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력으로 거부하다 전력을 쏟아내는
―이미산 시집 『우리의 수다는 다정해서 쓸쓸해』를 중심으로
이영숙
이미산 시인이 『우리의 수다는 다정해서 쓸쓸해』를 출간하였다. 네 번째 시집이다. 초기 시에서 대체로 과거로 쏠리던 기억과 시간의 중력을 이 무렵의 시인들은 자아를 넘어 타자와 외부 세계로 선회하거나 새로운 방향으로 시적 영토를 넓히는 미학적 모험기에 접어드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줄곧 정직한 자기 응시를 통한 내면 탐험을 감각적으로 표출하면서 일상과 관계의 관성에 저항해왔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밖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내면으로 더욱 침잠한다. 어쩌면 탐사를 계속 미뤄두었을지도 모를 오지, 곧 과거 죽음의 추체험이 자리한 무의식의 심연으로 과감하게 걸어 들어간 것이다. 죽음의 환기를 통한 기억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시인은 비로소 자신의 최초 죽음과 맞닥뜨린다.
오늘도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
뱃속의 너를 지우기 위해 수도 없이 뛰어내렸단다
나는 또 묻죠
아직도 먼지인가요?
우리는 악착같이 달라붙고 아낌없이 밀어내며 돌아앉아 후회했죠
환영받지 못한 삶은 정착을 구걸하고
바람에 밀려가다 길을 잃으며
평등한 가계인 양 누구와도 함께
사랑은 허튼짓 마지막 인사도 없이
전력으로 거부하다 전력을 쏟아내는 부토 춤으로
흔한 게 먼지일 테니
밟고 즈려밟고 갈 데까지 가보라고
살아도 죽은 척 끝내 살아남았죠
먼지의 이후가 궁금할 때
살아생전 당신처럼
달빛 아래 서죠
좋아질 거야 그곳은 요요한 언덕이니,
차갑고 차분한 목소리
마침내 먼지가 된 당신
여전히 맨발이군요
―「우리는 먼지처럼」 전문(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자신을 직시하는 행위에 두려움과 용기가 공존하는 것은 자신과의 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우리는 불행이나 치부를 드러내는 게 두려워서 미화나 은폐라는 카드를 사용하고, 조작된 왜상(歪像)을 사회적 가면으로 내세우며 때로 자기 자신을 속이기까지 한다. 자기방어라는 이 겹겹의 장치를 무장 해제시키는 일에 용기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시인이 너무도 심상하게 이 일을 수행함으로써 시에는 진입장벽이 없다. “오늘도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독자도 함께 듣는다. 쉿! 죽음도 시인의 무의식도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이 시에서 ‘먼지’는 환영받지 못한 자의 실존을 드러낸다. 동시에 낙태라는 시원적 트라우마는 태어나지 못하고 지워진 존재의 비유이자 환유이기도 하다. “뱃속의 너를 지우기 위해 수도 없이 뛰어내렸단다”라는 ‘당신의 목소리’는 ‘당신’이 부재할 때도 실재하며, ‘나’가 실재하는 와중에도 ‘나’의 부재를 증명한다. 고로 ‘나’는 죽음과 삶의 모호한 경계에 사물처럼 존재하는 ‘먼지’와 정체성이 같다. “저기요 부르면 홀연 사라지는”(「유령」) 유령처럼,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존재를 연기하는 ‘부토 춤’의 무용수처럼.
알려진 바와 같이 ‘부토’는 춤출 舞, 밟을 踏의 일본식 발음으로, ‘사체가 필사적으로 서 있으려고 하는 몸짓’이라는 죽음의 체현을 춤의 근간으로 삼는다. 온몸을 하얗게 칠한 채 무용수는 “태아의 웅크리는 자세, 느린 움직임과 손발의 뒤틀림”(어진) 등의 외형적인 요소들을 “나약한 사람들, 죽은 사람, 소외된 사람들의 욕망을 재현”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독 같은 인간의 무의식을 현재화(신효영)”하는 데 사용하였다. 시집 한 권을 시의 한 구절에 응축하여 이미산 시인은 그것을 “전력으로 거부하다 전력을 쏟아내는 부토 춤으로”(「우리는 먼저처럼」)라고 규정하였다. 시집 전체의 유전자를 품은 채 오랜 시간 침전되고 정제되어 마침내 도달한 미학적 에센스 혹은 시집을 관통하는 화살과 같은 이 문장은 시의 중간 지점에서 시의 앞과 뒤를 가르고, 또한 시인의 생애를 그 전후로 가른다. 인간의 생애와 시집 한 권의 기나긴 생애가 이 한 행에 다 들어있다.
