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 ‘빠 삐 따’
韓 明 熙
2011년, 신묘년 새해가 밝았다. 토끼해가 밝은 것이다. 토끼는 영리한데다가 귀까지 커 남의 이야기도 잘 듣고, 잘 어울리기 때문에 지혜로운 동물로 알려졌다. 그런데 나는 72년 전 토끼해에 태어났으니까 토끼가 분명한데 영리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하다.
1968년 내 나이 설 흔 살 때, 친구에게 등 떠밀려 종로5가에 있던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간 일이 있다. 백 아무개라는 점쟁이는 점 잘 보기로 유명하여 그날도 점을 보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그는 나의 이름을 한자로 적고, 얼굴을 유심히 처다 보더니 ‘재물복은 없으나 사람복은 있다고 하면서 제 구실을 하고 살다가 일흔 셋에 죽는다.’고 했다. 그때 죽는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덤덤하게 그 사실을 받아 들였다. 왜냐하면 일흔셋이라는 나이가 젊은 나에게는 까마득하게 먼 미래의 일이었기에 아무런 실감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미래의 일이 나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그 점쟁이 말대로라면 나는 올해 죽게 되어있다. 그의 점이 틀려 내가 이 세상에 더 살더라도 확실한 것은 내가 죽음을 의식할 만큼 늙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만날 젊은이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청년에게도 시간은 비켜가지 않아 이제 죽음을 걱정하는 노인이 된 것이다. 까마득하게 긴 시간으로 느껴졌든 43년이란 긴 세월도 지내놓고 보니 찰나나 다름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까마득하게 먼 훗날로 느껴졌던 그 미래가 현실이 되고 보니, 노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이사람 저 사람이 일러주고 있다.
그중 하나가 늙을수록 친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전화를 걸고, 친구를 만나서도 쓸데없이 따지지 말고, 사소한 일에 삐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따지지도 않고 삐치지도 않기로 작정을 했다.
얼마 전 회식자리에서 옛 직장 선배가 건배사를 하는데, ‘빠삐따’하고 선창을 하기에 우리는 뜻도 모르면서 덩달아 ‘빠삐따’하고 화답을 하였다. 그리고 빠삐따의 뜻을 물었더니 늙을수록 모임에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우리 모두는 노인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건배사라고 하면서 모두들 한마디씩 토를 달았다.
늙다보면 만사가 귀찮을 때가 있다. 그래서 모임이나 행사 등에도 빠지게 되고,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상하여 삐칠 때가 많다. 또 나이를 먹다보면 타산적으로 변하여 별거 아닌 일을 가지고도 잘 따지게 된다. 그러한 노인들에게 빠삐따는 정말로 적절한 건배사였기 때문에 모두가 박수를 치고 함께 웃은 것이다.
나는 건배사를 부탁받게 되면 대개 ‘… … 위하여’ 라고 선창을 할 터이니, 여러분은 큰 소리로 ‘위하여’하고 화답을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지난 년 말, 문우들과의 송년 모임에서도 ‘우리들의 건강과 문운을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하였다. 물론 끝의 ‘위하여’는 모두가 함께 연회장이 떠나갈듯 큰소리로 외쳐댔다.
사실 노년을 여유롭게 잘 보내려면 참을 줄 알고, 재물이었던 재능이었던 베풀 줄 알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건배사를 하게 되었을 때 가끔 ‘참자, 베풀자, 즐기자’ 라고 선창을 하고, 회중은 ‘참베즐’ 하고 큰 소리로 화답 하도록 했다. 그러나 호응이 별로 좋지 않아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빠삐따‘는 호응이 좋은데 ’참베즐‘은 호응이 낮은 까닭은 아마도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자는 생활모토는 실천이 용이한데 비하여 참고, 베풀고, 즐기자는 생활모토는 실천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하여간 앞으로 나이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건배사를 ‘빠삐따’로 통일할 생각이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오라는 곳이 있으면 가깝고 먼 것을 가리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가고, 작은 일로 감정을 상하여 삐치지도 않을 것이며, 쓸데없이 따지지도 않을 생각이다. 친구나 이웃 간에도 조건 없이 사이좋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하면 내 노년이 조금은 안락하고 보람차지 않을까, 최소한 외롭지는 않을 것 아닌가.
‘빠삐따’를 흥얼거리며 어느 모임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하고, 넉넉한 웃음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내 노년의 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