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의 평화사상
고 형 일
1. 서 론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하였을 당시 한국문제와 티베트문제는 UN총회의 주요 의제였다. 그러나 열강의 한국전쟁에의 깊은 관여와 한국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서방 국가들은 티베트의 중국군 침략문제보다는 한국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무력침공이라는 똑같은 현상을 두고, 아니 한국이 내전이라면 티베트는 외국군의 명백한 침략임에도, UN총회에서 한국문제는 주요 의제로 채택한 반면, 티베트 문제는 도외시하고 말았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티베트의 묵은 문제가 과연 우리와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그뿐만 아니다. 침략과 억압을 가하는 중국인들을 티베트인들은 사랑과 자비로 대한다. 그런 티베트인들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지난 40년 동안 티베트인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자국의 자결을 위하여 보여준 비폭력과 자비의 정신은 오늘 우리가 북의 동족에게 보여주고 있는 미움과 분노를 감안할 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삶이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비의 정신은 우리가 남북문제와 지역간, 계층간 갈등문제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달라이 라마가 비폭력과 이타주의의 정신으로 중국과 전세계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서서히 승리해 가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수록 그의 평화사상은 더더욱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이 글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평화사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지난 50년 동안 중국이 티베트에 가한 억압과 침탈상황을 알아보고, 이러한 상황에서 달라이라마가 제시한 평화안이 무엇이며, 거기서 나아가 그의 평화에 대한 담론의 중도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달라이 라마의 평화사상과 티베트 불교가 우리의 분단체제 극복에 무엇을 시사하는지를 따져 보기로 한다.
2. 중국의 티베트 지배와 달라이 라마의 평화안
1950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2, �� �� r疆 등 네 성에서 여러 길로 티베트의 심장부를 향해 진군하자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49년 말부터 시작된 전투는 50년 말, 라사에 중공군이 진입함으로써 중국의 티베트 지배가 본격화되었다. 지난 세월 동안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지배를 하면서 저지른 참상은 다음과 같다.
1959년 달라이 라마가 서장[티베트]을 떠날 때 있었던 6,259 좌의 사찰 가운데에 겨우 8좌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폐허가 되었다. 59만 승려 가운데 11만이 박해받아 죽고 25만은 강제로 환속되었다. 아주 많은 절이 도살장과 돼지우리, 감옥, 창고 등으로 바뀌었다. … [티베트인]들을 더욱 비분케 한 것은 6백만 장인 가운데, 1949년부터 1979년까지 30년 간 박해와 총격에 의해 죽은 장인이 86만 4천 명에 달했고 기아로 34만 2천 명이 죽었으니, [죽은 자가] 모두 126만 명으로, 장인 6명 가운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서장[티베트]의 최대 변화는 더 많은 감옥을 건조한 것이다. 그리고 중공은 지금까지 40차의 핵실험을 진행하였는데, 대다수는 모두 달라이 라마의 출생지인 암도구, 즉 중[국]이 현재 �ザ��부르는 곳에서 진행되었다. 중[국]은 서장[티베트]에 50만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전 핵무기의 3분의 1이 서장[티베트] 경내에 저장되어 있으며, 장구에서는 화학 무기를 사용한 군사연습을 진행하였다. 달라이 라마의 형이 이끈 참관단이 그곳에 이르자 수많은 2이 자동차 대열을 둘러싸고 달라이 라마의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하면서 그들이 당한 고난을 하소연하였다. … 당시 중[국] 정부에서 고위직에 있던 서장 제10세 판첸라마조차도 북경에서 참관단에게 자신이 중[국 점령] 14년 동안에 당한 고문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북경 당국은 마침내 참관단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이것이 장인의 “이심( ��” 경향을 증가시킬 뿐임을 알게 되었다.(김한규, 2000: 379~389)
이렇듯 지난 40년 동안 120만의 티베트인이 죽음을 당하였고 세계문화 유산인 불교가 파괴되었고 청정구역이 핵실험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도 달라이 라마는 중국에 대한 비폭력 투쟁을 계속하였고, 그 결과 198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지난 30년간에 걸쳐 달라이 라마 예하께서는 평화의 상징으로서 비폭력에 의한 사회적 평화를 주장하는 국제적 대변인의 지도적 역할”과 “티베트 문화의 삶과 양식을 보존하기 위한 원동력”이 노벨상 심사 위원회가 밝힌 공식적 이유였다. 그의 수상은 서양 문명도 달라이 라마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인권이라는 원칙을 중히 여기는 평화의 현대적 화신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건인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국민의 원수인 중국을 자신의 스승으로까지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자비와 이성과 인내를 개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는 바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인데 이때 원수는 가장 좋은 스승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자비와 사랑을 개발하기 위해 관용과 인내가 필수적인데 원수 없이는 이런 것들이 개발의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원수는 고요한 마음을 개발할 수 있는 근원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심재룡 역, 1991: 292)는 “나는 중국을 비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가능한 한 중국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나의 제안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랬다.” 그의 이러한 말은 그가 티베트의 독립이 아닌 티베트의 자결을 주장했던 1988년 6월 스트라스부르 강화에 대한 논평에서 나온다. 티베트의 앞날에 관한 상세한 건의서인 스트라스부르 강화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티베트 전지역을 인민이 동의하는 법률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연계된 자치 민주 실체로 만들고,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의 외교 정책에 대해 계속 책임을 지되 티베트 정부는 자치적을 통해 종교, 통상 등 방면의 비정치적 대외 관계를 발전, 유지해야 한다. 