상을 마음껏 사랑했으니까 이제는 좀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고 남은 생애를 살아가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