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0월의 끝자락이다. 이맘때가 되면 가을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곡, 이용의 '10월의 마지막 밤' 가사가 자연스럽게 입가를 맴돈다. 오색 단풍이 온 세상을 고운 빛깔로 물들이는 계절, 가을의 운치를 온몸으로 느끼고자 58년 지기 교우 열 명과 함께 서울 도심 속 성북동으로 답사를 떠났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약 6분을 달리니 길상사 입구의 일주문이 우리를 맞아준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아름드리 연포지목들이 저마다의 운치를 자랑하며 짙은 가을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길상사의 풍경은 고즈넉하면서도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넓은 마당 전면에는 한옥 모양의 극락전이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범종과 불교대학, 길상7층보탑이 고풍스럽게 서있다.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왼쪽에는 스님들의 조그만 처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무데크 다리를 건너면 만나는 사당에는 부처님 전에 보시한 고(故) 김영한 여사의 초상화와 화분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계곡 끝자락의 진영각은 법정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머무르셨던 곳으로, 그 앞 화단에는 스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고, 내부에는 스님의 초상화와 소박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본래 이곳은 1970년대 요정정치의 산실이자 최고급 요리집이었던 '대원각'이 있던 자리다. 이곳의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의 삶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가난 때문에 16세에 기생의 길을 들어섰으나, 운명처럼 미남 시인 백석을 만나 불꽃같은 사랑에 빠졌다.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주며 "당신은 나의 영원한 여인"이라 고백했다. 그러나 시대의 비극과 집안의 반대로 두 사람은 끝내 만주와 서울로 갈라졌고, 6.25 전쟁으로 영원한 이별을 맞이해야 했다. 백석은 떠났지만,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속에는 자야를 향한 그리움이 영원히 녹아들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훗날 김영한 여사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당시 시가 1,000억원에 달하는 7,000여 평의 대원각 터를 길상사로 사주했다. 일생의 전부였던 재산을 선뜻 내놓으면서도 그 거대한 돈도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고 말했던 그녀. 내가 죽으면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길상사 뜰에 뿌려달라던 유언대로, 그녀는 참된 무소유의 삶을 남긴 채 흰 눈과 함께 길상사의 일부가 되었다. 붉게 물든 단풍길을 따라 내려오다 전인구 교우와 합류했다.
길상7층보탑 앞에서 다 함께 단체사진을 찍고, 나무 의자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나누었다. 시를 무척 좋아하는 전인구 교우가 백석과 김영한 여사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시 한 수를 읊조리니, 성북동의 가을 깊이가 한층 더 짙어지는 듯했다. 다음 목적지인 간송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33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기와집 덧가옥 수백 채에 달하는 막대한 전재산을 받쳐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의 숭고한 정신이 서려있는 곳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매입할 당시,
주인이 부른 값의 10배인 11,000원을 선뜻 지불하며 우리 글의 뿌리를 지켜낸 그의 일화는 언제 들어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비록 미술에는 문외한이지만, 1년에 단 두 번(5월, 10월)만 문을 열어주는 이 특별한 공간에서 국보와 보물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안목이 넓어지고 가슴 깊은 감흥이 밀려온다. 답사의 마무리는 단연 즐거운 오찬이다. 성북동의 유명 설렁탕집에 둘러앉아 진한 국물과 따끈한 만두를 곁들여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권커니 잣거니 잔을 채우며 정겹게 웃음꽃을 피우니 이보다 더한 보약이 없다.
식사 후 바로 옆 금옥당으로 자리를 옮겨 따스한 쌍화차와 생강차를 마시며 담소를 이어갔다. 오후 3시경, 12월의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한성대입구역에서 마무리하였다. 58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흘러온 교우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반갑고, 헤어지면 또 보고 싶어지는 친구들이 있어 참 행복하다. 인생은 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행복이 아닐까. 오늘 하루도 소중한 교우들과 함께해서 참으로 따뜻하고 감사했다. 모두 늘 건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