그리하여 시의 앞부분에서 “정착을 구걸하고/ 바람에 밀려가다 길을 잃으며평등한 가계인 양 누구와도 함께/ 사랑은 허튼짓 마지막 인사도 없이” 뿔뿔이 흩어지던 ‘먼지’는 시의 뒤에서 “살아도 죽은 척 끝내 살아남”아 “살아생전 당신처럼/ 달빛 아래” 서는 존재가 된다. 나의 변모에 주목해 보자. ‘나’는 여전히 ‘먼지’이지만, “마침내 먼지가 된 당신”과 조우한다. 시의 앞부분에서 ‘평등한 가계’가 ‘~인 양’이라는 직유법으로 표기된 바 허약하고 위조된 관계였다면, 뒤의 “여전히 맨발이군요”의 뉘앙스는 비로소 ‘평등한 가계’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화해를 위한 조급하고 감정적인 제스처는 없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지금부터 제가 당신이 될래요/ 빚을 갚듯 하양에서 검정까지/ 무표정의 세계를 순례하겠어요”(「희미한 노랑」)라고 고백한다. 이때 시집의 표정이기도 한 ‘무표정’과 시집의 목소리이기도 한 “차갑고 차분한 목소리”는 해피엔딩 대신 또 다른 죽음의 ‘순례’를 예고한다.
어느 행성의 공주였을까 아카시아꽃처럼 하얀
언니는 웃을수록 시드는 꽃
늦잠 자는 대추나무야
어서 싹을 틔우렴
대추 알 굵어지면
언니 볼도 발그레 익겠지
가까이 가지 말라는 엄마들의 당부와
가까이 훔쳐보는 우리의 숨바꼭질
후다닥 달아나다 가만가만 돌아보면
언니는 더 예쁘고
자꾸만 궁금하고
점점 무서워
―「그해 오월 서울 언니」 부분
발톱을 숨긴 늑대가 사방에 어슬렁거렸고
주머니에 숨긴 앵두가 터졌을 때
기억의 방에 던졌어야 해
해마다 탐스러운 앵두는 발그레 웃을 테니
(중략)
오늘도 언니 무덤엔 참새들 짹짹
머리칼 허연 늑대는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앵두는 오래 참고 앵두는 온유하며……
―「테스 언니야」 부분
이미 낙태, 곧 유사 살해를 추체험한 ‘나’는 자신도 모르게(그러니까 무의식 속에) 죽음과 친연성이 있다. ‘언니’가 매혹과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인 것은 그 때문이다. “가까이 훔쳐보”고 “후다닥 달아나다 가만가만 돌아보”게 되는 ‘언니’는 병들어 있다. ‘붉은 대추 알’과 ‘탐스러운 앵두’가 이 시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발그레한 언니 볼’에 대한 기원의 의미이지만, 시의 방점이 “아카시아꽃처럼 하얀” 낯빛에 찍히는 이유이다. 동화적 몽환 속에서 “발톱을 숨긴 늑대”가 “머리칼 허연 늑대”가 되기까지 시인과 동행할 때, “디퍼가 갑자기/ 여자에게 달려들”어 ‘나’와 “함께 웃으며 대화 중이었”(「포클레인」)던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이웃에서는 “허기에” 찬 “똥개”가 잠자던 아이의 “어린 고추”(「소란」)를 잘라먹는 사건도 발생한다. 이뿐일까.