지구성 평화회의를 열어 티베트가 비군사화와 중립화를 통해 하나의 진정한 평화비호 성지가 되도록 보장해야 하며, 이 전에 중국은 티베트에서 제한된 수량의 군사시설을 보지할 권리를 가지되, 그런 시설은 반드시 방위 목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티베트는 하나의 민주제 정부를 가지며, 이 정부는 티베트와 티베트인에 관계 있는 일체의 사무를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 정부는 한 명의 민선 수석 행정관을 두고, 삼권을 분립시키고 수도를 라사에 둔다. 언론과 집회, 특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티베트의 사회와 경제 제도에 관한 사항은 티베트 인민의 바램에 근거하여 결정해야 한다. 생태의 균형을 보호하고 핵무기의 제조와 시험을 금지하여 서장을 지구상 최대의 자연 보호구로 만든다. 중국 정부는 반드시 티베트에서의 인권 침범을 중지하고 이민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가 강조하는 것은 중국인과의 담판 결과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티베트 인민 자신이 최후 확정권의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어떠한 건의도 전민 투표를 통해 결정되는 방식으로 티베트 인민이 바라는 완벽한 단계적 계획을 확정한다는 것이다.(김한규, 2000: 419~420)
달라이 라마는 이러한 스트라스부르그의 연설에 기초하여 1989년에 ‘티베트에서의 평화와 인권의 회복을 위한 평화 5개 조항’이라는 평화안을 제출하였다. 평화 5개조항의 구체적 항목은 ① 캄과 암도의 동부 지역을 포함한 전 티베트를 아힘사(비폭력)의 지역으로 바꿀 것, ② 중국인 이주정책의 포기, ③ 티베트인의 기본적인 인권과 민주적 자유의 존중, ④ 티베트 자연환경의 복구와 보존, ⑤ 티베트의 장래와 티베트인과 중국인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성실한 협상의 시작 등이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가 아시아 지역 사회 최초의 평화 권역(zone of peace)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전 티베트 고원이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이 평화와 조화로운 균형 안에서 살아가는 자유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 꿈이 실현된다면 티베트는 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 다른 곳에서 겪는 긴장과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그들 내면의 평화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찾아 누리는 곳이 될 것입니다. 티베트는 진실로 평화의 발전을 위한 창조적인 센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이 그 때 제안된 어힘사 지역에 관한 중점적인 항목들입니다.
?전 티베트 고원이 무장 해제되어야 합니다. ?티베트 고원에서는 핵무기나 다른 재래식 무기의 제조, 실험, 저장이 금지되어야 합니다. ?티베트 고원을 세계에서 가장 큰 자연공원이나 생물권으로 지정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야생동물과 식물들을 보호하는 엄한 법을 제정하며, 자연 산물의 수확을 조절하여 생태계에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개발 정책이 채택되어야만 합니다. ?위험한 폐기물을 생산하는 원자력이나 다른 기계공업의 제조와 사용은 금지되어야만 합니다. ?국가 자원이나 정책은 평화와 환경보호의 증진을 적극적으로 지향해야 합니다. 평화에의 기여와 모든 생물의 보호에 기여하는 단체들은 티베트에서 모두 환대 받을 것입니다. ?인권의 보호와 증진을 추구하는 모든 국제기구와 지역단체의 설립이 티베트에서는 장려될 것입니다.(강옥구 역, 1999: 228~229)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의 평화권역 제안과 티베트의 자치적인 민주정부 수립에 대하여 일부 티베트인들은 이것이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독립과 주권을 팔아 넘기는 일이라고 질책하였고, 중국은 티베트의 독립선언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중국의 이러한 해석은 등소평이 티베트가 독립만 하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다. 사실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입장은 명백하다. 1992년 10월 중국은 ? 2 �!xK ?에서 “근본문제는 서장[티베트]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으로 이것이 맞든 틀리든 이것을 표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김한규, 2000: 426)고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하여 달라이 라마가 어떠한 제안을 하든 중국은 항상 티베트 문제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하는 말바꿈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한편 티베트인 내부에서도 달라이 라마의 ��ダ�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티베트의 많은 젊은이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좀더 호전적이기를 바란다. 왜냐 하면 아직도 티베트에는 3,000명 이상의 정치범이 있고 30만 이상의 인민해방군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티베트 애국자들은 아직도 달라이 라마의 평화주의적 정책이 비실용적이라고까지 여기고 있다. 나아가 중국인이나 그 외의 외국인들에게도 티베트의 평화주의는 우습게 보일 수 있다. 그리하여 맞받아 싸우려고 하지 않는 그들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비폭력주의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주장한다. 즉 평화만이 평화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당신의 마음이 한번 분노에 지배당하게 되면, 그것에 거의 미치게 됩니다.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도 없고, 또한 실체를 볼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침착하고 안정되면, 당신은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정치가들에게는 이러한 인내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고르바초프는 과거 지도자들에 비해 보다 침착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효과적입니다.(강옥구 역, 1999: 22)
