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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3장
1. 주고 받는 위로(1-8)
사도에게 있어서 믿음의 형제는, 단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사도에게 형제의 의미가 그런 것이었다면, 모든 서신서들은 형식적인 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을 형제로 여겼고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사도에게 믿음의 형제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한 개인의 성품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도의 사랑은, 믿음이 좋은 사도 한 사람의 사랑으로 전시될 뿐이고, 우리는 사도의 사랑에 감탄하면서, 칭송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의 사랑을 본받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사랑은, 우리가 본받아 행할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사도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가,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사도로 하여금 그 같은 사랑을 나타내도록 한 것입니다. 곧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랑이 사도에게서,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를 향한 사도의 사랑은, 환난 가운데 있는 교회가 흔들림이 없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도의 사랑을 2-3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3절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를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막음으로 가지 못하고, 대신 디모데를 보낸 것입니다. 그 이유 역시 그들을 굳게 하고, 믿음에 대해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관심의 전부였습니다.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기를 원한,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강렬했던가하는 것은, 8절의 말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8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사도가 환난 가운데 있는 교회로 인해 염려하던 중, 디모데를 통해서 그들이 환난 중에서도 믿음에 굳게 서서, 그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이 사도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위로가 되었든지, ‘이제는 살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곧 ‘모든 시름을 덜어내어, 이제 살만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에게는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서,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이, 교회를 향한 최대의 소원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우린 이러한 사도의 마음에서, 성도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관계가 아닌, 다른 것이 있습니까? 목사는 교인을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를 출석하고, 헌금을 해주는 사람으로만 바라보고, 교인은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를 하나 골라서, 출석해주는 것이 전부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안다고 하는 성도의 관계는 아닙니다.
단지 종교인들의 만남일 뿐입니다. 이러한 만남에서는 사도와 같은 마음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정한 날과 시간에 모여서, 같은 장소에서 예배하고, 헤어지는 것이 전부인 관계일 뿐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타인의 믿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환난에 처하든, 고통을 받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에, ‘안됐다’는 말로 형식적인 위로를 할 뿐이지, 환난과 고통에서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는, 인간의 약함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믿음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한 몸의 관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의 그 사랑과 마음을 본받자’라는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 4: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20-21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그 열매가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와 데살로니가교회의 관계는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발생한 관계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인해서, 한 몸의 관계가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한 몸의 관계인 교회에서는 너와 나가 없습니다. 믿음의 문제에서도 너와 나가 없습니다.
따라서 더 나은 믿음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타인의 믿음에 대해 비난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함께 믿음에 굳게 서서, 진리의 길을 행하고자 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이, 너와 나의 개인적 관계에서 만나게 되면, ‘너 기도 했나, 너 주일 지켰나’라는 것만 보게 됩니다. 목사도 교인들을 보면서, 섬김을 받고 싶은 욕구만 드러내게 되고, 교회를 위해 충성스런 일꾼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빠진 인간적 관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에 대한 욕구로만 살아갑니다. 사랑을 말하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매일같이 하나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진리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여러분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아 한 몸의 관계에 있게 된,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의 관계에 있는 다른 형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6-7절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사도에게 위로는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이었습니다. 사도의 형편 역시도 궁핍과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한 형편에서 위로로 다가온 것은, 함께 환난에 있던 데살로니가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함께 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통해 그 증거를 보게 된 것이고, 그것이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는 바울에게도 위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궁핍과 환난의 형편에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좋은 형편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원할 것이고, 그런데도 궁핍과 환난이 계속되면, 원망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궁핍과 환난의 형편에 있는 성도가, 흔들림이 없이 믿음에 굳게 서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믿음은 여러분께 위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에서 살아 역사하시고, 도우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는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위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궁핍과 환난에 있다고 해도,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위로로 가득하게 됩니다.
성도는 그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의 믿음에서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이 위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서 경쟁이나 비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서로 간절히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와 바울이 서로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것도, 인간적 정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환난 가운데서 믿음에 굳게 서기를 소망했고, 사도는 교회가 흔들림이 없이 믿음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 마음이 일치가 되어 서로 간절히 보고 싶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너는 왜 저 사람보다 못하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너는 저 사람보다는 잘한다’라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저주에 갇힌 자일뿐입니다.
그런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용납하시고 덮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백성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이 사랑으로 모이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드러날 것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는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힘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저주와 심판이라는 인간의 본래적 자리에 서서, 어떻게 나 같은 자가 부활과 생명에 속하게 되었는가를, 차근차근 찾아가 보십시오.