사람들은 그녀의 모든 것, 이를테면
이번 장날에 펼친 꽃무늬 양산,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치마꼬리, 이웃에 건넨 깍듯한 인사까지
공터에 쌓아놓고
맛있는 냄새가 날 때까지 양념을 쳤다
―「전쟁미망인」 부분
시인은 “젊음에 인색한” 이웃의 편견과 백안시로 인해 ‘전쟁미망인’이 “젊음과 절명 사이의 공간은 유폐”된 채 영정사진으로 돌아온 사건을 시로 복원하였다. 아마도 1950년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이 에피소드는 시인의 동시대적 경험이 아닐 확률이 높다. 혹시 죽음에 민감한 시인의 무의식이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를 반추했을지라도 죽음으로 기운 무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버린 것들의 기분을 다 모아도
저 어처구니에 닿지 못하리
엄마는 버려지지 않으려는 모든 고집을 모아
아이를 끌어안았으니
남겨진 신발의 용도란
소용없는 것들의 기본
역사를 일으켜 세우는 기록이 있고
발바닥에 숨긴 진실도 있지만
신발은 사실적인 이별을 예감하진 못한다
용서 없이 멈춰버린 심장처럼
이정표가 지워지면 처음을 가리키는 구두코
몸이 사라져도 중심을 기억하는 뒤축
꿈인 듯 농담인 듯
사라진 발을 찾는 신발들의 아우성
끌어안은 발자국 지워질까
강물은 영영 잠들지 못한다
*나치군에 학살된 유태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헝가리 다뉴브 강가에 조각된 신발들.
―「다뉴브강의 신발들*」 전문
한 개인과 가족사, 이웃이라는 공동체의 상처나 결핍을 뛰어넘어 단숨에 무고한 타자들의 슬픔과 공명하는 애도 의식으로 도약하는 이 시는, 애초에 원폭 투하로 인한 거대한 역사적 죽음과 국가적 트라우마를 애도하기 위해 탄생한 춤이 ‘부토’라는 점을 상기했을 때, 시인에 의해 추어지는 ‘부토 춤’이 된다.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고집을 모아/ 아이를 끌어안았”던 엄마와 아이의 신발도, 강물로 밀려 떨어지기 직전의 마지막 무게를 간직하고 있는 구두(“몸이 사라져도 중심을 기억하는 뒤축”)도 두려움의 각도를 보존한 채 강가에 철제로 굳어버렸다. 개인이 겪은 상실의 슬픔(“우리가 버린 것들의 기분”)을 “다 모아도” 역사라는 강물에 수장된 인간의 처참(“저 어처구니”)에는 “닿지 못하리”라는 시인의 뼈아픈 자각은 시공간을 초월해 유태인들의 신체적 고통과 연결된다. 죽음 직전 차가운 강물에 뛰어내려야 했던 그들의 ‘맨발’은 “마침내 먼지가 된 당신/ 여전히 맨발이군요”에서의 ‘맨발’과 조응한다. “살아도 죽은 척 끝내 살아남았죠”라고 노래하던 시인의 ‘먼지’ 같은 실존들이 이제 다뉴브 강가라는 역사적 제단 위에서 “꿈인 듯 농담인 듯/ 사라진 발을 찾는 신발들의 아우성”으로 터져 나온다. 죽음을 ‘전력으로 거부’하던 그들의 멈춰버린 신발을 바라보며, 시인은 그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가진 언어의 ‘전력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토’의 무용수가 몸을 일으켜 세우듯 절제된 언어로 시를 일으켜 세운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춤추는 별을 ~ 지녀야 한다」 부분
혼자 치르는 혼례 같은
한 여자가 피었다 가네
―「달래꽃을 만나는 어떤 방식」 부분
위의 인용은 시집 속 시의 제법 긴 제목이다. 각주에 달린 ‘니체’로 보아 이 제목은 니체의 글에서 빌려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서 시인에게 거듭되는 죽음의 환기가 파멸의 징후가 아니라 시적 별(“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한 무의식의 충동임을 시인은 굳이 감추지 않는다. 어찌 보면 시인은 제 몸속에 “악착같이 달라붙고 아낌없이 밀어내며 돌아앉아 후회”(「우리는 먼지처럼」)하는 실존적 혼돈을 욱여넣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집 말미에 시집 해설을 대신해 실린 시인의 산문에 의하면, “가톨릭 재단의 여고”를 다닌 시인은 수녀가 되려던 세 번의 시도에 실패한 후 시인이 되었다. 종교를 통해 세속의 고통을 신의 품에서 구원받고자 했던 청년기의 이력이 제 안의 상처를 전력으로 쏟아내는 시적 투쟁으로 전환한 것이다. “혼자 치르는 혼례”라는 이 신성한 고백은 언어라는 절대자와 맺은 고독하고도 엄숙한 서약이 된다. 시의 사제가 된 시인이 다뉴브 강가의 원혼들을 달래는 춤을 출 수 있었던 이유이다.