달라이 라마는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과 부드러운 마음의 수련에 의해 세계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적 문제들의 - 폭력적인 대립, 자연파괴, 가난, 굶주림 등의 - 해결가능성을 인간의 노력과 이해, 그리고 동포애의 발현에서 찾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지구, 그리고 서로에 대한 선의에 기초한 보편적인 책임의식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성이라고 하는 보편성을 개발하는 것이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라고 주장한다. 달라진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개인의 중요성을 달라이 라마만큼 강조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이러한 그의 개인주의의 관점이 과연 국가와 같은 단체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단체는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분위기와 상황은 평화스럽지 못하고 심한 긴장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모든 일이 돈과 권력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현재의 분위기는 우리의 생각하는 자세에서 기인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으로서의 우리가 좋은 인간적 자질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나가 저마다 개개인으로서 선한 태도와 선한 행동양식이 무엇인지를 선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진적으로 그러한 기본자세를 지니는 단체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러한 교육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실제로 적용시킬 수 있을까요? 만일 한 사람이 참으로 이타심을 지니게 되면 그 사람은 여러 가지 고통에 대해 그만큼 알게 되고, 그 지식을 다른 사람들 돕는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강옥구 역, 1999: 210)
이렇듯 그는 사회적 평화를 개인의 마음가짐에서 찾고 있다. 특히 그는 자비를 평화의 씨앗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티베트의 독립이 살상의 무기 대신 진리와 결단이라는 무기로 달성될 수 있다고 믿어 지난 40여 년 이상을 비폭력주의로 일관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비폭력주의는 과연 어떠한 평화론에서 기인한 것일까?
3. 달라이 라마의 평화에 대한 담론
이 문제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의 평화론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평화론은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1) 평화의 외적 조건
달라이 라마의 평화론의 외적 조건은 그의 전쟁관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전쟁과 군비확대를 지구상 폭력의 가장 큰 근원이라고 본다. 그 목적이 자체방어든 공격이든 간에 군대라는 강력한 조직은 항상 인간을 살상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달라이 라마는 본다. 게다가 우리들 사이에는 전쟁을 스포츠와 같이 흥분과 긴장을 유발하는 행사로 보는 경향도 없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 전쟁은 남자다움의 능력과 용기가 표현되는 기회로 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는 헌법에 의해 정당화된 기구이므로 전쟁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전쟁을 범죄적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달라이 라마는 본다. 달라이 라마는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가 세뇌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살아있는 생명을 연료로 하여 인간사회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다. 이런 비유는 특히 적절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적 전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불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불을 아주 스릴있는 것이라고 세뇌되어 있어 현대의 놀라운 기술에 근거한 신무기들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생명들이 타고 있다는 점이다. 또 전쟁은 불이 확산되는 방식에서 유사하다. 만약 한 지점이 약하면 사령관들은 그 지점에 포화를 집중한다. 이것은 마치 불 속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내던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세뇌되어 있어서 개개인 병사들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병사도 다치거나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 그를 사랑하는 어느 누구도 그 병사에게 해가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다. 만약 한 병사가 죽임을 당한다던가 생명을 잃을 정도로 불구가 된다면 적어도 그를 아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다섯 명 또는 열 명 정도가 그와 똑같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된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비극에 대하여 전율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혼돈에 빠져 있다.(달라이 라마, 1990: 7~8)
바로 이러한 혼돈은 어릴 때의 군복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부터 시작된다고 달라이 라마는 본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게임을 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옷을 입고 놀이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러한 태도는 어른들의 용인에 의해서 더욱 조장된다. 게다가 군대라는 제도는 이를 더욱 뒷받침한다. 장교들은 군대의 중요성, 군기의 확립, 적을 섬멸하는 것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한다. 이런 사실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에 대해 잘못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 달라이 라마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는 군대가 대다수 병사들의 권리를 짓밟고, 개인의 의지를 박탈하고, 병사의 생명을 희생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에서 반대한다. 한편 군대가 강력한 나라일수록 그 나라 국민들은 더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대체로 강력한 군대는 독재체제를 유지하는데 이용되기 쉽고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사용되기 쉽기 때문이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지도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이를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강력한 군대를 가진 독재자들은 자신의 국민들을 억압하였고 나아가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달라이 라마는 군대유지에 많은 재력이 낭비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한다. 신무기개발을 위해 엄청난 경비가 소진되고 있으며, 고귀한 인간의 지력이 살상에 이용되기 때문에 더욱 군대를 반대한다. 그래서 그는 살상무기 개발과 군대유지 비용을 병원, 학교, 주택을 짓고 질병과 문맹과 가난을 벗어나는데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사의 유지와 군비확산보다는 사막을 개발하고 가뭄을 해결하여 기아에 대체할 수 있도록 식량개발에 돈을 써야 한다고 달라이는 생각한다. 