그리고 도무지 나 같은 자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 나를 덮음으로써, 용서 받음으로 살아있게 되었음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에 감사하고, 그 사랑에서 형제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 감사로 하는 보답(9-10)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성도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오직 생명으로만 바라볼 뿐이지, 세상에서의 삶에 도움을 주는 분으로는 바라보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부분은 지금 주어진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선의 은혜로 받기 때문에, 주어진 것 밖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욕심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끊임없이,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이 곧 죽음의 흔적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서 죽음의 흔적을 보는 성도는,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해 절박한 심정이 있게 되는 것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복음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성도가 복음에만 집중을 하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사도와 성도는, 복음이 개입된 관계에 있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이 개입되고 복음이 중심된 관계에서는, 서로 원하는 것도 인간적 관계에서는 볼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환난이 있는 데살로니가교회가 믿음위에 굳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위해, 다른 교회처럼 헌금을 모아 주기를 원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8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사도가 교회로 인해 염려하고, 그들에게 가지 못한 것으로 마음이 무거웠는데, 데살로니가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이제는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문제를, 얼마나 크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에게는 교인의 수가 늘고, 큰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고, 그 믿음의 소문이 퍼진 것으로, 큰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도가 교회에 다른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사도를 기준으로 해서, 현대 교회의 목사와 교인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복음이 상실된, 다만 인간적 관계만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는 교인에게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을 기대합니다. 목사인 자신을 섬기고 잘 대접해주기를 기대하고, 장로 집사 권사를 세울 때는, 마치 자신이 그런 직분을 주는 것처럼, 목사에게 선물을 할 것을 요구합니다.
교인 또한 목사에게서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기대합니다. 곧 목사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목사와 교인은 서로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고, 그것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 뿐, 복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에 그런 관계가 가능한 것은, 목사도 교인도 복음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복음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충돌은 피할 수가 없고, 그러한 충돌은 인간적 관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복음이 개입된 관계만이, 교회의 참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직 복음이 개입되고, 복음이 중심되어 있는 관계에서, 사도는 교회의 믿음에 대한 소식으로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기쁨을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9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바울은 교회의 믿음으로 인한 기쁨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한다고 표현합니다. 모든 기쁨이라는 것은, 기쁨이란 기쁨은 모두 모아 놓은 것 같은, 큰 기쁨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일꾼의 위치에 있었던 사도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복음의 일꾼이 받는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았던 고난이 어떠했는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로, 큰 고난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만물의 찌꺼기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큰 고난이었습니다.
복음의 일꾼이기 때문에,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은 오히려 그를 말할 수 없는 고난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칭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좀 더 나은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사도와는 다른 길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가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갔던, 사도에게 주어진 보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환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굳게 서고,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소식으로 인해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도의 마음이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기쁨이며 보상입니다.
사도는 교회의 믿음으로 인한 기쁨을, 하나님이 주신 보상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보상이라면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면 되는데, 사도는 하나님께 대한 보답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누리는 기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곧 데살로니가교회가 믿음에 굳게 선 것을,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잘 전한 결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가 복음을 전한 자신의 공로를 생각했다면, 비록 그가 교회의 믿음으로 기뻐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업적에 대한 기쁨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보답하는 얘기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는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선 것을, 자신의 업적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로 바라봅니다. 그것을 복음이 그들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역사했다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자신은 사람의 말로 전했을 뿐인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에 자신은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교회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을,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이, 감사 말고는 없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피조물이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을 가지고 나온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들고 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보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시 50:8-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 50:8-15절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지금의 한국교회가 감사를 이유로 헌금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10절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보면, 교회를 향한 사도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기에, 교회의 믿음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고, 그 기쁨 또한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여기며, 감사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관계로 모이는 것입니까? 복음으로 교제하고, 믿음으로 인해 기뻐하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다면, 우리는 형제의 믿음을 염려하면서,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믿음에 굳게 서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있다면, 성도는 사도가 누린 모든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누려야 하는 하늘의 복은 이런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알기에,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와 위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귀한 복입니다.