백지 앞에 앉으면
나는 누군가의 감정을 사고 싶다
한때는…… 아직은……,
이 소생하는 기분은 어디서 오나
(중략)
백지 위로
눈부시게 걸어 나올
자음과 모음들
그렇게 쌓아둔
당신의 고독 삽니다
―「당신의 고독 삽니다」 부분
시를 쓴다는 것은 “백지 위로/ 눈부시게 걸어 나올/ 자음과 모음들”을 맞이하는 일이다. 문청 시절에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시를 잘 쓸 수만 있다면!’이라고 절규하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누군가의 감정을 사”서라도 “이 소생하는 기분”을 충족시키고 싶을 만치 시인은 시에 경도되어 있다. 다음 시에서 그 충동은 더욱 구체적이고 명료해진다.
1.
어릴 적 언니는 나의 신이었지/ 함께 가는 곳마다 신기한 세상/ 나는 좇아가고 언니는 달아났지.
2.
시는 그만 놓아주고 나랑 놀자/ 늙어버린 언니가 늙기 싫은 나를 따라다니네/ 언니 손 잡으면 폭삭 늙어버릴 것 같아 신의 목구멍 너머로/ 미끄러질 것 같아.
3.
신의 목젖에 걸려 있는 나의 시는/ 늙지 않은 안경을 찾아 헤맨다/ 이자벨 아자니의 블루아이, 까미유 끌로델의 겹겹 불행, 시간의 권총으로 신의 뒤통수를 노리는/ 찰나의 놀이
4.
예술과 사랑을 동시에 잡으려다 모두를 놓친,/ 밤과 낮으로 빚은 직물 같은,/ 빛과 어둠을 안고 자발적 불행에 뛰어드는,/ 존재가 슬픔인,/ 여자의 감각은 난해한 현실
5.
예술이 말한다, 사랑은 허상이야/ 사랑이 말한다, 예술은 우상이야/ 시가 말한다, 사랑은 눈물이야 예술은 어둠이야 시는 한밤으로 가는 정류장, 발가벗고 즐기는 대낮의 파티,
6.
여자가 말한다. 이자벨만큼 예뻤다고/ 까미유보다 도도했다고.
7.
헛되고 헛되도다/ 이자벨과 까미유와 로댕을 동시에 사랑했을/ 니체의 망치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8.
강수연*이 죽었다
*한국의 영화배우(1966~2022).
―「시(詩」) 전문
시인이 메타포적인 ‘시’를 쓸 때 그것은 한편 시론이기도 하다. 시란 무엇이다, 혹은 시는 무엇이어야 한다는 논리를 은연중에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는 ‘강수연’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녀의 영화적 삶과 현실적 삶이 과감하게 생략되었지만, ‘이자벨 아자니’와 ‘까미유 끌로델’의 사유와 행위는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이입된다(‘이자벨’은 영화 <까미유 끌로델>에서 ‘까미유’에 빙의한 연기를 했다). “시간의 권총으로 신의 뒤통수를 노”렸던 ‘까미유’가 “겹겹 불행”에 처했던 것은 “예술과 사랑을 동시에 잡으려다 모두를 놓”쳤기 때문이며, “빛과 어둠을 안고 자발적 불행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존재가 슬픔인” “여자”였기 때문이다. ‘까미유’처럼 시인은 자발적 불행 속에서만 태어나는 예술의 숙명을 온몸으로 감내한다. 그것은 내면의 혼돈을 찢고 나오는 “니체의 망치”질이자, “전력으로 삶을 거부하다 전력을 쏟아내는” 예술혼이다. “강수연이 죽었다”라는 단호하고 차가운 마지막 한 마디는 그러므로 시인을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자탄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까미유’와 ‘강수연’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역시 모든 우상을 부수는 ‘니체의 망치’를 가지고 파괴와 창조의 자리에 설 것이므로. 시인 역시 그러할 것이므로.
시가 말한다, 사랑은 눈물이야 예술은 어둠이야 시는 한밤으로 가는 정류장, 발가벗고 즐기는 대낮의 파티
―「시(詩)」 부분
‘다정함’과 ‘쓸쓸함’을 다 가진 ‘우리의 수다’처럼, 시는 한밤으로 가는 정류장에서 이제 막 시동을 거는 적막과 발가벗은 몸을 대낮의 적나라함 속에 내놓는 소란이다. 죽음의 무의식과 삶이라는 의식의 플랫폼에서 시인은 시의 사제처럼 “차갑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을 직시하는 시를 계속 쓸 것이다.
그다음이 어딘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아토포스》 2026년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