신무기개발을 위한 돈이 바닷물의 식수화, 에너지문제의 해결, 질병의 타파에 집중되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국가단위의 군대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지역간 분쟁을 해결에 도움이 되는 지역내 연합군(a joint force), 나아가 국제 헌병(an international police force)의 창설을 제안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대체로 지역을 유럽 지역, 아시아 지역, 아프리카 지역, 남미 지역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지역 연합군은 회원국이 침략 받았을 때 방어의 책임을 주요업무로 간주하고 있다. 연합군에 대해 회원국 모두는 나라의 크기에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연합군은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나라가 기본적인 규칙을 어겼을 때 연합군은 즉각 개입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역 연합군은 우선 달라이 라마가 제안한 각 지역 내 평화권역에서부터 그 업무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각 지역 내에 평화권역은 지역의 한 곳 또는 여러 곳을 선포함으로써 지역간 분쟁종식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즉 그는 일국 내의 군대폐지, 지역 연합군 창설, 지역 평화권 설치를 세계평화 달성의 외적 조건으로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달라이 라마가 이러한 제안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부터 시작된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를 진리의 승리로 보고 있다. 즉 비폭력적 민중의 힘이 무혈혁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폭력적 민중의 힘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힘이며 인간본성에 내재한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 10여 년 동안 일어난 세계의 정치적 지형변화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세계 평화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퇴조는 전 지구적 공존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으며 특히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전지구적 연계성 때문에 모든 지구인들의 보편적 책임의식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 그 자체는 중생이 아니지만 지구는 우리의 어머니로 기능하기 때문에 자녀인 우리들은 지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구의 어머니적 본성은 우리에게 상호 협력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온실효과나 오존파괴와 같은 문제들은 개인이나 한 단체나 한 나라의 힘으로써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합심하지 않으면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지구는 우리에게 보편적 책임의식을 가르치고 있다. 동시에 모든 개인들은 지구 가족의 일원으로써 서로를 도와야 할 책임의식을 지닌다. 이런 관점에서 달라이 라마는 우리 시대가 지구적 문제 해결을 위해 선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 시대이므로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전지구적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달라이 라마가 보는 또 다른 세계평화에 대한 희망의 배경이다. 비록 아직도 이타주의적 동기에 의한 세계평화가 이루어지리라고 믿지 않는 사람이 많지만 점차 다수의 사람들이 진실되고 성실하게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가 주장하는 세계평화의 또 다른 배경에는 과학과 종교의 양립 가능성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의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분야의 최상급 연구자들이 추구하는 문제는 우주와 생명의 궁극적 본질에 관한 것인데 이 문제는 종교의 첫 번째 질문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 과학 두 분야의 동일한 관심사와 잦은 접촉은 새로운 종합된 관점을 낳게 할 가능성이 높아 곧 마음과 물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출현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본다. 동양의 마음에 대한 이해와 서양의 물질에 대한 이해는 궁극적으로 생명의 정신적인 측면과 물질적 측면의 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노벨상 수상자이기에 세계평화를 위해 더욱 활동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세계평화에 대한 구체적 외적 조건 즉 군대철폐, 지역 연합군 창설 그리고 지역 내 평화권역의 설치 등을 목소리 높여 제안하고 있다.
2) 평화의 내적 조건
달라이 라마의 평화관은 전쟁을 방지한다는 소극적 의미의 평화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돕는다는 적극적 의미의 평화까지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그의 노벨 평화상 수상연설을 보자.
전쟁이 없다는 의미로서의 평화는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평화는 양심수가 겪고 있는 고문의 고통을 제거해 주지 못합니다. 이웃나라에서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삼림 벌채에 기인한 홍수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지도 못합니다. 평화는 오직 인권이 존중되고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이 있고 개인과 국가가 자유를 누리는 곳에서만 지속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 세계와의 진정한 평화는 정신적 평화의 발전을 통해서만 성취됩니다. 위에 열거한 여러 현상들은 그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깨끗한 자연 환경과 부와 민주주의 전쟁, 특히 핵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무의미해지며, 물질적인 발전만으로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강옥구 역, 1999: 220~221)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적극적 평화론에 그가 생각하는 평화의 내적 조건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는 진정한 평화를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동맹보다는 각 개인들의 사랑과 자비의 순수한 실천에서 찾고 있다. 그는 냉전 시기 중 아이러니칼하게도 군비확산경쟁에 의해 전쟁이 억제되었던 시기의 평화는 공포에 기초한 평화일 뿐이고 일시적 평화기라고 본다. 영속적 평화는 힘의 균형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신뢰에 의해서 달성된다고 본다.