성도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에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알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어떠함을 알게 된다면, 같은 사랑에 거하는 형제와의 관계는, 인간적 관계를 뛰어 넘어서, 복음이 개입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믿음을 염려하고, 형제의 믿음이 내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하늘의 복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사도의 소원(11-13)
한국교회의 신앙은 열광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광적이라는 것은 찬송이나 전도 등에서도 나타나지만, 기도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기도는 정말 열광적입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밤새 목이 터져라고 두 손을 들고, ‘주여’를 외치며 기도하는 것은 보통이고, 교회적으로도 새벽기도회를 시작해서 철야기도회, 그리고 교회 내의 여러 모임들도 개별적으로 기도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이러한 열정은 지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 열정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기도에 대한 이해입니다. 무엇이 기도인가를 모른 채, 기도에 열중하게 되면, 결국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신앙의 증거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것은 현대인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기도는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담기 위해, 신의 힘을 빌리는 용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만 드러납니다.
오직 나와 내 가정, 내 자식이 잘되는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물론 그러한 기도는 진정성이 결여된 기도일 뿐입니다.
본문은 사도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사도의 기도를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열광적으로 기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도의 기도는 열광적이지도 않고, 길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내용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를 열광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도, 길게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기도를 어떻게, 얼마나 오래 하느냐에 매인다면, 그것은 이미 기도를 벗어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는 어떻게 하라거나, 얼마나 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사도는 주야로 심히 간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할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뭔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을 만나고,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충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보충한다는 것은, 더욱 풍성한 믿음이 되게 해서, 믿음의 부요를 누리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사도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을 보충하기 위해서, 주야로 심히 간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믿음을 보충하는 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께 주야로 심히 간구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데살로니가로 가는 것까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로 갈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오직 그들의 믿음의 풍성을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향한 바울의 관심은, 믿음이 전부였습니다. 교회가 믿음이 풍성해져서, 그리스도로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울이 원하는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사랑입니다.
어떻습니까? 교회를 향한 우리들의 마음은, 사도의 마음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우리들에게 과연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는 합니까? 혹 교회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거나, 내 마음에 드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욕심은 아닙니까?
사도의 그 같은 마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게 된, 믿음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도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게 된 순간부터, 사도의 인생에게 가장 존귀한 분은 그리스도로 자리하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의 괴수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피는 생명으로 다가오게 되고, 예수님의 피 안에서 세상 그 어떤 것도,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도의 모든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러한 관심으로 교회를 본다면, 교회가 믿음으로 풍성해지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의 풍성함이라는 간절함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을 향한 우리의 간절함이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한 분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일까요? 우리 믿음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요? 교회가 믿음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사도의 마음을 엿보면서, 우리 마음을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를 가고자 원했지만, 2:18절에서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탄이 그 길을 막음으로 가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한번 두번 가고자 했지만 가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면서, 포기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계속 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을 내세우는 고집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하면 안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니까, 한두 번 해보고 안되면, 그만 두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물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될 때까지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사도의 길을 사탄이 막았다고 하지만, 사탄도 결국 하나님의 허용 아래 활동할 뿐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데살로니가로 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곧 인간의 모든 길까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데살로니가로 가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신이 오고 가는 길도, 모두 하나님께 달렸다는 고백이 담긴 기도인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2절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모든 교회가 사랑이 충만하고,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또 기도합니다.
특별히 어떤 문제로 인하여, 교인들의 관계가 멀어지고 불화가 생기게 되면,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라는 말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곧 사도의 사랑과 동일한 사랑이 넘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사도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는, 2:8절의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는 교회에 하나님의 복음만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했습니다. 그러면 사도의 이 사랑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오직 하늘의 비밀인 복음을 주기를 기뻐했고, 자기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사도를 주의 사랑으로 풍성하게 만들었고, 사도는 교회가 주의 사랑으로 풍성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아 넘치게 되는 것은, 인간적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가 말하는 사랑이, 단지 친분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노력으로 사랑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주의 사랑으로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예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따지지 않으시고, 덮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아무 가치 없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사랑이었습니다. 성도가 이 사랑을 알고, 주님의 사랑으로 다스림을 받는다면, 주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교회는 사랑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끝까지 증거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는가를 증거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사랑에 파묻힐수록, 사랑이 넘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3절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세 번째 기도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아버지 앞에 흠 없는 거룩한 자로 서게 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된 일입니다. 곧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미 흠 없는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세계에 들어간 것인데, 굳이 기도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도가 흠 없는 자로 아버지 앞에 서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따라서 사도는 교회가 예수님이 강림하실 그날까지, 십자가를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살아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과 박해와 시련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의 기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교회를 향한 사도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사도의 간절함의 중심에는, 오직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 대한 개인적인 마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에게 교회는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답게 존재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봅니까? 우리가 주일이면 만나고 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진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풍성해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다스림 받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도 사랑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