달라이 라마(1984)는 진정한 세계평화를 위해 다음의 네 가지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보편적 인류애가 기본이 된다. 둘째, 자비는 세계평화를 위한 기둥이다. 셋째, 모든 종교는 그 철학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이미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점에서 평화적 속성을 갖는다. 넷째 모든 개인들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평화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제도를 만들 보편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러한 네 가지 명제는 모든 인간은 인간성을 기초로 지구적 가족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각 개인들의 정치, 종교, 인종,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들 모두는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고 하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더더구나 핵무기 경쟁과 환경 파괴는 전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가 사는 환경에 대해 보편적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의 욕망은 나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므로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점을 철저히 깨닫지 못한다면 지구는 더욱 더 고통받을 것이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모든 문제를 이기적 관점에서 본다던가 자기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한다면 이로써 단기적 이익을 달성할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개인의 이익도 사회의 이익도 추구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종교와 인종과 성과 국적에 관계없이 보편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달라이 라마의 주장이다.
보편적 책임의식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보편적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나아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각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타인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행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면 동시에 타인의 행복도 추구하여야 한다. 이렇듯 달라이 라마의 보편적 책임의식은 우리 모두가 거기에 의존해서 존재를 유지한다는 상호의존성에 근거한다.
지구가 점점 더 하나의 작은 동네로 되어 감에 따라 상호의존성의 인식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리하여 협조와 협동은 더욱 중시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감정과 행복을 고려한 진정한 협동과 협조이다. 만약 사람들이 탐욕과 질시에 의해 행동한다면 우리 삶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탐욕과 질시를 감춘 표피적 협조로는 모든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진실된 마음가짐만이 오늘날 우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한편 오늘날의 사람들은 단기적인 이익에 집중함으로써 전 지구의 모든 생명에게 주는 장기적 효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만약 이런 문제를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세대들은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현재세대의 행복도 추구하여야겠지만 미래세대의 행복도 추구하여야 한다. 따라서 전지구적, 미래적 행복추구를 위해 이타주의적 동기가 중요하다. 왜냐 하면 이의 동기야말로 협상과 협조의 진정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타적 동기의 실현인 자비심은 용기, 결단, 그리고 친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다. 자비심이 개발될 때, 용서?관용 그리고 공포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강인함과 용기가 솟아오른다. 이렇듯 자비심은 나쁜 상황을 좋은 상황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비심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그러한 자비심은 대체로 집착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집착이 변하면 우리의 친절도 변한다. 진정한 자비심은 집착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 동기에 기초해야 한다. 따라서 자비심은 장애인, 환자 등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직업인에게 한정되어서도 안된다. 인류 사회 모든 부분에서 작동되어야 한다.
자비심은 모든 중생들의 고통이 계속되는 한 작동되어야 할 필수요건이다. 이것만이 제한된 존재를 무한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적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특히 현대사회에서 중요하다. 불교의 마음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고통은 바로 일방적인 욕망과 집착에서 나온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욕망과 집착의 대상이 영원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 그리고 욕망과 집착의 대상을 얻기 위해서 그 효과적인 수단으로 공격성과 경쟁심을 발동하여 적개적인 행동으로 표출한다. 공격심과 경쟁심과 적대적 행동은 현대사회에서의 성공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현대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자비심의 개발은 필수적이다. 이 밖에도 달라이 라마(1990, 1991)는 이러한 자비심의 개발이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첫째, 우리 모두는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태어남으로 모두가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킬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둘째, 나 자신과 타인과를 비교해 볼 때 타인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혼자이지만 타인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셋째, 티베트 불교에서 모든 중생은 우리의 자애로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셀 수 없는 환생을 통해서 셀 수 없는 어머니들의 도움과 보살핌 속에서 자랄 수 있었는데,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들은 과거의 셀 수 없는 어머니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바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한 가족임을 강조한다. 넷째, 자비심의 개발은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맑게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끊임없는 욕망의 흐름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미움과 시기심과 질투와 이기심은 우리의 마음을 흐트려서 바른 판단을 어렵게 한다. 바로 마음이 흩트려져서 미움, 시기, 이기심에 지배당할 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자비와 지혜의 개발은 우리 모두에게 유용한 것이며 특히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하다. 이렇듯 달라이 라마는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조건으로 군사적 정치적 과학적 기술적 외적 조건보다는 이타주의와 자비심의 개발 그리고 상호 이해하는 정신이라는 내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상대방을 인간으로서 상호존중하고 애정을 갖는다는 것은 무기와 힘으로 위협하는 평화보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평화를 달성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위협적 평화보다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평화가 진정한 평화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 이해와 보편적 책임의식과 이타주의적 마음을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세계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첩경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동구의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세계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되어 상호의존성이 이 때보다 강조된 적이 없었고, 천연자원의 고갈, 환경의 파괴, 인구의 과밀 등 전 지구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되어 있는 때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평화의 달성을 위해 상호책임의식과 이타주의에 기초한 보편적 책임감의 개발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이다. 상호의존적인 상황에서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 자기 이익 추구의 최고 형태이다. 개인과 국가가 서로간에 의존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최선의 방책이다. 이렇게 볼 때 세계의 새로운 질서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동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형제애와 각 개인들의 사랑과 자비의 실천에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이타주의에 기초한 자비심과 보편적 책임의식은 국제간의 거래에 있어서도, 과학기술의 개발에 있어서도, 종교분쟁의 해결에 있어서도, 그리고 국제정치에 있어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비폭력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옹호하고 있다.
행동의 드러난 면만을 보고 그 행동이 폭력적인가 비폭력적인가를 구별하기는 힘듭니다. 그러한 구분은 근본적으로 그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동기를 간과합니다. 만일 동기가 부정적이면 비록 그 외양이 부드럽고 온화하다 할지라도 그 행위는 본질에 있어서 매우 난폭한 것입니다. 반대로 진지하고 긍정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심한 행동이나 말은 근본적으로 비폭력입니다. 다시 말해 폭력은 파괴적인 힘이며 비폭력은 건설적인 힘입니다. 해가 길어지고 더 많은 햇살이 비치게 되면, 풀은 신선해지고 그 모습을 바라다보는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반면 가을날이 되면 나뭇잎이 하나 씩 하나 씩 떨어집니다. 그 아름답던 나무가 죽은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그렇게 행복하지 못합니다. 왜냐고요? 저 깊숙이 있는 인간의 본성은 건설을 좋아하고 파괴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으로 파괴적인 모든 행동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건설은 인간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이란 측면에 비추어 보아 폭력은 옳지 못합니다. 비폭력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폭력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결국 다른 누군가의 안녕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비록 우리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한다 할지라도, 하나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우리는 아마도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의 씨앗을 심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최선의 방법은 인간 이해, 상호간의 존중을 통하는 길입니다. 한편으로 양보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문제에 관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만족을 줄 수는 없으나,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다. 적어도 미래의 위험을 피하게 됩니다. 비폭력은 매우 안전한 길입니다. 1973년 유럽을 처음으로 방문하기 전, 나는 자비와 이타심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그 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인류에의 책임감의 중요성을 표현했습니다. 당시 몇몇 사람들은 나의 그런 생각이 아주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안타깝게도 서구 세계는 간디의 비폭력을 동양에 더 적합한 수동적인 저항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서구인들은 매우 적극적이며 일상 생활에서조차 즉각적인 결과를 얻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실제 상황이 사람들에게 비폭력을 가르칩니다.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운동은 비폭력적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나는 비폭력이 인간의 본성에 더욱 가까움을 재확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당신의 요구에 충분한 이유나 근거가 있다면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 당신의 요구사항이 양보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 없이 오직 당신 자신만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경우 이성으로써는 해결되지 않기에 당신은 무력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무력을 사용함은 강함의 표식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의 표식인 것입니다. 일상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이성을 통한다면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되는 점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이성으로써 증명할 수 없을 때, 그때 우리는 화를 냅니다. 이성이 끝나는 때 화가 시작됩니다. 결국 화는 약함의 표시입니다.(강옥구 역, 1999: 242~244)
그렇다면 그는 항상 비폭력만을 주장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심재룡 역, 1991: 301)에서 “나는 폭력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단기적으로 치유적 폭력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일부 티베트인의 중국에 대한 폭력 행사에 마지못해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어떤 조건에서 폭력을 인정하는 것일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전쟁을 반대한다. 그렇다고 유화론자는 아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부당한 침공에 대해서 결연히 맞설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에 나치의 잔악상에 맞서 문명을 구원하기 위한다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한국전쟁도 남한 민중에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도덕적 관점에서 정당화할 수 있을 때만이 불가피하게 폭력을 인정하고 있다. 나아가 타인을 도우려는 순수하고 적극적인 동기에서 나타난 폭력적 행위를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으로 간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분노와 나쁜 의도가 없는 조건에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비의 폭력이다. 분노와 증오가 없는 평정한 마음에서 부당한 일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폭력은 우리에게 강력한 마음을 개발시킬 수 있는 조건이라고 달라이 라마는 주장한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이종인 역, 2000: 140)는 “우리가 늘 화를 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계평화를 외친다면 그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개개인이 평화를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평화에 대한 학습은 티베트 불교를 믿는 서양인들이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중국병사에 대한 다음의 기도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비폭력을 견지하고 중국에 대한 증오를 거부하는 한, 티베트의 편에 서서 티베트를 대변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인권의 침해에 큰 소리로 항의하고, 고문당하거나 투옥당한 이들을 대변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고문자를 증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고문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고 고문을 중단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희생자뿐 아니라 고문자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연습해 보기로 하지요. 중국 병사들을 손님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게 된 우리 운전사들과 그 중국병사를 위해 기도합시다. … 자, 눈을 감으세요. 예닐곱 명의 병사들이 트럭에 타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세요. 무슨 농담을 하는지 들을 수는 없지만 그들이 웃는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의 웃음에 여러분의 기도를 보태십시오. 그 웃음이 점점 신비스럽고 장난스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그 웃음이 넘쳐흘러 말이나 행동이 되고 싶어하는 걸 느껴 보세요. 분노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의 놀란 가슴에 이상한 느낌이 솟구치고 이제는 예상치 못했던 기쁨으로 가득해지는 것을 느껴 보세요.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을 그들의 기쁨 속으로 밀어 넣으세요.(백영미 역, 2001: 333~334)
4. 달라이 라마의 평화담론의 중도적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지역 평화안과 평화에 관한 그의 담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평화실천은 비폭력주의이다. 즉 정치적 저항과 불의에의 대항을 비폭력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중생들에게 해를 주지 않는 것으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중생을 돕는 의미에서의 평화관과 이의 실현에 외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내적인 동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평화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평화안, 평화관, 평화론이 평화사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티베트 불교의 핵심교의인 중도에 기초하기 때문인 것 같다. 중도란 연기법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현상사물들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생기는 것으로 본다. 즉 현상이란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self-existence)을 갖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이 인연에 따라 생기는 비실체적 현상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용수보살(김성철 역, 1993:414)의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가명이며 그것은 실로 중도이다”라는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평화에 대한 담론이 중도적 의미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지적될 수 있다. 첫째, 달라이 라마가 의미하고 있는 평화는 궁극적인 상태로서의 평화가 아니다. 만약 평화를 궁극적 상태로 해석하면 이는 숭배의 대상이 되고 우상화되고 시대의 절대자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평화의 진정한 의미가 상실된다. 즉 평화의 극단적 형태의 사회적 모습은 새로운 종교적 우상물로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의 개인적 형태는 나르시즘으로 나타나는 자기몰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평화사상에 의하면 우리에게 내적 평화와 사회적 평화는 추구할 가치가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둘째로, 평화에는 자성이 없다는 점이다. 즉 평화는 내적 자기존재성이 없다. 다른 모든 현상과 같이 평화는 독립된 현상이 아니다. 평화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지해 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조건인 씨앗을 뿌리고, 그 싹들을 길러 내야 한다. 이는 평화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임을 의미한다. 평화라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사상누각을 세울 것이 아니라, 평화가 나타날 수 있는 원인과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를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하지도, 인격을 가진 신적인 존재로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나아가 우리시대 평화를 상품화하고 상업화하는데 있어서까지도 강력한 반대활동을 펼 수 있다. 평화를 상품화하여 책, 음악, 옷, 장신구 형태로 팔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만 사고, 듣고, 읽으면 평화가 오는 것으로 착각한다. 따라서 평화를 중도적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원인들을 확인하여 조건들을 육성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달라이 라마의 평화적 담론은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그 싹들을 기르는데 집중되어 있다.
셋째, 평화의 원인이 작동하는 조건은 문화와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 평화의 원인을 키우는 것은 느리고 점진적인 일이므로 이에는 어떤 처방법이나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예술이다. 즉 평화는 상황과 맥락에 의존한다. 평화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과정이며, 원인에서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지역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만약 평화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모델로 생각하여 평화가 하늘이 내리는 이상이라고 가정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원인과 과정을 무시하고 평화라는 결과에만 집착한 것이다. 즉 이러한 평화는 사물화 된, 꿈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의 집착일 뿐이다. 평화를 절대적으로 볼 때 이에는 원인도 시간도 공간도 문화도 없는 현상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이러한 평화는 자성을 가진 절대적인 것이 되어 숭배와 경배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달라이 라마의 평화사상은 조명된다. 넷째, 평화는 그 씨앗이 뿌려지고 길러져야 만이 달성될 수 있는데, 달라이라마는 그 씨앗으로 개인의 내적, 정신적 각성, 즉 자비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는 서구인들이 평화를 전적으로 외적인 요인 즉 사회, 경제, 정치적 요인으로만 보는 시각을 교정해 준다. 내적인 평화를 개발하는 것은 선한 의도가 평화를 사회적으로 달성하는데 중요함을 의미한다. 바른 이유와 바른 마음가짐으로 평화사업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 사업의 도덕성도 높이고 실재적 역량도 드높인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다는 선한 의도는 힘도 더욱 보태고 어려운 일이 직면해도 인내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사회적 평화를 위한 이타주의적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이러한 이타주의적 동기의 중요성은 21세기가 정보기술과 생명과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임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루가노 리포트(1999)에 의하면 2020년에 세계인구는 80억까지 늘어나 생태계의 파괴와 체제불안 요소의 폭발적인 증가를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 자본주의 집단에서는 2020년까지 현존 60억 인구의 삼분의 이인 40억 정도로 인구를 줄인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들의 인구 감축전략은 어느 누구도 미워함 없이, 다만 현재의 서구 중심 자본주의의 패권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인구감축 전략이다. 이 전략에 이용되는 것이 바로 기근과 전염병과 국지적 전쟁이라는 기술공학적인 원리이다. 따라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같은 종족 근절이라는 나쁜 업보를 일으키는 사회 기술적 공학의 발전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은 달라이 라마가 주장하고 있는 자비심, 보편적 책임의식 등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다섯째로, 평화의 내적인 마음가짐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세계평화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완전한 내적 평화를 이룰 때까지 사회정의와 관련된 문제를 유보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비도덕적인 태도이다. 구조적인 사회 부조리 척결을 정신적 개발의 완성 후로 미룰 수는 없는 문제이다. 게다가 제3세계의 비참한 생활조건은 평화를 조악한 형태의 내적 평화로 환원시키고 또 잘못된 경우는 불의의 세력과 타협하게 만들 수 있다. 달라이 라마의 평화담론은 바로 이런 점에서 사회적 행동주의와 개인적 정신성 개발과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5. 결 론
지금까지 살펴본 달라이 라마의 삶과 그의 평화사상은 분단체제를 극복하려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남북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해 이 땅의 지식인들은 과연 어떠한 평화사상을 개발해야 하는 것일까? 대체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서구사상에 심취되어 있어 평화의 외적인 조건 즉 군사, 정치, 경제 및 국제관계라는 조건에만 눈을 돌리고 있다. 반면 보수적 지식인들은 이러한 외적인 조건을 무시한 채 당위론과 국수주의, 그리고 폐쇄적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한반도의 평화를 중도적 의미에서 조망하는 입장은 거의 없다. 또한 사회적 평화를 위한 내적, 정신적 평화의 중요성을 대부분 간과하고도 있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사회 변혁을 위한 조건의 하나로 인간 내면의 문제를 제기한 학자가 나타났다. 이는 바로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의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새로운 사상 모색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서울대학교의 백낙청 교수이다. 백 교수(2001)는 각성한 ‘노동자의 눈’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분단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자의 특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각성된 노동자란 먼저 사회 과학적 인식으로 무장한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평등한 소유자체가 목적이 아닌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이 목적인 노동자이다.
이는 곧 노동자 하나 하나가 도인이 되기를 요구하는 셈으로서 그야말로 환상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고전적인 계급투쟁론도 실은 궁핍의 극한상황에서 인류를 위한 보편적 투쟁에 떨쳐 일어서는 다중의 혁명적 각성을 상정했다. 오늘날 환경운동가들이 요구하는 자연과 합일하는 마음을 갖고 살면서 개인적으로 넉넉하더라도 지구를 위해 물자를 아껴 쓸 줄 아는 대중의 존재도 실은 도인 - 적어도 수도인 - 의 경지와 다를 바 없다. 더구나 ‘지식의 시대’에 오면 노동하는 도인 내지 수도인 집단의 현실적 가능성이 한결 높아진다.(30쪽)
이렇듯 백 교수는 새로운 지식인 집단의 특성으로 수행자적인 내적 조건을 중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각성한 지식인 집단의 사회과학적 인식뿐만 아니라 내적인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적 인식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전쟁의 방지 및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한 지식인은 바로 사회과학적으로 무장한 지식인일 뿐만 아니라 항상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도인의 자세를 구비한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해 진다. 이러한 지식인 집단의 출현은 한반도 평화 정착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달라이 라마의 평화사상 그리고 티베트의 집착을 벗겨 내는 수행법은 한반도에서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 실현을 위한 새로운 사상 형성의 기반으로 신중히 탐구되어져야 할 것이다.
His Holiness the Fourteenth Dalai Lama‘s Thought on Peace
Koh Hyung Yeel
This paper briefly determines His Holiness the Fourteenth Dalai Lama's thought on peace and its implications for promoting peace in the Korean peninsula. In the early 1950s, both South Korea and Tibet were involved in war albeit with different enemies, South Korea with North Korea and Tibet with China. After fifty years, now, the bitter enmity of that time still lingers on in both countries but in different forms. In Korea, South and North still remain hostile enemies each fearing invasion by the other although some efforts are now being to get out of such a hostile relationship. In Tibet, on the other hand, the hostility of the ongoing “war” exhibits interestingly different features. The Tibetan government in exile in India officially considers the Chinese occupants to be “teachers” offering opportunity for “calming the mind and strengthening compassion.” In the account of this paper, such an unusual position of the government in exile is due to Dalai Lama's unique philosophy - the Prasangika philosophy of Buddhism. Dalai Lama has always been a model of inner peace and outer compassion, which are the gist of Sutra and Tantra in Buddhism. In them, cultivating peace within leads to peace in society. Compassion in the mind, therefore, is the pillar of world peace. Implications of Tibetan Buddhism for peace in Korea are inferred in this paper from this poi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